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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6강
폭류경(Ogha-sutta)1-3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띠양 위하라띠 제따와네 아나타 삔디깟사 아라메.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2. 아타 코 안나따라 데와따 아빅깐따야 랏띠야 아빅깐따 완나 께와라깝방 제따와낭 오바셋와
예나 바가와 떼누빠산까미,
Atha kho aññatarā devatā abhikkantāya rattiyā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jetavanaṃ obhāsetv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우빠산까밋와 바가완땅 아비와뎃와 에까만땅 앗타시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aṭṭhāsi.
2. 그런데 어떤 천신이 깊은 밤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따 숲 전체를 두루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후에 부처님께 예경하고 난 후에 한쪽에 섰다.
이상이 지난 시간까지 공부했던 내용입니다.
오늘 살펴볼 경전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3.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완땅 에따다오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ṃ etadavoca.
까탄누뜨왕 마리사. 오가마따리띠?
Kathannutvaṃ mārisa. oghamatariti?
(바가와)
(bhagavā)
3. 압빠띳탕 끄와항 아우소 아나유항 오가마따린띠.
야타 까탕 빠나 뜨왕 마리사 압빠띳탕 아나유항 오가마따리띠?
Apatiṭṭhaṃ khvāhaṃ āvuso anāyūhaṃ oghamatarinti.
Yathā kathaṃ pana tvaṃ mārisa appatitṭṭhaṃ anāyūhaṃ oghamatariti?
3. 한쪽으로 물러서서 그 천인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하여 폭류를 건넜습니까?
도반이여, 나는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폭류를 건넜다.
천신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 마리사(marisa)라고 불렀습니다. 마리사(marisa)는 괴로움을 없앤 분이란 뜻입니다. 이는 네 가지 폭류를 건넜다는 뜻입니다.
오가(Ogha)는 거센 물결이라는 뜻으로 폭류(暴流)를 말합니다. 폭류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까마 오가(kāma ogha)라고 하는데 감각적 욕망의 폭류가 있습니다. 까마(kāma)는 욕구, 욕망, 감각적 욕망, 애욕,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바와 오가(bhava ogha)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폭류입니다. 이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고 싶은 욕망입니다. 바와(bhava)는 존재, 유(有), 생성, 윤회, 다시 태어남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딧타 오가(diṭṭha ogha)라고 하는데 상견(常見)과 함께하는 욕망과 62개 견해의 폭류가 있습니다. 딧타(diṭṭha)는 보이는, 소견(所見), 보인 것, 봄, 시력 등을 말하는 어떤 견해입니다.
네 번째는 아윗자 오가(avijjā ogha)라고 하는데 무명의 폭류가 있습니다. 아윗자(avijjā)는 무명(無明), 알지 못하는 것, 무지(無知), 어둠을 뜻합니다. 연기의 근본원인을 무명이라고 할 때 아윗자(avijjā)입니다.
오가(Ogha)와 비슷한 단어는 아와하나(avahana)가 있는데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이는 네 가지를 집착하면서 연기가 회전하여 윤회의 세계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까마 오가(kāma ogha)는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바와 오가(Bhava ohga)도 천상에 태어나고 싶고 색계 무색계에 가고 싶은 것 자체가 폭류입니다. 이것도 좋은 곳에 태어나서 윤회하고 싶은 마음을 말합니다.
세 번째 딧타 오가(diṭṭha ogha)에서 딧타(diṭṭha)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올바른 견해(sammāditthi)라고 할 때의 견해와 비슷한 것인데 단견과 상견에 집착하는 것이고 전통을 너무 강하게 집착하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내 것이 옳고 남의 것은 그르다는 것이며, 중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싫거나 좋거나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등등 늘 그런 것만을 판단하는 것이 많습니다. 부처님은 62개를 극단으로 불렀는데 크게 두 개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까마 수칼리까누 요가(kāma sukhallikanu yoga)로 감각적 쾌락을 수행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앗따끼라마따누 요가(attakilamatanu yoga)로 피곤하고 피로하게 하는 극단적인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바로 감각적 쾌락과 극단적 고행을 의미하는 양극단입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극단을 벗어난 중도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런 결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팔정도입니다.
싯닷타(Siddhattha)는 왕자로 태어나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안, 이, 비, 설, 신, 의의 감각을 누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견해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최고의 즐거움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해탈의 방법으로 인도의 카마수트라라는 전통도 생기고 브라흐마 쪽에서 즐겁게 살 수 있도록 구원을 해줄 수 있는 기도를 하는 것도 이러한 수행방법 중의 한가지입니다.
부처님도 이런 경험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도 또 해도 끝이 없고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를 해보고 만족하지 못해서 두 번째를 선택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지혜로운 분이라서 이런 생각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길 앗따끼라마따누 요가(attakilamatanu yoga)를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앗따(Atta)는 몸을 얘기하고 끼라마따누(kilamatanu)는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괴롭게 한다는 뜻의 요가는 수행, 속박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고행입니다.
부처님은 29살에 출가해서 35살에 깨달음을 얻으신 붓다가 되시기까지 6년간 수많은 고행을 하셨습니다. 요즘은 수행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 당시에는 고행한다는 것을 수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고행을 해야만 깨달음을 얻는다고 알았습니다. 보살에게 다섯 비구가 도와준 것은 최고의 고행을 하라고 도와준 것입니다.
인도에는 수나카 우루따(Sunakha vruta)라고 하는 개처럼 살아가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네발로 걷고, 밥도 던져서 주면 먹고, 말도하지 않습니다. 잠도 개처럼 잡니다.
아자 우루따(Aja vruta)는 양처럼 사는 수행방법입니다. 고 우루따(Go vruta)는 소처럼 사는 수행법입니다. 불교의 검소한 생활을 의미하는 두타행이 있는데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떨쳐버리고 하는 수행입니다. 이런 두타행, 또는 두탕가와 유사하지만 개념적으로 달라서 뭔가를 죽을 때까지 계속 해나가는 방법입니다. 묵언수행이나 하루 한 끼만 먹는 것은 두탕가가 되는데 이런 것들을 죽어서 끝내는 것입니다. 이런 고행을 하면서 죽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한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20년간 한 번도 내리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만 살고 머리를 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브라흐만 쪽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머리카락 길이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머리카락이 긴지에 따라 수행능력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무게가 무거워서 쉽지 않은데 거기에 참배하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루를 온몸에 바르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힌두교 축제 할 때 혀에서 칼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도 힌두교에서 고행을 하면 신이 좋아하고 고행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며 그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님들도 그런 영향을 받아서 ‘고행을 해야 수행자다’라거나 ‘고행을 해야 스님이다’라는 생각은 인도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고행에서 벗어난 것인데 여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선정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였고 고행하는 사람들은 브라흐만 사람들이 많이 했습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멈추고 수자타의 우유를 먹는 것을 보고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가 다 떨어져나갔습니다. 부처님의 고행 상을 보면 밥을 못 먹어서 배가 들어간 것이 아니고 배 호흡법으로 장을 움직이게 할 수 있게 숨을 들이 쉬고 공기를 빼서 앉으면 1년 2년 3년 있어도 소화도 안 되고 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공기를 빼는 요가 수행방법으로 부처님이 하셨는데 뼈가 마르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이런 수행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벌레들이 뜯어먹고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도 바로 그런 생각이 드신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자타의 우유죽을 먹는 그 순간을 보고 비구들은 고행자가 수자타에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초전법륜경에 보면 그 때 부처님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발견하셨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폭류로 인해서 윤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나는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폭류를 건넜다.”에서 압빠띠탕(Appatiṭṭhaṃ)은 ‘머무르지 않고, 멈추지 않고’라는 뜻이며 아나유항(anāyūhaṃ)은 ‘애쓰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로 오염된 곳에 머물고 애쓰면 오염된 곳에 가라앉아 버리고 말아 괴로움을 겪는 윤회를 해야 합니다.
애쓰지 않는다는 의미는 업을 형성하거나 업을 생성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형성한 업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고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살면서 애를 쓰는 일은 새로운 업을 생성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의 애쓰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는 것은 중도를 지키는 계정혜로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잘못된 정진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여기서 잘못된 정진은 극단적 고행을 말합니다.
지금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천신과 부처님과의 대화입니다. 천신과 부처님과의 대화는 천신의 상태에 따라 내용이 다양합니다. 앞으로 다양한 천신이 다양한 내용을 질문할 것입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이 천신이 자만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의 자만심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지금과 같은 다소는 모호한 말씀을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천신은 자기 스스로가 지혜가 있다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어서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황하여 부처님께 질문을 드리자 부처님께서는 그 뜻을 아래와 같이 드러내셨다고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윤회의 바다에 떨어지게 하는 네 가지 폭류가 있는데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부처님의 경험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건넜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4. 야다 스와항 아우소 산띳타미. 따닷수 상시다미. 야다 스와항 아우소 아유하미 따닷수 닙부야미. 에왕 끄와항 아우소 압빠띳탕 아나유항 오가마따리띠?
Yadā svāhaṃ āvuso santiṭṭhami. Tadāssu saṃsīdāmi. Yadā svāhaṃ āvuso āyūhāmi
tadāssu nibbuyhāmi. Evaṃ khvāhaṃ āvuso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oghamatarintī.
4. 도반이여, 내가 머무를 때 나는 가라앉아 버렸다. 도반이여, 내가 애쓸 때 나는 휩쓸려 나가버렸다. 도반이여, 이처럼 나는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넜다. 이 말씀은 멈출 때는 가라앉아 버리고, 애쓸 때는 휩쓸려나가 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간략한 말씀으로 실천적인 측면과 이론적인 측면에서 불교의 중도적인 입장을 잘 드러내셨습니다. 상윳타니까야 주석서에서는 7개의 쌍으로 이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염원(kilesa)을 통해 머무르고 가라앉는다. 업의 형성(abhisaṅkhāra)을 통해서 모으려고 애쓴다.
둘째, 갈애(taṇhā)와 견해(diṭṭhi)를 통해서 머무르고 가라앉고, 나머지 오염원들과 업의 형성들을 통해서 모으려고 애쓴다. 여기서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세 가지입니다. 견해는 사견(邪見)으로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셋째, 갈애(渴愛)를 통해서 머무르고 가라앉고, 견해를 통해서 모으려고 애쓴다.
넷째, 상견(sassata diṭṭhi)을 통해서 머무르고 가라앉고, 단견(uccheda diṭṭhi)을 통해서 모으려고 애쓴다. 게으름의 집착(olīyana abhinivesā)이 존재에 대한 견해(bhava diṭṭhi)고, 너무 배부름의 집착(atidhāvana abhinivesā)이 비존재에 대한 견해(vibhava diṭṭhi)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견(常見)은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항상 하다는 견해입니다. 단견(斷見)은 무엇이나 한번으로 끝이라는 견해입니다. 두 가지는 모두 잘못된 견해에 속합니다.
다섯째, 게으름(līna)을 통해서 머무르고 가라앉고, 들뜸(uddhacca)을 통해서 모으려고 애쓴다.
여섯째, 쾌락의 탐닉에 몰두함(kāma sukhallika anuyoga)을 통해서 머무르고 가라앉고, 자기학대에 몰두함(atta kilamatha anuyoga)을 통해서 모으려고 애쓴다.
일곱째, 모든 해로운(akusala) 업의 형성(abhisaṅkhāra)을 통해서 머무르고 가라앉고, 모든 세간의 유익한(lokiya kusala) 업의 형성(abhisaṅkhāra)을 통해서 모으려고 애쓴다.
이것은 하나를 잡고 ‘좋다’라는 마음을 가질 때는 천상에 태어나고 싶다는 견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일곱 가지를 통해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 않으셨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의 거센 물결인 폭류를 건널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려면 악행을 버리고 선행인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하지만 공덕을 쌓는 뿐냐(puñña)를 집착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뿐냐(puñña)는 필요하지만 뿐냐(puñña)를 집착할 때 천상의 욕계 색계 무색계를 윤회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공덕을 쌓는 뿐냐(puñña)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 마음에서는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하면 하게 되는 것이 마음입니다. 하지 말라는 대신에 뭔가를 대신 해 줘야 하는데 부처님이 항상 공덕을 지으라고 한 것은 악행을 막기 위해서 한 방편입니다. 악행을 하지 말라고 하면 ‘뭘 해야 하지’라는 의문에서 나온 것이 공덕입니다. 적어도 선행을 할 때는 악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반에 이르게 하는 준비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뿐냐(puñña)인데 그렇게 윤회하면서 천상도 가고 색계 무색계에도 태어나고 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만 안 되었을 뿐이지 누구나 과거 생에 악행도 많이 했을 것이고 선행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뿐냐(puñña)를 하라고 한 것은 악행을 하면 악행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악행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하면 선행하려는 마음이 생겨서 뿐냐(puñña)를 많이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매달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향이 뿐냐(puñña)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중도적인 삶을 요구를 하시는 겁니다.
또 하나는 여기 나오는 단어 중에서 마나따따(mānatata)는 자만인데 쉽게 끊지 못하는 것이 자만입니다. 도과에 이른 아나함도 아직 아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가 돌아가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자만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만을 뛰어 넘어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자만을 흰색 옷에 비유합니다. 흰색 옷에 뭔가 묻으면 잘 더러워지고 잘 보이듯이 우리도 자만 때문에 항상 빛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법문을 하실 때 나는 비난할 것은 비난하고 칭찬할 것은 칭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자비로운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오직 아만이 없는 분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니그라하(Nigraha)는 혼내주는 것, 훈계 같은 것이고, 아누그라하(Anugraha)는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잘못하면 바로 잘못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가지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윤회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4가지 폭류에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 않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즐겁게, 감각을 즐겁게 하는 것을 가지면 윤회의 세계로 내려갑니다. 몸을 너무 괴롭게 하고 노력을 너무 해도 윤회의 세계를 집착하는 것입니다. 뭔가 가지려고 애착하는 순간부터 이미 윤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깊은 가르침을 천신과의 대화를 통해 하신 것입니다. 이때의 천신은 일반 욕계의 천신이 아니고 색계 천신과의 대화입니다.
그런 의미를 나타내는 말 중의 하나는 다음단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한 평화 얻은 진정한 브라흐만을 저는 친견했습니다. 그분은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 않아 세상에 대한 애착을 모두 건넜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많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5. 찌랏상 와따 빳사미 브라흐마낭 빠리닙부땅
Cirassaṃ vata passāmi brāhmaṇaṃ parinibbutaṃ.
압빠띳탕 아나유항 띤낭 로께 위삿띠깡
Appatitṭṭhaṃ anāyūhaṃ tiṇṇaṃ loke visattikaṃ.
5.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한 평화 얻은 진정한 브라흐만을 저는 친견했습니다. 그분은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 않아 세상에 대한 갈애를 모두 건넜습니다.
찌라상(Cirassaṃ)은 오랜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주석서에 의하면 과거의 부처님이신 깟사빠 (kassapa) 부처님 때 완전한 평화 얻은 자를 친견한 이후 오랜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겁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섯 번째인데 4번째 부처님이 깟사빠(kassapa) 부처님입니다.
천상세계의 하루가 인간세계의 백 년인데 다음 생에 색계에 태어나거나 무색계에 태어나면 미륵불 시대에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생의 인간세상보다 이런 천상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져 안정이 되니까 천상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빠리닙부탕(parinibbutaṃ)은 완전한 평화를 얻음, 오염원의 적멸이라는 뜻입니다. 브라흐마나(brāhmaṇa)는 당시 인도의 최고의 성직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브라흐만으로 태어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 밑에 있는 나머지 계급의 사람은 브라흐만으로 태어나기를 바랐습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아라한 대신 브라흐만이라고 많이 썼습니다. 전통적인 힌두교 사회에서 처음부터 아라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부경전(小部經典)의 감흥어(感興語)인 우다나(udana)에서 보면 ‘옴’이라는 소리를 내며 수행하는 것이 나오는데 원래 브라흐만 사람들이 이런 수행을 많이 했습니다.
부처님은 진정한 브라흐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인 탐진치를 없애는 사람이고, 돈을 많이 받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브라흐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렇게 하면 브라흐만이 된다고 하셨고 아라한 대신 브라흐만을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브라흐만을 비판하였지만 브라흐만이라는 말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숫타니파타의 와살라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나쟈짜 와살로호티 나 자짜 호띠 브라흐마노 깜마나 와살로 호띠 깜만나 호띠브라흐마노.
출생에 의해 브라흐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고 행위에 의해서 브라흐만이 된다.
옛날에 브라흐만이 되려면 다음 생에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출생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된다는 건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카스트제도는 지금도 심각한데 그 당시는 엄청났습니다. 그나마 벗어난 때는 부처님 시대와 아소카왕 때뿐이었습니다.
출생에 의해 브라흐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고 행위에 의해서 브라흐만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양반이라도 천한 일을 하면 천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쁜 일을 하면 천한 사람이 되고 아무리 카스트에 낮은 지위라도 선한 행동을 하면 브라흐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경전 본문에 나와 있는 아우소(avuso)는 도반이라는 말로 씁니다. 산스크리트어는 아우스마또(avusumato)로도 쓰고, 또 반떼(bhante)라고도 씁니다. 이름을 부를 때 이름 앞에 무슨 무슨 스님이라고 할 때 아우수마또(Avusumato) 무슨 스님 이렇게 호칭합니다. 도반에게 친구이지만 이름만 부르지 않고 이런 식으로 씁니다. 본인보다 나이나 법랍이 낮은 스님, 친구나 도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한테도 씁니다.
로께 위사띠깡(loke visattikaṃ)은 세상에 대한 애착, 세상에 대한 갈애(渴愛)를 말합니다. 갈애는 몹시 목말라 하는 것으로 땅하(taṇhā)라고 합니다. 그러나 갈애는 무게감이 있어서 여기서는 위삿띠까(visattika)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오온인 색, 수, 상, 행, 식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을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애착’을 말할 때의 세상을 부처님은 오온(五蘊), 또는 다섯 가지 무더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석서에서는 갈애를 위사와(visavā)로도 해석하는데 독(毒)을 지닌 것이라고 뜻입니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을 말합니다.
6. 이다마오짜 사 데와따. 사마눈뇨 삿타 아호시. 아타 코 서 데와따. “사마눈뇨 메 삿타” 띠 바가완땅 아비와뎃와 빠닥키낭 깟와 땃 테 아위띠.
Idamavoca sā devatā. Samanuñño satthā ahosi. Atha kho sā devatā: “samanuñño me satthā”ti bhagavantaṃ abhivādetvā padakkhiṇaṃ katvā tatthevantaradhāyīti.
6. 그 천신은 이렇게 말하였고 스승께서는 그의 말을 가상히 여기셨다. 그러자 그 천신은 ‘스승께서 나의 말을 가상히 여기신다’고 안 뒤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거기서 사라졌다.
이 내용은 다음 강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참고 >
(질문) 부처님은 무색계에도 태어나셨습니까?
(답변) 부처님은 색계 사선정인 정거천을 제외한 무색계도 태어나셨습니다. 정거천은 아나함이 가는 색계천상입니다. 정거천은 아라한이 없을 때는 비어있다고 합니다. 최고의 신통력을 얻은 분도 많고 색계에 있는 분들끼리 정신적으로 소통하는 것도 경전에서 나오는데 색계 있는 분들은 욕계를 약간 깔보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너희들이 100년 살려고 별일 다 하고 사네, 수행 좀 하지’ 하는 식입니다.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수기 받은 이후에는 태어나지 않았고 그 전에는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질문) 부처님 당시 미륵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까?
(답변) 부처님 제자 중에 유명하지 않은 분이었는데 금색가사를 부처님 방에 걸어 놓고 방 앞에는 가사를 깃발처럼 만들어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항상 대중 앞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부처님은 그것을 아시니까 개입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는 미래의 미륵불이고 다음 생에 마지막 부처가 되실 것이라고 앙굿따라니까야에 나옵니다. 수기를 주셨습니다. 이 겁의 시대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주석서에 나오는 말인데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이 5천년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2500년 남았으니 엄청 짧은 시간입니다.
불법이 없는 시대에는 무상, 고, 무아를 가르치는 사람도 없어지고 스님이라는 존재도 팔에 노란 실을 묶은 사람이 스님이라고 하는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가사가 없어지고 노란 실만 묶은 것이 표식이 된답니다. 일본의 대처승 비슷한 승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비구가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부처님 사리가 사라지면서 부처님 말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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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빨리어는 부처님 당시에 마가다국의 언어입니다. 지금은 빨리어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어는 부처님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빨리어가 낯설지만 자꾸 사용하면 차츰 익숙해집니다.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장점과 가슴벅찬 즐거움이 있습니다. 자꾸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부처님의 육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맞이합니다. 경전을 읽다보면 주석서 없이는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새삼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도 중요하고 교학도 중요함을 더 깊게 절감합니다. 아무쪼록 여기 올린 내용이 여러분의 믿음과 수행에 도움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