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무엇일까. 태곳적부터 거듭 의문을 가져온 명제다. 그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연구해 왔지만 명확한 답을 내놓은 적은 없다. 아니 못하고 있다. 그만큼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세계 미술사에서 한 획을 긋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프랑스)이 나타나서 인생사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제목도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붙였다. 남태평양 중부에 있는 타히티(프랑스령)섬의 작은 오두막에서 말년을 보내며 한 달 만에 완성한 대작이다. 이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된다. 그림의 맨 오른쪽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는 갓난아기를 앞에 두고 앉은 3명의 여인 뒤에 서서 이야기하는 정령들까지이다. “우리는 누구인가?”는 노동을 통해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상징하는 열매를 따는 남자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로써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삶의 황혼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여자까지다. 인생의 종착역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폴 고갱은 인간의 삶 여정을 교묘하게 한 장의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의 사유를 깊게 하는 대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UN은 2009년 발간한 <세계인구고령화보고서>에서 오늘날을 호모 헌드레드(Homo-Hundred)시대라 명했다. 100세의 장수가 보편화된 시대의 인간이란 뜻이다. 하지만 영겁의 세월에 비하면 100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작은 입자만도 못한 미미한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생의 환희를 즐겨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짧아져 가기 때문이다. 삶의 진실이 이러한데도 날마다 아귀다툼 속에서 헤매고 있다. 어떤 이는 돈을 쓰지도 않고 평생 모으기만 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회적 지위나 명예라는 블랙홀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이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고 불쌍하지 않은가. 시간은 잠깐의 쉼도 없이 흘러가는데. 결국 불과 몇십 년 살다가 어느 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젊고 젊었던 푸른 삶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저승꽃만 얼굴 가득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미 다리는 쇠고랑 찬 듯 무거워져 있고 내장기관들은 아주 작은 음식 부스러기조차도 소화해 낼 수 없다는 상황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것 아닌가. 나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저승사자를 훠이훠이 쫓아내 봐야 무슨 소용 있겠는가. 요즘 세상이 선거판으로 요동치고 있다. 상대방이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으로 날마다 쳐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해본들 무슨 영광이 있는가. 어차피 도찐개찐 아닌가. 죽음의 그림자는 날마다 다가오고 있는데. 때문에 너무 많은 욕심일랑 갖지 말고 한 푼 두 푼 모아서 적절하게 쓰면 어떨까. 그래도 남거들랑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것도 좋잖은가. 미국 미시간 대학교 사회연구소 심리학자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는 “자기 자신만 위하고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은 남을 돕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2배 높다.”고 심리학 전문지 <심리과학>에 발표했다. 반면에 하버드 의과대학 연구 결과는 남을 도와주는 이타적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는 테레사 효과가 나타났다. 테레사 효과는 직접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면역기능이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