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2권 : 경상도(慶尙道) 흥해군(興海郡)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2권 : 경상도(慶尙道) 흥해군(興海郡)
동쪽으로 영일현(迎日縣)의 경계까지가 21리이고, 남쪽으로 경주부(慶州府) 안강현(安康縣)의 경계까지가 31리이며, 서쪽으로 같은 부 신광현(神光縣)의 경계까지가 9리이고, 북쪽으로 청하현(淸河縣)의 경계까지가 1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의창군(義昌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이 경주(慶州)에 소속시켰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이 국사(國師) 천희(千熙)의 고향이라 해서 승격시켜 군(郡)으로 삼았고, 본조에서도 이에 따랐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퇴화(退火)ㆍ미질부성(彌秩夫城)ㆍ의창(義昌)ㆍ곡강(曲江)ㆍ오산(鰲山).
【성씨】 본군 배(裵)ㆍ최(崔)ㆍ이(李)ㆍ장(張), 정(鄭) 장기(長鬐). 이(李) 덕안(德安). 주(朱) 웅신(熊神).
【형승】 땅이 다해서 막혀 있다 권근(權近)의 〈읍성기(邑城記)〉에 있다.
【산천】 도음산(禱陰山) 고을 서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망창산(望昌山)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고령산(孤靈山)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별산(鱉山)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오산(烏山) 고을 북쪽 16리에 있다. 별내현(別乃峴)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바다 고을 동쪽 16리에 있다. 포이진(包伊津) 고을 북쪽 20리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곡강(曲江) 고을 동쪽 7리에 있는데, 근원은 경주 신광현 마북산(馬北山)에서 나왔으며, 북으로 흘러 고을 북쪽을 지나고, 동으로 흘러 고령산(孤靈山) 아래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두모적포(豆毛赤浦) 고을 동쪽 15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에 있었고, 지금은 칠포(漆浦)로 옮겼다. 장생지(長生池) 고을 북쪽 8리에 있다. 돈각지(頓角池) 고을 북쪽 9리에 있다. 서림지(西林池) 고을 서남쪽 3리에 있다.『신증』 방어진(魴魚津)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왜우음진(倭亏音津)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토산】 전복ㆍ대구(大口)ㆍ청어(靑魚)ㆍ홍합(紅蛤)ㆍ넙치[廣魚]ㆍ방어ㆍ상어[鯊魚]ㆍ고등어[古刀魚]ㆍ김[海衣]ㆍ해삼(海蔘)ㆍ미역[藿]ㆍ참가사리[細毛]ㆍ우모(牛毛), 죽전(竹箭) 성황산(城隍山)과 망창산(望昌山) 강 기슭에서 난다.『신증』 송어(松魚)ㆍ홍어(洪魚)ㆍ송이[松蕈]ㆍ은어[銀口魚].
【성곽】 읍성 석축이며, 둘레가 1천 4백 93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3개가 있다.○ 권근(權近)의 기문에, “고개를 넘어 동남쪽으로 가면 바다 위 수백 리에 이르는데, 군(郡)이 있으니 흥해(興海)이다. 땅이 제일 끝까지 가다가 막혔는데 물고기와 소금과 땅이 기름져서 이로움이 있다. 그 옛날에 여기 사는 백성들이 편안하였었는데, 중간에 왜적의 난을 입고 나서부터 점점 메마르고 황폐해 갔다. 경신년 여름에 이르러 더욱 화를 몹시 받아 고을이 함락되고 불타서 백성들이 학살과 약탈을 당하여 거의 없어지고, 그 중에 겨우 벗어난 자는 흩어져 사방으로 달아났었다. 마을은 빈 터만 남았고 무성한 나무들만 길을 가리니 이 고을 원이 된 사람도 먼 마을에 가서 살고 머리를 움츠려 감히 고을 속에 들어오지 못한 지 수년이 되었다. 정묘년에 이르러 국가에서 군 남쪽에 병선(兵船)을 두어 바다와 포구를 통하게 하여 적들이 오는 것을 막은 연후에 떠돌던 백성 중에 고향을 생각하던 자들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성지(城池)의 견고함이 없었기 때문에 모여서 살지 못하고 왕왕 산골짜기 속에 굴을 파고 살면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가 때때로 나와서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았으며, 왜적이 이르면 능히 서로 구하지 못하고 도망해 숨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이나 고관들이 먼 마을에 살면서 감히 오지 못하기는 전과 같았다. 무진년 겨울에 김제(金堤) 조우량(趙友良) 후가 원이 되어 홀로 와서 마음을 다하여 다스리더니, 이듬해가 되자 정사도 닦여지고 백성들도 화평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에게 묻기를, ‘우리 고을에는 성이 없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기로 내 성을 만들어 쌓고자 하는데 너희는 이것을 꺼리는가?’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진실로 우리들이 원하는 바인데 누가 감히 꺼리겠습니가.’ 했다. 이에 이것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인부를 보내달라 청했으나 이것만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이에 군의 어리고 늙은 백성 겨우 수십 명을 합해서 8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친히 채찍을 잡고 감독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부지런한 자는 위로하고 게으른 자는 경계해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고 엄하게도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모두 즐거이 일을 하였다. 통양만호(通洋萬戶) 백공 인관(白公仁琯)이 군사 50명을 보내어 도와서 시월에 이르러서 일을 마쳤다. 이리하여 백성들이 모두 모여서 집을 지으니, 떠돌던 자들이 날로 더욱 모여들었다. 그 해 겨울에 벼슬이 갈리자 백성들이 사랑하고 사모해서 마치 젖 먹는 자식이 그 어미를 잃은 것 같이 여겼다. 이리하여 그의 정사의 자취는 빛나는 것이 몇 가지 있는 바, 이것을 조정에 말해서 다시 오도록 하기를 청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또 그 일을 기록하여 성루(城樓)에 걸어두어 그의 선정을 사모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붙이려 했으나 이것도 부탁할 곳이 없었다. 경오년 봄에 내 이곳으로 귀양왔었는데, 이 때 만호 백공(白公)이 원이 되어 조후(趙侯)가 다 하지 못한 것을 더욱 이루어 못을 파서 밖으로 형세를 험하게 하고, 문에 자물쇠를 채워 그 안을 견고하게 한 뒤에 그 성이 더욱 완전히 굳어졌다. 군의 늙은이 전 지태천군사(前知泰川郡事) 안성언(安成彦)군과 전랑장(前郞將) 장표(張標)군과 이회(李薈)군 등 몇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여기서 나고 여기서 자라고, 이제 또 여기서 늙었는데, 우리 원이 되는 분이 혹 1년에 한 번 바뀌기도 하고 혹 한 해 걸러서 한 번 바뀌기도 해서 지금까지 무려 수 십 명이 갈려 갔으나, 청렴하고 공변되고 명민하고 위엄과 은혜가 함께 나타나서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감히 속이지 못하는 이는 조후에게 비교할 만한 이를 일찍이 보지 못했을 뿐아니라, 더욱이 우리 군의 쇠잔하고 피폐하기가 이때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으며, 일이 많이 쌓이고 문서의 번거로움이 또 지난해 전답을 측량하던 때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후는 피폐해진 뒤에 일을 이어 받았고, 일이 많이 생긴 때를 당해서 동자 하나와 말 한 필로 여기 왔건만, 자기 몸에 쓰는 것을 몹시 절약하여 아침과 저녁으로 쌀 창고를 조사해서 비용을 주고, 없는 사람을 구제해서 여러 가지로 힘을 써서 관청에 쓰는 것을 넉넉하게 하고, 일찍이 종이 한 장도 백성들에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 땅을 측량할 적에 두둑 수의 많고 적은 것과 토질의 좋고 나쁜 것과 또는 곡식이 수확될 것 등을 한 번 눈에 거치면 잊지 않았기 때문에, 장부를 하는데는 빠르고 정밀하고 자세하기가 여러 고을 중에 제일이었습니다. 또 적을 막는데 용맹이 있어서 그들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곧 말에 올라 먼저 달려가기 때문에, 왜적이 두 번이나 왔어도 침노하지 못했습니다. 이 역사를 하는 데는 백 명이 못되는 무리를 가지고서 한 사람도 매질하지 않고서 한 절후를 거치지 않고서도 풀숲을 변하여 성지(城池)로 만들고, 빈터에 민가를 세워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살기를 예전과 같이 하고 베개를 높이하여 근심을 없게 하였으니, 오늘날로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길이 집을 세워 산 사람을 살리고 부족함이 없게 한 것은 모두 우리 조후가 주신 것 아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고 어린 자식처럼 사모해서 비록 오래 되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니, 원하건대 그대는 글로 써서 뒷사람에게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 조후의 덕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한다. 내 듣고 아름답게 여겨 그 말을 쓰고 나서 인하여 말하기를, ‘맹자도 지리의 이로움이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대개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는데 죽기로써 일하고 가지 않은 것도 사람에게 있고, 성이 높지 않은 것이 아니며 못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맡기고 가는 것도 또한 사람에게 있도다. 이제 성지도 이미 이루어졌고 조후의 은혜도 이미 깊어졌다. 이 뒤에 이 땅을 다스리는 자가 과연 능히 백성들로 하여금 가지 않게 하겠는가. 혹시 맡겨놓고 가버리게 하는 자는 없겠는가. 이것은 원이 된 자가 백성을 얻고 못 얻는데 있는 것이다. 백성이 화목하지 못하면 이것을 가르쳐 주고 성이 견고하지 못하면 완전하게 해서, 그 전에 이루었던 것을 떨어뜨리지 말고 더욱 그 효험이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로다.’ 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사례하기를, ‘그대의 말이 행해지면 우리 원으로 오는 자가 더욱 힘쓸 것이고, 우리 백성들이 살아 나가는 것을 더욱 가히 보존할 것이니, 청하건대 이것을 모두 써서 기문을 만드시옵소서.’ 했다. 조후는 정간(正簡)의 자손으로서 그 조부의 임금을 도운 덕과 공렬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컬어 마지 않는다. 후야 말로 참으로 그 조부를 닮은 사람이다. 훗날에 보상(輔相)이 된다면 능히 그 조상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있도다.” 하였다.
【관방】 칠포영(漆浦營)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 『신증』 정덕(正德) 경오년에 비로소 돌 성을 쌓았으며, 둘레가 1천 1백 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2개가 있다.
【봉수】 지을산 봉수(知乙山烽燧) 고을 동쪽 15리에 있으며, 동쪽은 영일현(迎日縣) 동을배곶(冬乙背串)에 응하고, 북쪽은 오산에 응하였다. 오산 봉수(烏山烽燧) 남쪽은 지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청하현 도리산(淸河縣桃李山)에 응한다.
『신증』 【누정】 차군루(此君樓)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망창역(望昌驛)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부원(釜院) 고을 북쪽 7리에 있다. 옥산원(玉山院) 고을 남쪽 29리에 있다. 여천원(余川院)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불우】 천곡사(泉谷寺)ㆍ백련사(白蓮寺) 모두 도음산(禱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여단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미질부성(彌秩夫城) 주관(周官)이 육익(六翼)이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북미질부 성주(北彌秩夫城主) 훤달(萱達)이 남미질부 성주(南彌秩夫城主)와 함께 와서 항복했으므로 두 미질부(彌秩夫)를 합쳐서 흥해군(興海郡)을 삼았다. 아등변(阿等邊) 또는 근오형변(斤烏兄邊)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동해신(東海神)을 여기에 제사 지냈음이 중사(中祀)에 실려있다. 참포(槧浦) 또는 토지하(吐只河)라고도 한다. 신라의 동독(東瀆)이라고 중사에 실려 있으니, 이는 아마 곧 곡강(曲江)인 듯하다. ○ 신라 신덕왕(神德王) 4년에 참포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쳐서 물결 높이가 20길이나 되어 3일이 지난 뒤에 그쳤다. 망창산성(望昌山城)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6천 척이요, 안에 못 하나와 샘 3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본조 조우량(趙友良)ㆍ백인관(白仁琯) 모두 권근(權近)의 기문에 있다.『신증』 강백진(康伯珍).
【유우】 본조 권근(權近) 일찍이 일이 있어 여기 와서 귀양 살았다.
【제영】 전유지리대어염(田腴地利帶魚鹽) 이곡(李穀)의 시에, “밭은 살찌고 땅은 이로운데 어염까지 겸했으니, 다만 백성 다스림 청렴하지 못할까 두렵네. 옛집 어느 사람이 이곳을 피폐했다 말했는가. 썩은 서까래 낡은 기와 앞 처마에 떨어지네.” 하였다. 해군생애반시염(海郡生涯半是鹽)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바다에 사는 생애 절반은 소금이니, 뉘 있어 혹 염치를 상한다 하리오.” 하였다. 변민락리자지염(邊民樂利自知廉) 신인손(辛引孫)의 시에, “못 파고 밭 갈며 바다에 소금 찌니, 변방 백성 이(利)를 즐기고 스스로 염치아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방면】 동부(東部) 끝이 5리이다. 서부(西部) 끝이 5리이다. 북상(北上)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북하(北下)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동상(東上) 처음은10리, 끝은 20리이다. 동하(東下)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서면(西面)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진보】 혁폐 칠포진(漆浦鎭) 북쪽으로 15리, 옛 두모적포(豆毛赤浦)에 있다. 중종 5년에 여기에 옮겼고 또 영일현(迎日縣)의 통양포(通洋浦)의 만호(萬戶)를 옮겨서 이 성에 합하였다. 둘레가 1천 1백 53척이며 우물이 두 개이고 수군만호를 두었다. 선조 25년에 동래부에 옮겼다.
【진도】 왜우음진(倭亐音津)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곡강진(曲江津) 북쪽에 있다.
【누정】 망진루(望辰樓) 읍내에 있다. 성을 등지고 높이 솟아 평평하게 큰 들을 임해 있다.
興海郡
東至迎日縣界二十一里,南至慶州府安康縣界三十一里,西至同府神光縣界九里,北至淸河縣界十三里。距京都八百二十六里。
建置沿革
本新羅退火郡。景德王改義昌郡。高麗初改今名,顯宗屬慶州,明宗置監務。恭愍王以國師千煕之鄕,陞爲郡。本朝因之。
官員 郡守,訓導。各一人。
郡名
退火,彌秩夫城,義昌,曲江,鼇山。
姓氏
本郡 裵,崔,李,張。鄭。長鬐。李。安德。朱。熊神。
形勝
地窮以阻。權近《邑城記》。
山川
禱陰山。在郡西五里。鎭山。
望昌山。在郡南二里。
孤靈山。在郡東十里。
鱉山。在郡東十里。
烏山。在郡北十六里。
別乃峴。在郡北十里。
海。在郡東十六里。
包伊津。在郡北二十里。有魚梁。
曲江。在郡東七里。源出慶州神光縣馬北山,北流過郡北,東流至孤靈山下,入海。
豆毛赤浦。在郡東十五里。舊有萬戶營,今移漆浦。
長生池。在郡北八里。
頓角池。在郡北九里。
西林池。在郡西南三里。
〔新增〕 魴魚津。在郡北十五里。
倭
亐音津。在郡東十五里。
土産
鰒,大口魚,靑魚,紅蛤,廣魚,魴魚,鯊魚,古刀魚,海衣,海參,藿,細毛,牛毛,竹箭。出城隍山、望昌山、曲江岸。〔新增〕 松魚,洪魚,松蕈,銀口魚。
城郭
邑城。石築。周一千四百九十三尺,高十三尺。內有井三。○權近記:“踰嶺而之東南,至海上數百里,有郡曰興海,地最窮以阻,而有魚鹽、沃饒之利。其在昔時,居民旣庶,中罹倭患,漸就凋廢,迄至庚申之夏,受禍尤烈,陷而焚之。民遭殺掠殆盡,其僅脫者散而之四方,閭井爲墟,荊榛蔽道,爲守宰者
棲于遠村,縮首不敢至邑中者數年矣。及歲丁卯,國家置兵船于郡理之南通洋浦,以備寇至,然後流民之懷土者,稍有復者焉。然未有城池之固,不得聚而居之,往往營窟於山谷中,務欲秘其跡,時出而爲耕漁,寇至則無能相救,自鼠竄而已。故守宰之寓遠村而不敢至者猶昔也。戊辰冬金堤趙侯友良爲宰,單騎以來,盡心於理。越明年,政修民和,乃咨於衆曰:‘爾邑無城,民未安堵。吾欲作而築之,爾無憚否?’ 咸曰:‘固所願也。誰敢憚之?’ 於是報聞觀察使請徒役,不得,乃合郡民老幼僅數十,以八月始裁。親操杖策,監督不怠,勤者勞之,惰者戒之,不勞不威,民皆樂趨,通洋萬戶白公仁琯以兵五十助之,至十月而畢役。由是民得完聚,營立家室,而流寓者日益至矣。其冬見代,民愛而慕之,若乳子之失其母也。類次其政績卓卓者數事,訴于朝請復,不獲報,又欲記其事揭城樓,以寓去思之心,而無所托也。明年庚午春予乃謫來。于時
萬戶白公爲宰,益修趙侯之所未及者,鑿其池以險於外,鐍其門以固其內,而後其城益以完堅。郡之老前知泰川郡事安君成彦、前郞將張君標、李君薈等若干人語予曰:‘吾儕生于玆,長于玆,今又老于玆矣。爲吾宰者,或歲一更,或間歲一更,所歷無慮數十人,廉公明敏,威惠竝著,民畏而愛之,不敢欺者,未嘗見有趙侯之比。而況吾郡之殘弊,未有甚於此時;事之叢宂、文案之煩,又未若去年量田之日也。趙侯承殘弊之後,處叢宂之際,單僮匹馬,自奉甚約,省晨夕廩給之費以濟飢乏,多方營辦以贍官用,未嘗有一紙賦於民。其量田也,畎畝之多寡、土壤之腴薄與夫收成之實否,一經於目則不忘,故其上簿事速,而費省精詳,爲諸州最。又勇於禦寇,聞其至,卽上馬先馳,故倭再至不得侵。至若役疲羸,不滿百之衆,不鞭一人,不歷一時,化榛莽爲城池,易丘墟爲閭井,使吾民按堵如舊,奠枕無虞,自今日至于後世,永立乃家生生
不匱者,皆吾侯之賜也。故吾民父母愛而孺子慕,雖久而不可忘也。願吾子筆之文,以告後之人,使無忘吾侯之德焉。’ 予聞而嘉之,旣書其言,因語之曰:‘孟子不云乎?地利不如人和。夫築斯城,鑿斯池,效死而勿去,在乎人;城非不高,池非不深,委而去之,亦在乎人焉。今城池則旣設矣,趙侯之惠則旣深矣。後之守玆土者,果皆能使民勿去歟?無或有使委而去之者歟?是在爲守者得民之如何爾。民有未輯則懷之,城有未固則完之,無墜其前成,而益圖其後效,可也。’ 咸起而謝曰:‘子之說行,吾宰之繼繼者益勉,而吾民之生生也,益可保矣。請幷書以爲記。’ 趙侯,先正簡之後。乃祖輔相德烈,人至今稱之不衰,侯眞克肖者也。他日爲輔相,能不墜其先業,可信也。”
關防
漆浦營。在郡北十五里。○水軍萬戶一人。〔新增〕 正德庚午始築。石城。周一千一百
五十三尺,高九尺。內有二井。
烽燧
知乙山烽燧。在郡東十五里。東應迎日縣冬乙背串,北應烏山。
烏山烽燧。南應知乙山,北應淸河縣桃李山。
〔新增〕 樓亭
此君樓。在客館東。
學校
鄕校。在郡西一里。
驛院
望昌驛。在郡東二里。
釜院。在郡北七里。
玉山院。在郡南二十九里。
余川院。在郡東二十里。
佛宇
泉谷寺,白蓮寺。俱在禱陰山。
祠廟
社稷壇。在郡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郡南二里。
厲壇。在郡北。
古跡
彌秩夫城。《周官六翼》:“高麗太祖十三年,北彌秩夫城主萱達與南彌秩夫城主來降,二彌秩夫合爲興海郡。”
阿等邊。一云斤烏兄邊。新羅祀東海神于此,載中祀。
槧浦。一云吐只河。新羅東瀆,載中祀。疑卽曲江也。○新羅神德王四年,槧浦水與東海水相擊,浪高二十丈許,三日而止。
望昌山城。土築。周六千尺。內有一池、三泉。今廢。
名宦
本朝 趙友良,白仁琯。俱見權近記。
〔新增〕 康伯珍。
流寓
本朝 權近。嘗以事來配。
題詠
田腴地利帶魚鹽。李穀詩:“云云,只恐臨民頗不廉。古館何人能起廢?腐椽殘瓦落前簷。”
海郡生涯半是鹽。洪汝方詩:“云云,有誰專是或傷廉?”
邊民樂利自知廉。辛引孫詩:“鑿井耕田煮海鹽,云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