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날리기(1) (나의 별명은 미친개)
병아리 날리기(1)
-나의 별명은 미친개-
89년 봄, 그때는 우리 가족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병(폐암)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이후로 난 할아버지가 가족 몰래 주시던 요구르트와 아이스크림을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벌써 35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땐 나에게 상당하게 큰 충격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D시에서 서울로 발령이 나서 주거지를 옮긴 아버지는 몇 달을 혼자서 지내시다가 새 학기를 맞추어 온 가족 모두가 서울 송파구 쪽에 있는 어느 변두리 동네로 이사를 했다.
이사 왔는지 일 년도 채 못 되어 동네 주위가 갑자기 개발되면서 7통4반의 서민아파트 주위에 고급아파트와 호화주택이 대량으로 생겨나고 포화상태에 이른 초등학교는 3학년까지 우리 동네에 새로 지은 학교로 학생일부가 옮겨가서 삼년 후에 1회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로 빈부의 차이가 심했고 나를 포함한 기존 마을 토박이 아이들과 서민아파트 아이들이 수적인 열세와 부에 눌려 꼼짝 못하고 지내고 있었다.
D시에서 전교 5등 이내에 성적으로 2년 연속 반장에다 공부를 잘했던 탓인지 전학
때 우수한 학생이 전학 와서 기쁘다는 말과 함께 교장선생님이 교실로 직접 안내를 해주었다. 때때로 동생이 다시 D시로 가자며 간혹 울 때도 있었지만 차츰 친구를 사귀면서 다시 이사를 하자고 떼를 쓰는 일도 없어질 무렵이었다.
학교를 옮기면서 그나마 다소 부담 없었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다시 부자동네 학교로 이전하여 새로 반 편성이 되면서 외로운 힘든 서울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의 싸움은 검도, 태권도 유단자도, 운동선수도 도움이 안 되고 덩치로 밀어붙이면 그의 성공한다. 지금은 185cm의 키에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지만 그땐 작고 깡마른 체격으로 덩치 큰 녀석들이 밀어붙이면 어김없이 나동그라지곤 했다.
그리고도 모자라 집단으로 싸움을 걸어오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문에 기대에 나오지 못하게 하거나, 여학생들 앞에서 왼쪽 뺨에 있는 팥알만 한 점을 가리키며 쩜씨~ 쩜씨~ 쩜탱이라고, 놀림을 당하던지, 어떤 형태로든 하루가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그날도 방과 후에 화장실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82평짜리 같은 동 아파트에 사는 뚱땡이 최철우를 포함한 강승대, 황동균, 세 명이 전등 스위치를 내리고 화장실 문에 기대어 서서 나가려는 나를 억제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 넘게 지나가고 정말 울고 싶을 정도로 화장실 안은 적막하고 무섭고 외롭고 슬펐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지난 추억들이 꼬리를 달고 화장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함께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꼬맹이 시절부터 아버지는 시도 쓰시고 연극도 하셨다.
그 지역에서는 꽤 알려진 시인이자 연극인이셨다 팜플렛이나 벽보에 붙인 포스터에 아버지 얼굴이 자주 나붙곤 했고 가끔 지역 TV에도 나오시고 했던 그 시절에는 회사 사람들보다 문인이나 연극인 후배들이 집으로 자주 찾아오곤 했다.
당시 극단도 직접 운영하고 계셨는데 순회공연이 없는 휴일은 나를 극단에 데리고 가셨다. 무대 위에서 재미있는 그림자놀이와 소품으로 극단단원인 형, 누나들과 놀이도 하고 총싸움도 했다.
컴컴한 무대 위에 산재한 장치들 사이로 숨고 숨으며 소리 지르던 총소리가 잠잠해지면 갑자기 조명이 밝아지고 환한 무대를 혼자 서있게 되었을 때 스피커를 타고 흐르던 아버지의 목소리....
"우리 쩜도리 인자 집에 갈 거나" 하면
"눈이 부셔요" 라고 대답하기 무섭게 베이비 조명을 따라오라고 얼른 다른 조명을 다 꺼주시던 아버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울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꼭 깨물고 참았다. 끝이 없는 서울학교 생활의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도 막연하다. 벗어나기엔 나는 너무 약하고 왜소하고 또 가난하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자꾸 떠올려지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겨냈지만, 지금은 너무나 힘들다.
컴컴하고 적막한 화장실 속에서 순간적으로 환한 조명 켜지기를 바라며 아버지를 외치며 초인적인 힘으로 문을 박차고 동시에 네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화장실 바닥에 엉켜 있었고 3대 1의 결전에서 순간적인 방어본능의 수단으로 뚱땡이 최철우의 어깨를 물고 늘어졌다.
얼굴과 몸에 다른 두 녀석의 주먹과 발길질로 몇 차례 구타를 당했지만, 끝까지 물고 뚱땡이 철우의 몸에서 이탈하지 않고 견디어 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참아 냈다.
이윽고 뚱땡이 철우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당황한 다른 녀석들은 황급히 교무실로 뛰어갔다.
교무실에서 뚱땡이 일행과 나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일장 훈시를 듣고 반성문을 쓴 다음 마무리 지을 수 있었고 양호실에서 소독약을 바르고 악수를 하고 헤어져 집으로 왔다.
해 질 무렵 뚱땡이 철우는 육성회장인 자기 어머니를 앞세워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수준 이하의 발언을 하며 전교에서 몸집이 제일 큰 그 녀석의 어깨를 할머니에게 들이밀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없어서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확대되는 불행은 없었지만, 뚱땡이 어머니의 방문 요지는 담임선생에게 찾아가서 항의하는데 오히려 자기 자식을 나무라며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를 괴롭히다가 그런 거라며 이해하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에 화가 나서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허리 굽혀가며 반복하시던 할머니가 나를 불러 감싸안았다.
뚱땡이 철우 어머니는 작고 왜소한 나와 철우를 번갈아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곤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요런 쪼그만 녀석에게 세 명씩이나 덤벼 망할"
뚱땡이 철우 어머니는 나의 얼굴에 담긴 피멍과 부르터진 입술을 보고 작고 왜소하고 착하기 그지없으며 시골스러운 내 모습에 철우는 절대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표시했고
"손자교육 똑바로 해라"는 말도 덤으로 주고 갔다.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으시며
"엄마한테는 말하지 않으마" 라고 하셨다.
돌아서는 뚱땡이 철우의 어깨에 남긴 선명한 이빨자국 위로 덤으로 주고 간 철우 엄마의 말들이 이우는 햇살과 함께 주름진 할머니 얼굴에 꽂히고 있었다.
김다호 : 1982년 도가니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국제펜한국본부이사. 한국문인협회회원 한성백일장,통일백일장 심사위원
송파문인협회자문위원. 강서문인협회자문위원.
시동인 가릉빈가회장. 다시동인회장. 前강서청소년회관 관장. 흥사단부이사장.
시집: 경계에 서성이다. 말들이 고여 있다. 동인시집 오래된 습관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