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서당
이영백
서당 다녔다고 하니 모두들 믿지 아니하였다. 설마 정식학교 다녔겠지, 왜 서당을 다녔느냐고 자꾸 되물어댔다. 그랬다. 초교 입학 전에도 서당에 두어 달 정도 다녔고, 초교 졸업과 동시 서당에 2년간 다닌 것이다. 아버지의 교육철학(?) 때문에 이태동안 세월을 동기들보다 흘려버렸다.
서당은 정상의 “향촌 서당”이 아니었다. 훈장이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아는 지식을 학동들에게 가르쳤다. 책 걸이와 옷 얻어 입는 정도로 운영되던 시골 “물봉(勿峯)서당”이다.
정상 서당은 엄격한 규율과 훈장, 접장까지 두고 수업료도 호되게 받았다. 지방에서 향교 짓고, 명륜당에 공자님 모시고, 공방에서 공자 왈, 맹자 왈 구식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다. 과거에는 “과거(科擧)”보려면 향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갈 실력이 되어야 공부 좀 한다고 하였다.
일제침략기를 거쳐 오면서 신학문이 시작되었고, 신식학교가 생겼다. 그러다가 해방되면서 밀려오는 신학문의 봇물이 터졌던 것이다. 우리가 신학문하게 된 것도 정치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서당에 입교하여 또래 학동반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훈장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지만, 학동들은 전후로 흔들어가며 암송하였다. 벼루에 연적의 물 떨어뜨리고 진한 먹 갈며 묵향을 즐기기도 하였다. 한자를 쓰면 필순도 어렵고, 개발 새발 글씨로 온통 손에 먹물 묻히기 일쑤이다.
서당은 한 권의 책을 다 배우면 책 걸이를 하였다. 일종의 잔칫날이다. 떡 만들어 나누어 먹고, 훈장에게는 제철에 맞는 옷 지어 올렸다. 물론 수업료격인 볏섬도 갖다 드렸다. 접장은 나이 차이도 있고, 공부한 연륜 있는 선배로 훈장에 버금가는 우대하여야 한다.
서당에 꿇어 앉아 천자문, 동몽선습, 계몽편, 소학, 명심보감, 통감까지 배웠다. 지나고 보니 국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한문 배운 덕으로 큰 밑거름이 된 것도 사실이다. 대학원에서 한문소설 시간에 임의 번역한 것으로 이야기를 낭독한 때도 있었다. 결코 헛된 이태를 날린 것은 아니다.
서당에서 혹독한 한문공부의 시련을 겪었다. 비록 구식학교이지만 사람 살아가는 데 도움주기도 한 공부이다. 고교에서 한문을 다시 배웠다.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