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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적 33 _말고의 귀를 고치심
마태복음 26:50-56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말고의 귀를 고치신 이적은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14:46-50, 누가복음 22:49-53, 요한복음 18:4-11에도 기록되어 있다. 본 이적은 이적 자체를 베풀어 병을 고치시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한 제자의 순간적인 혈기에 의해 발생 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예수님의 생각에 전혀 없었던 일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적 자체에 대한 말씀보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드러내고 계신다는 사실을 복음서는 더 중요하게 드러내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문맥을 보면 가룟인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파송된 무리를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아시고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라고 말씀하시자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50절)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47절에 보면 유다를 소개하면서 “열둘 중의 하나”라고 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제자 중의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눅 6:13)를 세우셨다는 것은 구약의 열두 지파를 보여 주는 선택이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열두 사도를 통해 고발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에서 “열둘 중의 하나”라는 표현은 가룟 유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나서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마 26:21)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철저히 하나님을 거부하며 십자가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판 자는 ‘유다’이고 그 유다는 곧 모든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 유대인들이 죄의 권세에 매여 예수님을 죽이듯이 오늘날 죄의 권세에 매여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는 바로 유대인이 바로 ‘나’라는 의미이다.
유다와 함께 온 “큰 무리”(47절)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인데 공회의 관할 병력으로 보인다(참고 요 18:3,12). 성경이 큰 무리라고 하였으니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동원된 숫자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제압하여 잡는 일이 큰 무리의 힘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여겼다는 것이고 또한 칼과 몽둥이로 무장하였다는 것은 세상의 무기를 힘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종교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분명 많은 무리들의 힘을 빌려 힘으로 대항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오늘날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힘을 제압하는 방식은 더 큰 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힘의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세상의 상식이며 삶의 방식이고 그것이 곧 인간들의 종교 생활이다.
예수님은 유다를 향해 “친구여”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신 것은 의아해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친구여’라고 부른 것이 두 번 나타나는데(마 20:13, 22:12) 두 경우 모두 천국과는 관계없는 존재로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 예수님은 유다와는 아무 상관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언하신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프 호 파레이’라는 말은 번역이 쉽지 않은 말이다. 개정성경의 번역처럼 ‘네가 하려고 온 일을 행하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네가 왜 왔느냐?’라는 질문으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네가 이것을 위해 왔구나!’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세 번째 번역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이시며 그것을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51-52절). 본문에서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라고 하였고 마가는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막 14:47), 누가는 “그 중의 한 사람”(눅 22:50)이라고 하였지만, 요한은 “시몬 베드로”(요 18:10)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마태나 마가, 누가는 “대제사장의 종”이라고만 소개한 반면 요한은 그 이름이 “말고”(요 18:10)라고 밝혀준다.
그리고 마태, 마가, 요한의 기록을 본다면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베어버린 것만 보이지만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라고 그의 귀를 고쳐주신 이적을 나타내신 것을 알 수 있다(눅 22:51). 그렇다면 세 복음서의 기록자는 말고의 귀를 고치신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심으로 칼로 행하는 이것 자체를 철저히 거부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이적을 통해 말씀하신 것에 초점을 두고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 10:9-10a, 참고 막 6:8-9, 눅 10:4)라고 하셨는데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지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눅 22:36-38)
그래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다고 진술한다(요 18:10).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불법자, 즉 죄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하고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죄인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 죽음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십자가 죽음이 언약의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위해 베드로는 칼을 들고 있어야 했다.
우리 성경에 어떤 곳에는 ‘검’ 어떤 곳에는 ‘칼’로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성경에서는 동일하게 ‘마카이라’라고 쓰고 있다. 즉 검이냐 칼이냐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칼이란 전쟁을 위한 도구이고 그 도구로 상대를 제압해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세상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만의 방식이 아니라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칼의 방식,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도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다른 종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여긴다. 이런 사고방식이 제자들이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하는 방식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인간들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망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타내신 하나님 왕국이다.
그래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53-54절)라고 말씀하셨고, 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5b-56a절)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22:3-6에 보면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였고 누구를 잡을지는 입맞춤으로 표시한다고 맞추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유다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예수님의 체포가 실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이 유다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응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선포한다. 실제로 주도하는 인물은 유다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말씀의 성취란 말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그 말씀을 따라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과 일치가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약에서 약속으로 주셨던 말씀과 하나 된 것을 보여 주심으로 그분이 말씀 자체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며 말씀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환영하리라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방문하였는데 인간들이 거부하자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십자가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었는데 급작스럽게 변경된 것이 십자가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시기 전에 이미 계획된 것이었기에 생명 나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에덴동산 중앙에 두셨던 것이었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알고 먹고 죽어야 했다. 에덴동산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하지 말라’고 하는 선악의 지식 나무를 통해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 안에 있었던 계획이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세 번이나 밝히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내가 그니라”라고 하였는데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이다(요 18:5,6,8).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하셨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나는 나다/예흐예 아쉘 예흐예)라는 그 표현이다(참고 출 3:14). 즉 구약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스로 잡히시며 십자가에 자신을 넘겨주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은 언약의 상대자로 세우셨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실패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언약의 진짜 상대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문 속에서 제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 내려고 하는 죄인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폭로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고자 하시는 그 말씀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열두 제자들이란 언약에 실패한 구약의 이스라엘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자들이다. 그런데 마가는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는 내용 뒤에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1-52)라고 하여 자신의 이야기도 슬쩍 덧붙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한 것이 비단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마가와 같은 존재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버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예수님을 붙잡는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으신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는 것은 종교 생활이고 예수님이 나를 붙잡으신 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손에 잡히심으로 십자가 죽음에 자신을 넘겨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칼로 설치는 자가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에 주와 더불어 죽는 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2022121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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