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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새로운 화약고의 등장
안드레이 사사노프 장관이 중동정세보고서를 편찬하고 나서, 연방은 이란과의 적극적인 제휴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실로 1995년 2월 1일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모하마드 하타미 종무담당장관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연방의 정책은 명확했습니다. 이라크보다는 이란을 우선시하되, 그들이 독자적 핵무장을 용인받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죠. 이 부분에 대한 협상은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이란은 소련의 핵우산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핵 프로그램을 완전 폐기하기로 약속했고, 어서 대외정책과 관련된 부분으로 넘어가고 싶어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타미 장관은 난데없이 파키스탄에서의 일, 즉 탈레반을 위시로 한 수니 극단주의의 발흥이라는 주제를 꺼내들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물결이 전 중동을 장악하는 것은 소련의 국익에 정면으로 반하므로, 또 다른 시아파 신정국가인 자신들과 적극적으로 제휴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심지어 그는 "이란식 신정민주주의(?)야말로 수니 극단주의에 맞설 대항마로, 아사드나 후세인의 폭압적 세속주의보다 그 점에서 더 지속가능성이 탁월하다"는 신박한 논리를 꺼내들며 모두의 어이를 날려버렸습니다. 결국 결론은 자신들을 도와 이라크와 시리아의 '폭압 세속주의 정권'을 날려버리는 데 일조해달라는 이야기였죠.
솔직히 말하자면 이는 전형적인 블러핑이자 혓바닥질이었습니다. 알렉세이를 비롯한 연방 각료들은 "당신들이 정말 폭력적 극단주의에 맞서는 이슬람 세계의 대안이라면 대아야톨라 몬타제리와 같은 비판적 신학자들을 재신임하고 정권에 반대했던 운동가들을 사면복권하는 정도는 보여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받아쳤고, 하타미 장관은 약간 당황한 눈빛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시리아는 전통적인 친소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이라크 작전에서 도움을 받고 빠지던지 하라는 반응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란은 소련의 대안을 약간의 체념과 함께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란이 시리아와 제휴해 이라크를 공격해 사담을 축출하는 동안, 놀라운 소식이 접수되었습니다. 중국이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파키스탄 신정부와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선포하고 사실상 경제동맹 수준의 협정을 공개한 것입니다. 즉시 미국, 소련, 일본, 한국, 인도의 긴급 5자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파키스탄과의 연대로 인해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 내 이슬람주의 세력이 맹위를 떨치게 되고, 중동의 극단주의 세력은 중국과의 연결로 차익을 얻어 발흥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고강도 제재안을 검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의 망언 제조기 모리 요시로 총리는 "중국이 1920년대로 돌아가는 것이 세계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 "중국 공산당은 제2의 나치" 등등 각종 요상한 소리들을 늘어놓았고, 클린턴이 이를 어떻게든 말리려는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도중 아미나트는 작정한듯 "사실 파키스탄을 지원하는 본체는 미국의 우방인 사우디이며, 그들은 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의 배후"라는 사실을 그대로 폭로해버렸습니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죠.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것은 중국 '따위'가 아니다"라는 의견에 급격하게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회의가 해산되고, 애틀랜타에서 미-중-소 3자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장쩌민 국가주석은 회의가 시작하자마자 중국이 2주 내로 디폴트를 선언해야 하는 국가파산의 위기에 있다는 말을 꺼내 모두를 파란으로 이끌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구제금융안을 제안했고, 소련은 고심했습니다. 일단 수백 기에 달하는 핵미사일의 통제권이 날아가는 사태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죠. 그러나 리즈코프 총리를 비롯한 지도부는 중국이 다시 살아나 연방의 국익을 위협하고 잠재적 패권국으로 성장하는 일 역시 달갑지 않아 했습니다. 이에 중국에게 '산소호흡기만 겨우겨우 달아놓는' 수준의 합의가 완성되었습니다. 1995년 애틀랜타 협정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합의는 미소 양국이 중국의 영토적 완결성과 정권 안정을 보장하고, 대외채무의 만기연장을 보증하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최소한의 구제금융을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이 (디폴트는 아닌)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사실상의 반신불수 상태에 빠지자, 북한 정권은 사실상 붕괴수순을 밟았습니다. 중국 국내의 민심은 그야말로 바닥으로 떨어졌고, 티베트와 신장 지역의 통제권이 사실상 날아가버렸죠. 대만은 대만대로 리덩후이 총통 및 야당(민진당)의 주도로 독립 여론이 강해졌고, 일본은 나름대로의 대책을 차근차근 준비했습니다. '실낱 위의 평화'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06.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조중개발은행이 파산하고 중국이 무기한 지불유예선언(모라토리움)을 공표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은 5달동안이나 공식석상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미국, 소련, 일본, 한국의 정보기관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무언가 급변사태가 발발했다는 소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확실히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선루트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최광" 명의로 도착한 서신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말인즉슨, 자칭 '친위세력'이 급변사태에서의 보호를 명목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신변을 확보해 모종의 장소에 안치시켜놓고, 사실상의 조용한 친위쿠데타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정일의 숙부이자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그 친위쿠데타 세력의 수장인 것으로 추정되며, 어디로부턴가 모종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첩보 역시 속속들이 들어왔습니다.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기 위해, 최광 측의 특사인 계응태 공안비서, 황장엽 전 의장, 오극렬 조선인민군 대장이 블라디보스토크 모처의 KGB 안전가옥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북한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혼란스러웠습니다. 인민군에 대한 통제권은 사실상 보위장교가 일선 지휘관과 결탁해 밀수, 성매매 등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약탈을 주도하는 등 아예 날아가버렸고, 김영주는 북한의 수양대군이 되어 김정일을 인간 옥새로 사용하는 상황이었죠. 1994년과 1995년의 연달은 자연재해로 농업생산성 또한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수준이었고, 벌써 수많은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일행들은 '다 죽어가는' 중국이 '투자했다가 처참하게 망한' 북한에 돈을 써가며 공작을 주도한다는 전제 자체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에 대해 면밀한 조사가 시행되었고,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바로 한국의 안기부가 일본 내각정보조사실의 협조를 받아 김영주 정권을 배후지원, 대통령의 허가도 없이 북한의 혼란을 부추기고 국내여론을 공안정국으로 개조하려 한다는 것이었죠. 크게 놀란 일행들은 곧바로 서울로 향해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두명, 김덕룡 민자당 사무총장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고문을 접견했습니다. 소식을 전해들은 김영삼은 그야말로 대노, 안기부에 대규모 특검과 검찰조사를 지시해 조직 자체를 와해시켜버리고 내친 김에 구 군부정권 인사들까지 강경하게 숙청해버렸죠.
배후지원을 차단당한 김영주 정권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신정부로 빠르게 대체되었습니다. 소련은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대신 '통일 완수 시 중립국화'라는 조건을 내세웠고, 이는 받아들여졌습니다. 북한은 소련식 의회주의 체제가 이식된 채 많은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국을 소련과 친밀한 입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카드에 불과했지만, 김평일을 백두혈동의 계승자로 추대한 이들 입장에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07. 중경삼림
1996년 7월 29일, 잠시 진정세로 접어드는 듯 했던 홍콩의 중국 귀속 반대시위는 다시 한번 불타올랐습니다. 홍콩 반환과정을 담당하던 크리스 패튼 총독이 BBC와의 인터뷰에서 "홍콩인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돌려준 것이 내 임기 중 가장 보람있는 일이었다"고 답변했고, 존 메이저 총리가 이를 지지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영미권, 서유럽, 일본 등의 언론사들은 이를 부풀려 "영국이 홍콩의 중화민국 반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기사를 생산해냈죠. 바야흐로, 7.29 홍콩 만세운동이 막을 올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중국 본토에도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왔습니다. 홍콩 주변도시인 광저우와 선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그리고 이를 진정시켜야 할 광동성정부는 사실상 사보타주를 일삼는 수준이었죠. 급기야 진압 담당인 광저우군구 소속 제42집단군 역시 오히려 시위대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며 사태는 겉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달았습니다. 샤먼, 상하이 등 중남부 해안도시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시위에 정부는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졌습니다.
원래부터 티베트 불교 신자였던 홍콩 인기배우 양조위가 미국에서 톰페티 라마와 악수하는 사진이 보도되자 홍콩영화는 단숨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베이징의 장쩌민 정권은 홍콩영화의 상영과 배포를 금지하는 조치를 부랴부랴 내놓았습니다. 물론 이런 정책이 성공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홍콩'이라는 단어가 공산당 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만 제공했을 뿐이었죠. 시간이 약간 흐른 8월 14일, 티베트와 신장은 사실상 독립세력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라싸로 복귀했고, 신장위구르지역에서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을 위시한 이슬람주의자들이 급격히 후퇴하는 인민해방군 병력에 뒤이어 우루무치에 입성했습니다.
중국의 붕괴라는 사태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몰고 올 가능성이 매우 큰 변수였습니다. 1993년부터 중국에 유입된 해외자본이 이탈하면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 등은 과잉투자를 경험했고, 미일 간 '역플라자합의'의 결과로 엔화 가치가 절하되자 일본발 자금이 추가로 흘러들어가면서 아시아 경기는 그야말로 과열에 과열을 거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죠. 파키스탄 문제로 인해 인도의 안정성이 악화되고 투자자들이 대체투자처를 찾는 상황에서 중국마저 대혼란에 빠진다면 경제버블의 붕괴로 인한 세계금융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중군위 부위원장 후종밍 상장은 류화칭 제독과 양바이빙 장군이라는 육해군의 두 우두머리 원로들을 추대한 채 '구국정부'를 선언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해안의 시위대는 '푸른 완장'을 차고 자오쯔양을 사실상의 지도자로 옹립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장쩌민 정권은 빠른 속도로 군사쿠데타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죠. 미국은 중국 사태로 인해 촉발될 금융위기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잠재적인 경제침체를 'IT산업의 활황세'로 방어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상함을 느낀 소련 각료들은 조금 더 상황을 파악해보기로 했습니다.
조사 결과, 장쩌민 세력의 가장 큰 후원자는 일본이었습니다.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은 사실상의 브레인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외무상을 통해 중국 상황에 깊숙이 개입, 중국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묶은 뒤 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야심을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쿠데타군을 빠르게 몰아낸 뒤 각종 학살들의 책임자인 장쩌민 이하 정권 인사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차오스, 후진타오 등 온건파를 옹립하는 계획 역시 수립된 상태였죠. '푸른 완장' 시위대와 자유파 역시 이를 받아들이고, 중화민국 정부는 독립 인정을 조건으로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퍼즐조각이 맞춰졌습니다. 미국은 중국 사태를 진화하고 아시아에서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의 아시아공동체 안을 배후지원하는 한편, IT시장을 최대한 키워 유동성 위기를 막으려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고, 중국은 신장과 티베트, 타이완을 사실상 놓아주는 대가로 '살아남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미국과 친밀한' 막대한 아시아 블록이 형성되어 소련이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무조건적으로 대책을 강구해야 했죠.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편승해 소련 역시 경제적 이익을 최대한으로 챙기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움직임을 철저히 사보타주해 경제위기를 일으키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적인 생존을 도모하는 것. 전자는 연립여당의 소브차크, 후자는 보수파 야조프의 안이었습니다.
안드레이, 알렉세이, 아미나트는 야조프의 안에 보다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이를 관철하려면 위험을 최대한 회피하고자 하는 리즈코프 총리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했죠. 그러나 그는 "인위적으로 경제위기를 촉발해 인민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정부수반으로서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에 아미나트는 아시아 블록에 친소국가들을 대거 가입시키고 소련 역시 블록에 발을 걸쳐 일본과 영향력 싸움을 전개한다는 절충안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경제위기의 리스크는 최대한 북미와 영국에게 전가한다는 방안이 마련되었죠. 이 안건은 받아들여져, 소련은 이후 창설된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최중요 역외협력국이자 준회원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후 기구 내 '검은 양'들을 키우고 EU 등과 연합해 리스크를 떠넘기는 한편 일본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거세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알렉세이는 일본 우익들의 목소리를 키워 역사 및 대외정책 문제에서 주변국들이 일본을 신뢰할 수 없게끔 하는 작업을, 안드레이는 한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공작을, 그리고 아미나트는 EU와의 에너지 협력으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버블 붕괴 상황에 대응하는 작업을 끝마쳤습니다. 태풍은 물러간 것 같았으나, 전세계는 단 몇 년의 유예를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캐릭터 일람>
0.
- 이름: 예브게니 일리치 람스도르프
(Евгений Ильич Ламсдорфф)
- 플레이어: NPC- 생년월일: 1946년 1월 29일
- 클래스: 연방 외무장관
- 민족: 러시아인+부랴트인 혼혈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약간)
- 배경:
예브게니 람스도르프는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러시아인 지역당원이던 아버지와 부랴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활발한 콤소몰 활동과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1965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인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 람스도르프는 1968년 상부로부터 긴급명령을 받아 그의 소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습니다. 연대장은 그에게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으러 간다"고 전했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이상하게도 사회주의 동지의 나라라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였죠.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끔찍했습니다. 비무장한 노동자, 아이를 업은 어머니, 지팡이를 짚은 노인에게 발포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람스도르프는 그때부터 모종의 신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진압되고 다시 복귀해 남은 복무기간을 마치고 복학한 뒤 대학을 졸업한 람스도르프였지만, 그는 밤마다 울부짖는 체코인들의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1972년 모스크바 지역당에서 교육행정업무를 맡으며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으나, 그와 안면이 있던 중앙당 정치국원 안드레이 키릴렌코와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람스도르프는 '브레먀' 방송에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투서를 남기고 그대로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서독 본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우던 그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받는 존재였고, 어떠한 주제든 성역 없이 토론해야만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논리에 따라 건설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람스도르프는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처절한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보드카, 보르시, 톨스토이, 체호프,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의 조국 역시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원하고 인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진보를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꽤나 많긴 했으나, 그들의 대책없는 개인주의와 인간 소외, 빈부격차의 정당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옹호할 수 없었죠. 람스도르프는 고향에서나, 여기서나 소수파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내 사람'에 집착했습니다. 다행히 문화와 예술, 음주가무를 즐기고 지갑 여는 데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물욕을 경계하는 그의 성격은 꽤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1986년, 새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을 외치며 그간 탄압해왔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석방과 복권을 단행했습니다.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던 리즈코프는 람스도르프를 잊지 않고 다시 연방에 불러들였죠. "개혁은 필수적이나, 미국인들에게 굽혀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만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그대로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종속시킬 것이다"라는 편지 내용이 리즈코프로 하여금 안심하고 람스도르프를 다시 불러들이게끔 하는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작업 지원 과정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눈도장을 얻고 나서, 그는 정치국 중앙위원회와 유류기지건설-가스공업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물론 1990년 리즈코프와 함께 고르바초프-옐친의 "500일 경제재건계획"을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하다가 다시 서기장의 눈밖에 나긴 했지만, 그는 일단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며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람스도르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인권을 중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드높이며 서방과 협력하되 굴복하지는 않는 튼튼한 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고육지책이 필요할 지도 모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상만은 수단으로써 뒤집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조국에서는 그 누구도 무고하게 상처받지 않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1.
- 이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메스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6년 5월 8일
- 클래스: 외무위원회 국제협력부 장관
- 민족: 러시아인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0)/경영(2)/호신(0)/조사(2)/위조(2)/선전(4)/공작(3)/화술(5)/장악(3)/압박(5)
- 트레잇:
#친절한 미소, 강력한 빠따: 동지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친절을, 적에게는 가차없는 독설과 위협을 날려야 합니다. 영향력 하 국가에 대한 화술에 +2, 압박에 -1. 적성국에 대한 압박에 +2, 화술에 -1. 서방 국가에 대한 화술에 +1.
- 잔여포인트: 0
- 배경:
알렉세이 메스너는 1946년 5월 8일 대조국전쟁 승리 1주년이 되던 해 모스크바에서 소련 최고회의 의원인 니콜라이 메스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메스너는 당시 소련 법무장관을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릴적부터 소련에 대한 애국심을 교육받으며 자랐기에 조국 소련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마음 가득 가지게 되었죠. 아버지 니콜라이는 아들이 자신처럼 법조인의 길을 걷길 바랬지만 알렉세이는 외교관이 되어 조국의 이름을 국제무대에서 널리 퍼뜨리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알렉세이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브라티슬라바 조약, 모스크바 협정, 헬싱키 협정, 전략무기제한협정 등의 냉전 중반기 주요 외교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평판을 쌓아나갔죠.
그렇게 외교관의 일에 열중하던 1980년. 알렉세이는 주영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런던에서의 경험은 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분명 영국은 '지는 태양의 나라'이자 광업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구세대의 실패국가라고 배웠으나, 그런 영국의 인민들마저도 '초강대국'이라는 소련의 인민들보다 훨씬 나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국에서는 국영 백화점(굼) 등에서 길게 줄을 서야 살 수 있던 치약과 비누, 의류, 주류 등이 시골마을의 작은 상점에도 즐비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부임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자신의 조국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자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도입을 지지하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습니다.
1985년, 공산당 정치국원들과 서기장이 직접 참관한 연방 외무부 실무자 전체회의에서 알렉세이는 서방과의 화해, 자유화, 아프간 철수, 군 개혁, 경제개혁 등이 연방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모험적 연설을 함으로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관심을 샀습니다. 외무부 내에서 '인기 스타', 또는 '검은 양'이 된 알렉세이를 고르바초프는 기꺼이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대외교류위원회 서기,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개인 외교안보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등 이른바 '고르비 라인'을 타는 듯 했죠. 그러나 개혁의 향방을 두고 둘의 사이는 극명하게 벌어졌고, 1990년 외무부 서유럽국장직을 끝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휴직계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대학 시절 친구였던 람스도르프가 접근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둘은 의기투합해 조국을 바꿀 마지막 찬스를 잡아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2.
- 이름 :아미나트 잠불라토브나 나가이
(Аминат Джамбулатовна Нагай)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55년 11월 7일
- 클래스: 산업, 자원, 에너지위원회 정보통신부 장관
- 민족 :체첸계 고려인(체첸 3/4, 고려 1/4)
- 모국어 :소련파 북한말(문화어+중앙아시아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러시아어, 북한말, 바이나흐어(체첸-잉구시어), + 제한적으로 망명지 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2)/경영(5)/호신(1)/조사(4)/위조(5)/선전(1)/공작(0)/화술(4)/장악(3)/압박(0)
- 트레잇:#창조적 파괴: 다방면의 경험은 그녀에게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한 적응력, 선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민간조직의 혁신과 투자에 +2, 관료조직의 평시 관리에 -1.
#현란한 언론플레이: 그녀는 언론을 다루는 데에 상당한 재능을 보입니다. 여론선동 및 전환에 +1 모디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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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할아버지는 고려인, 친할머니와 어머니는 체첸인이라는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아미나트는 북한 평양 출신의 여성으로, 그의 아버지 잠불라토프 나가이(나백선)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정권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이주한 소련파 고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대대적으로 소련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자 나백선과 그의 딸인 아미나트는 소련 모스크바로 다시금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나트의 부모는 북한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압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고, 아미나트는 체첸인 할머니와 함께 자라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미나트의 할아버지인 나창만이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때 누명을 쓰고 사망하였으며, 그 후로 나씨 일가는 소련체제에 대한 증오심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모스크바 국립교대에 진학한 아미나트는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탈리아 마그나트, 그리고 알렉산데르 타라소프와 만난 아미나트는 체 게바라와 레프 트로츠키 등의 사상을 공부하며 이윽고 신좌파 비밀결사인 '신 소련공산당(NCPSU)'의 당원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NCPSU의 정체가 발각되고 타라소프가 정신병원에 강제수감되는 동안 아미나트는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아미나트의 11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실현하고 있었고, 아미나트는 유고 시스템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유고의 최고지도자 티토가 사망하며 민족주의자들이 유고 전역에서 득세하였고, 아미나트는 이번에도 망명하여 굴라쉬 공산주의를 실현하던 헝가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노쇠한 야노슈 카다리의 헝가리 또한 쇠퇴기에 있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모델이 완전한 실패를 했다고 판단한 아미나트는 마침내 서구로 향했습니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에서 '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즉 반공 사회민주주의와 코포라티즘 등에 대해 공부하며 망명가 생활을 이어가던 아미나트는 1982년 람스도르프를 만나 친분을 다졌고, 일명 '람스도르프 서클' 내 좌파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 고르바쵸프의 초청으로 람스도르프와 동지들이 소련으로 복귀한 뒤에, 아미나트는 몇 안되는 '복지국가형 자유주의'를 공부한 사람으로써 리즈코프 내각의 각종 경제정책 실무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체첸인-고려인의 이중 정체성을 가졌던 아미나트의 입장에서 체첸인 동지라고 생각했던 소련공군 전략폭격대 사령관 '조하르 두다예프' 소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융단폭격을 했다는 사실이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에 의해 폭로되자, 큰 충격을 받은 아미나트는 사하로프의 국회연설 당시 원내에서 그를 옹호하며 악명과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제업무에서 좌천되어 1990년 12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방문을 담당하는 의전일을 맡았던 아미나트는 1991년 8월인 지금 무너지는 연방을 어떻게든 평등한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개혁하던 재건국하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습니다.
3.
- 이름 :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사사노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Сасанов)
- 플레이어 : dear0904
- 생년월일 : 1955년 8월 20일.
- 클래스: 내각 총무처장관
- 민족 : 우크라이나+체코인 혼혈
- 모국어 : 우크라이나어
- 구사가능언어 : 러시아어, 체코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능력:
지휘(0)/통솔(2)/행정(5)/경영(1)/호신(0)/조사(5)/위조(0)/선전(2)/공작(2)/화술(5)/장악(3)/압박(0)
- 트레잇: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념과 이상의 차이는 일시적 협력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국내 적대/알력집단의 포섭 및 설득에 +1.
#명품 서포터: 탑, 원딜, 정글러가 빛나려면 누군가는 와드를 박아야 합니다. 각 메인이벤트 당 한번, 타인의 행동에 +2의 버프를 추가 부여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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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사사노프는 1955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당원인 아버지, 그리고 조약 체결 행사때 방문한 체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외가인 체코와 우크라이나 사이를 오가면서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13번째 생일날 우크라이나에 있던 사사노프와 가족은 비보를 전해 들었고, 그때부터 사사노프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을 조장하고, 체코에 피바람을 몰고온 소련을 언젠가는 내 손으로 엎어버리겠다고.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기에 자신의 속내를 깊게 숨기며 가슴속의 칼을 다듬었습니다.
1974년에 그는 키이우 종합 대학에서 법학과-외교 관계 연구소에 진학하여, 군 복무를 거쳐 훌륭한 성적으로 석사학위와 함께 졸업 했습니다. 사사노프는 국제법과 지역학을 배우면서 본인의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굳혔고, 대학 총장의 추천사를 받아 소련 외무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외무성에서 일하는건 상당한 고통이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에 일조한 그로미코. 그리고 소련의 높으신분들. 그리고 그게 어느정도 눈에 띄는 바람에, 사사노프는 1984년 외무성에서 한직인 종교 문제 위원회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더러운 사람 밑에서 계속 있기보다는 낫다 생각하며, 그 좌천을 받아들여 2년동안 버텼습니다.
그리고 1986년,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몇몇 부서들을 개혁 할때, 외무부로 다시 불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람스도르프를 만났고, 같이 술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와의 대화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대로는 안된다."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건 미친일이었다." "부당한 탄압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같은 말과... 계산까지. 이후 람스도르프와 자주 만나면서, 이 호인의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화술과 인맥으로 형님의 아르메니아 행을 지원했고, 사사노프는 공연히 람스도르프 라인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람스도르프가 서기장의 눈 밖에 났을때, 그의 라인인 사사노프 또한 문학 출판국 본부로 밀려났지만, 그는 계속 버텨낼 것입니다.
사사노프는, 소련은 인민을 탄압하는 국가로써, 소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람스도르프가 소련에 칼을 들이댄다면, 그를 절대적으로 도울것입니다. 그것이, 소련을 붕괴 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더 기뻐하며 도울 것 입니다...
- 사회 안정성 : 4(불안한 조짐)
: 낮을 수록 극단주의가 횡행하고 급진적 수단이 선호됨.
- 공화국 단결도: 6(양호함)
: 낮으면 분리독립 시도가 빈발함.
- 정권 지지도 : 7(높음)
: 낮으면 인민들이 들고 일어남.
- 국가평판 : 5(보통)
: 낮을 수록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국가로 인식됨.
- 주요 대외관계 : 미국(6) / 일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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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0904 소련으로 올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죠.
현실 소련-러시아보다 나아보이는데 여러가지로
@931117 이미지... 의 문제랄까요. 소련 = 종교 탄압. 이런 이미지가 막연하게 있는데, 이슬람교 난민이면 굳이 종교 탄압 받는곳을 고를까? 라는 생각이 들죠.
@dear0904 비 무슬림이 올수는 있겠지만 규모가 적긴 하겠죠
@E.E.샤츠슈나이더 빈 라덴의 탈출.. 중요 정보기관의 무력화.. 체첸지역의 불안정.. 중국산 무기..
슬슬 국제 테러가 시작될 때가 되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