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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42
요한계시록 11:7-10
증인의 죽음
교회에서 흔히 “예수 믿는 것이 복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도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성도가 ‘복’을 말할 때 우리 기준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누린다고 해서 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을 복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해석에 의한 복이 아니라 정말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말씀하는 복 말이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가정이 행복하고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고 건강하게 물질적으로 부를 누리며 사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이 시편을 자세하게 다 설명할 수는 없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형제와 연합하여”라는 표현은 다윗 언약 안에서 이 땅에 언약의 실체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라고 한 것이다. 한마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성령에 의해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 되어 사는 것 그것이 복인데 곧 영생이라는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을 복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은 종말의 때에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말씀한다. 앞의 강론에서 우리는 증인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복음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증인, 즉 자신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자기 복음을 드러내신다. 그 두 증인의 권세란 말씀으로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다. 세상이 증인을 향해 핍박을 가하는 그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 주신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8절).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 의해 증인이 죽임을 당한다. 복음을 드러내는 증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지 않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증인은 죽을 자리까지 간다. 아니 주께서 죽임을 당하도록 이끄신다.
그래서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라고 말씀하였다. “마칠 때”의 ‘텔레오’는 ‘완성하다, 성취하다, 수행하다’라는 뜻이다.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된 뜻이 성취되는 시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 드러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증인들의 증언이 완성되어야 하고 그 후에 죽임을 당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복음이 하나님 편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복음 증거는 결코 어중간하게 중도에서 포기되는 법이 없다. 미완성 작품으로 증인들의 사역이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복음은 세상 끝까지, 주께서 원하신 곳까지 증거되게 되어 있다. 우리들의 일이 아닌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방해와 상관없이 십자가는 온전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복음을 복음답게 드러내는 상태를 세상의 끝이고 땅끝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올라오는 짐승”이란 말은 현재형으로, “전쟁을 일으켜”, “죽일 터인즉”은 미래형으로 표현하였다. 즉 짐승의 활동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일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종말이란 표현은 이런 의미에서 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늘의 비밀이 다 드러났고 세상은 짐승의 본색을 다 드러내는 상태이다.
짐승이란 다니엘서를 배경으로 표현된 것이다. 다니엘은 네 짐승이 세상에 일어나는 꿈을 꾼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꿈을 통해서 계시하신 장차 되어질 일은, 세상에 네 왕이 일어나는데 그중에 힘센 한 왕이 일어나서 성도들을 핍박하고 파괴하고 짓밟을 것이라고 하였다(단 7:1-12). 본문에서 짐승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것으로 용, 곧 옛 뱀인 사탄과 결탁된 존재임이 드러난다(12:9, 20:2).
“큰 성”은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16;19, 17:18, 18:10,16,18,19,21). 그런데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는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라고 한 것을 보면 현실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큰 성”이라고 표현하여 예루살렘이 바벨론과 같은 죽음의 장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이나 소돔과 같은 심판의 대상임을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나타내신 말씀이다.
10 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10-11)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다는 것은 장례를 지낼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고대 사회에서 시체를 장사지내지 못한 것은 신의 저주로 인한 수치로 여겼다(참고 창 40:19, 삼상 17:43-47, 사 14:19-20, 렘 8:1-2 등). 그래서 시편 기록자도 이렇게 노래하였다.
1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 79:1-3)
이런 점에서 세상은 증인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굴복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곳을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라고 말씀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였기에 하나님을 십자가에 죽였는가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다 드러난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곳이라고 표현함으로 증인들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증인이란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그대로 가는 자들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신앙 생활한다고 착각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세상에서 밀쳐냄을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같은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언제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그 현장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무슨 일을 얼마나 하고 있느냐? 주일 성수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가? 교회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는가? 몇 사람을 전도하여 교회에 데리고 나왔는가?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씩 하는가? 성경을 하루에 몇 장씩 꼬박꼬박 읽으며 Q.T를 하고 있는가? 성경 몇 권을 필사하였는가? 아웃리치를 몇 나라를 다니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선교를 하였는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무슨 봉사를 하느냐 하늘나라에 마일리지를 얼마나 많이 쌓아 놓고 있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오로지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증인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자신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말씀드린 이런 모든 일을 통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 확인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내가 끌려 들어가 죽었다는 것이 인정되고 받아들여지는지 확인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곧 자기 부인으로 드러난다. 나는 부정당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는 것만으로 기뻐하며 감사가 있는가가 확인되어져야 한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9-10절). “사흘 반”이란 무슨 뜻인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라면 ‘삼 일’ 동안 죽음에 있어야 한다고 해야 하지 않나? 엘리야 선지자 때 비가 내리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3년 6개월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 7:25)라고 다니엘 선지자가 표현한 것에 대한 유비로 예수님께서 죽음 가운데 있었던 삼 일을 반영한 숫자이다. 물리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죽음보다 길의 시체로 더 방치한다는 말인데 ‘7’의 반을 표현하여 증인의 죽음은 짐승에 의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반으로 꺾인 것처럼 나타내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조롱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라고 하였다. 땅적 존재들은 증인들의 죽음으로 축제를 벌이면서 복음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라고 전시한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것과 같은 상태로 말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 이적을 보이면 믿겠다고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이 조롱하였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서도 조롱을 당하였다. 그러니 증인들이 세상에 의해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증인들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였고 또한 십자가를 따르는 증인들의 증언이 실패라고 단정 짓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증인으로 선지자로서 심판을 선포하니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금 제단의 향이 성도의 기도들이라 하였고(5:8, 8:3-4) 그 기도에 근거하여 심판하신다고 하니 세상에서 우리가 부당하게 대우받았던 것,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던 것, 무시당했던 것, 가난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울분이 있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통쾌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드디어 우리의 복수를 이루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우리의 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중심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원수는 우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를 갚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을 통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보고 심판하신다. 그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 땅에 “두 증인”, “두 선지자”로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미워서 죽이는 그 죽음에 내 죽음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늘 확인하는 자이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여 나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기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악이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저항하는 죄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 아니 죄악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심이 심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의 생애 말년에 쓴 서신에서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하였고 이미 그 이전에 이렇게 선언했던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202307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