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지고 나면 꽃이피는 꽃무릇과
도심에있는 산사 길상사에 다녀왔습니다.
길상사하면 떠오르는게 있습니다.
대원각이라는 유명한 요정과 대원각을 시주한 길상화 보살과
법정스님
삼각산 길상사
서울에서는 꽤 알려진 성북동 길상사 사찰이지만 흔히 봐 왓던 사찰이란 느낌이 별로 안드는
한적한 도심 속 휴식처 같은 느낌이 드는 절입니다.
길상사를 알려주는 일주문이 없으면 시골 한적한 사적지나 고택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길상사 일주문을 지나면 길상사 안내판이 나오네요
굳이 이정표를 볼 필요는 없으며 그저 발길 닫는데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걸으며
다리가 아프면 쉬었다 가고 또 걷고 성북동 부자동네에 이렇게 좋은
휴식처가 있게해준 김영한이라는 사람에게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길상사에는 금강문도 없고 사천왕을 모시는 천왕문도 길상사에는 없고요
사찰에 있는 큰 불상도 안보입니다.
길상사에는 상사화라고 하는 꽃무릇이 많이 피어 있네요
주로 절 주변의 약간 그늘진 숲속에서 많이 피는데,
특히 고창 선운사와 영광의 불갑사, 함평 용천사 주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꽃이 말라 죽은 뒤에 잎이 나오기 때문에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한다
하여 ‘상사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엄밀하게는 상사화는 꽃무릇과는 다른 꽃이구요.
그래서인가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선운사 주변에는 이꽃과 관련된
애절한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요 꽃은 활짝 피어있는데 잎이 없답니다.
좋은 가을에 꽃무릇을 보고 있으니조금은 마음이 찡하네요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는 어느 사찰에서나볼 수 있는 대웅전은 없으며
극락전이 대웅전역할을 하고 있으며 법회나 기도하는 곳
시인 백석과 대원각을 시주한 길상화
보살에 대한 글입니다.
백석시인 내사랑 백석에서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26여섯의 당대최고 미남시인 백석과 김영한의 나이 22
백석은 퇴근하면 의레 진향(김영한)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자새곤 하였답니다.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김영한이었고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면전 대표인솔자로 학생들을 여관에 투숙시키고
김영한의 곁에 있기위하여 함흥여고보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기 시작하여 혼례만 치르니 않았을 뿐 두사람은 부부와 똑같이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백석은 자야와 3년여 동안 동거를 하면서 사랑을 주제로
여러편의 서정시를 쓰기도 하였다고 하네요.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의 아픈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였네요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강제로 고향으로 데리고가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도망쳐나와 자야품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법정스님의 진영각
백석은 기생과의 동거를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과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야에게 만주로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하고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 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괴로워 했다고 합니다.
길상사 뒤뜰에 있는 대추나무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새관업무를 하기도 하였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조만식선생의 사랑을 받아 눌너 앉았고 자야(김영한)는 성북동에 대원각의
여주인이 되었으며 오늘날 길상사 시작이었며
백석과 김영한의 이루어지지 못한 아름답고 가슴아픈 사랑이 깃든 길상사입니다.
길상사 뒤편에 있는 성북동 저택
생전의 자야(김영한)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고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꽃무릇
꽃이 지고나면 잎이나와 사라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꽃말이 있습니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게 가장 큰 생애의 기쁨이었다고 하였으며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하였다고 합니다.
백석과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김영한(자야)의
애뜻한 사연이 깃든 길상사
길상사 관세음 보살상
길상사에는 근 불상들은 없으며 성모마리아상같은 석상이 있으며
종교간 화해를 위하여 천주교신자가 조각하여 봉안한 석상이랍니다.
길상사는 도심속의 공원같은 가족과 친구들 아니면
연인과 함께 산책하고 힐링할 수 있는 그런 종교를 떠나 내 마음속의
안식처 같은 곳입니다.
길상사 7층 보탑
길상 7층보탑은 김영한(후에 길상화 보살)과 법정스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는 법정스님이 지은 사찰로 유명하며
길상사의 시작은 성북동 배밭골에 김영한이라는 사람이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면서 시작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3대요정 삼청각, 청운각,그리고 대원각이 3공화국시절부터
한시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요정이었습니다.
김영한은 1916년에 태어나 16세의 나이로 하규일 문하에서 진향이란
이름으로 기생으로 입문하였습니다.
당대 시인 백석의 여인이면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미인이었고 가무는 물론
시와 서화가 뛰어나 장안 최고의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란 한식당(요정)을 운영하던 김영한은
198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7천여평의 대원각터와 40여동의 건물을
절로 만들어주기를 법정스님에 간곡히 청하였답니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창건되는
아름다운 법석에서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불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나 죽으면 화장해거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 뒤 뜰에 뿌려주시오라는 우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 육신의 옷을 벗었다고 합니다.
김영한(자야) 시주 길상화 보살의 공덕비
길상화 보살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첫눈이 온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현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으며 무주상보시의 귀한 뚯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2001년 공덕비를 새웠다고 하네요.
스님들의 처소
김영한은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백석시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신분상의 차이로 백석의 아버지가
다른여자와 강제로 결혼을 시켜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길상사에는 꽃무릇이 피어있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