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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를 대표하는 산... 계룡산 거제도는 해파리 모양으로 남북으로 홍포와 구영이 있으며 동서로 양지암과 견내량이 있다. 그 중심지역에 고현(신현)이 있다. 행정문화교통중심지인 고현은 계룡산 선자산 독봉산이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으로는 해안을 끼고 있다. 계룡산은 거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으로 온갖 식물들이 서식하며 시민들에게 숲과 물을 제공하고 있다.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웅자를 드러내고 있는 계룡산은 머리는 닭과 같이 생겼고 몸둥아리는 용같이 생겼다. 북극성을 향해 비상하는 형국을 한 이 산은 닭의 울음소리가 하늘가지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한 기상이다. 산 정상에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기도처로 사용했던 의상대가 있고 그 아래에는 약수터가 있다. 정상에는 기이 절묘한 바위가 마치 닭벼슬 같이 생겼고, 꼬리 부분은 용이 서리서리 감겨 구천계곡에 구룡호를 만들어 놓았다.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하여 온갖 조화를 부려 놓은 것 같은 계룡산 삼거리 구천계곡은 신비롭다. 구천계곡의 물이 삼거리 고개를 넘어야 발복(發福)한다는 말이 맞아 들고 있다. 구천댐이 생기고 그 물이 삼거리 고개를 넘어 대우, 삼성조선소와 시민의 식수를 위해 이 고개를 넘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정감록 비결에 보면,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로 알려진 영지(靈地)로 鷄龍山下救百萬이라 하여 큰 난리가 났을 때 그 산 아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종교인 안식처로 했으나 6.25전란 후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거제도 계룡산은 6.25 전쟁이 나자 수많은 피난민과 포로들을 수용했음으로 충남의 계룡산이 아니라 거제도 계룡산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거제도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섬이라 하여 클 거(巨) 구제할 제(濟)를 사용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이승철 주장) 그러나 거제는 육지에서 조금 떨어져 바다를 건너면 큰섬이라는 뜻일 것이다. ~~`계룡산 찬가~~` 거제도는 육지와 떨어진 섬인 곳이라 옛 도읍지는 육지와 가까운 오량, 사등, 거제, 둔덕쪽으로 두었으며 그 다음이 지리적으로 중심지인 고현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육지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야했다. 그래서 성포와 장승포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거제의 교통문화교육 등 모든 기관의 중심지가 고현으로 몰려있다. 고현은 북풍이 몰아치고 토질이 좋지 못하여 농경사회에서는 그렇게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 연초에 논 한마지기를 팔면 고현에 논 두마지기를 살 수 있었다. 6.25전쟁으로 포로수용소가 들어오고 피난민이 진을 치던 시대에는 거제군도 장승포에 위치하여 좀 소외받던 곳이었다. 그러나 거제대교와 삼성조선이 들어서고 다시 군소재지가 고현으로 옮기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지금은 거제인구의 절반 정도가 고현권역에 살고 있다. 거제의 정기는 계룡산에 있다. 계룡산은 거제도 중앙에 위치하며 사방에 높은 산들이 옹위하고 있다. 북으로는 앵산과 대금산, 동으로는 국사봉과 옥녀봉, 남으로는 북병산과 노자산, 서로는 산방산이 머리를 숙여 쪼아리고 있는 신하처럼 국궁(鞠躬)하고 있는 것 같다. 섬 한가운데 연꽃이 자비를 베푼듯하다.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웅자를 드러내고 있는 계룡산은 머리는 닭같이 생겼고 몸둥아리는 용같이 생겼다. 북극성을 향해 비상하는 형국을 한 이 산은 닭의 울음소리가 하늘까지 울려 퍼지고 있는 듯 기상이 장엄하다. 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기도했던 암자가 있다. 의상대사는 서기650년 불교를 공부하려고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고구려군에게 붙들려 간첩으로 오해를 받아 다시 신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의상은 661년에 배를 타고 다시 중국으로 갔습니다. 이때 함께 떠났던 원효는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중국으로 가지 않고 신라에 남았다고 합니다. 거제도 신현읍에 해발 566m의 아담한 계룡산은 정상의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산세로 등산객들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푸른 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거제도는 국내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갖고 있으며 면적으로는 제주도 다음으로 크다. 가라산을 비롯해 산방산.계룡산.선자산.옥녀봉.노자산등 5백m대의 산이 7개나 있다. 높이는 얼마 안되지만 산행하기가 만만치 않다. 계룡산~가라산까지의 종주산행은 총 거리가 약 25㎞. 하루일정으로 빠듯하다. 「거제도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어 동은 고현이요. 서는 거제구읍이다. 높이 565m로 두 번째로 높고 웅장한 수탉처럼 닭 벼슬 모양의 바위가 솟아있는 세 바위를 가리켜 닭도 같고 용도 같다하여 계룡산이라 부르고 있다. 남북으로 길게 용의 등과 같이 뻗은 계룡산 밑에는 용산마을이 있고 중허리에 계룡사가 자리하였으며 그 밑의 시내에는 고현의 계룡초등학교가 있다. 계룡산의 머리는 북쪽을 향해 승천하는 기상으로 진해만의 괭이바다를 희롱하는 듯하다. 산 밑의 앞 바닷가에는 대섬과 유자섬이 쌍둥이 같이 있다. 여기 이 대섬에 1974년에 죽도 조선소가 기공하여 이제는 용머리 같은 큰 배가 건조되어 세계의 오대양을 향하여 항진하고 있다. 계룡산의 중간인 용산마을에서 용틀임하여 용소(沼)를 만들었고 옛날에는 명주실 한 구리를 풀어 넣으면 그 실 끝이 괭이바다로 나온다는 구전이 있다. 지금도 짙푸른 물빛이 으스스 해서 들어가기가 꺼림칙하다. 산세가 용으로 형성하였으니 그 꼬리는 구천계곡에 닿아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구룡 못이 있고 맑은 물이 굽이굽이 돌아 흘러서 연담의 저수지에 모여져 20여ha의 호수를 형성하였으니 이를 구룡호(九龍湖)라 한다. 계룡산의 봉우리에는 신령을 모시던 영탄이 있어 하늘과 신령님께 제사를 모시고 도민의 안녕과 태평을 빌었다는 곳이 있다. 최고봉의 바위 밑에 거제를 내려 보는 따뜻한 자리에는 서기 640년 신라 화엄종의 개조(開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수도하던 의상대의 절터가 지금도 축대와 우물인 암혈수가 흐르고 있음은 그 높은 봉우리의 경관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신선대가 있고 반석 위에서 장기와 바둑을 즐겼다는 바둑판의 흔적이 있어 옛날에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고 갔다는 예기에 따라 신선대라 부른다. 또한 정상에서 100m 고현 쪽에 절터가 있고 약수터도 있다. 이 절은 옛날에 빈대가 하도 많아서 폐절하였다는 구전이 있으나 그 내력을 잘 알 수는 없다. 이 일대에는 소나무와 비목나무 참나무 등 온통 잡목으로 우거져 있어 녹음과 단풍의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는 그 수림 속의 소로를 따라 고현에서 거제로 가는 길이 있었으나 산길이 험준하고 경사가 가팔라서 통행에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정감록의 계룡산하 구백만 이조시대 (연대미상) 정감이 지은 정감록은 국가운명과 민생존망을 예언한 책이다. 이 책에 보면 오랑케의 침입과 천재지변으로 피신할 장소로 십승지를 지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조선은 한양에서 이씨가 100년, 그 뒤 정씨가 800년 동안 계룡산하에서 정권을 잡고 이어 가야산에서 조씨가 100년 집권하며 이어 범씨와 왕씨가 집권한다고 예언하고 있다. 계룡산은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과 신 도읍에 있는 산을 정감록(鄭鑑錄) 비결에 계룡산 구백만(救百萬)이라 했다는 풍수와 지리학설의 비록이 있다하나 충청도 계룡산은 그 후 아무런 사적이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거제의 계룡산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수다히 유수되어 살고 갔으며 임진왜란의 첫 번째 대승첩지인 옥포해전터에 노일전쟁 때에는 일본군의 승전 본거지였고 6ㆍ25 때에는 백만 명을 구제한 거제 계룡산이다. < 향토사학자 이승철 주장> 고전속의 계룡산 정황(1512~1560년)선생께서 1560년경 계룡산에 올라가 지은 ‘계룡산시(鷄龍山詩)‘는 총26절 104구로 이루어진 장문의 칠언고시(七言古詩) 한시(漢詩)로써 운(韻) 자(字)는 ‘선(先)’이다. 선생은 1548년 거제도 고현동으로 이배되어 약13년 간 귀양 살다가 거제에서 타계하신 분으로, 거제 유배동안 지은 유헌집(游軒集)을 통하여 많은 글을 남겨 거제도 유배문학의 가장 큰 획을 그었고, 거제향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신 분이다. 또한 선생은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의 성리학의 거두로써, 당시 편지로 학문을 주고받으며 거제가 성리학의 한 축을 담당케 한 인물이다. 이 작품 ‘계룡산시‘는 10여 년째 귀양살이 하면서 자주 찾던 계룡산에 올라가, 거제도 지세의 웅장함과 국토의 끝자락에서 보고 느낀 점을 표현했다. 雞龍山在海中碧 계룡산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어 崢嶸勢壓扶桑天 한껏 높은 산의 기세가 부상의 하늘을 압도한다. 鯨噴萬頃屹砥柱 고래가 물을 뿜는 아주 넓은 바다에 지주처럼 솟아나 滄波幾見爲桑田 푸른 물결 몇 번이나 뽕나무 밭이 되어 오고갔나. 烏兒自古置大帥 오아포는 예로부터 대장수(수군절도사)를 두어 다스리고 五浦烽火通危巓 다섯 포구에서 봉화가 가파른 산꼭대기로 통한다. 縣郭嚴排就民衆 고을현 성곽은 경비가 빈틈없어 대다수 백성이 줄지어 따르니 爲土中央公私便 고을땅(거제) 가운데에 관인과 백성이 편안해졌다. 雄峙加羅是南趾 가라산 웅장한 고개 여기가 남녘의 발꿈치인데 遙拖練白走九川 먼 곳을 끌어당겨 자세히 보니 아홉 내(川,구천동)가 달리는구나. 龍種幾匹任自牧 용종포(다대포)의 말을 몇 필이나 스스로 길러짐에 맡기었나. 飢則有草渴有泉 주리면 풀을 먹고 목마르면 샘물 먹겠지. 潮通商賈百濟國 조수를 이용하여 백제국이 통상하고 장사를 했다하고 昇平物貨相貿遷 나라가 태평하여 물품과 재화가 서로 옮겨가며 무역을 했었다네. 惟東案對是對馬 생각해보니, 대마도를 마주보며 땅의 경계에서 동쪽으로 갔을 꺼고 晴日分明一眸邊 맑은 날에 한번 훑어보아도 또렷이 국토의 끝(대마도)이 보인다. 於焉逍遙以卒歲 어느새 한해를 보내면서 슬슬 돌아다녀도 豈念身是爲拘攣 손발이 굳어 못쓰게 된, 이런 몸이 어찌 가엾지 않는가? 何當一凌高頂望 높은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어찌하여 순간 업신여겨 보이는가? 兩腋羽翰飛翩翩 양 겨드랑이 날개가 가볍게 나부껴 훨훨 날아 볼까나. 해설 계룡산 ; 거제중앙에 있는 산으로 주봉이다. 오아포 ; 현 가배로 경상 우수사가 거주한 곳이다. 5포구: 거제에는 9개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5개라고 한 것은 작은 봉수대는 제외 한 것 같다 (가라산, 옥녀봉, 강망산, 화도, 지세포) 고을현: 고현성 용종포 ; 다대포 거제에는 조선초기 7목장, 조선후기는 9목장이 있었다. ( 칠천도, 가좌도, 구천동, 탑포, 구영, 장목, 구조라, 지세포) 해상교통: 백제국이 일본과 무역 대마도 ; 국토의 끝이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루어 대마도는 한국땅으로 표현 마지막 부분: 타향에 와서 병들어 신세 한탄 < 예로부터 거제 계룡산을 찬양한 기록을 살펴보자> 1) 1881년 8월, 이유원(李裕元)의 거제향교 풍화루중수기(岐城鄕校風化樓重修記) 내용 중, 일부분인데 계룡산을 보고 감탄한 글이다. [以鷄山爲主峯 落脉蜿蜒 拓鹿洞而面鷰浦 毓文明之氣 余欽歎而歸] “계룡산은 주봉으로써 꾸불꾸불하게 산줄기를 이루며, 사슴골(거제면 녹반골)이 넓어지니 포구가 즐거운 표정이다. 그런 기운에서 문명이 나온다하네. 나는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돌아왔다.” 2) “거제읍지 1759년 여지도서편”에는 계룡산은 거제부의 주산으로 읍치 관청의 북동쪽 5리, 대금산 내맥이 이어진 산줄기이다[鷄龍山 府主山在府東北五里大金山來脈]. 3)김진규 선생이 1689년 거제면 동상리로 유배 와서 지은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은 선생의 선산이 있는 충청도 지역의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의 이름이 같은 걸 알고 자신의 귀양살이 동안 많은 위안을 삼았다는 내용이다. [裳郡多山 嶂嶠重複環遶 而有巍然最高而大者出於其間 余始至而望之 問土人曰山何名 人曰此爲吾邑鎭 /南北遠 古之名之者 不相聞歟 彼此之名]. 거제에는 산이 많다. 높고 험한 산이 쭈빗하고 겹겹이 둘러싸여 중복되어 있으며, 아주 뛰어나게 높고 우뚝 서 있어, 어떤 때에 큰 인물이 나올 것 같다. 나는 일찍부터 기대하고는 "산 이름 무엇입니까?" 물으니, 거제토착민이 말하길, "이 산이 우리 고을 읍진(주봉)이다". / 남북이 멀다. 옛날에 이름을 지은 자는 서로 알거나 방문하지 아니했을 건데, 충청도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 이름이 같구나. 4) 거제도 설화 그리고 거제에서 오래전부터 전하는 설화가 있다. “계룡산 정기를 받고 조선을 빛낼 분이 두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용이 꽈리를 틀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계룡산의 웅장한 기운을 받아 나라를 일으킬 것이다.”라고 전한다. 또한 지역 어르신들에 의해 전해오는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따르면, 남해바다의 음기(陰氣)가 모두 모여 수렴하는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상 터와 녹반골 출신 여성이, 왕후(영부인)에 버금가는 여장부가 태어날 것이라고도 전한다. 5) 계룡산(鷄龍山). 1870년대 作. 조익찬(曺益贊) 珍重鷄龍數疊峯 진중한 계룡산, 겹겹의 봉우리, 上遊日暮月惟東 올라가 노닐다 날 저무니 오직 동쪽 달만 떴구나. 座岩望景千年海 앉은 바위에서 바라본 경치는 천년의 바다일세. 橫路汗醒萬里風 험한 길에 젖은 땀, 만리 바람 불어 사라진다. 갈도(葛島, 해금강) 洛洛寒松無盡處 언제나 푸른 소나무 다함이 없는 곳, 層層石壁有碁蹤 층층 석벽에 바둑판의 흔적 있다네. 徐市過此銘於蹟 '서불과차' 새겨 자취 남겼으니 仙藥應生是邑中 선약(仙藥)은 응당 이 고을에 있으리라. 조선말기 경상우도 육군 대장이었던 조익찬(曺益贊) 장군이 거제도 계룡산에 올라가 해지자 보름달이 뜬, 장면을 보고 쓴 시가 첫 수(首)이다. 둘째 수(首)에 따르면, 해금강에 '서불과차' 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제도에 서불이 새긴 자취가 있으니 이 고을에는 불사초(신선의 영약)이 있었던게 아닌가? 하며, 마지막 화두를 던지고 있다. ~~~.자료 협조... 향토사학자 고영화~~ 김대기 길 1663년에 거제현아를 고현에서 거제로 옮긴 후 신구읍간에 연락이 불편하여 25년 후인 1688년 숙종 14년에 현령 김대기가 부임하여 계룡산 중허리를 가로질러 한길을 개설하였으니 이 길이 고현의 서문에서 10마지기골을 지나 거제의 사슴 골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개통하다 주민을 과로 역사시킨다는 안렴사(按廉使)에 의하여 현령 김대기가 파직을 당하였으나 뒤에 준공 개통하고 서문고개에다 `김현령치비'를 세웠다. 지금은 운동장에 김현령치비가 있고 거제공고를 따라 임도 전망대까지 김대기길이 형성되어 있다. 의상대사가 수도하던 암자 계룡산의 봉우리에는 신령을 모시던 영탄이 있어 하늘과 신령님께 제사를 모시고 도민의 안녕과 태평을 빌었다는 곳이 있다. 최고봉의 바위 밑에 거제를 내려 보는 따뜻한 자리에는 서기 640년 신라 화엄종의 개조(開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수도하던 의상대의 절터가 지금도 축대와 우물인 암혈수가 흐르고 있음은 그 높은 봉우리의 경관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신선대가 있고 반석 위에서 장기와 바둑을 즐겼다는 바둑판의 흔적이 있어 옛날에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고 갔다는 예기에 따라 신선대라 부른다. 또한 정상에서 100m 고현 쪽에 절터가 있고 약수터도 있다. 이 절은 옛날에 빈대가 하도 많아서 폐절하였다는 구전이 있으나 그 내력을 잘 알 수는 없다. (장기판 흔적은 사라짐) 6.25전쟁과 계룡산 6.25 때에는 처음 인민군이 남침할 때 경남의 5개 시군에서 20만 명의 긴급피란민을 구제하였고 1ㆍ4후퇴 때에는 서울과 이북 5도민 30만 명을 수용 구호하였고 육군훈련소를 두어 후퇴 시 교육기지였고 인민군과 중공군 17만 3천명을 수용한 바 있으니 거제의 계룡산은 크게 구제하는 `거제'의 진짜 구백만의 계룡산이다. 그 때 계룡산은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미군 통신대를 설치하였으며 지금도 그 잔해가 널브러져 있다. 고자산치의 전설 거제면 동상리에서 계룡산을 올라와서 신현읍 문동리로 가는 이 고개는 경사도가 급하고 산림이 울창하며 10㎞나 되는 준험한 산길로 고자산치라고 한다. 이 고자산의 고갯길에 연유한 전설은 우리 거제에 널리 알려진 인생 윤리 도덕의 대표적이 애한이라 할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함락되고 17년 후인 1663년 현종 4년 거제현아를 고현에서 이 고자산을 넘어 거제로 옮겨 온 후에 고현과 거제 사이는 이 고개가 가파르지만 하나밖에 없는 대로였다. 그로부터 25년 후인 1688년 숙종 14년에 현령 김대기가 계룡산 북쪽 중허리를 둘러가는 김현령재의 고갯길을 개설할 때까지 96년간 신읍 거제와 구읍 고현 사이의 중앙 도로였기 때문에 사람의 내왕이 많았던 고자산재였다. 이 때에 어느 날 거제에서 의좋게 잘 살고 있던 기성반씨(岐城潘氏)의 반명돌(가명)이란 오빠와 여동생 순이(가명)가 함께 아주의 아주신씨(鵝洲申氏) 집안의 외갓집에 가는 길이었다. 때는 초여름의 장마철로 고자산 고개 중턱을 오를 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비를 피할 곳이 없으므로 비를 맞으면서 오빠는 앞에 가고 여동생은 뒤를 따라 올라갔다. 계룡산의 고개 정상에 오르자 숨가픔을 쉬어가기 위해 앞서가는 오빠가 기다렸다. 이 때에 여동생이 올라오니 비 맞은 머리카락을 닦아주는 오빠의 눈에는 너무나도 여동생이 예쁘게 보였다. 얼굴은 보름달같이 밝으며, 두 눈은 부용꽃이 활짝 핀 것 같으며, 푸른 소나무 같은 팔자의 눈썹에 샛별같이 반짝이는 눈알, 해당화 핀 것처럼 분홍색의 양 뺨에 수양버들 가지가 늘어진 모양의 길 다란 머리카락에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초여름 고개를 넘어가는 산길이라 옷을 많이 입을 수 없고 백옥같은 모시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촉촉이 비를 맞았으니 온 몸에 옷자락이 밀착되고 처녀의 갸름한 몸매에 유방이 분명하고 허리의 곡선미는 말로만 듣던 여인의 몸매가 과연 이런 것이냐 하고 마침 나체같은 또한 선녀같은 생각에만 도취되어 여동생인지조차 잊을 정도였다. 어느 새 동물성의 발동이 정신없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남성의 신기가 명돌이의 바지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으니 하늘이 캄캄해졌다. 오빠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교훈을 받은 바 있어 때와 곳도 모르고 정신없이 동물성을 나타내는 자기의 눈과 신기는 인간된 도리에도 있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을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불륜의 꿈같은 죄라도 마음의 용서가 되지 않아 여동생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타이르고는 혼자 남아서 이 고약한 못된 생각을 한 것은 자기의 눈이지만 행동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불륜한 고환(睾丸)인 불알의 잘못이다 하면서 주머니에 있던 작은 칼로써 고환을 찔렀다. 명돌이의 고환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정신없이 쓰러졌으니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동생 순이는 얼마쯤 내려가다 돌아보니 오빠가 오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감돌기 시작해서 도저히 혼자서 갈 수 없기에 다시 되돌아와 고개에 올랐다. 오빠를 부르며 숲 속을 헤메다 보니 뜻밖에도 오빠의 몸은 피투성이로 변했고 숨도 쉬지 않는 시체로 변하여 있지 않은가! 순이가 사연을 살펴보니 비맞은 여동생의 몸매에 귀신도 도취될 정도로 되어 인간다운 윤리에 어긋난 짓을 느껴 그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계룡산 고개를 고자(睾刺) 산치(山峙)라 부르게 되었으니 칼로서 고환(불알)을 찔렀다는 전설이다. 여동생 순이는 하는 수없이 오빠를 바위틈에 흙을 덮어 매장하고 외갓집이 있는 장승포시 아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로질러 하늘만 보이는 골짜기를 무섭게 여기지도 않고 걸어가면서 한없이 한없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이러한 전설로 고자산치와 울면서 걸어갔다는 길인 양정에서 아주로 가는 옥녀봉 밑의 고개를 울음이재라 불려 오늘날 300년 동안 고개의 이름이 되었다. “ 왜죽었노 왜 죽었노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람목숨 제일 중한데 왜 죽었노 왜 죽었노 너만 알고 나만 알면 귀한 목숨 살릴 긴데 왜죽었노 왜 죽었노 말이나 한번 해보지 말도 한번 하지 않고 왜 죽었노 왜죽었노 나만 혼자 살아서 무슨 영관 누리겠노 동생동생 내동생아“ 그 후 총각의 오빠와 처녀인 순이가 남긴 사연으로 지방의 신랑신부가 우기일 때는 아무도 이 두 고개를 넘지 않고 멀리 둘러서 다녔다. 이는 동방의 예의와 인륜의 도덕 원리에 대한 갸륵한 전설이라 할 수 있다. (고자산치에는 천여평의 잡초들이 거제만을 바라보고 있어 가을이면 석양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계룡산의 바위들과 지명 약물바위 계룡산 큰 골의 챙이들 동쪽에 있는 바위로 위쪽이 파여져 있다. 그곳에 고인물을 먹으면 속병이 낫는다고 해서 약물바위라고 한다. 쫑긋바위 계룡산 서북쪽 갈리발골 중턱 아래 있는 쫑긋한 큰바위가 있다. 동네 아이들이 나무하려갈 때, 올 때 쉬어가는 곳이다. 매통바위 장평 서남쪽 계룡산에 있는 매통처럼 생긴 바위를 말한다. 성황당 김현령재에는 3개의 성황당이 있었다. 서문과 장평 경계(당걸), 서나무골, 장평과 거제 경계지점에 각각1개의 성황당이 있었다. 탕근바위 계룡산 동쪽 상동리 산375번지의 위치한 바위로 둘레 약20m 높이 약 10m의 큰 바위이다. 송곳바위 낙바위 동북쪽에 뾰족한 바위 병풍바위 낙바위 북쪽에 병풍처럼 생긴 바위 뿔바위 큰엄장옆 통신대옆 계룡산 상봉좌측 약 50m 떨어진 능선 위에 있다. 높이 약5m 두 개의 바위가 같이 잇다. 위는 3m 정도 벌어져 마치 짐승의 뿔과 같은 모양이다. 큰엄장과 암바위 계룡산 정상에 두 개 봉우리가 있다. 북쪽에 있는 바위산을 의상대바위라 하고, 동족에 있는 바위산 북쪽의 음달 진 곳에 있는 바위를 큰 엄장이라 한다. 그 바위와 붙어 있는 암바위가 있다. 40여평쯤 되는 이 바위는 여자의 성기를 닮은 바위가 여러개 있다. 그래서 암바위라 한다. ~~~이 바위에 대한 전설~~~ 이 바위가 바라보는 것이 연초면 한내리이다. 이 기운이 뻗어 있는 한내리 마을 처녀가 1년에 한명씩 바람이 나서 가출하지 않으면 정신 이상이 된다. 그래서 한내리 주민들은 이 사실을 알고부터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장정들을 골라서 괭이 망치 등을 가지고 작우모양으로 생긴 바위를 부셔버렸다.그 후로는 바람난 처년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 때 다 없애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여러개 남아 있긴 해도 늙고 힘이 없어져서 지금은 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 노처녀가 암바위 아래가서 기도를 드리면 좋은 배필을 만나는 영험이 있다고 하고, 또 부부간에 애정이 없는 사람도 이곳에 가서 기도를 드리면 화합해 진다고 하는데 그 암바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밑바위/ 밋바위 계룡산 정상인 큰 엄장으로부터 용산 쪽으로 약 100m 지점에 밑바위가 있다. 둘레약 10m, 높이 4m, 넓이5평 정도이다. 옛날 장수들이 말을 타고 이 바위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었다가 다시 독봉산으로 날아 건넜다가, 왔다갔다 했다는 바위이다. 지금도 그 흔적으로 길이 약 60cm정도의 장수 발자국과 80cm되는 말발자국 터가 있다. 그 옆에는 90cm정도 되는 담뱃대를 놓았던 자국이 남아 있다. 서어나무골 김현령재 장평 마을 위쪽 골짜기에 서어나무과 있었던 곳을 말하며 이곳은 6.25당시 미군의 후방기지가 주둔하면서 전차포 사격장의 목표물로 활용되어 그로 인하여 서어나무 전체가 멸종되었다. 식물의 천이는 침수식물군락-부엽식물군락-소택식물군락-습생초원식물군락-양수림-음수림(극상림) 극상림이란 식물군락의 최종단계로 안정된 산림을 말하며 몇 백년 간다. 물 맞는 골 장평쪽 심적사 위쪽에 있는 고량물을 말하며 칠월칠석과 백중날 거제의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맞고 간다고 해서 물맞는 골이라 한다. 이 물은 문둥병과 위장병 등에 영험한 특효가 있다고 하여 지금도 찾아오는 이가 있다. 사기도요지 서어나무골 하단부인 신현읍 장평리 산 83-12번지 조선시대 도요지로 노출된 부분이 직경 1m, 깊이 0.5m, 길이 3m 정도 된다.이 도요지는 조선시대 그릇을 굽던 곳으로 현재도 파편 조각이 있다. , 열마지기골(골프장) 화원(化垣) 뒷산을 올라가면 김실령재의 중간지점에 분지가 있고 외딴집에서 논 2,000평을 개간하여 영농하였으므로 열마지골이라 하였는데 최근에 노루, 사슴, 멧돼지를 기르는 농원이었다가 올해 골프장을 개장하였다. 계룡산 둘레길 계룡산의 둘레길(임도길)은 동북으로는 고현과 삼성조선을 보며 걸으며 남서쪽으로는 거제면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고 중간에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출발지점은 용산, 백병원, 거제공고, 계룡사,심적사, 팔골재, 거제여상쪽으로 다양하다. 여기서는 용산 출발점을 소개 한다. 출발 ➜ 용산 임도 출발점 (주차)➜오른쪽 임도➜거제백병원 접선지역➜계룡사 등산로 접선지역➜약수터➜공설운동장 등산로길 접선지역➜김실령재 숲길 만나는곳 ➜심적사 등산로길 만나는곳➜산림욕장➜골프장➜옥산뒷산➜동림저수지➜수정저수지➜옥산금성➜고자산치➜용산 임도 출발점 (총 15km 3시간)
계룡산의 사계...여름
계룡산의 사계...겨울
숲속의 작은 폭포
계룡산의 사계...봄
계룡산의 사계... 가을
고자산치의 가을 풍경
계룡산의 사계...야생화 ( 며느리배꼽)
옛날 설사약으로 쓰였던 이질풀
누린내가 난다고 하영 이름 붙여진 누린내풀( 의상대에 있음)
가을 수 놓는 가막살나무
가을을 대표하는 꽃...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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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계룡산 명산입니다,
저는 어릴때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높은 산이 계룡산인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계룡산이 제일높고 아름다운산이라고 하는 집염에는 별로 변함이 없습니다,
계룡산은 저의 기대를 저바리지 않고 웅장히 벼터주는 아름다운산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