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위치: 거제시 계룡로61 (고현동)..거제시청 바로옆 (네비: 거제시청 &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홈페이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http://www.pow.or.kr/_main/main.html 전화 : 055-639-0625 <거제포로수용소 이용안내> 1) 입장료/ 주차료 입 장 료 | 주 차 료 | 구분 | 어른 | 청소년 | 어린이 | 할인내용 | | 2시간 | 2시간초과 10분마다 | 종일(1박) | 개인 | 4,500 | 3,000 | 1,500 | 거제시민, 경로,단체30명 이상 | 이륜차 | 1,000 | 500 | 6,000 | 단체 | 3,000 | 2,000 | 1,000 | 승용차 | 2,000 | 500 | 15,000 | 할인 | 1,000 | 1,000 | 500 | 버스 | 5,000 | 500, | 30,000 |
2) 체험시설 이용료 개별요금 | 1950체험관 | 사격 | 2,000 | 단체활인요금 | 1950체험관 | 거울미로 | 2,000 | 거울미로 | 3,000 | 짚라인 | 7,000 | 짚라인 | 9,000 | 평화파크체험관 | 4DFX영화관 | 3,000 | 평화파크체험관 | 4DFX 영화관 | 4,000 | 평화수호대 | 1,500 | 평화수호대 | 2,000 | 평화탐험관 | 3,000 | 평화탐험관 | 4,000 | 단체할인은 30명 이상 | 어린이평화정원 | 무료 | 체험시설자유이용권 | 체험시설전체 | 15,000 | 체육시설묶음 이용권 | 짚라인포함 빅3 | 12,000 | 짚라인제외빅3 | 8,000 |
3) 입장/휴관시간: 여름성수기 08:30~18;30/ 평상 시 09:00~18:00 휴관은 네 번째 월요일 6.25전쟁과 거제포로수용소 6.25전쟁은 북한의 괴수(怪獸)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의 사전 협의 하에 일으킨 전쟁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38선 전역에서 일제 도발하였다. 인민군 198,400명, 탱크 242대, 전투기200여대, 대포 172문, 곡사포 1,258문으로 일제 남침을 한다. 그 당시 남한의 병력은 105,752명으로 북한의 절반정도였으며 전투장비도 북한 1/3 정도였다.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까지 밀리자 유엔군이 참전한다.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9월27일 서울이 수복되고 평양까지 북진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 이후 남북한 밀고 밀리는 전투를 계속하다 1953년7월27일 휴전이 되므로 전쟁은 일단락된다. 한편 6.25동란으로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던 거제도에 1951년부터 고현리, 수월리 등지를 중심으로 설치한 수용소이다. 360만평 대지위에 28개소 840여동을 설치하고 포로 17,000여명을 수용하고 한국군과 미군 18,341명이 관리하였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협정되자 1954년 1월23일 인민군 111,754명, 중공군 20,720명, 모두 132,474명의 용공포로와 우리 국군 7,142명, 미군 3,193명, 기타 참전군 1,216명 총 11,551명을 판문점에서 교환함으로서 거제도 UN군 포로수용소는 막을 내렸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세계 전쟁포로전시관으로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유적관내에는 전시실, 영상실, 기념품판매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전시실에는 포로의 발생, 배경, 생활사, 포로유품, 폭동, 석방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6.25전쟁과 포로수용소의 장면을 적나나하게 재현하고 젊은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둘러볼 때 주의할 점은 첫째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 꼼꼼히 관찰하면서 옛날을 생각하면서 관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약3시간) 둘째 부모님의 사전에 충분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6.25 전쟁 잔혹사, 포로수용소와 인권, 전쟁의 아품 등 사전 지식이 풍부하지 않으면 입구에 문화해설사들이 있으니 동참하면 된다 (해설은 무료임) 셋째 관람 후 어린이들에게 감상문을 쓰게 하거나 차안에서 다양한 질문을 해서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넷째 돈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몇 군데 체험코스가 있으니 관람을 시켜주어야 한다. 특히 4DFX씨어터 (영화관)는 꼭 관람시켜주는 것이 좋을 상 싶다. 기본시설 | 분수광장, 탱크전시관, 북한군남침, 6.25역사관, 흥남철수작전기념비, 다오라마관, 국군의사수, 대동강철교, M.P다리,야외공연장,포로수송,여지포로관,포로생활관, 포로생포관, 기념촬영 코너, 포로사상대립관,포로폭동체험관, 포로귀환 및 송환, 철모광장, 무기전시장, 포로설득관, 포로수용소유적박물관,야외막사, 잔존유적지 ...24개소 (1999, 2002년1,2차 개관) | 흥남철수작전기념탑 |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이 되었던 흥남철수작전 재현 ( 2005.3.15.) | 평화파크체험시설 | 평화미래전시관,4DFX씨어터, 어린이평화정원,평화수호대,평화탐험체험관 (2013.10.1. 개관) | 1950체험관 | 거울미로, 착시미술체험관, 사격체험관 (2013.7.17. 개관) | 아바타원체험시설 | 롤러코스터 + 짚라인 (2014년3월 개장예정) |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둘러보기 > < 한국전쟁 연표> 1950.6.25 | 인민군 38선 전역 남치 | 1950.6.28 | 한강대교 폭파, 서울포기 | 1950.7.7 | UN군 한국전쟁에 참여,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 | 1950.8.4 | 낙동강 방어선 구축. 8월16일통영까지 침투 | 1950.9.15 |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 1950.10.1 | 서울탈환 38선 돌파 | 1950.10.19 | 평양탈환 및 진격 | 1950.10.25 | 중공군 30만명 개입 | 1950.11.27 | 거제도포로수용소 설치 | 1950. 12.4 | 평양, 원산, 흥남 철수 | 1950. 12.22 | 흥남 철수 작전 .피난민 10만명 수송작전 . 195012.25 장승포항에 도착 | 1951.1.4 | 국군.유엔군 서울 후퇴 | 1951.3.14 | 서울재탈환 | 1951.7.1 | 휴전회담 시작 | 1953.6.18 | 반공포로석방 (27,389),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 1953.7.27 | 휴전협정, 유엔군 11,551명과 공산군 132,474명 포로교환... 세계 최고의 휴전기간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어린이와 함께하는 포로수용소 ... 일러두기 ( 성인 즉 보호자용) 공산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19세기 중엽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해 창시됨. 소련, 중국, 폴란드, 체코, 동독, 라오스, 베트남, 쿠바, 북한 등이 있었으나 소련의 자유화 물결로 공산주의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현재는 라오스, 베트남, 쿠바, 북한, 중국 등이 있으나 대부분 정치형태는 공산주의, 경제형태는 자본주의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전제군주의 정치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유일의 국가이다. 노동자 위주의 모두가 잘사는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나 모두 실패한 정치형태이다. | 2. 6.25전쟁과 남로당 19세게 중반 각종 기계의 발명(방직기, 증기기관)으로 농업중심의 1차산업에서 공장중심의 2차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겨나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생겨났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여 마르크스레닌이 주동하여 만든 사회구조로 1917년 볼세비키에 의하여 사회주의혁명을 탄생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시 공산주의 가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수많은 국가들이 공산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부분 식자(識者)들은 다같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갈구(渴求)하여 공산주의 정당인 남로당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빨갱이라는 미명아래 억울하게 죽은 이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 나라를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남로당의 총책 박헌영은 공산주의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청춘을 불살랐으나 1955년 김일성에 의해 처형되었다. | 3. 한일합방이란 한국의 국력이 쇠퇴(衰退)하여 자주권을 발동할 수 없을 때 일본은 청일전쟁(1894)후 침략야욕으로 내정간섭하다 1910년8월22일 대한제국이 한일합방의 조약을 체결하고 36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36년간의 고초를 겪는다. 한국대표는 이완용이었다. | 4. 조국해방과 남북분단 1945년8월15일 일본천황이 항복함으로서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한다. 그러나 카이로회단, 얄타회담, 포츠담회담(1945.7.26.) 에 의하여 남북은 38선으로 분단된다. 그리하여 남한에는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한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위 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 5. 한국전쟁 직전 남.북한 병력비교 1949년 미국의 닉슨 독트린의 선포에 따라 주한미군은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전부 철수한다. 한국군은 94,974명 북한군은 182,700명으로 2배가 되었으며 심지어 남한에는 탱크나 항공전투기는 하나도 없었다. | 6. 한국전쟁(6.25전쟁)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의 사전 협의하에 일으킨 전쟁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38선 전역에서 일제 도발하였다. 인민군 198,400명, 탱크 242대, 전투기200여대, 대포 172문, 곡사포 1,258문으로 일제 남침하여 3일 만인 6월28일 서울을 집어삼키고 물밀 듯이 밀고 내려온다. 이 당시 북한군을 침략을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당했다. | 7. 6.25전투에 참여한 UN군과 미군 UN이란 국제연합이라고도 하며 국제평화기구로 국제간평화유지, 군비축소, 경제/사회/문화교류 역할. 현재는202개국가입, 사무총장 반기문(2007~ 현재).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UN안전보장이사회는 6월27일 북한 무력침략 격퇴하고 한국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원조할 것을 결의한다. 7월7일 유엔군이라 명명하고 총사령관으로 맥이더 원수를 임명하고 즉시 낙동강 전투에 투입한다. | 8.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맥아더가 이끄는 UN군은 인천상륙작전(1950.9.15.)을 감행하여 9월27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10월1일 38선을 회복한다.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은 이천상륙작으로 고립되어 수 많은 포로가 생겨났다. 이 당시 약 23,600명의 포로가 생김. | 9. 평양탈환/1.4후퇴/서울재탈환/중공군개입 서울을 수복한 한국군과 UN군은 북으로 북으로 향진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원산까지 북진했으나 10월26일 30만명의 중공군이 개입하는 바람에 12월4일 평양에서 철수한다. 이때 12월22일 흥남부두에서 10만 명의 피난민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대동강을 폭파하자 남으로 피난오던 백성들은 부러진 철교 위를 넘느라 아비규환이 되었다. 포로수용소에 가면 흥남철수작전과 대동강 철교위를 탈출하는 북한주민들의 리얼리티한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손인호의 ‘한많은 대동강’ 이란 유행가 가 빅히트를 쳤다. 중공군 인해전술로 밀어 부쳐 1951년 1월4일 서울까지 빼앗기고 다시 피난길을 나선다. 계속 밀리던 한국군과 UN군은 1월25일 일제 반격을 개시하여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한다. | 10. 한국전쟁과 휴전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하여 최대 쟁점이던 포로의 자유송환이냐 강제소환이냐 하는 분기점에서 결국 자유송환으로 결정나고 1953년 7월27일 조인식이 성립되고 그 지루한 전쟁은 끝을 맺고 말았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는 휴전이라는 점이다. 세계에서 최장 휴전기간이다. (1953,7,27~현재) 북한은 지금도 휴전 상태이므로 언제든 전쟁을 재개할 수 있는 주장이다. 거기에 반해 대한민국은 휴전된 지 60년이 지났으므로 이제는 한나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아직도 북한을 한나라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 11.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설치 1950년 6.25동란으로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던 거제도에 1951년부터 고현리, 수월리 등지를 중심으로 설치한 수용소이다. 360만평 대지위에 28개소 840여동을 설치하고 포로 17,000여명을 수용하고 한국군과 미군 18,341명이 관리하였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협정되자 1954년 1월23일 인민군 111,754명, 중공군 20,720명, 모두 132,474명의 용공포로와 우리 국군 7,142명, 미군 3,193명, 기타 참전군 1,216명 총 11,551명을 판문점에서 교환함으로서 거제도 UN군 포로수용소는 막을 내렸다. | 12.돗드준장 납치와 주민소개 1952년 5월7일 포로수용소 사령관 돗드준장이 친공.반공의 분류심사에 반발하는 인민군 포로에 의하여 납치 감금되어 석방되지 않자 5월9일 포로 폭동제압의 이유로 고현지구내 1,116세대를 24시간 내에 강제로 소개(疏開)되었다. 소개민들은 피난아닌 피난민 형세로 3년 동안 떠돌다가 1955년 3년만에 복귀한다. 한편 돗드준장이 납치되었다가 5월11일 석방되었다. | 13. 포로수용소내의 생활 포로들은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대우를 잘 받았다. 일부는 피복과 일상용품을 팔아 노동당 자금으로도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는 포로들마다 그 당시 귀중품으로 여기는 시계를 차고 금반지를 끼지 않는 포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반면에 한국군은 물자가 지급 되지 않아 포로들에게 오히려 구걸을 하여 옷이며 시레이송( 통조림)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포로들에 대한 대웅는 1949년 제네바협약에 의하여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관리하였다. 그 실태는 국제적십자사와 서방언론들이 수시로 취재하여 보도하였기에 지상천국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자즌 흉년으로 초근목피로 생화하던 시절 이었기에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포로들의 일과는 대체로 자유로웠다. 포로들은 제네바협정에 의해 편안한 생활을 했다. 5시30분 기상하여 일과를 마치고 오후8시에 지침하는데 자유로이 취미생활을 하였다. 연극, 무용, 웅변, 노래자랑, 복싱, 운동 및 공부를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 14. 포로수용소내의 반목(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17만3천명이 수용된 수용소에는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1951년 7월1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리자, 포로들은 공산파와 비공산파로 갈라져 살육전이 시작되었다. 공산포로들은 낮에는 적기가를 부르고 밤에는 인민재판을 하여 날만 새면 반공포로들은 살해되어 가마니에 쌓여 쓰레기에 버리거나 시체를 토막 내어 변소에 버렸다. 인민재판은 특급에서 4급으로 나누어 특급은 그 자리에서 살해하고 1급은 곤장 500대, 2급은 400대, 3급은 300대, 4급은 100대를 쳤으며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 15.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 1951년 개성에서 시작한 휴전협정은 1953년 6월8일 쟁점이었던 포로교환문제가 자유송환으로 타결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독단으로 현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불러 6월18일 0시를 기회 일제히 석방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로 인해 이를 게기로 거제도를 위시한 8개 지역의 반공포로 27,389명에게 자유시민권을 안겨주어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하였다. | 16. 한국전쟁의 피해 한국군과 유엔군 피해 | 구분 | 전사 | 부상 | 실종.포로 | 합계 | 합계 | 95,800 | 294,280 | 89,262 | 479,342 | 한국군 | 58,8-09 | 178,632 | 82,318 | 319,759 | 유엔군 | 36,991 | 115,648 | 6,944 | 159,583 | 남한 민간인 피해 | 사망 | 학살 | 부상 | 납치 | 행방불명 | 합계 | 244,663 | 128,936 | 229,625 | 84,532 | 303,212 | 990,968 | 인민군 및 중공군 피해 | 구분 | 전사 | 부상 | 포로 | 합계 | 합계 | 520,000 | 942,000 | 189,937 | 1,651,937 | 인민군 | 294,000 | 226,000 | 153,483 | 673,483 | 중공군 | 226,000 | 716,000 | 36,454 | 978,454 | 민간인 | 사상자 약 200만명 |
한국군과 유엔군 피해는 약 150만명, 북한 및 중공군은 360만명 정도이다. 피해규모는 조사한 방법에 다라 들쭉날쭉한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남한은 200만명 북한은 250만명 이라고도 한다. | 17. 양키시장 (돗대기 싱장)이란 양키시장과 돗데기시장: 양키시장이란 포로나 미군병사들이 군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양키시장의 상인 (주로 피난민)에게 파는 행위로 현재 연초초등학교 앞의 논밭에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를 양키시장이라고 하며 또한 ‘돗데기시장’이라고도 한다. 돗데기란 돗드준장을 상징하는 말이다. 거제도에서 물자를 공급받아 시장이 형성된 남포동에도 ‘돗데기시장’이 형성되었다. 참고로 양키(Yankee)란 미국사람 별칭이며 코쟁이란 전쟁 시 나폴래옹의 ‘ 멋쟁이 장교’를 칭했으나 우리들은 6.25전쟁 시 미군이나 서양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 쓰였다. | 18. 포로수용소 잔존유적지 포로수용소내 (경비대 막사, PX, 무도회장 등), 그 이외에 고현중학교구내, 장평 홈플러스앞 소공원, 양정저수지 아래, MP다리( 임전마을) , 계룡산 통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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