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윤심덕에 대하여
김우진은 나이 30에 1926년 동갑나기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바다에 투신정사 사망했으나 지금도 목포의 인물열전에 나와 있음을 알았다.
내가 1970년 직장에 처음 부임했던 목포, 내가 20대에 사의찬미가 무엇이고 윤심덕이 누구인가 관심이 없었고, 김우진이 어떤사람인지 알 필요가 없었다.
내가 20대에 처음 직장생활을 했던곳 목포.
일제치하 인물 김우진이 어떤 사람인가?
19살에 결혼하여 부인과 딸과 아들이 있는 꿈 많던 인물!
김우진은 일제시대 목포갑부(호남갑부가 맞을성 싶음)김성규의 장남으로 1926년 나이30에 사망한 사람이 목포의 현대인물열전에 나오고 문학도들이 김우진을 재 조명하고 있답니다.
윤심덕 김우진 일제시대 30에 1926년 삶을 마감했지만 윤심덕의 삶을 희자하여 영화 두편이 만들어지고 아직도 문화예술인들의 조명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섹스로 이세상에 태어난 모든이들 이리도 한세상 저리도 한세상, 사람은 떠나가고 인생 무상이다.
인생이란 하룻밤 이슬과 같다라는 말처럼 오늘하루도 소중히 생각하며 즐거운 삶을 영위해야 하겠다.
목포에 김우진 거리가 있다.
봉건과 근대화의 뒤얽힌 모순의 시대상을 살다간 목포백만장자의 맏아들 김우진 "연극인이자 목포 최초 근대예술인"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극작가 김우진!
1926년 30의 나이에 현해탄 바다에 윤심덕과 투신한 김우진은 아내와 딸과 아들이 있었다.
김우진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하여,
예향의 도시 목포에 있는 목포문학관에는 김우진문학관이 있어 극작가 김우진의 유품과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목포 북교동성당에는 김우진이 한때 작품활동을 했던 성취원자리가 표기되어 있다.
목포 북교동성당은 원래 목포갑부 김우진 아버지 김성규의 99칸 대저택자리였으나 천주교에 기부하여 현재 북교동성당이다.
북교동성당 벽에는 김우진 삼형제의 유업을 기린 벽화를 부착한 김우진거리가 있다.
이만 하면 목포의 거장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김우진이 아니겠는가?
기회가 되어 목포에 가면 북교동성당과 김우진거리와 목포문학관에 들러 김우진의 흔적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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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 여인은 누구였는가?(1897∼1926)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대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차즈려 가느냐"(이하 생략)
이 곡은 러시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곡인 「다뉴브 강의 잔 물결」에 윤심덕이 번안하여 노래했다.
우리가 '사(死)의 찬미(讚美)’ 라고 하는 노래의 원 제목 ‘죽엄의 창가’였다.
여기서 '찬미' 는 '창가' '음악'이란 말이었다. 그 때는 음악을 '찬미'라 썼다.
우리 나라 최초의 대중가요인 「사의찬미」를 부른 윤심덕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시대에 지성인으로 자질을 마음껏 부르다
애인 김우진과 바다에 몸을 던진 풍운아였다.
신여성으로 살고 싶은 자신의 욕구와 전통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 사이에 갈등을 지녔던 윤심덕, 그런 와중에 예술적 동조자이자 연인인 김우진과 함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현해탄에 투신 삶을 마감했다.
윤심덕(1897∼1926)은 평양에서 출생, 경성여고를 졸업한 교사출신이고, 동경음악학교 성학과를 졸업했다.
우리나라 개화기(1920~30년대)를 주도했던 여성 예술가 세 명을 꼽자면 시인 김일엽(1896-1971), 화가 나혜석(1896-1948), 그리고 성악가 윤심덕(1897-1926)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1926년 8월5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머리기사에는 실린 전문이다.
“지난 삼일 오후 열한시에 하관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사일 오전 네시경에 대마도 엽흘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녀자 한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엿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엿스나 그 종적을 찻지 못하엿스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수산(30), 녀자는 경성부 서대문뎡 이뎡목 이백칠십삼번디 윤수선이라 하엿스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요
남자는 김우진이요,
녀자는 윤심덕이엿스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원과 장식품이 잇섯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원과 금시계가 드러 이섯는데 련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자유인은 지인이 유럽여행을 하면서 촬영한 동영상 중 이탈리아 베네치아 수상도시의 영상속에 “다뉴브강의 잔물결” 음악이 삽입되어 감상하고, 그 음악이 우리나라의 윤심덕이 번안하여 불렀다는 “사의찬미”를 인터냇을 통해 감상하였다.
일제시대 사의 찬미를 윤심덕이 불렀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으나 인자사 윤심덕의 생애를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
☛윤심덕의 가정환경과 생애(1897-1926.8.4)
윤심덕은 1897년 1월에 평양에 순영리에서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러시아와 일본제국이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팽팽하게 힘을 겨루던 시기에 태어난 셈이었다. 아버지 윤석호는 심성이 곱다는 소문만 났을 뿐 가장으로는 생활력이 강하지 못해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가다시피 하였다. 어머니는 일찍이 감리교회 신자가 된 인연으로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유명한 병원 광혜의원의 보조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광혜원은 윤심덕 어머니가 이곳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하기 훨씬 전인 190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점동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광혜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홀 부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으로 생각과 사리를 판단하는 관점과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으로 개화된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그러니 윤심덕은 남보다 먼저 개화의 눈을 뜨고 신학문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윤심덕은 열살이 되던 해에 진남포 보통학교 3년을 마치고 평양에 있는 숭의여학교를 거쳐 1918년에 현재의 경기여고인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사법과를 졸업하게 되면 보통학교 선생이 되는 자격이 주어졌다.
윤심덕이 경성여고보에 다닐 때에는 훤칠한 키로, 많은 남학생들로부터 매력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윤심덕은 가난하게 자라난 환경답지 않게 성격이 활달하고 아무에게나 말 붙이기를 좋아해 때로는 쓸데없는 입방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싹싹하고 친근한 여성이라는 칭찬을 더 많이 받았다. 윤심덕은 학교 다닐 때부터 유난히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를 따라서 어려서부터 감리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른 까닭도 있겠지만, 윤심덕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고 맑아서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나면 주위 사람들은 으레 다시 한번 불러보라는 주문을 던지곤 했다. 또한 학업성적도 항상 우등권에 들었다.
친구들은 윤심덕 만큼은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성적이 우수하여 평양보통학교 교사로 부임될 것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선 윤심덕을 원주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을 냈다. 뜻밖의 일이었다. 윤심덕은 몹시 분개했다.
나보다 성적이 뒤떨어진 친구들은 오히려 평양이나 서울의 보통학교로 발령이 나고 그 사람들보다 성적이 월등하게 좋은 나는 무엇 때문에 벽지로 알려진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이 났을까 하며 며칠간 밥조차 먹지도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얼마전 동창 모임이 떠올랐다. 그때 자리를 같이했던 총독부 학무국장이 몹시도 짓궂게 치근덕거려 신경질을 부린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일이 화근이 된 듯싶었다. 원주에서의 교사 생활은 별 흥미도 없었다. 타고난 성격이 활동적이고 야망적인데다가 발령지 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더욱그러했다.
"그래. 나는 이런 산골에서 여선생이나 해먹을 팔자는 아니야. 노래를 불러야 해."
윤심덕은 내심 일본 유학의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윤심덕의 나이 열아홉 살 되던 해에 바로 그 기회가 돌아왔다. 어머니가 일하는 광혜의원 홀 부인의 주선으로 총독부 관비 유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가게 될 행운을 얻은 것이었다. 그때가 1915년이었다.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그 무렵만 해도 한국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도 없을 정도로 교육의 과목이 다양하고 전문화되어 있었다. 서양미술이며, 음악이며, 연극이며, 세계 각국의 외국어며, 뜻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는 나라였다.
완고한 유교의 풍습으로 성악 공부는 기생짓, 그림은 환쟁이, 연극은 광대로 업신여기던 시절에 일본은 그런 분야를 거창하게 예술이니 문화 교육이나 하며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일본에 건너온 윤심덕은 먼저 아오야마학원에서 3년간 일본어를 비롯한 음악의 기초를 배우고 곧이어 동경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을 했다. 윤심덕의 동경음악학교 입학은 동경 유학생 사회를 흥분케 했다.
윤심덕은 먼저 동경에 유학온 미술학도 나혜석과 함께 남자 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서 피나는 항쟁이나 다름없었다. 국권을 회복하려는 한국인의 의지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마침내 3.1독립운동의 항일사건이 일어나고, 이런 여파는 일본 유학생들한테까지도 퍼졌다. 일본 유학생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국권을 찾으려는 데 열의를 쏟기 시작했다. 윤심덕이라고 해서 그런 열의에서 한눈을 팔 수 없었다.
1921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동경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동우회 순회극단>에 윤심덕이 적극 가담한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주요 맴버로는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김우진을 비롯해서 홍난파, 마해송, 김기진, 홍해성, 조명희 등 바로 음악과 문학을 전공하는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이 순회 극단은 여름방학이 되면 귀국하여 극단 활동을 통해 애국애족의 계몽을 전개하고 나아가 일본 압제로부터 독립하는 데 나름대로 한몫을 맡겠다는 목적 의식이 너무나 뚜렷한 모임이었다.
순회 극단은 당초의 예정대로 마산, 경주, 대구 지방을 먼저 순회 공연하고 서울, 평양, 원산 지역의 공연에 앞서 김우진의 고향인 목표에서 공연을 가졌다. 호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목포 공연을 갖게 된 이유는 이 극단의 자금줄이 김우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잠시 김우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정사했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장성 군수 김성규의 아들로 태어나 목포에서 성장 과정을 거쳤으며 유난히 문학에 심취하여 일본의 구마모토농업학교와 와세다대학의 영문과 유학 시절에도 아예 전공학과보다는 시와 희곡분야에 더 열중하였다.
특히 그가 번역하거나 집필한 희곡 『찬란한 문』,『난파』,『산돼지』 ,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쓴 『이영녀』등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문예사상 표현주의 희곡들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항상 전통윤리와 새로운 서구적 윤리의 첨예한 갈등의 묘사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전통인습의 현실부정을 바탕으로 개혁사상을 강렬하게 주장하는 것들이었다. 남해안의 짭짤한 해풍과 함께 삼학도를 비롯하여 잘디잔 숲 섬들이 유달산 자락에 마치 춤을 추듯 매달려 있는 목포의 자연 경관은 일찍이 이곳 태생들을 예술인으로 낳고 기르기에 충분했다. 이 순회 극단의 성과는 대단하였다. 공연이 벌어지는 곳마다 흥분과 갈채가 뜨겁게 연출되는 예술 축제나 다름없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이 순회 공연을 통하여 사랑을 교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의 교감은 시작부터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 김우진에게는 이미 처자식이 버젓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윤심덕은 순회 공연이 있는 뒤 동경으로 돌아가 일년 더 음악수업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녀의 귀국은 금의환향이었다. 윤심덕이 귀국하자마자 때마침 우리나라 사람들의 순수한 자본으로 설립한 동아부인상회 창립 행사에, 그녀를 위한 음악 발표 무대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으니 이게 금의환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 윤심덕의 음악 발표회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무대를 제압하는 늘씬한 키를 가진 그녀가 한없이 치솟아 오를 것만 같은 음성으로 노래의 기량을 발휘하자 한번 터진 박수 소리는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특히 이 공연을 본 사내치고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윤심덕의 이러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얼마전에 서대문구 정목 70번지로 이사온 그녀의 집안 형편은 어렵기만 하였다. 더군다나 동생 성덕이의 미국 유학 여비 문제까지 겹쳐 있어 돈에 대한 궁핍은 말이 아니었다. 한번은 동생의 유학 여비를 의논해 보려고 서울의 갑부 아들 이용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잘못 알려져 윤심덕은 돈 때문에 애정을 헤프게 소비한다는 스캔들의 투망에 걸려들기까지 했다. 이 스캔들은 화려한 프리마돈나를 하루 아침에 매춘녀로 전락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수모나 다름없었다. 윤심덕은 이런 슬럼프를 극복해 보려고 만주로 건너가 어렸을 때부터 영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배형식 목사를 찾아가 잠시 목회를 돕고 돌아와, 목전의 궁핍한 생계를 타결해 보려고 영화배우의 길을 선택했다.
당대의 유명한 감독 이경손의 야심작 『동도』의 주연을 맡았다. 윤심덕은 이 영화의 주연을 맡고나서 낮은 코를 높이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하는 등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신문마다 『동도』의 상연 광고가 큼직하게 실렸다. 원작 각색 이경손, 주연에는 성악가 윤심덕, 배우 전원 총출연, 배경이 어떻고, 줄거리는 어떻고, 온갖 미사여구를 나열한 신문 광고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니 영화배우로서 궁핍한 생계를 해결해 보려는 꿈도 흥행 실패와 함께 사라지고만 셈이었다. 그녀가 생계를 위해 이러저리 허둥댈 때마다 좋지 않은 추문만 무성하게 따라다닐 뿐이었고, 이런 것들이 누적될수록 그녀는 생에 대한 환멸과 비관을 한시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무렵 목포의 김우진은 윤심덕을 자주 찾아왔다. 윤심덕의 괴로운 처지를 멀리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김우진의 잦은 방문과 격려로 윤심덕은 그때마다 좌절과 실의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화여전 음악과를 나와 음악 교수로 눌러 않았던 동생 성덕이의 미국 유학이 결정되자 윤심덕은 여러 날을 고민하던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이유는 동생의 유학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가면 그전부터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던 닛토 축음기 회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 동생의 유학 여비 문제로 명예에 치명적인 구설수를 당한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아예 레코드 취입 대가로 얼마간의 돈을 만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윤심덕이 노래 취입차 일본으로 떠나기 얼마전에 김우진은 이미 일본에 와 있었다. 전혀 약속된 일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윤심덕은 김우진을 일본 땅에서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윤심덕은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알아낸 다음 동생 성덕과 함께 부산의 부관(부산-시모노세키)연락선 편으로 일본으로 건너왔다.
일본에 도착한 윤심덕 자매는 오오사카의 강춘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예정된 레코드 취입도 마쳤다. 축음기 회사와 맺은 레코드 취입 계약은 동생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스물 여섯 곡만 부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한 국을 더 부르겠노라고 했다. 윤심덕의 이런 제의에 대하여 회사측으로서는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윤심덕이 추가하여 한 국 더 부르기로 한 노래의 곡명이 「사의 찬미」였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윤심덕은 자주 울었다고 한다. 벌써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리라.
윤심덕은 유부남 연극인 김우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윤심덕은 김우진과 함께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 갑판 위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극작가 김우진 생애(1897∼1926.8.4.)
김우진은 장성군수 성규(星圭)의 아들로, 할아버지도 헌관(獻官)이었으며 지주였다. 장성군 관아에서 태어났으며,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농업학교(熊本農業學校)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24년에 영문과를 졸업했다.
김우진(1897∼1926)은 1920년대 대표적인 비평가이자 극작가로 평가받아 왔다.
안동 김씨 성규의 장남으로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김우진의 호는 초성(焦星) 또는 수산 (水山)이며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초등학교) 졸업에 이어 일본 구마모또농업학교를 거쳐 19세에 곡성 출신 정점효(鄭點孝)와 결혼, 1924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후 목포로 귀향해 영농사업체인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창작활동에 몰두, 시(50편), 희곡(5편), 소설(3편), 평론(20편) 등 총 78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후 1926년 8월4일 동갑나기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정사, 당시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졌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씨와 1남(방한, 2살), 1녀(진호, 8살)가 있었다.
외아들 김방한은 서울대교수를 역임했으며(2001년 작고)아버지 시신은 찾지 못 했으나 무안 청계에 초혼묘를 해 놓아 아들된 도리를 다했다.
사람은 떠나가고 인생 무상이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세상의 하고많은 놀랄 일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주변에서 남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인생이란 하룻밤 이슬과 같다라는 말처럼 오늘하루도 소중히 생각하며 즐거운 삶을 영위해야 하겠다.
☛김우진 가정환경과 활동상
김우진의 아버지 김성규는 목포 최고의 갑부였으며, 거듭되는 사별로 인하여 모두 5부인을 얻어 그 중 세 부인으로부터 3남 7녀를 낳았다고 한다. 김우진은 둘째 부인 박씨의 소생으로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만다. 그 뒤로 3명이나 되는 계모와 이복 형제들 사이에서 그는 자라게 된 것이다.
김우진은 1897년 장성 군수였던 김성규와 순천 박씨의 장남으로 장성군 용강면에서 태어났다.그는 호를 처음에는 초여, 일본 유학 중에는 초성, 귀국 후에는 수산을 사용했다. 수산은 목포에서 연유한 것이고 초성은 니체의「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태양을 가리키는 '불타는 별' 의 의미로 지은 것이다. 부친이 장성 호남선우의숙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수학하던 중 동학운동의 여파로 가족이 목포 북교동 성취원으로 이사하였다.
성취원은 유달산 동쪽에 위치한 99칸의 대궐 같은 집으로 부친 김성규가 무안항 감리로 재직하면서 거주하던 곳이다.소년시절 익힌 한문 실력은 훗날 일본 유학시절에 고전을 탐독하고 시를 지으며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1910년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이후 1913년 일본인들이 다니던 목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를 1년 수료하였다.
김우진은 집안의 토지관리를 위해 농업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가서 현립 구마모토농업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 새로운 일본 건설을 위한 첨단농업학교였다. 그는 재학 중 여러 과목을 배웠고 성적도 뛰어났다. 영어(99), 수신(100), 논문(95), 독서(90) 등 유독 인문 관련 과목이 우수했고 특히 영어 성적이 뛰어나 와세다대학 영문과 진학의 계기가 되었다. 이 기간에 빅토르 위고, 셰익스피어, 다눈치오 등을 사숙하였다.
17세에 단편소설「공상문학」을 '정로생' 이라는 필명으로 창작할 정도로 문학에 열의를 보였다. 재학 중인 19세에 부친의 뜻에 따라 전남 곡성 출신의 유학자 정운남의 딸인 정점효와 결혼하여 21세에 장녀 진길이 태어났다. 같은 해「조선에서의 삼림사업 일반」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농업학교(16회)를 졸업했다.이 때 뛰어난 논문임을 인정받아 영친왕에게 5원의 우등상금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농업보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때였다.
농업학교 졸업 후에 김우진은 귀국하라는 부친의 뜻을 따르지 않고 1919년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해 1921년 영문과 본과로 진학했다.
동경 유학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의 한 지식인이며 작가로서의 문예적 체험과 능력, 선구적인 문학사상을 성숙시켰다. 이때부터「마음의 자취」라는 제목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일기 속에는 식민시대 국가 주권의 상실을 통한하면서 일본의 통치에 대한 과감한 저항과 민족자결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유학생들의 정치적 집회에 참여하고 2·8 사건에 관련하여 수감된 유학생들을 수차 면회한 기록도 전한다.
또한 민족어에는 민족적인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고 한글로 쓴 일기를 통해 작품도 한글로 쓰려는 의지를 밝혔다.그리고 3·1운동이후 격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시대정신을 이끌만한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나타내었다.
1920년 봄 조명희, 홍해성, 김영팔, 유춘섭, 진장섭, 고한승, 조춘광, 손봉원 등 20여명과 함께〈극예술협회〉를 결성하였다. 기존의 낡은 신파극을 비판하고 새로운 근대극을 연구하고 실현하자는 선각적인 목적이었다. 그는 서양의 사실주의 연극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극예술활동을 주도했다. 또한 연극·문학 비평 활동을 하면서 창의적이고 근대적인 문학 창작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21년 동경 고학생과 근로자들의 모임인 동우회 회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국내 순회공연을 결행하였다. 이 순회공연은 임세의 단장, 김우진 연출, 홍해성이 무대감독을 맡고 막간에 홍난파와 한기주의 연주 그리고 윤심덕의 독창이 공연되었다.
부산을 시작으로 40일 동안 25개 지역을 순회하였고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극운동이며 근대극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의의를 갖는다.
1924년 3월에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6월에 목포로 귀향하여 부친이 가문의 토지와 재산관리를 위해 설립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포부는 연극운동과 창작, 문예연구 활동을 더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가 해야 했던 회사 사장의 역할은 매우 분주하고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희곡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친이 그를 위해 '백수제' 라는 2층 서재를 지어주었는데 「정오」,「이영녀」,「난파」,「두덕이 시인의 환멸」,「산돼지」등이 이 무렵부터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출가하기 1년 전 장남 김방한(1925~2002, 전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이 태어났다.
이 한 살배기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후에 집을 나오고 나서도「출가」를 통해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김우진이 추구한 자유로운 삶과 문학적 포부로 인해 부친과 갈등을 겪었다. 당대 지식인으로서 마음대로 조국을 위해 활동할 수 없었던 일제식민지의 환경도 그를 절망시킨 원인중 하나였다. 결국 1926년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도쿄로 건너가 축지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친구 홍해성의 집에 기거했는데, 목포에서 보내오는 귀가 권고를 거절하면서까지 창작에 몰두하여 완성한 것이 마지막 희곡「산돼지」다.
한편 윤심덕은 오사카에 머무르면서 대표곡〈사의 찬미〉를 비롯한 20여곡을 취입하고 있었다. 도쿄에 머물던 김우진에게 어느 날 그녀로부터 자살하겠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그는 홍해성에게 '그녀를 말리러 가겠다 알리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경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을 향해가던 관부연락선 덕수환1등칸 3호실에 유서를 남기고 두 사람은 현해탄 바다로 투신하였다.
☛만석꾼 김성규 아들 우진, 철진, 익진 3형제의 삶
무안감리를 지내고, 목포의 유지로서 뿌리를 내렸던 김성규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 각기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다.
둘째인 김철진은 목포신간회 운동에 참여했으며, 1934년부터 유명한 문예지『호남평론』을 발간한 인물이다.
한때는 조선공산당 목포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나, 1930년대 이후는 우파 성향의 사업가로 변모하였다.
셋째는 김익진이다.
그는 중국혁명군에 가담했을 정도의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훗날 천주교에 귀의한 그는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 전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 분배하고, 대구에서 평생을 종교인으로서 사회봉사를 하며 살았다.
천주교계에서 김익진을 “한국의 성프란체스카”로 평가할 정도로 봉사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목포는 근대화가 가장 빨리 이루어진 도시 중 하나이고, 근대성에 대한 고민과 문화충돌이 발생했던 곳이다.
그러한 문화사적 특성이 김우진 삼형제의 인생에 고르게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김우진의 아비 초정 김성규
-권보드래 글-
극작가 김우진은 남성으로선 드물게 생애가 온통 스캔들화해 버린 경우다. 여성이야, 그것도 근대 초기의 신여성이야 소문과 스캔들 속에 갇혀 살았지만, 남성으로서 김우진만큼 풍문 속에 소진돼 버린 경우는 달리 찾기 어렵다. 1926년 8월 일본서 조선을 향해 오던 여객선에서 실종됨으로써 김우진은 지금껏 한 세기 동안 ‘정사’의 주인공으로 남았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의 찬미」의 가수 윤심덕의 애인이라는 틀로써. 둘에 대한 관심은 좀체 사그라들지 않아, 자살로 위장한 후 해외로 도피했다는 둥, 유럽 어느 도시서 함께 살림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둥, 여러 해 동안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생전에 발표한 글은 몇 되지 않지만, 유고로 남은 김우진의 평론이며 희곡을 보면 그 밀도가 만만찮다는 사실을 어렵잖게 눈치 챌 수 있다. 니체와 버나드 쇼를 사랑했던 김우진은 창작에서도 극적인 고뇌를 형상화해 냈고, 기대와 사랑이 속박이 되는 가족 관계와, 고집스런 정직성이 일의 논리와 충돌하는 사회적 생활을 여실하게 그렸다. 그 중 봉건과 근대가 얽히고설켜 어지러운 파열음을 내는 가족이라는 장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늘 아버지다. 초정 김성규(1863~1935). 개혁론자였던 아버지 아래서 자라나 일찍부터 산술과 외국어를 익혔고, 광무국 주사라는 한직에서 출발했으나 충청․강원 양도의 관찰사를 지냄으로써 환로(宦路)의 영광도 제법 누렸던 김성규는, “정력, 재능, 천재, 통찰력”을 두루 갖춘 야심가이자 성공가였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가계도를 따져보면 김성규는 하나뿐인 적자가 죽은 후 반쯤 적자처럼 자라난 서자였던 것 같다. 적장자는 성규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적장자가 남긴 아들은 성규보다 나이가 많았으나 늦도록 말썽을 끼친 골칫거리였다. 성격도 편협하고 모질어, 김우진이 「난파」라는 희곡에서 표현했듯 김성규 모자는 “제 집 개보다도” 더한 멸시를 받으며 살았던 모양이다. 전환기의 풍조를 타고 현감으로, 군수로, 관찰사로 승승장구했던 김성규는 김우진을 낳을 무렵(1897년) 전라남도 장성으로 이주하고 생모의 묘도 이장해 온다. 몇 년 후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목포와 장성 일대를 기반으로 대지주가 되는데, 이 지역에는 별반 기반이 없었던 사람의 성공이라 자못 놀랍다. 하긴, 김성규는 철저한 섭생으로 나병까지 이겨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놀라운 의지력의 소유자였다.
자식들을 가르칠 때도 김성규의 성격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진이 소학교에 다닐 때 김성규는 방학 때도 6시 기상, 세수하고 청소한 후 8시까지 복습 1회, 오전과 오후에 각각 2회․3회씩으로 일과를 철저히 통제했고, 구마모토에 아들 삼형제를 유학시켰을 때는 동생들이 맏형 우진보다 “늦게 자리를 깔며 아침에는 먼저 일어날 것”을 요구했다. 서자였다는 추측이 사실이라면, 김성규의 이런 집념이랄까 엄격성은 가문의 정통성을 제 것으로 하려는 데서도 발휘되었던 듯하다. 조카 호진이 호남 일원에 “서자가 발호하는 바람에 적손이 망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가운데, 김성규는 증조부에서부터 부친에까지 이르는 3대의 문집을 낼 것을 열망했고 안동 김씨 일문을 휘하에 두고자 고심했다. 1923년,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도 김성규를 일으킨 것은 “삼세(三世) 문집을 내야 한다”는 열망이었다.
토지 개혁 업무를 주도했고 전권대사 부임을 위해 홍콩에까지 다녀왔던 근대의 선구자, 초정 김성규에게 가문이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고군분투하여 쌓은 이력과 재산, 그 근거는 근대 생활세계에서의 적응력이었건만, 김성규는 이것을 봉건의 적통(嫡統)임을 증명하기 위해 쓰고 있다. 뒤란에 생모의 사당을 지었고, 안동 김씨가 신라 적부터 있었던 성씨임을 자부했으며, 조카의 패악을 견디면서 집안의 실질적 수장이 되기를 갈망했다. 아마 김성규는 근대적 규율을 통해 추진되는 봉건적 야심이라는 복잡한 구조물을 아들에게도 물려주고자 했던 것 같다. 전 재산을 기탁해 세운 상성합명회사를 족친의 생활 기반으로 제공하면서, 김성규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우진을 회사 책임자로 불러들인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그이가 선 길과 내가 선 길 사이에는 태평양이 있습니다. 어떻게 넘어 뜁니까.”라고 탄식했던 김우진이 가출한 것은 3년 후의 일이다. 진작 결혼해 1남1녀를 두었던 김우진은 가족과 일체의 인연을 끊을 것을 선언했고 독일로, 혹은 러시아로 떠날 계획을 세웠지만,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봉건과 근대가 뒤얽힌 모순을 살았던 아버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이었을까.
☛김우진 막내동생 김익진 이야기(1906-1971)
1906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하다.
한 해 녹두는 800섬, 나락은 2만 섬씩 거둔 만석꾼 집안 출신. 서울 중앙고보와 일본 와세다대 예과를 거쳐 베이징대 언어학과에서 언어학 및 미학 전공. 한학은 물론 영어와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라틴어, 에스페란토어에 능통. 한때 베이징대 사서로 일하던 마오쩌둥 권유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 홍군과 함께 죽음의 대장정 참여….
약력만 보자면, 남부럽지 않은 집안 배경에 남 못지않은 학력과 재력을 갖췄고, 해서 누구 못지않게 편안히 살 수도 있었던 사람. 그럼에도 일제가 수탈하던 식민지 조선에서, 혼란한 대륙에서 목도한 세상의 불합리를 바라보며 '의롭고 뜨겁게' 살고자 했던 청년. 야인(也人) 김익진(프란치스코)이다.
그런데 3형제 중 막내인 자신을 애타게 찾던 아버지(김성규, 1864~1936)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 그는 1934년 초 조선으로 돌아온다. 장시(江西)성에서 산시(陝西)성에 이르는 1만2000㎞ 대장정을 걷던 혁명의 열정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땅에 돌아왔지만, 그는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흔들린다.
그러던 그의 삶이 1935년 초에 만난 책 한 권으로 뒤바뀐다. 그 책이 일본 도쿄 간다(神田) 헌책방 골목에서 우연히 접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다가선 낡은 서가에 꽂힌 헌책 한 권이 그를 잡아당겼다. 결코 낯설지만은 않았던 성자 프란치스코를 떠올린 그는 책을 사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독서삼매경에 빠져든다.
비단 장사로 큰돈을 모아 아들이 기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꿈, 아버지 뜻에 따라 기사가 돼 전쟁에 나갔으나 포로로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뒤 평생 거지가 돼 하느님 아버지 아들로 예수님 발자취만 따라 사는 길로 들어선 아들, 아버지의 꿈과 아들의 길이 엇갈리는 대목에서 그는 특히 전율을 느낀다.
모든 짐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하느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나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그는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걷히듯 답답하던 가슴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더 이상은 방황하며 일본에 머물 까닭이 사라졌다.
고향 목포로 돌아오니 가족이, 마을이, 이웃이 그리 정겨울 수가 없었다. 언덕 꼭대기 성당도 마음을 끌어당겼다. 혼자 성당을 찾아가 쉬어도 아늑했다.
그런데 막상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자 마음 한구석이 다시 답답해졌다. 프란치스코도, 예수도 옳지만 가톨릭교회는 아니라는 내면의 소리가 자꾸 들렸다. 답답한 나머지 본당 회장을 하던 어린 시절 친구도 만나 토론도 해보고, 친구 안내로 본당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만난 사제가 서울 약현(현 중림동 약현)본당에서 사목하던 오기선 신부다. 1935년 3월 친구와 함께 상경, 오 신부를 찾아간 그는 새벽미사를 집전하러 오 신부가 자리를 뜬 사이 책장을 둘러보다가 토마스 데 아퀴노의 철학과 역대 교황 회칙을 모아놓은 「가톨릭과 경제 문제」를 우연히 펴든다. 현세 사회문제에 빛을 던지는 이 책을 통해 그는 사회주의자에서 가톨릭 신자로 거듭난다.
다시 1년간 회개의 깊은 심연에 빠져들어 정화의 시기를 거친 그는 1936년 11월 병환이 깊던 아버지가 타계하자 그해 말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 패트릭 모나한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다. 아내와 딸, 아들까지 일가족이 함께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고, 가족은 유산으로 상속받은 장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그의 달음질은 거칠 게 없었다. 세례를 받고나서 1937년 11월 서울 백동(현 혜화동) 성당에서 오 신부에게 청원, '레오'라는 수도명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 단독회원으로 착복식을 가졌다. 평신도로는 국내에서 맨 먼저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으로 입회한 것이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새 회칙에 따라 재속 프란치스코회원들은 이제 수도복을 입지 않는다.)
이 즈음 김익진의 삶을 오 신부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 늘 흰 띠를 두른 갈색 수도복을 입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마치 비상하는 봉황과 같이 만사를 해탈한 듯 절대한 자유를 누렸다."
자신의 농토 4만 2975㎡(1만 3000여 평)를 광주지목구에 기증해 장성성당을 세우도록 도왔고, 신앙선조 유적들을 찾아다니며 순교의 얼을 새겼고, 멀리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을 찾아가 수도 영성을 체험하며 세월을 보냈지만 전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1945년 초 예비검속에 걸린 그는 반일사상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던 전력 탓에 장성경찰서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8ㆍ15 광복을 맞아 자유를 찾은 그는 '진작 벗지 못한 짐'을 마저 벗어던진다. 그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소작인 몇 백 명을 불러 모은 뒤 미리 준비해 놓은 등기문서에 도장을 찍어 그들에게 나눠 준다.
당시 그의 말이 지금도 전해져 온다.
"여러분,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조상을 잘 둬 물려받은 땅으로 본의 아니게 지주 노릇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로 저는 지주가 아니라 여러분의 형제가 되고 싶습니다. 조국이 해방을 맞은 기쁨으로 여러분이 땀 흘려 농사짓던 농토를 여러분에게 온전히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농부들은 감격에 젖었다. 하지만 그의 이같은 결단에 부인과 일곱 아들딸의 반응이 어떠했을지는 가늠키 어렵다.
느닷없이 나락에 굴러 떨어진 여덟 식구를 거느린 김익진은 대구 남산동 132㎡(40평) 짜리 한옥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부잣집 외아들의 자리를 버리고 거지의 삶으로 내려선 성 프란치스코처럼 그도 장성 일대 만석꾼 자리를 버리고 낯선 땅에서 서민으로 살아간다.
'진정성 짙은' 그 삶의 여정은 교육계로 이어진다. 1949년 왜관 순심중 교장으로 영어를 가르치던 중 6ㆍ25전쟁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부산과 제주로 옮겨 다니며 피란민과 곤경에 빠진 이들을 돕는 데 안간힘을 썼다. 휴전 뒤에는 다시 김천 성의중, 경주 근화여중 등에서도 교감으로 일했다.
당시 그의 삶을 오 신부는 이렇게 증언한다.
"6ㆍ25때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제주도로 찾아갔더니 거적을 둘러치고 양재기에 밥을 해먹어가며 피란민 가운데 파묻혀 전교를 하고 있었지요. 그래도 그는 특유의 해학으로 이웃들을 위로하고 있었어요."
그런 틈바구니에서 가톨릭시보 편집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1956년 이후에는 문필가로서 삶을 살았다. 그가 만년에 교회매체에 발표한 글은 '민속과 서학'(성바오로, 1971)에 실려 있다.
또 「레지오 마리애 교본」(1956), 「상재상서」(1958), 「황사영 백서」(1959), 「동서의 피안」(1961), 「요셉」(1964), 「동방문화와 공교」(1965), 「내심낙원」(1966) 등을 번역했다.
이 서적들 번역에 그가 얼마나 큰 기쁨을 느꼈는지는 생전에 그가 "주님공현대축일에 동방박사들처럼 「레지오 마리애 교본」과 「동서의 피안」, 「내심 낙원」 등 3권을 들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1971년 1월 6일 주님공현대축일에 대구 대명동 66㎡(20평)짜리 허름한 한옥에서 '프란치스코처럼 산' 고귀한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평화신문, 2011년 3월 6일,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김성규는 아들 김우진의 묘표를 1931년 만들다
무안감리 김성규(1863-1936 74세사망)는 아들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무안 마계산 정산에 1931년 시체 없는 아들의 무덤을 만들고는 다음과 같이 墓表를 남겼다.
(…) 안동김씨 金祐鎭은 자는 원강이요 號는 초거라. 正三品 돈녕부도정 석근의 증손이오, 正三品 연풍현감 병욱의 孫이오, 正三品 전강원도순찰사 초정거사 성규의 맏아들이다. 李朝 高宗 광무 원년 정유 9월 19일 묘시에 장성부 官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맑고 총명하여 혜안이 맑았다. 성품이 또 인자하고 효심이 고결하였다. 10살에 이미 배움에 매우 열심이었고, 19살 을묘년에는 학습을 위해 바다로 떠나 일본의 웅본농교와 동경의 와세다대학 문과를 다 우등으로 다녔다. 문학사 학위를 얻어 세칭 세계의 대학자가 되어 을축년에 귀가하였다. 고난이 10여년 쌓여 신경 쇠약으로 결국 병인년 6월 26일 해시에 죽었다. 경학원 강사 하동 정봉현의 딸과 결혼하여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방한은 이제 7살이오, 딸 진길은 13살이다. 본래 자식이 먼저 죽는 법은 없건만, 하늘이 그 아비가 무덕한데도 享受(향수)함이 지나쳐서, 그것을 미워하고 벌을 내려 이 늙은이에게 아픈 독을 끼치게 되었다. 그 아비 귀신에게 울부짖지만 끝내 속죄할 수 없었다. (…)
김성규는 큰아들 김우진이 죽은후 끝없는 마음고생을 하고 1936년 74세에 사망했다.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많이 배우고 학식과 직위가 높다고 오래사는 것도 아니며 행복한 것도 아니고, 재물이 많다고 오래사는것도 아니며 행복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사람의 운명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