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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3.1절 기념사가 얼마나 심각한 역사의식의 빈곤을 반영하는지를 한 눈에 보여주는 글. 아래 공유하는 주진오 교수님이 인용하신 박찬승 교수님의 글에 나타나는 역사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그의 기념사가 얼마나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킬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찬승 교수가 3.1운동 당시, 일본 경찰이 여성들에게 가한 물리적, 성적 폭력에 대한 자료를 소개했습니다. <재한선교사보고문건>은 독립기념관의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에 실려 있다고 하네요.
저는 이 자료를 읽으며 눈물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꼭 읽어 보시기 바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3.1절에 그런 기념사를 하는 대통령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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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Yi Hyo Syung)은 신효범(Sin Hyo Pum)의 아내입니다. 그는 신천 남학교(Syen Chun Boys Academy)에서 한동안 선생을 하였습니다. 스물여덟 살인 그녀는 연못골 여학교(Yun Mot Gol Girls Academy)의 졸업생이며 매우 유능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네 살 난 어린아이를 가지고 있으며 두세 달 전에 두 번째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잠깐 동안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딸이 체포된 후 시름에 빠진 표학선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표학선의 집에 갔습니다. 그녀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경찰과 군인은 마당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학교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학교에서 그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숨으려고 한 죄로 고소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녀가 만세를 불렀는지를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등에 있는 아이를 남겨 두라고 명령하였고 그녀는 그것에 순순히 응했습니다.
그녀가 경찰서 앞문에 이르자 한 경찰이 뒤에서 세게 그녀를 발로 찼고, 그녀는 방안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녀가 바닥에서 떨면서 누워 있을 때 한 경찰은 발을 갖다 그녀의 목에 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고 머리와 얼굴 등을 셀 수 없이 때렸습니다. 그는 그녀의 옷에 있는 줄을 세게 잡아 당겼고 그녀에게 옷을 벗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 그는 강제로 그것을 찢어 발겼고, 그러는 동안 계속해서 그녀를 구타하였습니다. 그는 그녀가 어린아이들에게 반일감정을 고취시켰고 그녀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속옷을 벗겨 내었고 그녀의 가슴을 발로 찼습니다. 그녀는 벗겨져 나간 속옷들로 그녀의 벗은 몸을 가리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것들은 잡혀져 멀리 던져졌습니다. 그녀는 앉아 있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끊임없는 몽둥이 세례에 의해 일으켜졌습니다. 그녀는 방에 있는 많은 남자들로부터 돌아서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그들을 마주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녀는 손과 팔로 그녀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그녀의 팔을 뒤로해서 그것들을 묶어 버렸습니다.
계속해서 구타는 이어졌습니다. 그녀는 무감각해졌고 고통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부풀어올랐으며 그녀의 몸은 색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몸은 매어져 있어야만 했고 가혹 행위는 계속되어졌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구타를 멈추고 그녀를 방의 한쪽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곳에 한동안 내버려둔 후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옷을 입도록 허락되었고 옆방으로 보내졌습니다.
약 저녁 9시쯤 세 명의 여자와 체포된 다른 두 명의 여자는 다시 사무실로 불려 나갔습니다. 그들은 지금 만세를 부른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인식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공격적인 행동을 다시 되풀이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경찰은 세 명의 여자를 풀어 주었지만 표학선과 이효성은 감금시켰습니다. 이 두 여자는 그들이 밤을 보냈던 옆방으로 다시 돌려보내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죄수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명의 남자들이 먼저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자들이 받은 처우들에 대한 소식들이 마을 마을에 퍼졌고 500여 명의 군중들이 아침에 집결하였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경찰서를 공격하려고 하였고 여자들에 대한 가혹 행위에 대해 복수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연장자 한 씨는 폭력의 사용, 또는 어떠한 종류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마침내 침착한 협의가 진행되었고 항의를 위해 두 명의 대표를 들여보내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두 명의 남자가 선택되었는데 둘 다 기독교인은 아니었고, 그 중 한 명은 일본말을 할 줄 알았습니다. 이 둘은 경찰서로 들어갔고, 군중들은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을 옷을 벗긴 것은 불법적인 행위라고 주장하며 항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서장은 그들이 실수라고 말하며 일본법에서는 그것이 허락되어진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불법 신문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나이든 여자가 아닌 젊은 여자들만이 옷을 벗겨졌으며, 왜 그들이 옷이 벗겨진 후에도 구타를 당했는지 그리고 왜 오직 남자가 아닌 여자만 옷이 벗겨졌는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서장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당한 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군중들의 대표자들은 결의에 차 있었고 군중들은 점점 더 들뜨기 시작했고 소란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들도 감옥에 구금되든가 아니면 구금자 모두가 풀려나기를 원했습니다.
서장은 마침내 항복을 해야만 했고 네 명의 죄수를 제외한 모두를 풀어 주는 데 합의하였습니다. 표학선은 그녀가 나오자마자 양쪽에서 부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효성은 한 남자의 등에 업혀서 실려 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로 여자들이 실려 가는 것을 보자 가엾음에 휩싸였고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몇몇은 “이러한 야만적인 폭압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외쳤습니다. 군중들 사이에서는 맨손으로 경찰서를 공격해서 서장을 잡아 옷을 벗기고 죽을 때까지 때려야 한다는 감정이 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장자 한 씨와 다른 현명한 지도자들은 어떠한 폭력 행위로부터 사람들을 격리시켰고 마침내 그들을 해산하게 하였습니다.
(재한선교사 보고문건, 분기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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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려난 소녀 죄수의 이야기(4)
내가 3월 5일부터 --일까지 겪은 이야기.
그날 나의 목적은 학생회와 합류하는 것이라 남대문에서부터 독립만세를 외치며 출발하였다. 나는 이 목적에 동의하였는데, 왜냐하면 나는 한국의 1천만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독립을 외쳤다. 이런 만세운동을 통해 일본인들의 형언할 수 없는 10년간의 압제에 대한 우리들의 솟구치는 분노를 문명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총칼도 없이 나는 대의명분에 내 인생을 맡겼다. 나는 3월 5일 9시에 학교를 떠나 남대문으로 가는 전차를 탔다. 한 구역을 지났을 때 우리는 서대문으로 가는 전차를 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차에서 내렸다. 다른 차로 갈아타려 하는 순간 일본인 순사가 내 뒤에서 나타나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나는 “남대문으로 가는 중이오”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의 말도 없이 그는 나를 붙잡아 검문을 하고, 내 옷을 뒤졌다. 그러나 의심할 만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자 내가 신고 있는 짚신을 꼬투리로 삼아 경찰서로 끌고 갔다. 나는 “평화롭게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왜 경찰서로 데리고 가는 거요”라고 말했다. 그 순사는 많은 군중이 있는 가운데서 나를 마구 구타했다. (중략)
나는 순사를 따라 본서까지 따라갔다. 그곳에는 칼을 찬 순사가 양쪽으로 늘어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를 때렸다. 양쪽 귀를 가로질러 때려서 내 뺨은 부풀어올랐다. 그들은 무거운 군홧발로 내 발가락이 그 군홧발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나의 발을 짓이겼다. 양쪽을 보니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모두 아주 많이 있었다. 그들은 여학생들의 귀를 때리고, 발로 차고, 구석으로까지 걷어찼다. 그들 중 어떤 순사는 여학생들의 머리를 잡아채 앞뒤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창문으로 내던져 얼굴 양옆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몇몇 남학생들은 밧줄로 꽁꽁 묶어서 그들의 머리가 다리 사이에 고정되게 하였다. 그러고는 그들을 군화발로 걷어차고, 남학생들의 눈이 퉁퉁 붓고 피가 흘러내릴 때까지 얼굴을 찼다. 그리고 나서 모든 학생들을 앉게 하였다. 들어온 각 순사들은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대로 돌아가면서 구타를 했다. 그 방은 작았는데도, 40명의 남자와 35명의 여자가 있어 모두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작은 공간에 있는 것이었다. 공기는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두통이 났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어지러웠다. 그렇게 우리는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를 보냈다. 그 후 남자들은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이때부터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과 떨어져 여자들끼리만 있게 되었다.교차 심문을 받을 때에도 분노를 자아내는 일들은 계속되었다. 그 대략적인 내용을 말해 보겠다. 그들은 처음에 이런 질문을 했다. “너 혼자만의 생각으로 나온 것이냐, 아니면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나온 것이냐?”“나는 절대로 누군가의 선동을 받고 나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로 나온 것이요”라고 나는 대답했다.그가 다시 물었다. “너희 학교에 있는 선생이나 외국인이 한국의 경우가 평화회담에서 거론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나?”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대답했다.“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를 주먹으로 치고, 막대기로 때렸다.
다시 그가 물었다. “너는 한국의 독립을 원하느냐?”“마음속으로부터 원한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다시 물었다. “일본과 한국이 합병된 이후로 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다. 다른 모든 것도 그와 같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감사는커녕 독립을 바라는 것이냐?”나는 대답했다. “나는 이 문제에서 한 가지 점만 본다. 만약 일본과 한국이 정말로 한 나라였거나 처음부터 한 나라였다면 이런 소망은 내 마음속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4천 년 동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너희 일본 정부가 세계의 인정도 받지 않고 야만적인 무력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 너희들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교육의 기회도 주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을 바라는 나의 희망은 극히 자연적인 것이다.”취조관은 대답했다. “아하! 그 말을 듣고 보니 이것은 너의 생각이 아닌 네 선생이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진실이 아닌 바를 나에게 말하는가?” 그는 얼얼해질 정도까지 내 머리와 얼굴을 때렸다. 나는 뭐라고 말할지 몰랐다.
그는 다시 말했다. “너는 착한 여학생이다. 감옥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느냐. 너는 정말 딱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고집부리지 말고, 나에게 진실을 말해라. 한 번만 미국인 선생이나 한국인 선생의 이름을 나에게 말해 주면 너를 풀어 주마.”나는 대답했다. “내가 죽어도 좋다. 어떤 선생님도 나에게 이 일을 하라도 선동한 적이 없다.”“너는 거짓말을 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두 손으로 내 입을 잡았다. 나는 내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는 내 입에서 피가 나도록 잡고 있었다.
그가 또 물었다. “너는 왜 짚신을 신고 있느냐?” 나는 대답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고종께서 승하하신 이후로 내내 이 신발을 신고 있다.” 그러자 그는 막대기로 내 입을 때려 내 입술은 부풀어오르고 다시 피가 났다. 그는 또다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할 때까지 나를 때렸다. 이런 식으로 나는 모두 네 번 교차 심문을 받았다. 나와 같이 심문을 받은 사람들 중 몇 명은 고문을 당하고, 몇 명은 한 시간 동안 무거운 것을 팔에 들고 있어야 했다. 몇 명은 옷이 벗겨지고 괴롭힘을 당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체벌과 고통을 겪었다. 경찰서에 있었던 5일 동안 우리는 이빨을 닦거나 씻을 기회가 없었다. 5일부터 9일까지 우리는 교차 심문을 받았고, 9일에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손목에 끈으로 함께 묶여졌다. 감옥으로 이송되자 우리 모두는 남자와 여자 간수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그 추운 날에 우리는 옷을 벗고 있어서 추위에 떨었고, 발은 거의 꽁꽁 얼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살피고 조사하는 몇십 분 동안 그러고 있어야 했다. 그런 후 그들은 우리에게 옷을 입으라고 하고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으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제대로 무릎을 꿇지 않거나 졸면 네 시간 동안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어느 날 밤 나는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다.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방안에 있던 나무로 만든 변기통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냄새가 났다.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을 했다. 욕조 하나에 물이 담겨 있었는데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물로 목욕을 해야 했다. 몇 명이 한 번에 들어가서 목욕해야 했다. 감옥의 경비병이 옆에 서서 쳐다보며 욕을 하고 음란한 말을 했다. 방은 비좁았으나 15명이 함께 있었다. 밤에 우리는 비스듬히 눕거나 포개져 누워 있었다. 너무 좁아서 돌아눕지도 못했다. 누군가 기도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졸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고 호통을 들었다. 우리는 열 시간 정도를 잤고, 나머지 열네 시간 동안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고통 속에서 나는 성경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결코 성경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나는 한 번도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렇게 우리는 풀려날 때까지 엄청난 고난을 경험했다.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중 '풀려난 소녀 죄수의 이야기'(4)에서)"주진오 한국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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