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르신 천국에 가셨다
9월18일 새벽 12시05분에 장인께서 타계하셨다는 메시지를 아내가 보내 왔다. 바로 이틀 전 강남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이신 장인을 뵈었다. 숨이 차 고통 중에 의식이 없이 눈을 감고 산소마스크에 의존하시고 계셨다. 아내가 아버지를 안으시고 귀에 기도를 드렸다. 그동안 잘못을 용서해달며 한 없이 슬프게 울었다.
지난 10여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온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하리오.장인어른을 일 년에 두서너 번 밖에 찾아뵙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특히 병환이 깊어진 일 년 동안 서울에 올라 오셔 치료를 받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아내가 두 번 정도 시골에 가서 며칠 동안 병간호를 해준 외에는 아버지를 돌봐드리지 못했다. 나 역시 암 수술을 받고 활동을 못하니 작년에 한 번 금년에 한번 만 찾아뵈었다.
지난여름 8월11일에 김제 시골에서 뵈었을 때는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 기어서 거동 하셨지만 식사도 잘하시고 대화도 나눌 만큼 건강 하셨다. 그런데 한 달 만에 급속히 건강이 악화 되어 서울에 오셨을 때는 몸을 좌우로 움직이시지 못해 식사도 아주 힘들게 드셨고 대소변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러던 중 가래가 심해지면서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의식이 가물가물해지시다 서울 병원에 입원하신지 13일 만에 타계하셨다.
9월 16일 일요일에 장인어른을 뵙고 집으로 와서 긴장한 가운데 대기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밤 10시40분에 위독하시다는 전갈이 왔다. 용인에서 강남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검색을 해보니 아무리 서둘러도 가까운 정류장에서는 탈 수가 없어 부랴부랴 짐을 챙겨 직선 도로로 차를 앞질러 갈 계획을 세우고 차고에 내려와 문을 여니 차 키가 아무리해도 열리지 않았다. 워낙 낡은 차라 가끔은 그런 적이 있지만 그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 아마 비가 오니 습기 때문에 헐렁거려 이가 더욱 안 맞아서 그랬던 것 같다.
3-4분가량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열려 차를 타고 지름길로 가는데 비가 오고 도로 양쪽에 차를 주차한 비좁은 도시길이라 앞 차들이 계속 오는 차를 비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다. 이미 강남으로 가는 차는 지나 가버렸고 바로 2백 미터 전에 잠실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코너를 돌아 온 모습을 보고 차를 돌려 주차를 하려니 다른 차가 앞에 정차 해 그냥 지나 가버렸다.
그때 마침 장인께서 위기 상황을 넘기고 좀 나아지셨다는 전갈이 왔다. 내차는 너무 낡은데다 내비게이션도 없는 상황에 비까지 오는 터라 도저히 서울 병원까지 이동할 수가 없다. 큰딸한테 전화가 왔다. 강남으로 가는 막차 버스가 아직 있어 곧 도착 할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와 마음이 진정 됐다.11시 30분에 버스를 타고 아내는 병원으로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긴장한 상황이라 심장이 뛰어 진정시키느라 막걸리 한 병 사다 마시고 거의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 날은 그렇게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다. 화요일 하루가 너무 긴장 됐다. 딸 역시 출근은 했지만 수시로 상황을 물어 왔다.
우리 딸은 엄마의 아픈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할아버지의 위급 상황이 전달 될 때마다 눈물을 장대비처럼 쏟았다. 엄마가 산후도우미로 집에 토요일 늦게 왔다가 일요일 오후가 되면 가는 동안 반찬을 만들고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일해야 하는 그 아픈 세월이 벌써 7-8년이 되었다. 하지만 빚의 이자에 원금까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은 막막한 현실 앞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굳게 세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땐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어찌 없으랴?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 동안도 우리는 생활비 걱정이 태산이다. 당장 그 공백을 또 다른 고금리 빚으로 매워야한다.
화요일 오후 7시에 아내와 통화를 했다. 가래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시던 아버지께서 이제는 가래가 가시고 많이 평온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곧 돌아가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20여 일 동안 한쪽 몸을 전혀 쓰지 못하시던 분이 임종 직전에 온 몸을 움직이셔 이제 다시 사실 수 있다고 기뻐했는데 몇 시간 후에 돌아가셨다.
장인어른 상태가 좋아져 처남도 9시쯤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날이 바로 3시간 쯤 지나 다음 날 화요일 12시 05분에 의식이 끓어지셨다. 임종은 두 딸과 둘째 사위가 지켜보았다. 장례식장은 처남이 오랫동안 기거 해왔고 근무했던 은평구 장례식장으로 정했다. 딸이 직장에 가서 결근계를 내고 우리는 오전 10시에 집을 나서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눈물이 쏟아져 차마 들어 설 수가 없어 화장실에 가서 안정을 취한 다음 조문을 했다. 영정을 모신 조문 실은 아주 아름답게 꽃단장을 했다. 연세가 한국 나이로는 84세이니 이승에서 보통 다른 사람과 같은 세월을 지내시고 떠나신 것이다.
처남 내외가 워낙 발이 넓어 많은 분들이 조문해주셨다. 나는 몇 년 동안은 거의 남의 애경사에 찾아다니지 못해서 꼭 올 사람에게만 문자 메시지를 보냈으나 그동안 전화번호가 많이 바뀌어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꼭 찾아 갔던 사람 중에도 찾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작년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방문 한번 와주어도 될 만한 사람들은 여전히 무소식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섭섭함도 없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통해 누구에게도 원망과 미움을 다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이승의 시간을 뒤돌아보면 너무 짧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데 이승이 영원할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작금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사랑이 식은 이 황금만능의 사회에서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남에게 사기나 배반을 당해 너무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현대 사회를 디스토피아사회라 하는데 이는 이기적 본능에 따른 행위를 도道라 여기고 절망으로 달려감을 이른 말이다.
아버지께서 입관하실 때 손녀들이 할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써서 도포에 넣어 주셨다. 나도 시 한 편을 읽어드리고 그 시를 도포에 너 드렸다. 장례식 때부터 시골집이 앞에 보이는 선산에 안치 하고 삼우제를 지내는 내내 날씨가 너무 좋았다. 모두가 아버지의 평생 맑고 아름답게 사셨던 은덕으로 하나님께서 돌봐 주셨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제 건강이 좋지 않으신 장모님 생각을 하니 앞이 막막하다. 하루빨리 우리 환경이 좋아져 아버지의 큰딸이 일하지 않고도 생활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내와 이틀 동안 처갓집 집안 청소를 말끔하게 했다. 아버지의 옷을 태우면서 먼발치에 보이는 산소를 바라보았다. 이제 세상의 무거운 짐을 다 털고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큰 딸의 아픈 마음을 빨리 덜어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아버지, 이제 천국에서 평안 하옵소서
아버지 이제 당신의 평안이 하늘에 계십니다.
지나간 태풍은 아버지의 한 생애의 이승의 아픔과
서러움을 털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평생을 고된 농사일로만 점철 된 날들은
생명을 알알이 키워내는 인고만큼이나 자식들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몸 바치신 거룩한 희생이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 오실 때부터 소리쳐 울던 날들은 다 지나갔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오색 무지개 길 따라 천사들의
인도를 받으시며 하늘나라로 가십니다.
하나님 곁에서 찬양을 부르는 영생의 기쁨만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가슴 아프게 한 자식들의 불효도
하늘의 사랑으로 다 감싸주셨습니다.
자식들은 더욱 우애하여 자손만대 사랑으로 하나의 끈이 되겠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아픈 사람 내 몸처럼 아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오신 그 위대함을
자손만대에 심어나가도록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아버지 천국이 참 좋지요?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신 모습을 보니
저희들도 마음이 천국에 있습니다.
평생 아버지를 기리며 천국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비록 몸으로는 이별이나 영혼은 늘 우리 함께 있습니다.
부디 뒤 돌아보며 걸음 더디 마시고 그 걸음마다 평안만 하옵소서.
2012년 9월20일
불효자식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