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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창 가정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일전
순창 금과면 출신 430가정 윤필례 사모님의 간증을 올립니다.
나의 지난 삶
윤필례
나는 전북 순창군 금과면, 지금은 마을 이름이 매우리로 바뀐 모정리에서 아버지 윤정섭과 어머니 조천덕의 6남 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내가 어렸을 때인 1950년대 말, 우리 집은 아주 부자는 아니었어도 남부럽지 않게 사는 형편이었다. 살고 있는 집도 꽤 넓은 대지에 부엌과 안방, 대청마루와 광, 작은방을 갖춘 4칸의 본채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아래채, 본채 오른쪽에는 외양간과 창고, 변소가 있는 행랑채를 갖추어 부잣집이란 말을 들을 정도였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옷을 팔러 다니는 보따리장수와 밥상을 팔거나 고치러 다니는 사람, 미싱을 고치거나 청소해 주는 사람 등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아래채에는 큰 사랑방 두 개가 있었는데, 이렇게 마을에 찾아온 사람들이 밤이 되면 우리 집 사랑방에 와서 잠을 자고 가곤 하였 다. 집안일과 농사일을 하는 일군도 두고 있어서 아침이면 올케가 밥을 해서 한상이요, 두상이요 하면서 사랑방에 밥상을 들이는 일이 많았다. 옷 같은 물건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가 오면 꼭 우리 집 안방에서 어머니와 나랑 같이 자고 밥도 먹고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마을에서는 인심 좋은 집으로 불리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유관순 열사와 같은 애국자가 되든지 나이팅게일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며 살았다. 그러던 1962년 봄철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 사랑방에서 72가정 최경석 지역장님이 1주일 정도 부흥회 비슷한 모임을 열어서 ‘조상들이 터를 닦은 이 좋은 산수’로 시작되는 노래를 가르치고 있을 때, 나도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설용수 씨가 40일 수련회에 다녀왔다면서 시간만 나면 우리 집 사랑방에 와서 최 지역장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곤 하였다. 그러던 중 마을의 오빠 친구인 최순효 씨 방에 124가정 이홍순 구역장님이 기거하시면서 얼마나 열심히 활동을 하시는지 옆 마을 기성교인들을 몽땅 전도해서 권사, 집사 같은 분들이 우리 통일교회로 넘어오는 일이 있었다. 당시 김기태 씨나 심명례 씨도 같이 입교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흙벽돌을 찍어 교회를 지어 헌당식을 하는데, 정수원 교구장님 내외분도 오시어 우리 집에서 주무신 적이 있었고, 강경렬 속장님도 오셔서 말씀을 해주셨다. 그렇게 은혜로운 교회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순창 지역장으로 72가정 정동석-문수자 가정이 부임해 와 계실 때의 일이다. 1962년 5월, 나는 전주 교구 본부 13차 7일 수련회에 참석했다. 얼마나 은혜로웠는지 강의 시간이면 눈물로 치마를 적셔서 화장실을 가는 시간에 치마를 햇볕에 말리고 들어가 강의를 듣곤 하였다. 콩보리밥에 무나박김치를 물에 띄운 반찬만 있는 밥상에서 아침과 저녁의 두 끼만 먹는 식사였지만 꿀맛이었다. 그러면서 은혜로운 7일 수련을 마쳤다. 그리고 사업 보따리를 들고 시골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사업을 하였다.
남원 지역본부 시절
1964년 7월 20일, 하계 계몽 전도 기간이 되어서 내 친구 5명이 남원 지역 본부로 갔다.
72가정 엄기섭 지역장님이 임지를 금지면 옹정리로 배치해 주셨다. 금지면 면사무소에 가서 옹정리로 계몽을 하러 간다고 하니까 면사무소 직원이 부모님이 남원 읍내에 사업차 나가 있는 오누이 남매가 있는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7일 금식부터 시작 하면서 주인집 밭매는 일이며 집안일들을 도우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자 그 일이 소문이 나서 하루는 면사무소 직원이 나와 굶어 죽으면 큰일 난다면서 금식을 하지 말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고 7일 금식을 무사히 마쳤다. 밤에는 집 마당에 칠판을 걸어 놓고 한문을 가르치고 낮에는 들일을 도우면서 지내는데, 엄기섭 지역장님이 순회를 오셨다. 냉수 한 그릇밖에 대접을 못해 드려서 몹시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려 있다. 이 무렵 입회원서를 쓰게 되어 정식 입교일은 8월 12일로 되어 있다.
40일 계몽 전도 기간이 끝나고 남원 지역본부로 돌아오니 엄기섭 지역장님이 “필례 너는 나와 함께 지역본부에서 고생하면서 같이 살자.”라고 하셨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보따리를 들고 사업을 하러 시골로 다니면서 지냈다. 남원은 교통편이 좋아서 지나다니는 식구님들도 많이 와서 들러 가기도 하고, 때로는 교통비를 빌려 달라는 식구님도 있어서 지 역장님은 나만 불러대니 그 뒤치다꺼리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지역장님들이 지리산에 갔다가 몇 분이 교회로 오셨다. 나는 쌀이 하나도 없고 해서 바로 옆에 있는 도립병원으로 쫓아가서 피를 팔겠다고 하니 지금은 안 된다면서 나중에 연락하면 오라고 한다. 할 수 없이 병원을 나와서 우리 교회에 나오는 여학생 자취방에 가서 사정 얘기를 했더니 쌀을 주어서 식사 대접을 해드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에는 순회사님 세 분이 각 지역마다 일주일씩 순회 부흥회를 하신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나는 사업 보따리를 이고 시골 여기저기로 사업하러 다니면서 쌀이고 보리고 받아 가지고 왔다. 식사 준비를 하는데 숟가락 젓가락이며 밥그릇, 반찬 그릇까지 모두 준비를 해야 했다. 황환채 교구장님과 김병호 36가정 지역장님, 이소담 선생님 3분이 오셨다. 나는 식사 준비를 하면서 틈틈이 자전거에 스피커를 싣고 다니며 마이크를 들고 저녁 부흥회에 참석하라고 동네마다 외치고 다녔다. 그렇게 어른들을 모시 면서 2개월마다 열린 3차에 걸친 부흥회를 얼마나 힘들게 치렀는지 모른다. 지역본부 총무 일과 살림살이 전부를 맡아서 일했던 것이다.
그리고 엄 지역장님과 노국환 씨가 운봉에 가서 개척하여 운봉교회를 짓게 되었다. 거기에 가서 교회를 다 지을 때까지 밥을 해주면서 치다꺼리를 하였다. 당시 기성교회에 다니던 최인남 권사님과 김판봉 청년이 전도되어 최 권사님이 땅을 사고 교회를 짓는 모든 경비를 다 대 주어서 교회를 짓게 되었다. 그렇게 든든한 운봉교회 건축이 봄에 시작하여 늦가을에 완공되어 헌당식을 하고 72가정 김봉철 지역장님의 인도로 1주일간 부흥회가 개최 되었다. 이후 124가정 이상인 구역장님이 발령을 받아 운봉교회로 오셨다.
당시 어머니는 6남매의 외동딸인 내게 아무도 몰래 돈을 보내주시곤 했는데, 나를 위해서는 양말 한 켤레 사서 신고는 전부 생활비에 보탰다. 내가 4년 동안 어머니로부터 받은 돈을 계산해 보니 그때 한 달 하숙비가 2 천원이었는데 4년 동안의 하숙비가 되었다. 그 많은 돈을 나에게 보내주 시느라고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그 공로는 영계에서 축복으로 돌려받으실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던 중 엄기섭 지역장님이 강원도로 가시고 김영호 여자 지역장님이 오셨다가 1년이 안 되어 다시 72가정 조동현-한봉례 지역장님이 오셨다.
나는 동계 계몽 전도를 보절면 사랑리로 장정애와 둘이서 나갔다. 낮에는 양재 일을 하고, 밤에는 한문을 가르치면서 장정애가 가져온 쌀로 신세지면서 계몽 전도를 마쳤다. 계몽전도를 끝내고 지역 본부에 돌아와 있으니 교구 본부로부터 공문이 내려왔다. 각 지역본부에서 1명씩 차출하여 전북 교구 본부 이전 사업비로 한 달간 사업해서 1만 원씩 헌금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또 사업 가방을 들고 이젠 각 군 단위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고학생 행세를 하며 사업을 하였다. 전라남도와 경기도, 충청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업을 했는데, 잠은 지역본부를 찾아가서 잤다.
그렇게 사업을 해서 정수원 교구장님께 전해 드렸다. 책임량을 완수한 사 람은 서남식 씨와 나 둘뿐이었다. 교구장님이 1주일 동안 교구 본부에서 쉬 었다 가라고 하셨다. 당시 교구 본부에는 엄일섭 총무부장님이 계셨었는데, 교구장님과 총무부장님, 서남식 씨와 나 이렇게 넷이서 중국집으로 가서 탕 수육과 잡채, 간짜장으로 큰 식사 대접을 받았다. 처음으로 받은 그 대접이 평생잊히지않는다.그때당시1만원이엄청나게큰돈이었던것같다.
다시 남원 지역본부로 가서 있다가 이백면 효기리 구역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때 거기엔 1800가정 최성길 씨가 있었다. 당시 배고픔 때문에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800가정 최순 씨가 보내준 강냉이 가루를 물에 타서 소금만 넣고 끓여 먹어 가면서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며 구역 장으로 일하였다.
430가정 축복
그러던 중 430가정 축복식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정수원 교구장님이 직접 남원에까지 오셔서 이번 약혼식에 참석하라고 하신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안 가겠다고 하니 정 교구장님은 “금과교회에 부흥회 차 가서 보니 너희 집이 부잣집이던데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사탄의 밥이 되고 말 테니 꼭 참석해라.”라고 부탁하고 가셨다. 그러고는 믿음의 아버지인 설 용수 사업부장님을 남원에 보내시어 필례 이번에 약혼식에 꼭 참석하도록 설득하고 오라고 하셨다면서 설 사업부장님이 밤새도록 광한루에서 나를 설득하였다. 또 정 교구장님이 오셔서 서울로 올라가 약혼식에 참석하라 하시기에 “저는 차비도 없어서 못 가요.”라고 했더니 “차비 내가 주마.” 하시면서 차비까지 대주셨다. 나는 ‘구경만 하고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약혼이 거의 끝나갈 무렵 군인 엄영길 씨가 와서 나를 지명하니까 아버님께서 “그래 좋다. 만나 봐라.” 하셔서 약혼이 되었다. 약혼식을 하기 전 2층으로 올라가니 유 협회 장님과 최원복 선생님, 아버님 이렇게 세 분이 계셨다. 약혼이 끝나고 집에 가려고 밖에 서 있는데 최원복 선생님이 “필례, 너는 누구하고 됐니?” 하시기에 “경북 안동 사람입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너는 전라도니 경상도 사람하고 하면 좋단다.”라고 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 다. 신랑은 입교 날짜가 1962년 7월 23일로 나보다 조금 빨랐다.
1968년 2월 22일, 축복식 날이 다가왔다. 그때 북한의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이 넘어오는 바람에 군인들은 휴가를 못 나온다고 했는데 엄영길 씨는 이미 휴가를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식을 마치고 교구에서 배정한 여관에 가서 남녀가 서로 방을 바꾸어 자기로 했는데, 천금자 언니와 같이 자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부케와 면사포를 받지 못해 신랑이 돈을 내고 받아다 주었다. 축복비도 못 내고 외상 축복을 받았다. 집에는 결혼한 단 말도 못 하고 도둑시집을 간 형편이었다. 큰 오빠가 알게 되면 감금을 당해서 축복식에 참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결혼할 색시가 화장품 하나도 없이 있으니 천금자 언니가 군인 신랑한테 잘 얘기해서 로션 하나와 루주 하나를 사들고 와서 천금자 언니가 화장을 해주었다. 축복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그 이튿날 신랑 집에서 잔치를 한다고 하기 에 밤에 열차를 타고 시골 시댁으로 갔다. 시댁은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혜 동이다. 엄영길 씨는 엄 ‘인’ 자 ‘협’ 자의 아버지와 김 ‘인’ 자 ‘희’ 자의 어머니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댁에서는 친척들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가운데 잔치가 벌어졌다. 마당에서 시조모님과 시어머님께 인사드리고 나서 고된 일정을 보냈다. 그 이튿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신랑이 새벽 5시쯤에 세숫물을 떠다 주면서 세수하고 일요일 경배식을 하고 예배를 보자고 한다. 시댁에 간 이튿날부터 함께 일요일 경배식을 하게 되었다. 나는 신랑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보통 신앙이 아니구나!’ 하고 마음이 놓였다. 다음날 우리는 순창군 금과의 친정집에 가서 인사하고 대구교회로 가서 탕감봉 행사를 마쳤다. 군인 신랑은 부대로 복귀하고 나는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전북교구에서 고생을 제일 많이 한 식구를 지역장님들의 투표로 뽑는데 내가 선정됐다면서 표창장이 안동 시댁으로 우송되어 온 가슴 뿌듯한 기억도 새롭다.
시댁 시조모님은 어찌나 성품이 좋으신지 일요일이면 안동 지역본부에 예배보러 가라고 차비를 주시고, 예배를 보고 오면 버스정거장까지 나오셔서 나를 맞이해주시곤 하였다. 하루는 시조모님이 “새 아가 밥은 한두 사람 먹을 밥을 더 해놓아라.” 하셨다. 그렇게 해서 형편이 어려운 이웃이 집 앞을 지나가면 꼭 불러서 밥상을 차려 밥을 먹고 가게 하셨다. 밥이 없 으면 국수라도 삶아서 먹여 보내곤 하셨다. 그렇게 불쌍한 사람에게는 잘 대해줄 만큼 아주 인심 좋은 시댁이었다. 어렸을 적에 친정집에서 오가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내어 주고 식사 대접을 하더니만 시댁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1968년 5월 초, 신랑이 제대하여 집에 돌아왔다. 그 후 어느 날 안동 김병호 지역장님이 엽서를 보내왔다. 참부모님께서 순회 오시니 미리 와서 진지 준비를 하는데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시할머니께 “같이 안동에 나가 작은댁에 계시다가 참부모님을 뵙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더니 그러마고 하셔서 시할머니와 같이 안동에 나와서 참부모님을 뵈었다. 우리 부부가 참부모님께 경배를 올리자 지역장님이 “이번에 축복받은 부부 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참아버님은 “그래. 시부모님들께서는 좋아하시니?” 하고 물으셨다. 지역장님이 “할머니도 오셔서 밖에 계십니다. 정말 좋아하십니다.”라고 하셨다. “그래, 통일교회에서 결혼한 사람이니 시부모님께 잘하고 본이 되는 생활을 해서 나 욕먹지 않게 잘해야 된다.”라고 하셨다. 친정아버지 같은 심정으로 나를 타이르고 격려해 주신 참부모님 의 그 사랑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하늘 앞에 누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하였다. 참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지성을 다해 시댁 어른들을 섬기고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 시할머니도 모셨다.
공적 생활 시작
남편은 안동 총 판매사업소장으로 발령받았다. 몇 개월 후에 다시 영양 사업소장직을 19개월여 맡았다가 울진 사업소장으로 발령받아 갔다. 나는 큰아이를 임신하여 출산일이 다가와 시댁에 가서 출산하였다. 큰아들을 낳고 21일째 되는 날 시댁에서는 온 동네 어르신들을 모셔다가 미역국을 가마솥에 끓여서 하루 종일 잔치를 벌였다. 시댁에서 오래간만에 큰 경사를 맞이했다고 그렇게 잔치를 벌였단다. 그도 그럴 것이, 시어머니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6·25전쟁 통에 시아버님이 피란길을 나선 후 행방불명이 되시는 바람에 시할머니와 둘이서 살림을 꾸려 가면서 막내 시동생 유복자를 낳은 지 23년 만에 이 집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고 동네잔치 를 하신 것이다. 나는 그날부터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가서 얼음물에 기저귀를 빠는데, 손이 맵고 시리고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바람에 그게 산후병이 됐는지 겨울만 되면 온몸이 시리고 아픈 병이 생겼다. 그렇게 지내는데 큰아들 백일잔치를 해 주었다.
그 후 나는 남편을 따라 울진으로 갔다. 총판매 사고건으로 미수금이 이 루 말할 수 없이 많아서 아이를 업고 사고 건 장부만 가지고 다니면서 수금을 하기 시작하였다. 아이 기저귀 보따리를 들고 가서 수금하러 왔다고 하면 100퍼센트 다 미수금을 갚아주었다. 아이를 업은 아줌마가 돈을 안 주면 그 집에서 자고라도 가야겠다고 하니 안 줄 수가 없었다. 그때 경북에서는 사업부장을 36가정 최주원 씨가 맡고 계셨다. 한 달에 한 번씩 수금을 해서 대구 회의에 가면 울진 사고 건 100퍼센트 수금됐다면서 수고했다고 내 스웨터까지 사서 보내 주시기도 하였다. 그해 추석날 엄일섭 교구장님이 포항에 계실 때인데 나를 보겠다고 울진에 오셨다. 내가 수금하러 가고 없어서 못 보고 갔다고 하시면서 아기 엄마가 아기를 업고 추석날에도 수금하러 갔느냐는 인사까지 하셨다.
그 후 영주 사업소장으로 발령을 받아 영주로 가는 길에 시댁에 들렀다. 시조모님은 꿈에 우리가 오는 꿈을 꾸셨다면서 식혜를 해놓고 묵을 쑤고 떡을 해놓는 등 우리 부부를 맞이할 준비를 해놓고 계셨다. 내가 “할머니!” 하고 부르며 들어서니 “어서 온나! 올 줄 알고 준비 다 해놓았다.” 하시는 것이었다. 시조모님은 말도 못하게 영특하신 분이다.
일 년 농사를 지어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다음 해에 농사지을 경비니 뭐니 모든 비용을 다 계산해 남겨 놓고 남은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동네 이집 저집에 한 마리씩 나눠 주셨다. 소를 키워 새끼를 낳으면 기른 집에 한 마리 주고 또 낳으면 우리가 한 마리 가져오고 하면서 재산을 불려 나가시는 훌륭한 분이셨다. 그리고 나에겐 한없는 사랑을 주셨다.
영주에서도 나는 공기총 판매 사고 카드를 들고 수금하러 나섰다. 큰아들 인호가 첫돌이 되니 시댁에서 떡하고 닭 두 마리까지 준비해 가지고 오신 시조모님이 음식재료 비용까지 다 주셨다. 식구들을 불러 음식 대접을 하도록 하셔서 그렇게 하였다. 나는 매일 열심히 수금하러 다니고 남편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공기총 판매 전국 2위 표창까지 받았다. 상품으로는 총 개머리판에 아버님 사인이 되어 있는 공기총 1정이었다.
3년 동원 활동
1970년 부인 전도 동원령이 떨어졌다. 뱃속에 있는 둘째 아이가 8개월 될 때였다. 12월 1일, 총동원이어서 임신 8개월이라 안 나가도 되는데 신앙 좋은 남편은 첫 출발을 하여 임지에 가서 3일 노정을 걷고 오라기에 경기도 이천교회 임지로 갔다. 그날 꿈을 꾸는데 참아버님께서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 정자에서 낚시를 하시면서 아주 큰 잉어를 잡으셨다. 참어머님께 드리면서 필례 임신했으니 인삼을 넣고 고아 먹으라고 주라고 하셨다. 건네주시는 팔뚝만 한 잉어가 팔딱거리는 것을 정말 감사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받은 꿈을 꾸었다. 그날 아침에 교회 부인회장님께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현명한 아들을 낳겠네요.”하시는 것이었다,
둘째 아들을 낳은 지 80일째에 젖을 떼었다. 아이는 우유병은 물지 않고 울어대는 것이었다. 젖은 불어서 젖몸살이 나고 젖을 짜내어 버리면서 우유병을 들이대니 고개를 저어가며 하루 내내 울어댔다. 하루가 지나니 워낙 배가 고픈지라 젖병을 움켜쥐고 빨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나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옛날 선배님들이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고 뜻 전선에 나서서 수고하신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래도 시댁에서 아이 둘을 맡아 키워 주시겠다고 했으니 천만다행이다.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나오는데 버스 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치 못하고 우니 남편은 버스에서 내려 신문 하나 사다가 나를 가려주었다.
이천 임지에 가니 조장님이 36가정 이상헌 회장님의 김한숙 사모님이셨다. 같은 조에 72가정 김정연 언니, 124가정 오장순 언니, 430가정은 김연 주, 양남임, 나 셋이었고, 777가정 5명이 있었다. 연주 언니가 애를 떼어놓 고 와서 나와 부둥켜안고 많이도 울었다. 서로 같은 처지이다 보니 더욱 위 로가 됐던 것 같다. 교회 바로 옆집에 우리 아이와 비슷한 아이가 있어서 자다가 애가 울면 나도 깨어서 밤중에 성전에 엎드려 울곤 하였다. 애들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아버님께서 “필례야, 나 좀 업어 주렴.” 하셔서 아버님을 업으려고 몸부림치다가 꿈을 깬 후 나는 깨달았다. ‘하늘 일을 하러 온 내가 아이 생각에 몰두해 있으니 아버님께서 하늘 일을 하라는 뜻이구나!’ 하고 마음 단단히 먹고 열심히 전도 일에 몰 두하였다.
777가정 이예다 씨가 얼마나 헌신적이고 모범적이며 마음도 한없이 넓은 사람인지라 성질 급하고 모난 나를 너그러운 이예다 씨 닮게 해달라고 3년 동안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열심히 활동한 결과 식구들이 늘어나 예배 공간이 비좁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사업해서 헌금을 하라는 조장님의 불호령에 우리는 헌금을 모아 성전 증축을 하는 데 보탰다.
그러던 중 군대도 휴가가 있는 것처럼 아이 엄마들도 20일 기간의 휴가가 있어서 번갈아 가면서 휴가를 다녀왔다.
시댁에 가보니 아이 기저귀는 올이 안 보이게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아이가 싸 놓은 똥을 보고 요충이 뭉쳐 있는 똥이라고 느껴졌다. ‘연세가 많아 눈이 어두워 요충만 싸대는 것도 모르시는 연세 많은 어르신들에게 아이를 맡겨 놓고 임지 생활을 태만히 하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휴가가 끝나고 임지에 돌아왔는데 당시 경기교구장님이 도 순회사로서 순회를 오셔서 한 명씩 단독 상담을 하셨다. 휴가 갔다 온 소감을 이야기하라 시기에 시골 상황과 아이가 요충 변을 보더라는 등등을 이야기했다. 그런 아이를 놓아두고 임지에서 태만한 생활을 하면 안 되겠다고 했더니 교구장님이 무릎을 탁 치면서 “바로 이거야!” 하셨다. 엄마들이 휴가 갔다가 임지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아버님께 휴가 제도를 실시해서 이런 꼴을 만들었다고 꾸중을 들었는데 윤필례 씨 내용에 아버님께 보고 거리가 되겠다고 몹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축복받을 때 1만 4천원이 없어서 축복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원 기간 동안 남편이 생활비 2천 원에 용돈 500원을 합해 보낸 2천 500원을 가지고 생활비를 내고 용돈 500원을 3년 동안 모아서 축복비를 완납하였다.
또 한 가지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남편이 영주사업소장을 할 때 시조모 님께서 너희 사는 데 불편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점포를 1년 사글세로 얻어주었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주인에게 전세로 하면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어봐라.”라고 하셨다. 집주인에게 얘기하니 7만 원이면 해주겠다고 하여 그대로 말씀드렸다. 시조모님은 황소 한 마리 판 돈 7만 원을 전세로 점포를 얻으라고 주셨다. 사업소가 폐지될 때 그 돈 7만 원으로 여의도 부지 헌금을 냈다.
임지에서 활동하다가 오후에 교회로 돌아올 때 일반 가정집 아주머니가 아기를 업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아주머니가 한없이 행복해 보이고 부러운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늘 뜻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그런 마음을 억누르며 하루하루 생활해 나갔다.
구담교회 개척과 성전 건축
축복받기 전 나는 마음속으로 ‘하루 세 끼 보리밥이라도 먹여주는 남편 이라면 평생 잔소리 안 하고 살아야지.’ 하고 다짐하었다. 그런데 남편은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한지 끼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었다. 임지 기간에 남편은 총포사가 폐지되고 예천지역장으로 가라는 명을 어기고 총각 때 개척했던 임지 구담으로 가서 예전에 전도되었던 믿음의 자녀들을 다시 찾아 세워 김동호, 김주환, 김명자, 김순희 씨 등을 1800가정 축복을 받게 하였다. 그 이전 군대 생활을 춘천에서 하면서는 춘천 우두 교회 교회장님 이 물심양면으로 성전 건축을 도와서 교회에 공로가 많았다고 교회장님의 칭찬을 받았다.
나도 3년 임지 기간이 끝나자 안동 구담 개척교회로 갔다. 남편은 낮에 는 남의 일을 해가면서 돈을 모으고 밤에는 청년 식구들과 흙벽돌을 찍어서 교회를 지었다. 72가정 유진희 순회사님이 오셔서 일주일 동안 부흥회를 해주셨다. 430가정 이명정 순회사님도 오셔서 일주일 동안 부흥회를 열어 주셨다. 유진희 순회사님은 어느 지역본부보다 더 든든한 교회니까 딴 데 가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다.
교회를 짓는 동안 교회 지붕을 올리고 그날 흙 범벅이 된 옷을 빨려고 강 가로 갔다. 내 등에 찬바람이 돌더니 그날 저녁부터 추워 떨면서 잠을 한숨 도 못 자고 아프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고생하다가 “아무래도 영적 역사 같으니 대구 교구 본부에 가서 기도하시는 권사님들 기도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 아요.”라고 해서 남편과 함께 대구 시댁으로 갔다.
남편이 대구 교구 본부 새벽예배에 나가서 아내가 아파서 기도 받기를 원한다고 하니 엄일섭 교구장님 사모님께서 마침 경주교회의 안다비다 권사님이 와 계시니 그곳에 가 보라신다고 하여 우리가 안다비다 권사님께 말씀드렸다. 교회를 짓고 제물로 죽는 경우도 있는데 잘 왔다고 하시면서 안수를 해주셨다. 안 권사님이 안수를 해주시는데 온몸을 칼로 베는 듯이 아파 나는 너무 힘들어 소리를 지르며 울어댔다. 안수를 받고 나서 근 보름 동안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 내가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남편은 버스 안에서 코를 골며 자더라고 기뻐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둘째 아들 머리를 보니 웬일일까, 보름 동안 봐주지 못한 아이 머리엔 하얀 서캐와 이가 바글바글한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아이 머리를 감기고 이를 잡아주는데 아이는 울고 난리였다. 만약 내가 죽고 없다면 저 아이들 꼴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참담한 기분이었다. 임지가 끝나고 아이들을 구담으로 데려왔다. 둘째 아이 인태는 밤만 되면 엄마한테 가자고 울어대서 나는 아이를 업고 마당에 나와서 “엄마한테 가고 있다.”하고 서성이면서 3일 동안 잠을 못 자고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난 지 80일 만에 젖을 떼고 할머니 손에 의해 길러 졌으니 할머니가 엄마인 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엄마를 보니 낯설고 남같이 생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다기에 말하라니까 “엄마가 친엄마야, 할머니가 친엄마야?”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낳은 친엄마다.”라고 하면서 갓난아이 때 목욕시키는 사진과 젖 먹이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엄마가 친엄마야.”라고 했더니 여태까지 그게 의심스러웠는데 이제야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혼란스럽고 갈등이 많았을까? 그런 인태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하늘 섭리사에 탕감을 짓고 가야 할 역사의 한 토막 스토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3년 임지 기간 동안 김한숙 조장님은 유난히 나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 주셨다. 임지 활동이 끝난 뒤에도 종종 내 옷이며 애들 옷들을 사서 보내주시기도 하고, 구담에까지 한 번 왔다 가셨다. “개척교회에서 힘들 텐데....” 하시면서 격려의 편지도 종종 보내주시곤 했던 인정 많고 배려심 많은 조장님의 은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430가정 이상 서울 총동원
다시 축복가정 동원 섭리가 시작되었다. 430가정 이상 축복가정 서울 총 동원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중구 신당 7동 산동네로 이사 와서 단칸방에 부엌도 연탄 한 장 갈아 넣을 장소밖에 없어서 마당에 풍로를 놓고 치마로 바람을 막아 가면서 밥을 짓곤 하였다.
그러던 중 동대문구 이문동에 믿음의 아들인 김동호 씨가 살고 있었다. 탁구장을 하다가 당구장으로 업종을 바꾸게 되어 손재주가 있는 남편은 그곳에 매일 출근해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김동호 씨 동서가 그 아래층에 170평 되는 체육관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 체육관 관장이 남편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남의 일을 그렇 게 열심히 하느냐고 하니까 남편은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오늘 저녁에 강의를 들어 보라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부터 남편은 그 체육관에 딸린 주산학원에서 일이 끝난 후 저녁마다 칠판을 걸어 놓고 원리 강의를 하였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남편은 신당동 산꼭대기 단칸방에서 살면서 밤 12시면 나를 데리고 산에 가서 간절한 기도를 하였었다. 그때 남편은 새벽 5 시와 밤 12시에 맞춰 성전 하나를 마련해서 하늘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세 살 먹은 어린애가 보채듯 하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다. 나는 속으로 ‘이 서울에서 누가 성전을 마련해 줄까?’ 하는 의심스러운 생각만 들었다. 남편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 앞에 상달되었는지 170평짜리 체육관을 가진 정수인 관장을 만나 밤마다 원리 강의 전후 편을 다 해주었다. 그러자 이들 부부가 7일 수련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 부부는 중구 교구 본부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나가다가 하루는 그러지 말고 자기 체육관에 성전을 마련해 줄테니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절절히 느꼈다. 사심 없이 하늘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늘은 역사하신다는 것을 정말 실감하게 되었다. 이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절실히 깨달았다.
중구 교구 본부에 김영휘 협회장님이 순회를 오셨다. 그때 체육관에서 예배를 보고 있다고 보고 드리니 당시 124가정 김우정 교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음 주에 동대문 교구 본부로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20명이 넘는 식구들과 함께 동대문 교구 본부로 예배를 보러 갔다. 예배 후 이문동에서 온 식구들은 일어서 보라고 해서 일어서니 교구장님이 깜짝 놀라시면서 이문동교회 협회 보고서를 주셨다.
우리는 신당동 산꼭대기 동네에서 이문동으로 이사 온 이튿날 통장이 나 보고 반장을 하라고 반적부를 갖다주길래 “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하고 감사히 받았다. 그때 반장 일은 그 반에 누가 이사 오면 전입 신고서에 반장과 통장의 도장을 받아서 동사무소에 신고를 해야 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기가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나는 반상회 날이면 집 마당에 자리를 깔고 반원들을 모아 놓고 반상회를 몇 달간 했다. 그랬더니 반원들이 반장 집에서만 반상회를 할 게 아니라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집집이 번갈아 가면서 반상회를 했더니 반 활동이 너무나 잘 되었다.
교회장은 통장 일을 도와서 그때 당시 청량리 88단지 주변에 가서 한 달에 한두 번씩 청소년 선도활동을 밤을 새워가며 하였다. 나는 동사무소 부인회에 가입해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인연 된 사람이 전도되어 점점 교회 식구가 늘어났다. 친정 조카들도 나에게 와서 전도되었다.
그렇게 체육관에서 예배를 잘 보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댄버리 수난을 당하시게 되자 당시 정부에서는 통일교회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때였다. 정 관장을 파출소에서 불러 갔더니 이제는 체육관에서 예배를 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 관장은 그러니 어떡하면 좋으냐고 해서 협회에 보고하니 교회를 얻으라고 자금을 대주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앞에 2 층 건물을 얻어서 칸막이를 세우고 건물의 반은 세를 주고 반은 성전을 꾸미고 방도 하나 들여서 딸 진영이가 피아노 반주를 하는 가운데 예배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교회 운영이 그럭저럭 제법 잘 되어 갈 때 세계일보 창간에 맞춰 6500가정 축복을 받은 일본 식구 23명이 이문교회로 배치되어 왔다.
나는 새벽예배에 가서 예배를 보고 일본 식구들 밥을 해주곤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밥솥에 밥을 지어 놓고 도시락에 밥을 떠가서 챙겨 먹으라고 하고 일본 식구들에게 온 정성을 들여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먼 이국땅에서 와 새벽부터 신문 배달과 구독자 모집을 하러 다니며 고생하는 식구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잘 먹이고 좀 잘해 줄까 하며 청량리 도매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와 맛있는 음식을 해먹이려고 애도 많이 썼다. 또 제직회에 건의해서 부산 범냇골 성지 순례와 경주 불국사, 설악산, 민속촌 등 구경도 자주 시켜 주곤 하였다. 이들이 임지 생활이 끝나고 떠날 때에는 일본에 가면 김치가 먹고 싶겠다고 하여 김치도 담가서 몇 쪽씩 싸서 들려 보 내주었다.
그리고 통반 활동을 할 때에는 통반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동장을 통해 각 통장들에게 연락하여 통장 집에 동민들을 모아 놓으면 교회장이 강의를 해 가면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때는 축복가정 동원도 자주 있었다. 서울 관악교회, 청파동 본부교회, 춘천 교구 본부 등에 20일간씩 동원에 안 빠지고 나갔다. 72가정 김인애 언니도 활동 기간에 만나 알게 되어 최원복 선생님 댁의 외할머니 첫 제사 인데 좀 도와줄 수 있느냐고 연락이 와서 김경술 씨와 둘이 워커힐아파트에 가서 준비를 늦게까지 하게 됐다. 최 선생님께서 저녁 밥상은 430가정 들과 겸상을 하겠다고 하셔서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그때 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우리 약혼식 때 한번 뵈었는데 어떻게 내 이름을 이때까지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 약혼을 누구하고 했느냐고 물으셔서 나는 깜짝 놀랐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최 선생님은 “나는 이대 교수 때 첫 시간에 출석부를 들고 가서 출석 한번 부르고 나면 그 다음날부터 출석부 안 들고 가도 학생들의 이름과 번호를 다 기억하고 출석을 불렀어요.”라고 하셨다. 뜻 앞에 부름 받고 아버님께서 성별 생활을 하고 이혼 준비를 하라고 하실 때 남편으로부터 위기가 있을 때면 아드님의 역사로 위기를 모면하는 하늘의 역사가 있었다는 등의 간증도 해주셨다.
그때 인애 언니에게 “혹시 누구 이민 가는 식구가 있으면 장롱 하나 얻어주세요.”하고 얘기했다. 얼마 후에 이민을 가니 장을 실어 가라고 전화가 왔다. 언니 집에 가니 언니가 하는 말이 사촌 언니가 장을 달라는데 개척길을 가는 필례 씨에게 주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나에게 주는 거라고 하신다. 인정보다 천정에 따라 사시는 인애 언니가 존경스럽고 고맙기 그지없다.
이문동교회에서 목회 15년 근속상을 받아 일본 연수도 2주간 교회장들만 다녀왔다. 그때만 해도 목회자 사모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이문교회에 있을 때 친정 조카 윤성호와 윤경호가 한일 가정으로 6500가정 축복을 받게 되었다. 친정 오빠들한테는 교회에서 약혼만 했다고 하고 광주와 보성에 가서 예식장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여 피로연을 하였다. 두 조카며느리들의 성실함과 지극한 효성에 두 친정 오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칭찬을 많이 하셨다. “한국 며느리 같으면 어림도 없지. 이번 설에도 보름 동안이나 시댁에 있으면서 제사며 뒤치다꺼리며 다 했다.”라고 칭찬하고 흡족해하신 큰 오빠는 기성 축복을 받으시고 영계에 가셨다.
둘째 오빠 역시 며느리가 손자를 3명이나 낳아 준 고마운 며느리라고 자랑하셨다. 또 며느리가 보성 시골에 올 적에 깻잎 몇 장을 싸가지고 와서 는 신랑이 두고 오면 버릴까봐 가져왔다고 한다며 알뜰한 며느리라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시던 둘째 올케도 흡족해하셨다. 두 일본 조카며느리들이 친정 집안의 보배들이다.
이문교회에서 한창 부흥이 될 때 이지섭 집사님이 부인인 김남희 집사가 기성교회에 나가는데 나더러 전도해서 믿음의 딸로 하라는 암시를 주었다. 몇차례이집을방문하여마침청평수련소에서신호철강사를중심으로천막 부흥회를 하던 때여서 김남희 집사에게 한번 다녀오라고 권고를 하였다.
김 집사가 내 말대로 청평 수련소를 갔다 와서는 자기 집에서 금요일 속회를 보면 좋겠다면서 식사들 하지 말고 예배를 보러 오라고 하였다. 식구님들 하고 가서 예배를 본 후에 집사님이 밥상을 차렸는데, 잔칫집 못지않게 진수성찬을차려서나는깜짝놀라왜이렇게준비를많이했느냐고했더니청평 수련소 부흥회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아 그렇게 아픈 다리가 나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열심히 지성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신다.
이문교회와 사택의 거리가 좀 멀어서 나는 일요일만 되면 들통에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어 예배 후 식구들이 먹을 수 있게 준비해서 두 아들이 리어카에 실어 날랐다. 식구들을 위한 일이라면 열심히 노력하고 봉사했다. 그렇게 했더니 부인 식구들이 계속 그렇게 사모님 혼자 힘들게 할 게 아니고 우리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점심 준비를 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였다.
한편 믿음의 아들 김동호-이정숙 가정은 당구장을 운영하면서 어려운 우리 살림을 도맡아 해주시다시피 하였다. 시장에서 자기네 생선 한 마리를 사면 우리네는 가족이 많다고 두 마리를 사서 갖다 놓고 가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지금 좀 어려워도 참으시라고 하더니만 쪽방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새로 지은 집의 반지하에 방 2개짜리 멋진 집을 800 만 원이나 들여 옮겨 준 덕에 편하게 잘 지내다가 등기가 난 14평 건물의 집을 그 돈으로 구입해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보기에 이정숙 집사의 하늘 대한 충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려운 교회장 살림살이를 통째로 맡아서 어려움 없도록 돌봐준 이들 부부의 공은 하늘나라에 길이 기록되리라 믿는다.
이렇게 이문동교회에서 재직할 때 참부모님께서 수도권 목회자들을 제비뽑기를 해서 인사이동을 하셨는데, 문래 교회로 가게 되었다. 문래 교회는 아주 오래된 고택에다 지붕에서는 비가 줄줄 새고 일본 대원 식구는 식구 집에 가서 기거를 하고 있었다. 마침 777가정 김주형 장로님이 일성건설 여의도 창고장으로 계셨는데 헌 자재들이 많아서 얻어다가 방 2개를 만들어서 일본 식구도 교회로 오게 하여 같이 살았다. 문래 교회에서 그렇게 8개월 시무하다가 환고향 방침에 따라 목회를 면하게 되었다. 목회 생활은 끝냈지만 영광스럽게도 참부모님이 주시는 천일국주인상을 받았다.
두 아들 2세 200가정 축복
1992년 2세 200가정 축복식이 있어서 통일산업에서 근무하고 있던 큰 아들 인호와 둘째 인태가 축복 대상자가 되어 축복받을 준비를 하였다. 군 대에 가 있던 둘째 아들 인태는 내가 카메라를 들고 면회 가서 사진을 찍어 와 축복 서류를 제출하였다. 그때 축복식은 본인이든 부모든 아무도 없이 참부모님이 사진을 걸어놓고 사진으로 상대를 맞춰 주셨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을 맡기겠으니 부모님께서 해주시는 대로 찰떡처럼 딱 붙어 사이좋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만 올렸다.
큰아들 상견례 때에는 아들이 창원에서 오지 못하고 며느리 부모와 우리 내외만 상견례를 가졌다. 큰며느리 사돈은 430가정 김종진-김용선씨 가정으로 그 외동딸 김희선과 짝이 맞춰졌었는데 우리 재단에서 8년 동안 근무하고 있었다. 신랑 사진만 보고도 상견례 자리에서 축복받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나중에 내가 “너는 어떻게 신랑 얼굴도 안 보고 축복받겠다고 했니?” 하고 물었더니 친정엄마가 할머니한테 많은 시집살이를 당해서 시부모님만 좋다고 하면 하려고 했다고 대답하였다. 축복식 예행연습을 하는 날 만나서 축복 식장에 들어갔다. 둘째 인태도 축복식 2일 전에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 상견례를 가졌다. 둘째 사돈 역시 430가정으로 허종수-김월자씨였다. 그때 작은며느리 허순희는 숙명여대 학사장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성균관대학교 4년 동안 장학생으로 공부한 수재인데다 인품 또한 말할 수 없이 착한 며느리였다. 인품이나 심성이 너무나 곱디고운 며느리들을 인연 맺게 해주신 참부모님께 한없는 감사를 올린다.
큰아들은 손자 원철이를 낳아 잘 길러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잘 다녀와 직장에 다니고 있다. 둘째는 큰손녀 애진이는 우크라이나 유학을 잘 마치고 왔으며, 손자 원일이는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 공부하고 있다.
딸 진영이는 같은 430가정의 신흥균 씨 가정 큰아들 인웅이와 축복받아 미국에서 아들 둘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둘째 인태를 선문대에 보낸 얘기를 하고 싶다. 고3이 되어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선문대학교에 원서를 써 달라고 했더니 깜짝 놀란 담임선생님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못 가는 학생이 가는 대학이지 인태 같은 실력 있는 아이를 왜 선문대에 보내느냐고 정신이 없는 어머니 아니냐고 난리가 아니었다. 첫 번 찾아갔을 때에는 원서를 못 받고 며칠 후 또 가서 울면서 사정했다. 인태는 꼭 선문대에 보내야 한다고 우는 나에게 나중에 후회는 말라고 하면서 원서를 쓰게 해줬다.
그런 후에 선문대 사목이신 이요한 목사님이 인태 성적표를 보시더니 “너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성적을 가지고 왜 선문대에 왔느냐?”라고 하셔서 인태는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왔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단다. 그 후 부모한테 효도하려고 선문대에 온 학생이 있다고 교내에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 72가정 김관해 학생처장님도 선문대 보내느라고 수고했다는 인사까지 하였다.
나는 1970년 12월 1일, 3년 임지 동원을 했을 때 아버님으로부터 팔뚝만한 잉어를 받은 몽시가 있어서 인태는 남편 뒤를 이어서 꼭 목회를 하도록 해야겠다 싶어서 선문대 목회학 공부를 하기를 바랐었다. 졸업식 때 보니 사회복지학과 졸업장이었다.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큰아들 인호는 이문동 개척교회 당시 힘들게 살 때인지라 어떻게 대학을 가겠느냐고 하며 성동기계공고에 입학해 3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그때만 해도 장학금을 받으러 내가 학교에 가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아이를 공고에 보내 놓고 장학금 받으러 오는게 좋으냐고 핀잔을 받았다. 제조 자격증을 따서 창원 통일산업에 근무하면서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졸업장을 받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야간으로 공부하면서 너무나 고생이 많았던 큰아들에겐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고등학교를 공짜로 다니면서 살림살이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딸 진영이도 고등학교 3년간을 전체 수석 자리를 차지하고 장학금을 받았다. 학비를 내지 않고 돈을 벌어다 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특차로 인하대 관광과에 진학해 졸업하고 여행사에서 근무하였다. 이 딸 덕분에 해외여행도 많이 했다.
참부모님 덕분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애들 교육하는 데 힘들지 않게 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도 감사하다. 하늘은 보잘것없는 나를 불러 주셔서 지금까지 한없는 감사와 은혜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불변의 심정으로 살고 가고 싶다. 자녀들도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면서 부모처럼 지성으로 교회를 다니기를 바라고, 부족한 부모였지만 자녀들로부터 신앙만은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 부모였다고 하는 말을 듣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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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창 가정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일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