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가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책을 쓰므로서 정국은 다소 안정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학파의 사상과 주장이 받아드려지지 못했고 고식적인 세도정치가 판을 침으로서 서정의 쇄신은 고사하고 탐욕과 부패로 삼정(三政: 田政, 軍政, 還穀)이 문란하고 지방관리의 수탈이 심해서 국정은 어려워지고 민심은 흔들렸다. 선각자들의 실학적인 개혁의 주장은 대세를 움직이지 못하여 과학기술은 도외시되고 말았으니 나라가 발전되지 못하였다.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섭정하여 서정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열강들의 개화사상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민비일파의 정권다툼으로 국내형편은 혼란만을 거듭했다. 따라서 선각자들의 개화의 노력, 독립자강(獨立自彊)의 노력도 허사가 되어 잔악한 일제의 마수에 걸려들어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을 초래하는 원인이 조성된 시대라고 하겠다.
영조시대의 활동한 우리 광김의 인물로는 먼저 계헌 김 계(金 계:30世)가 있는데 영조4년(1728)에 이인좌가 모반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반군들이 안의를 점령하자 이 때 합천의 조성좌가 밤에 군수 이정필을 찾아와 협박 할 때 힘이 장사인 김계는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고 별군을 구성하여 반군 일당을 소탕한 공로로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인좌의 난에 김수견(金壽堅:31世)은 반란이 일어나자 종군하여 적의 괴수를 사로잡은 공으로 판관에 추증되었으며 수운재 김지원(金智元:29世)과 김도원(金道元:29世) 형제 또한 의병참모로서 예안 의병대장인 이수겸을 보좌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은 임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근시재의 5대 손이므로 이 집을 가르켜 임진, 정묘, 병자, 무신의 '4란의 창의 가문' 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 때 적암 김동준(金東俊:28世)은 경종조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병조정랑이었고 기주관으로 일할 때 상을 당하여 향리에서 거상중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을 못하고 소모사 백화재 황익재에게 서신으로 적을 섬멸할 방략을 제시하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며 그대로 적용하여 적을 토평하여 원종일등훈에 녹훈되고 유고가 있다.
그 밖에도 이인좌 난에 창의한 광김으로는 덕헌 김천환(金天煥:29世)은 예천에서 졸와 김치장(金致章:32世)과 서호 김 박(金 撲:31世)은 안동에서 김경화(金慶華:32世)는 호남에서 창의했고 그 밖에도 더 있었으니 광산김씨는 언제나 군주를 옹호하는 충절의 길을 걸어왔음을 증명하였다.
이인좌의 난과 관계 없으나 영조시대에 활동한 현조들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김양택(金陽澤:32世)의 호는 건암이니 영조조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 헌납, 보덕을 거쳐 영의정(정1품)에 까지 올랐다. 그가 홍문관 부수찬(종6품)으로 있을 때 당시 좌의정이던 정석오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받아 산청현감으로 좌천된 일도 있는 것을 보아 꼿꼿한 광김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영돈영부사(정1품)로 타계하니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사구재 김원택(金元澤:32世)은 영조조에 감역을 비롯하여 시평과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판결사, 동돈녕, 한성판윤에 승진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직하 김상복(金相福:33世)도 영조조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검열, 사서, 정랑, 보덕, 부제학과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배수되었는데 영상이 된 처음 자리에서 왕실을 바로잡고 의리를 밝힐 것을 아뢰니 왕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파직을 명했고 그래도 쌓인 포부를 다시 진언하니 삭직을 당하여 공주로 유배될 정도로 절의가 굳었다. 순조조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근와 김 희(金 憙:34世)는 영조조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조에 규장각 직제학, 대사성, 경기도관찰사, 이조참의를 지냈고 우의정을 지냈으며 동지사 사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기로소에 들어 갔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이길헌 김기성(金箕性:34世)은 장헌세자의 딸과 결혼하여 광은부위가 되었는데 문장이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고 정조 때 동지정사로 연경으로 떠날 때 〈어제노행시〉를 하사받았다.
퇴어자 김진상(金鎭商:31世)은 숙종조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으로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설서, 수찬, 지평을 지내다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이조정랑, 부제학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대사헌과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영조 13년(1737)에는 평장동에 시조공의 유허비를 세울 때 동국필언에 올라 있는 명필이었기에 그 비문을 썼다. 유고가 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김광윤(金光胤:31世)은 영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귀성도부호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묵와 김화택(金和澤:32世)은 영조조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설서, 승지를 거쳐 춘천, 곡산부사등 외직을 나갔으나 양친을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하여 상소하니 임금도 감동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였다고 하며 후에 부제학을 제수하였다. 춘천부사로 재직 시에는 실전했던 선조 광성군 김 정(金 鼎:18世)의 묘소를 찾아 수호하였다.
김화중(金和中:32世)도 이 무렵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과 장령을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석당 김상정(金相定:33世)도 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김하재(金夏材:33世)는 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의 아들로서 이 시대에 강원도 관찰사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낸 바 있는데 이재학의 무고로 화를 입었으나 융희 1년에 신원되었다.
육인재 김광국(金光國:32世)은 생원시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학식이 해박하고 문장이 좋아 눌은 이광정, 강좌 권만과 더불어 사귀니 영성군 박문수 어사가 공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고 유고가 있다. 김광호(金光虎:32世)는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한성참군, 선전관, 주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 때 조정의론이 분열되어 권간의 농간에 대해 김진상, 홍보석, 송환기 제현과 함께 소장을 올리니 4대신과 같이 무고하였다는 죄로 삭직되었다. 그 후 성균전적을 거쳐 삼례찰방으로 나갔을 때 사창을 털어 구제하니 군민이 거사비를 세웠고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사직하였다. 병자호란에 창의한 신성 임향조 김 봉(金 鳳:26世)의 증손자인 석포 김복수(金復壽:29世)는 어려서부터 탁이한 자질과 총명 영오하여 큰 재목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나주괘서의 변' '사도세자의 참사' 등 시국이 혼란함을 한탄하고 산 언덕에 '석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경서와 사기를 탐독하였으며 수직으로 가선이었다.
김종태(金宗台:30世)는 영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 사헌부 지평, 장령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을 겸하였다. 서장관으로 중국도 다녀왔고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삼우재 김 윤(金 鈗:32世)은 영조조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이 높고 성리학을 탐구하여 유고가 있다. 연암 김상익(金相翊:33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통신종사를 거쳐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지도에 유배되어 졸하였는데 정조조에 신원되고 순조 때 복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용봉 김홍구(金鴻九:32世)는 눌은 이광정의 문인이다. 천품이 총명하고 재예를 겸하였으니 스승이 공을 평하되 "침착하고 단정하며 참다운 군자"라 극찬하였다. 선대 유지를 계승하여 임하에 묻혀 후학을 장려하였고 도의로 사귀고 학문을 강론해 유고가 있다.
복재 김두추(金斗秋:34世)는 경사에 밝았고 영천군수로 재임시 선정을 펴 치적이 나타났고 부정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관안군에 봉해졌다.
정조조 때 김명헌(金命獻:27世)은 제주에 살면서 학문 익히기를 즐겼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마침 어사 심락수가 베푼 과장에 응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공의 나이 81세였기에 특별히 급제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벼슬길에 부임할 수 없음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명하기를 '제주 대정현의 유생 김명헌은 다음 해 급제자로 숙배케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별세하니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김효건(金孝建:31世)은 정조조에 벼슬길에 올랐는데 사간원 대사간과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정조임금이 공의 단정한 풍모와 굳은 지조를 칭찬하여 상까지 내렸다 하니 그의 임품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만림 김범구(金範九:32世)는 대사간 류정원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성취하였고 덕행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동암 류장원, 반구재 권성제 제공과 도의로 사귀고 서당을 개설해 후진 육성에 힘썼고, 낭옹 김열택(金說澤:32世)은 별천으로 현릉 참봉과 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정조 후기에 특명으로 승자하여 교자를 내렸으나 그래도 부임치 않았다. 취석당 김상구(金象九:32世)는 영조조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정조 17년(1793)에 실시한 도산별시에 문과 급제하였으나 문제가 생겨 파방되고 말았다. 공의 재주를 아껴 왕이 자석으로 만든 벼류와 옥책띠를 하사하고 빈흥록을 간행할 것을 명 받아 실행 하였으며 유고가 있고 반와 김성응(金聲應:30世)은 정조 식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은 도사였으며 독실한 행실, 깊은 학문, 넓은 지식으로 향당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유고가 있다.
과재 김정묵(金正默:34世)은 경학으로 천망되어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사림의 천거로 사헌부 지평 겸 경연관, 서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리고 선산 아래에서 두문하고 성리학에 전심해 그 밝은 식견과 문장 및 덕행이 뛰어나 당시 사림의 사표가 되었고, 구봉 김우택(金禹澤:32世)은 예학에 정통해 향천에 올랐다. 4례의 32편과 음사합록과 거가예의 등 각 1권이 가장되어 있고 예론 변설 1권이 세상에 알려져 예학의 대가로 통칭되었으며 휴정서원에 배향되었다. 김기상(金箕象:34世)은 영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고 주재 김기응(金箕應:34世)은 학문이 성취하여 생원시를 거쳐 수령을 지내다가 황주목사에 이르렀고 점안재 김기헌(金箕憲:34世) 또한 같은 시대에 홍릉 참봉으로 출사하였다가 함평, 밀양, 충주 등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인일정 김성은(金性 :30世)은 정조 10년(1786)에 평장동 왕자공의 유허에 사우를 짓는 책임을 맡았고 정조 21년(1797)에는 문안공 양감의 위에 시조공의 위패를 봉설하고 서원강당 중수기를 썼다. 순조 3년(1803)에는 임진왜란 때 장성남문에 창의한 곳에 비를 세웠고 순조 26년(1826)에는 유림의 발의로 노산사를 창건하는 등 그 외에도 많은 문사일을 하였다. 동국문헌록, 삼강록을 편저하였고 성리변론, 태극해설 등을 저술하였으며 유고가 있고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김 수(金 燧:32世)는 재질은 경륜을 쌓았고 효우에 돈독하였으며 족조인 김성은과 더불어 장영공 진( ), 전리판서공 광리(光利)의 묘소를 풍덕, 망포 응봉하에서 비로소 찾아 수호하였고 저서로 동유록 및 풍천일기가 있다.
김상순(金相順:33世)은 순조조에 벼슬이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내면서 국가에 충성하였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죽하 김기서(金箕書:34世)는 정조조에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고 순조조에 감역을 제수하였으되 또 나가지 아니하니 그 때 공론이 공을 경연관으로 뽑아야 한다 하니 부득이 나가 시직, 부수, 위수를 거쳐 청도군수로 선정하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조야에 중망을 박았고 김효수(金孝秀:31世)는 정조조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였다. 김재삼(金在三:35世)은 학행이 높아 음사로 직장, 현령, 선산부사를 거쳐 형조참판,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붕당의 폐단을 없애려고 탕평책을 썼지만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파당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과 사도세자 사건 등의 격동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난국을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타계하여 지속적으로 이끌고 나가 성공하고 안정기에 들어서자 재야에서는 실사구시의 학문이 일어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니 이곳이 이른바 실학이다.
우리 광김에서도 실학 쪽에 관심을 갖는 이가 있었다. 암당 김도혁(金道赫:34世)은 노암 정필규 문하에서 경서를 독실히 탐구하여 오경중의 하나인 서경의 한편을 주해하였고 선기옥형(오늘날의 천구의)도 만들었다. 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구조(직각을 낀 삼각형의 짧은 변이 구, 긴변이 조)와 천문과 산수를 분명히 알게 하였고 저서로 오행심성도와 암당유고가 있다. 김기승(金箕昇:34世)은 영조조 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안군수를 지냈고 황주진영 병마동지절제사겸(종4품) 대구중군을 지냈고 수원북문을 건축하는데 참가하여 활동한 공로로 정조 임금으로부터 어주를 특별히 하사받았다.
이 무렵에 김기은(金箕殷:34世)은 정조조에 춘장대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사인, 대사성, 승지를 거쳐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고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또한 기기재 김상연(金尙 :30世)은 효성이 지극하고 숭조정신이 투철하였으며 대학, 중용, 상례비요 등 학문을 연마하여 학행으로 유명하였고 용양위 부호군을 거쳐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제수받았으며 논산에 있는 휴정서원에 배행되었다. 소산 김도손(金道孫:34世)은 시례고가의 법통을 이어받아 학문이 깊었고 필법 또한 정묘 간결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장려하였다.
우리 광김에서 외척의 세도정치 시대에 활동한 이가 잘 나타나지를 않는다. 위암 김상악(金相岳:33世)은 순조 때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에 부담을 느끼고 벼슬길에서 영달할 것을 단념하고 관악산에 들어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근세의 역학을 총망라한 저서로 산천역설 12권과 위암시록 3권을 편찬했다. 그 후 정조의 명을 받아 홍릉 참봉을 지냈으며 첨지중추부사와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임명되었다.
세도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광김은 정부의 요직에 있던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개화기의 주역을 담당하지 못했음이 아쉽다. 벼슬길에 있었던 사람을 구태여 찾는다면 철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종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지냈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던 김영목(金永穆:37世)이 있고 호조참판을 거쳐 형조와 예조판서와 이조판서까지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을 받은 김영철(金永哲:37世)등이 있으나 정도를 걷고 덕행을 쌓는데 주력했고 매국적 행동을 한 분이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번포 김재창(金在昌:35世)은 정조조에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순조조에 부수찬, 승지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초천 김상휴(金相休:33世)는 순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지와 이조판서겸 예문관 제학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나이가 많아 기로소에 들어갔다. 김낙수(金樂壽:33世)도 이때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과 이조참판을 지냈는가 하면 김재전(金在田:35世)은 순조조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외직으로 봉산, 안변부사를 거쳤고 내직으로 사간원 대사간과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에 으르렀다.
순조조에 활약한 광김의 인사를 찾는다면 김재원(金在元:35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고 승계하여 의주 부윤에 이르렀다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김기순(金箕순:34世)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릉 참봉을 첫 벼슬로 각 고을의 수령을 거쳐 나주목사에 임명되자 나가지 않았고 재임중 치적이 현저해 왕이 교서를 내려 우부승지에 특진시켰다.
평암 김상면(金相勉:33世)은 문과 급제하여 정자 벼슬을 시작으로 가주서, 성균관 전적, 장령을 거쳐 금산 현감으로 나갔다가 사간원 헌납, 이조정랑 등 여러 요직을 거쳐서 철종조에 형조참의에 까지 승진되었다. 귀산 김성관(金星觀:33世)은 순조조에 생원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천성이 고결하고 명민하며 위엄이 있었으며 강직하여 공의 앞에서 함부로 비리를 행하지 못하였다. 선조의 유훈을 지켜 임천에서 자연을 벗하며 구도 수학하였고, 김재성(金在成:35世)은 순조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교관 벼슬을 시작으로 각급 관작을 거쳐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김종범(金宗範:30世)은 학문이 높아 음사로 간성, 해주, 연안 등 각 고을의 수령으로 선정하다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김공현(金公鉉:36世)은 순조조 식년시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김득현(金得鉉:36世)은 효력부위와 용양위 부사맹을 거쳐 돈녕부도정을 역임하고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는 등 그 외에도 여러분이 있었다.
이어서 헌종, 철종시대에 활약한 인사를 더 찾는다면 김재청(金在淸:35世)은 헌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대사성과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가 하면 김기주(金基周:35世)는 순조조에 벼슬길에 올라 헌종조에 동부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까지 승진하였으나 그 직위를 탐하는 자들이 있어 춘천부사로 자원하여 내려앉는 겸손을 발휘한 바도 있다. 미서 김재현(金在顯:35世)은 철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을 거쳐 이조판서에 까지 이르렀으며 김수현(金壽鉉:36世)도 이 무렵에 같은 이조판서를 거쳤고, 김기현(金琦鉉:36世)은 호조참판을 지냈고 광석 김태현(金台鉉:36世) 또한 이조참판을 같은 시대에 지냈으니 광김의 내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서계 김재찬(金在燦:35世)은 강고 류심춘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호를 서계라 하였고 사림의 중망으로 좌수가 되었으며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저서로 태극도설, 서명연주, 퇴소유요, 해동명현록, 서계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여기에서 좌수란 향청의 으뜸 벼슬로 자문하는 직책인데 그 고을의 향사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향사가 천거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는데 주로 평민신분에서 맡아 향리를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성들에게 정령을 전달하고 민정을 대표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유독 안동과 울산좌수 만은 평민이 아니고 양반계층에서 담당하는 전통이 있었으니 위에 말한 서계 재찬의 조부 만오헌 김성열(金星說:33世)과 선친 애오헌 김도진(金趙振:34世)도 도학과 사류의 추앙을 받아 안동좌수를 역임하였으니 세간에서는 이 집을 3대 좌수집이라 칭송하였다.
석하 김기석(金箕晳:34世)은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여 현종조에 선치 수령으로 형조참의에 승진되니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고, 정와 김 증(金 증:31世)은 헌종 증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율봉 찰방과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였는데 재임중 청검하여 이름이 높았고 유고가 있다. 외암 김도명(金道明:34世)은 강고 류심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에 깊이 젖었고 예설을 정초하여 향폐를 구하고 여씨 향약을 만들어 시국폐단을 논하였고 후학 장려에 힘써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외암 문집이 전해진다. 하서 김응규(金應奎:37世)는 헌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인품이 고매하고 의표가 단정하였으며 경사에 밝아 사림의 추증을 받았고 하서 유고가 있다.
정암 김의표(金儀表:34世)는 헌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비롯하여 이조정랑까지 역임하다가 외직으로 제주목사가 되었는데 사헌부 장령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에 까지 승진되었고, 김재헌(金在獻:35世)도 이때 벼슬길에 올라 금성군수를 지내었다. 김우현(金佑鉉:36世)은 헌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와 목사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김오현(金五鉉:36世)은 고종조 생원시에 합격하고 세마였으며, 목사를 거쳐 돈녕도정과 가선에 올랐다.
19세기의 중엽부터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 년간 게속되어 온 세도 정치로 정치기강이 무너졌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은 철종조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각조의 참의와 대사간을 거쳤고 고종조에 들어와서 형조참판과 성균관의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좌빈객,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고, 어주까지 하사받았으며 말년에는 보국숭록대부(정1품)에 까지 오른 우뚝 솟은 인물이다.
김재성(金在聖:35世)은 천성이 호방하였고 춘추와 병서를 탐독 정통하였으며, 기력이 과인하여 궁술에 능했으며 무과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김증현(金曾鉉:36世)은 생원시에 합격 출사하여 목사를 지내고 승계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김익현(金翼鉉:36世)은 철종조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비롯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정정에 밝아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폈고 부응교를 역임하고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김기문(金箕文:34世)은 문과에 급제하여 별검을 지내고 병인양요 때 양성 영정을 받들어 승희전에 봉안한 공으로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열관,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다.
계운 김낙현(金洛鉉:36世)은 철종조 진사시에 합격하여 사림의 일천으로 현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경연관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익수(金翼洙:38世)는 풍도, 언행이 일문의 모범이 되었고 철종조에 무과 급제하여 삼군부 낭청을 거쳐 훈련원정, 도총관과 승지를 지내고 가선대부 반열에 올랐다. 고종말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임금을 사모하는 사군대를 쌓고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서울을 향해 망배를 하였다. 남파 김갑교(金甲敎:32世)는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승문원 정자를 지냈다. 이 시대에 같이 과거를 본 청오 김봉상(金鳳相:34世)은 문필과 시화에 탁월하여 당시 영남의 거유였던 방산 허훈과 교류가 돈독하여 드디어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과거에는 관운이 없었는지 두 사람 다같이 번번이 실패하였다. 도산과 문순공 시비(퇴계 이황과 그의 문도인 후조당 김부필이 시호가 같았음으로 일어난 문중 싸움)가 있었는데 예리한 필봉으로 이를 막아 예조로부터 문순공의 문하에서 다시 문순공이 나니 그 어찌 광명이 아니겠는가(文純之下又出 文純 不可光榮哉)란 비답을 받아 왔으니 문중의 선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여생은 즐거이 후진을 양성하다가 졸하였으니 청오 유고가 있다.
김명수(金命洙:38世)는 음사로 사복시 주부와 여러 요직을 거쳐 목사를 역임하고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김직현(金稷鉉:36世)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관 현감 등 여러 요직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김용우(金容愚:34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황산도 찰방과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확재 김학수(金鶴洙:38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 필선, 상례, 전랑을 거쳐 참의, 동부승지를 지내고 예조참판과 우윤, 병조, 형조참판과 좌윤을 역임하고 특진관에 올랐다. 김영로(金永로:37世)는 동몽교관으로 식년시 문과 급제하여 검열에 발탁되고 교리, 선전관을 지내고 사직소를 올리고 하향하였고 계속 교리, 응교, 순천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고당 김석상(金奭相:34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갑오경장이후 국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김덕수(金德洙:38世)는 고종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응교, 예조참의을 역임하고 좌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섬계 김영윤(金永胤:37世)은 경학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고 예학에 밝았다. 도산, 병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안동 향중에서 추중되었고 저서로 섬계유고가 있다. 서운 김귀수(金龜洙:38世)은 고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해 참봉, 세마, 사직을 지내고 고종조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어, 부수찬, 부응교, 정언, 전랑을 거쳐 동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연심당 김영규(金永圭:37世)는 인품이 고매하여 사림의 추증을 받았고 고종조에 동몽교관으로 후진양성에 힘썼고 연심유고가 있으며, 아우인 연서 김영구(金永龜:37世)는 강고 류심춘의 학맥을 이어 실학에 힘쓰고 학부교관으로 후학 장려에 힘스고 인자한 천품으로 기근이 심한 흉년에 인근 동리의 호세를 자담한 선행으로 동민이 공의 덕을 추모하는 '시혜불망비'가 무주군 안성면 중산촌에 세워져 있다.
낙와 김영익(金永翼:37世)은 재예가 절륜하고 총명하여 경서와 사기에 박통하였으며 공명 정대하고 엄정 간결하여 사림에 추중되었고 저서로 낙와유고가 있고, 익와 김영규(金永奎:37世) 또한 경서와 사기에 해박한 식견으로 저술에 힘써 지역사적지 발간에 심혈을 기울여 지역풍토와 인물사 발간에 공헌한 바가 크고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임하에 은거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고 저서로 익와유고가 전해진다.
좌암 김용현(金龍鉉:36世)은 효우가 극진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사림의 추천과 도천, 어사천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도학을 강마하고 일생을 보냈으며 유고가 있다. 김영전(金永典:37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고 자헌에 올라 종묘제조가 되었으며 서포 김영관(金永寬:37世)은 고종때 효릉참봉을 지냈는데 시조공 설단시 단비건립 등 종사에 공헌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