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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닭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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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한 마리 있다.
주인은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닭은 그런 주인을 보면서
주인을 자신의 조력자 또는 친구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주인, 즉 인간이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생의 보편적 규칙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주인은 칼을 가져와 단칼에 닭의 목을 베어버린다.
닭은 자신의 목이 달아나기 하루 전에도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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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닭 이야기는 칠면조 이야기 등 다양한 버전으로 재생산 됩니다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경험으로 체득하는 귀납적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며 세상을 이해하지만
그 지식과 경험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바로 기존 사회 시스템이며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오히려 그 기존 시스템에 더욱 동화되어 갑니다.
그러다 기존 시스템이 붕괴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기존의 지식과 경험은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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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명을 받고 있는 행동주의 경제학자들은
인간들이 손쉬운 생존의 방편으로
주로 생물학적 본능이나 직감을 따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기존사회 관념이나 생물학적 본능에 즉각적으로 반응함으로서
생존의 편리함을 도모한다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때로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의도적인 사고
즉 계산, 논리, 추론을 통해 상황을 능동적으로
분석해 가기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주장을 20세기 초 물리학자인 화이트헤드가
그의 ‘과정과 실재’라는 거대한 철학 사유 속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성의 기능을 생리학적 관점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실천이성의 개념과
좀 더 형이상학적인,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이성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이 둘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성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재정의 합니다.
바로 (1) to live, (2) to live well, (3)to live better의 과정으로
생리학적 몸의 기능과 이성의 추상적 형이상학의 역할을
다른 기능과 목표를 가진 상반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to live better하기 위한 동일한 기능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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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to live나 to live well하는
생리학적 관점의 실천이성에 주로 집착을 하는 반면
삶의 근본적 물음과 최선의 삶을 추구하는 이성의 형이상학적 기능
즉, to live better 하기 위한 이성적 기능을
단지 철학자들의 유희나 사변적 낭비로 본다는 데 문제가 있지요.
사실, 삶의 근본적 의미와 기능에 대한 고민은
동양철학에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다룬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식 물질문명에 오염되면서
오히려 서양보다 더욱 물질에 집작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창진적 기능이 발휘되지 못하는
딱딱한 물질적 사회로 점점 추락하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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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홍익인간을 말하고 인내천 사상이 우리 문화의 근간이라고 배우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아귀다툼의 진흙탕 그 자체입니다.
아직도 철학이나 역사는 그다지 필요 없는 고리타분한 학문이고
순수 학문은 도외시한 채 오직 돈을 벌기위한 실용학문에만 매달립니다.
우주의 원리와 창조의 아름다움을 엿보기 위한 틀인 수학을
단지 점수를 얻기 위한 계산 과목으로 추락시켰습니다.
똑똑한 고등학생들은 오직 경영대나 의대로만 몰립니다.
아이들의 잘 못이라기보다 부모들의 잘못이고
또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반영하는 창피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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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심 탈레브는 그의 책 ‘블랙스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검은 백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는
과거의 관찰을 미래를 결정짓는 것, 혹은 미래를 표상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타이타닉 호의 선장이었던 E. J. Smith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사고라 할 만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바다 위를 표류하는 배라고는 단 한 척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배의 조난을 목격한 일도 없었을 뿐더러,
내가 재난의 주인공이 되는 사고를 겪은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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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버스를 탈 때마다
사고가 날 확률을 생각하며 염려로 걱정하고
길을 건널 때마다 위험을 인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기존 사회의 통념을 따르고
생물학적인 직감을 따르는 이유는 삶의 편리성을 위해서이고
굳이 그 모든 편리함을 포기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사람들의 이러한 걱정에 대해 탈레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눈을 감은 채 길을 건너지마라!”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관행에 익숙해져서
눈을 감을 채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겠지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눈을 감고 길을 건너고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패러다임 변화 같은 이야기는
쓸데없는 웃기는 얘기일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인 헛소리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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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표현입니다.
제 글을 읽어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패러다임’이라는 표현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새 시대!
어쩌면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이 우리의 삶을 한 단계 고양시켜줄
새로운 시대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이 망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말론자들은 세상의 완전한 멸망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괴롭혀온 과거의 시스템이 붕괴되고
자신에게 유리한 시스템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 또한 저의 개인적인 소망과 바램이
세상을 보는 저의 틀에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비관적인(사실은 희망적인) 견해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늘 스스로 반성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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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가 말한 이론 이성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성의 기능을 통해 일단 세상을 이해하는 일정한 틀이 만들어지면
우주는 그 틀에 맞추어 자신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는 1930년대에 주장하기를 근대 과학자들의 방법론에는 오류가 없지만
그들이 분석하는 세상은 그들이 보고 싶은 틀에 의해 만들어지는
오류 가득한 결과들뿐임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과학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과학의 역사 또한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와 수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권력싸움으로 분석합니다.
이처럼 이미 그는 ‘과정과 실재’라는 1930년대 그의 저작에서
패러다임 개념을 내놓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의 창시자는
토마스 쿤이라는 과학자이지만
제가 화이트헤드라는 철학자를 더 좋아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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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리는 모두 자신이 보고자 하는 틀 안에서 세상을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갖고 있는 틀을 통해 모든 정보가 재구성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확실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경제 위기의 모습을 어디까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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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제 쓴 글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과거의 역사를 통해 누구는 디플레이션 발 대공황을 유추해내고
또 누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하이퍼 발 대공황을 유추해 냅니다.
더 나아가 과거 문명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통해 경제 붕괴의 시나리오,
아예 수메르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우리를 만든 창조자와의 조우까지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어쩌면 100년도 못사는 인간의 한계상,
어쩌면 우리는 애석하게도(?) 어떠한 붕괴도 만나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을지도 모릅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멋진 저작을 남긴 칼 포퍼는
우리 인간의 정신을 폐쇄적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플라톤을 지목하며
그는 세상의 본질을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처럼 세계는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곳이라면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고자 하는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쳐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정보들을 습득하지만
오히려 정보들을 많이 접할수록 스스로 만든 가설의 노예가 되어
잘 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지적 한계(확인편향의 오류)에 더해
각종 뉴스나 통계를 혼란을 더해갑니다.
똑 같은 사건이 호재가 되기도 하고 악재가 되기도 하니까요.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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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며 대비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결국 허사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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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70대 후반의 한 노인이
종말을 예견하여 혼자 살아남겠다고 산에 들어가 굴을 파고
혼자서 힘들게 생활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처량하게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노인이 예측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마도 그 노인은 그가 꿈꿔온(?) 세상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아마 자연사, 또는 병사로 운명을 달리했을 것입니다.
2012년 12월을 두고도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우주적 대격변이 발생한다!
경제 붕괴가 발생한다!
차원 상승이 일어나서 지구가 새로운 별이 된다!
예수가 재림하여 휴거가 일어난다!
어쩌면 그러한 많은 다양한 종말론 버전들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현 시스템에 지쳐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역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이 있겠지요.
그래서 살아남고자 도를 닦던 지하 벙커를 준비하던
혹은 금과 은을 사고 비상식량을 준비하던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는 것일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준비의 모습들을 보고
비웃기도 하고 또 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안에서 오히려 사람들의 생존에 대한 열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봅니다.
절망은 늘 희망의 씨앗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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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새시대의 열망이
지금의 세상을 부숴버리길 원할 정도로 강렬하다면
새 시대의 도래는 필연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시대!
소수의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이 통제하고 있는 이 시대의 진실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여
더 많은 창조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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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혼자만의 공상이지만 이런 식의 의식 혁명을 꿈꿔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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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부지불식간에 미래를 창조해가는 더 큰 능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뇌피질이 만들어 내는 우리의 미래 예측은
늘 우리의 영혼이 창조해 내는 미래와 다른 건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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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원래는 러셀의 닭 비유를 통해
갑작스럽게 닥칠 미래에 대한 준비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는데
쓸데없는 잡설로 이야기가 새버렸습니다.
철학적 논쟁을 하자는 의미로 쓴 글은 아니니
취할 건 취하시고 버릴 건 버리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정확한 미래의 예측은
인간의 생리구조, 또는 인지구조상 불가능하더라 하더라도
to live better하기 위해 끊임없이 오류를 수정해가며
미래를 예측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의 파편 하나하나가
지금 이순간도 우리의 미래를 창조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그 창조의 시나리오가,
붕괴, 즉 추락을 통한 재창조가 아니라
연착륙을 통한 새로운 이륙이었으면 더 좋겠네요.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 급격한 것 보다는 완만한 변화가 좋긴한데... 역사적으론 .. 급격한것이 더 쉽게 발생하니...
감사합니다^ ^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큰 맥락은 와닿습니다^ ^ 건강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사회의 통념이란....기득권들이 원하는방향이라 생각됩니다......
그러한 방향에 알수없는 거부반응과 불만이.......새로운세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가지로 표출되겠죠....
역사의 흥망성쇄처럼........지구가..... 통....하는 금세기에는 더큰 변화가 있을듯한데.............
많은 개개인들의 의식이 성숙되지않은만큼의 .........험한꼴을 볼것이라 생각되네요......
좋은글 감사 합니다.
찔리는게 많아서 일까요? 이제 것 비빔밥님 글 중 가장 가슴에 와 닿습니다..
빨려들어가는 수채구멍의 수류에 내가 어느지점에 위치하는지 자각하긴 어렵지만..빨려들어 간 뒤의 내가 머물 곳의 주위 환경은 완전히 달라지겠죠. 빨려들어가기 전의 지식이 빨려들어간 후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다만, 내가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존립 할 수 있는 지구라는 자연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나의 생존율을 높여줄 것 같네요. 인문학과 과학에 대한 서적이 가장 가치있는 생존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재난이 앞으로 닥칠지 모르겠지만, 내가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살고 죽는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정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준비를 먼저 하는 것이 생존대비의 과정이자 기본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랜 사색과 통찰이 어우러진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확인편향. 벗어날수없습니다. 다만 그렇지 않다고 오해 내지는 부정할뿐이죠 ㅋㅋ
확인편향을 벗어날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겠지요~^^
'과정과실재' 젊은 날 많이도 씨름했던 책 이름이네요^^ 헤드형님도 간만에 뵈니 반갑구요~ 감사합니다.
오홋! 과정과 실재를 읽으신 분이 계시군요.
저도 학부시절 헤드형님 글가지고 씨름 꾀나했었는데 말이죠..반갑습니다..^^
화이트헤드가 과거 철학쟁이들을 비판하며 이성을 확장적 범위로 광범위하게 말한 것은 인간이 동물의 한 종류라는 점은 아예 무시하고 지나치게 특별하게 개별 규정하여 인간의 사고능력 부분만 집중한 나머지 그 자신의 또 다른 패러다임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그 반대의 측면으로서 동물적 부분을 뛰어넘은 또 다른 본능적 지적 욕구의 추구인 인간의 순수한 진리 추구 본성도 이성의 범주에 포함시켜 인간이 하는 모든 본능, 생각, 사고는 뭔가를 목표하는 상승적 지향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야말로 양적 물질적 계량화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즉, 화이트헤드가 이성의 기능을 인간의 모든 생리적 동물적 본능과 더 나아가 초본능적인 순수한 지적 본능에 기인하는 행위와 느낌, 사고, 모두를 모두 목적 지향적, 합리적 사고능력의 이성의 역할로 포함시킨 건 오히려 굉장히 물질적 개념으로 생각됩니다. 인간이 별을 보고 그 실체를 알고싶은게 꼭 잘먹고 잘 낫게 살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런 것도 더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냐.라고 주장하겠지만 인간이 본능을 발현하고 사고를 할 때는 항상 결실있는 댓가를 바라고 행동하기때문이란 해석 자체도 인간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끼워맞추기 측면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누구나 각자 인지적 편향의 틀속에 갖혀 오류를 갖고 있기에 미래 예측이 어려운 것 맞습니다. 하지만 가식과 부끄러움의 껍데기를 모두 발가벗고 거울을 보고도 미래가 보이지않는다는 건 솔직히 웃기는 일입니다. 내가 가진 돈과 옷과 먹을 것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양보할 인간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모두라면 이런 카페가 생기지도 않았을겁니다. 그런데 인간 각자는 그렇지않습니다. 어떤 다른 인간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숫자는 많습니다. 인간은 탐욕스러우며, 숫자가 많아 각자 더 잘살기 위해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리를 지어살기 때문에 리더가 있어야하고 리더라고 뽑힌자들 또한 인간의 똑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잉여에 대한 탐욕, 이기적 생존본능, 살기 위한 공격과 방어, 공포, 이런 것들을 도덕과 선량함, 처벌과 규제로 추스려 세상을 유지해갈뿐이죠. 자신에게 괴로운 현 상황이 봇물처럼 터지고 기존 시스템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희망도 그런 타고난 이기적 생존 본능과,질투, 탐욕의 하나이지 싶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극소수의 보이지않는 권력과 금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모두 다 깨닫는다고 해도 인간사회 구조는 달라지지않을겁니다.
인간의 본능과 이성은 완전하지않으니까요. 그것의 완성은 타고난 것과 반대되는 포기, 희생, 양보이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 형이상학적 고귀함의 구현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지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경쟁은 계속됩니다. 또한 다가올 미래에 붕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않다고 봅니다. 이미 현실은 아주 천천히 흐름을 달리하고 있으며 그런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미 디자인된 변화가 “붕괴”라는 이름으로 가시화될뿐입니다. 중요한 건 피지배층의 그런 무한경쟁에서 자원의 소모가 많고 통제가 복잡해지니까 그런 개인주의적 개별적 경쟁과 행동이 제거되는 방향으로
붕괴라는 단어는 일반 피지배적 계급들에게는 공포를 심어줍니다. 그러나 붕괴는 가진 것이 많은 그룹에게 충격을 주지않도록 충분한 시간을 두고 면밀히 계획되어 천천히 매일 진행되고 D 데이에 현실화될뿐입니다. <<그러므로 붕괴라는 말 자체가 붕괴를 원하는 현실이 괴로운 일반군중사이에 회자된 것이 아니라 탑다운식으로 유포된 것이라는 걸 알아야합니다.>> 의도적 "붕괴 촉진"을 위해 "붕괴"라는 말이 유포된 거라는 거 말입니다.
이미 매일 매일 정해진 흐름에 따라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붕괴라는 단어를 뇌속에 인식당한 대중들이 충격적 붕괴 D 데이를 공포에 질려 기대반 공포반으로 기다리며 헛다리 짚고 있을뿐입니다.
자본주의로 모든 것을 흡입하여 섭취하고 포식 장악한 그룹들은 때가 되었음을 수십년전에 예측하고 계획하였으며 그에 따라 이미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고 사회전반 구조를 통제가 더 편리하고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미덕의 이름으로 소위 액면가는 협동적 공동조합 형태로 변모시켜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있습니다. 더이상 기존방식이 그들의 이익에 <<지속가능 및 통제가능하지않기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인 바로 지금 피폐한 사람들의 절망적 피곤함과 공포를 증폭시켜 이용하고 있을뿐인겁니다. 어떤 Ism은 그저 목적을 위한 미시적 Tool이란 것을 사람들은 인지하지못합니다.달라진 Tool이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하죠
단지 댓글로 보기에는 아쉬운 글입니다. 차라리 정리해서 게시물로 올려주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일단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언어의 구조 안에서 사고가 일어납니다. 예를들어 '붕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함의에 대한 이해도 교육 수준, 소득 수준, 그리고 체험 수준에 따라 다르게 일어납니다. 화이트헤드의 저작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에 거대한 의식 구조를 체계화 한 대학자입니다. 하지만 구조화에 능한 서양철학에 반감이 있는 분들에겐 그냥 말장난에 불과한거지요. 하지만 그의 글에서 배울게 없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식체계와 언어구조, 그리고 경험구조가 다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코끼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님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지식과 경험이라는 삶의 농축정도가 차이를 주기도 하지만, 인식 수준 자체도 영향을 줍니다. 30살의 젊은 예수가 평생을 연구한 학자들보다 더 깊은 삶의 성찰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보는 수준에 따라 세상은 파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산재한 곳이 될 수도 있고, 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투쟁의 장소로 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하나의 신의 의식의 장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 예수의 의식은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신의 의식이지요. 하지만 또 세상의 의식으로 내려오면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생존을 위해 죽고 죽이는 아귀다툼이 일어나는 곳이지요. 끝으로 보기에 따라 저의 글을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고마운 나침반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악한 역할로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고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창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에도 그리고 safehaven님의 글에도 정답은 없겠지요.
당장의 고단한 내 삶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틈을 내어 글을 쓰는 이유는 글 쓰는 행위가 내 삶을 변화시키고 창조해 가는 과정의 일부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지만 그렇다고 글 쓰는 행위를 굳이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것 저것 다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형이상학적 고귀함을 위해 저의 이익을 많이 포기해 왔습니다. 물론 남을 위해 제 생명을 내놓을 자신은 없지만 옳은 것은 항상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여전히 틀린 것이죠.
물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느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부끄럼이 없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다고 봅니다. 세상엔 70억의 인구만큼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니까요. 신념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최소한 돈에 자존심과 양심을 판적은 없습니다. 흠..쓰다보니 왠지 제 자랑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만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ㅋㅋ
끝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악'이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의식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두려움과 사랑..하지만 그 두려움 또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악은 하나의 체험이고 악한 인간들 또한 내 의식의 반영일 뿐입니다. 왕의 체험을 하건 거지의 체험을 하건 근본적으로 우리가 생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신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이 창조한 선과 악의 현실에서 사실상 자기 자신인 신을 비난하지요. 그리고 사랑의 신답게 굴라고 명령합니다.
시궁창인 현실과 인간의 세세한 삶에는 관심이 없어보이는 도도한 우주의 흐름..
현실에서 날카롭게 대비되는 선과 악의 모습,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악한 인간들에 대한 증오와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마어마한 욕망, 그리고 좌절..
이상은 늘 안드로메다인 현실이지요!
거기에 창조의 책임을 인간에게 돌려버리면 더 꼭지가 돕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환영인 것은 알겠는데 현실에서는 너무나 실제같아 벗어날 수 없지요..
ㅋㅋ..갑자기 이상한 댓글이 됐군요..그냥 저의 넉두리로 들어주세요!!
아무튼 잘 읽고 있습니다.^^ 댓글들도 참 재미있고 볼만합니다.
이렇게 침착하게 장문들을 정리해 주신 님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카페가 좋습니다.
님들이 계시어서..
오늘은 본문이나 댓글이나 읽는 재미가 쏠쏠 합니다. 훌륭한 본문과 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