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姓)을 갈았는가?, 그렇다- 2
발해국의 귀족 성씨였던 대(大)씨와 오(烏)씨들은 고려로 망명하거나
대단위로 유입되어 한반도 곳곳에 살게 된다.
大씨는 태씨로 바뀌었다. 그러나 烏씨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종 2년 고려사가 마감되면서 이들 烏씨들은 같은 음인 吳씨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본다.
한말의 학자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 제1권) ‘호남의 부호 오영석’에서 그 단초를 확인해 보자.
“호남의 부호 중에 오영석(吳榮錫)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논밭에서 생산되는 벼는 1만석쯤 되었다.
민영환은 그를 끌어들여 자신의 문하에 출입하게 하였다.
서울 사람들은 그를 오금(烏金)이라고 하였다.
「吳」와 「烏」가 동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음사(蔭仕)로 누차 군읍(郡邑)의 수령을 지냈다”라고 썼다.
1765년 영조(英祖) 41년 연경사행(燕京使行)으로 갔던
홍대용(洪大容)이 연경의 시장에서 만났던 오가 상인[烏商]은
자기가 조선인이라 말했다. 조선의 吳씨를 친척이라 불렀다.
사기(史記)와 시경(詩經) 주석자들이 동이의 자취를 감주고자,
삼족오인 현오(玄烏)를 제비(燕)로 바꾸어 놓았 듯,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대륙이 한민족 땅이었음을 알아서는 안되었을 터,
고려사 간행과 함께 동음이자(同音異字)인 吳자로 바꿔치기했을 개연성이 너무나 크다.
장유(張維 1587-1638)는 그의 문집인 계곡집(谿谷集 제15권) 의정부 영의정 권공 행장에서
‘권씨(權氏)는 본래 성씨가 김(金)이었다.
그런데 신라씨(新羅氏)의 후예로 행(幸)이라는 이가 고창군(古昌郡)을 가지고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귀부(歸附)하자,
고려 태조가 그 공을 갸륵하게 여겨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했다.[炳幾達權]’ 하여
권씨의 성(姓)을 하사하고 고창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는데,
뒤에 가서 고창이 안동부(安東府)로 바뀌면서 권씨가 마침내 안동 사람이 되었다‘고 썼다.
고려의 정치가이며, 문인이었던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권하 27장)에 보면,
이인로는 그가 찬한 글에서 자신을 농서타리(隴西駝李)라 칭했다.
그 주에 ‘증보문헌비고 제계고(帝系考)’를 인용,
경원(인천) 이씨의 본성(本姓)은 기(奇)씨였다고 기록했다.
신라 때 당(唐) 황제의 이씨 성으로 사성(唐賜姓氏) 받았다고 썼다.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는 당(唐)의 안렴사(按廉使) 김충(金忠)으로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중국 사신으로
왜(倭)에 갔다가 표류되어 영해(寧海)에 표착되었다.
남으로부터 왔다 하여 성(姓)을 남(南)으로 하사하였다.
신라가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하고, 의령 남씨의 시조로 삼았다’고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은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서원(書院) 편에 기록했다.
2000년 통계에 의하면 국내 성씨는 286개이다.
대체적으로 중국에 그 근거를 두고 귀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위에 간략하게 세 집안 만을 소개했으나,
고려가 중기 이후까지 대륙에 존재했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음을 볼 때,
중국 내륙에 있던 민족들이 살기좋은 고려로 이동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집단이 고려 황실을 따라 한반도로 다시 대 이동할 때
자기 고향의 지명을 가져와 성씨의 본관을 삼았고,
정착했으므로 귀화가 아닌 도래(到來)라는 표현이 적절하다할 것이다.
-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첫댓글 성씨에 관한 좋은 정보 잘 보았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좋은 역사의 비밀 감사합니다.
한 선생님!
"농서타리隴西駝李"가 눈에 화~악 들어옵니다...
추모경 내용 전반부 모수제 시절에 대한 기록에 "화원년(丙申,BC85) 봄에 선비 송백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타리佗利'라 했으나, 실은 편안하지도 이롭지도 않았다[火猿之春,鮮松生子,名曰佗利,實不佗利.]"라는 문구가 눈앞을 스치기 때문입니다...젊어서는 북부여의 충신이었으나, 여인 문제로 반역하여 모수제를 도성인 부리성 밖으로 쫒아낸 반역자 그 타리...
좋은 자료, 도움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선생님께도 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