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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대비사업
탁구주역 천영석 감독, 아쉬운 퇴장
1974년 11월 13일 대한탁구협회는 이사회를 열고, 이듬해 2월 인도 캘커타에서 개최될 제33회 세계대회에 대비하여 새로운 체재로 대표단을 이끌어가자는 취지로 먼저 대표단 코칭스태프를 선발했다. 장시간 논의 끝에 남녀대표단의 코칭스태프를 대폭 개편, 감독에 박성인(한일은행) 씨를 기용하는 한편, 여자팀 코치에 박종호(외환은행) 씨, 남자팀 코치에 유진규(대한통운) 씨를 각각 새로이 임용했다.
이로써 리딩 히터로서 한국여자탁구를 세계정상까지 끌어올렸던 천영석(산업은행) 감독은 지난 12년 동안 몸담았던 고난과 꿈의 일선 대표 팀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천 감독 자신뿐 아니라, 탁구계에도 커다란 아쉬움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천영석 감독은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인 62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6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면서 여자대표팀과 처음 그 인연을 맺었다. 당시 대회에서 여자대표팀을 준우승으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고 그 후에도 대표 팀을 도맡아 동남아는 물론 멀리 유럽에도 자주 원정했던 그는 현 한국여자탁구의 눈부신 성장을 가져오게 한 주인공이었다.
천 감독의 주요한 원정 기록을 살펴보면,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66년 방콕) 감독으로 남자단체 준우승과 개인단식 우승,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68년 싱가포르)에서 여자단체 준우승과 여자단식 1~4위 석권, 제13회 스칸디나비아 오픈선수권대회(69년 스웨덴)와 같은 해에 열린 제30회 뮌헨 세계선수권대회, 그리고 제9회 아시아선수권대회(70년, 인도네시아)에서 세계대회 우승자인 일본을 누르고 우승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무엇보다 탁구 편력사에 길이 남을 천영석 감독의 공로는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71년 일본 나고야) 2연패와 73년 사라예보 제32회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부 단체전 우승과 개인단식 3위 입상에 있다 하겠다. 특히 사라예보 세계제패는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세계제패로 당시 여자대표팀을 맡아 찬사를 한 몸에 받았고, 그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73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과 대한민국 체육상 지도상, 5.16 민족상 사회부문 본상(74년) 등을 수상했다.
그 찬란한 영광의 뒤안길에는 또한 천 감독의 남모를 고난과 역경도 없지 않았다. 대표 팀을 맡고 약 2년의 해외원정 경험을 쌓은 천 감독은 64년도 쯤, 독자적으로 한국탁구의 기술개발에 앞장섰던 선각자였다. 선배들이 모두 일본형의 탁구만 배워 그것을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가르치는 것에 그쳐 대일전에서 번번이 패배하며 빈축을 받았던 반면, 그는 일본 탁구전문지를 열심히 연구했으며 60년대부터 국제 탁구계에 발을 붙인 중국탁구의 기술정보를 입수하는 등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여 우리 선수들의 적성에 맞는 전형을 이끌어냈으며 과감하게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켰다.
제8회 아시아선수권대회(싱가포르)가 바로 그 첫 결실을 맺은 대회. 윤기숙, 최정숙, 정해옥, 김길자, 김수경 등 5명이 출전하여 단체 준우승과 개인단식 1~4위 석권이란 성적을 올렸던 것이다.
사라예보 세계대회 우승의 주역 이에리사 선수가 구사하는 주 무기인 ‘루프 드라이브’, ‘톱 스핀’등이 또한 그가 한국형 탁구기술을 접목시킨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당시 서울여상에 재학 중이던 이에리사 선수에게 이를 가르치기 위해 팀 관계자는 물론 이 선수의 부모를 설득해야 했던 일. 72년 스칸디나비아오픈대회 참가 전에 가졌던 국내평가전에서 이에리사 선수가 그 전형을 이용, 그만 패하여 호된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던 일 등 남모를 고난도 많았다.
그러나 43세의 나이에도 사그라지지 않은 불같은 성격과 굽힐 줄 모르는 신념이 있었던 그의 탁구열정은 가히 따를 자가 없었다. 또 선수들에게 지극히 엄격했던 그였지만 선수들의 건강이 좋지 못하면 손수 한약을 달여 먹이는 정성을 쏟을 마큼 속정도 남달랐다. 오직 세계정상에 서겠다는 일념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 그리고 직장 동료들의 이해와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르겠다.
결국 사랑예보 시상대에 올라 코르비용 우승컵을 높이 쳐들고 선수들과 함께 울어버렸던 천영석 감독. 그 영광의 뒤안길에 감추어진 고난의 여정은 이렇게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대표 팀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체육계는 물론 언론계에서도 그의 이 퇴장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세대교체의 일환이란 명분을 내건 협회로서도 세대교체라기엔 너무나 명분이 없었고, 세계정상 군림 이후의 보상은커녕 쪽박마저 깨뜨리는 처사라는 탁구계 일부의 혹평을 또한 면하기 어려웠다.
대표선수 선발
협회는 75년 2월 6일 ~ 16일까지 인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제33회 세계선수권대회에 파견할 남녀 국가대표 후보 선수 22명(남 10, 여 12)을 기본 상비군훈련 실적과 종합선수권대회 성적을 감안, 이사회를 통해 선발했다.
그리고 74년 11월 20일 ~21일 양일간, 신진공고 체육관에서 남녀 각 풀 리그전을 실시, 성적순 남자 2명과 여자 3명을 선발하고 국제적응도를 감안하여 협회 이사회에서 남자 3명과 여자 3명을 추천하기로 했다. 당시 엔트리 숫자가 남 5, 여 4명이었으나 국제연맹에서 발표한 세계랭킹에 여자선수 2명이 10위권 내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여자는 총 6명이 참가할 수 있었다.
평가전 결과 여자대표는 성적순 1위 이에리사, 2위 정현숙, 3위 성낙소 그리고 김순옥, 손혜순, 심경옥 선수를 추천하여 6명을 확정지었으며, 남자대표도 1위 이상국, 2위 최승국, 추천 소영인, 이재철, 박이희 선수 5명을 확정짓고 12월 9일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오픈선수권대회 참패
협회는 74년 11월 28일 ~ 12월 1일까지 스웨덴에서 개최된 제17회 스칸디나비아 오픈선수권대회(SOC)에 당시 서울 신탁은행 여자 단일팀을 파견하기로 하고 대한체육회 해외파견 심의 위원회에 심사를 의뢰했다. 선수단 명단은 단장에 박용일(서울 신탁은행 상무), 감독에 박성인(대표단 총감독), 코치에 손병수(서울 신탁은행 코치), 선수에 이에리사, 정현숙, 성낙소, 김진희, 박혜자 등 5명이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 해외파견 심의위원회에서는 명년 세계선수권대회에 대비하여 김진희, 박혜자 선수를 빼고 대한항공의 김순옥 선수로 교체하여 출전하라는 조건부로 파견을 승인했다. 하여 박성인 감독과 김순옥 선수 경비를 협회에서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실제 완전한 한국대표선발과 다름없이 구성된 선수단은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본 대회는 이듬해 2월에 열리는 캘커타 세계대회의 전초전으로서 우리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소련 등 세계여자탁구 상위랭킹의 국가가 모두 출전해 기량을 겨루는 한편, 토너먼트로 경기가 진행되어 한번 지면 그것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우리 선수단은 단체전 첫 경기인 대 영국전에서 3:2로 어렵게 역전승을 거두었으나 두 번째 체코와의 경기에서 2:3으로 패하여 허무하게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개인전에서도 불운은 잇따랐다. 이에리사 선수가 스웨덴의 이름 없는 신인 헬만 선수에게 3회전에서 2:3으로 패하는가 하면, 정현숙 선수가 준결승전에서 중국의 호옥란 선수에게 0:3으로 패하였고, 김순옥, 성낙소 선수 역시 2,3회전에서 모두 탈락하고 만 것이다.
복식에서 이에리사.김순옥 조가 준결승전에까지 올랐다가 중국의 호옥란.황석평 조에게 0:3으로 패해 3위에 머무르기도 했으나, 결국은 드러낼만한 성과 하나 없이 쓰라린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한국여자탁구의 이러한 행보에 세계의 탁구전문가들조차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1년간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73년 세계대회에서 여자탁구를 완전히 석권하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단체전 우승을 이끈 이에리사 선수에 대해서 세계탁구 전문가들은 전혀 내용이 없는 플레이어라고 혹평했고, 이에 관련한 씁쓸한 외신보도가 국내에 전달되기도 했다.
적어도 그해 2월, 서독오픈대회에서 한국이 단체전과 개인전을 휩쓸었을 때만 해도 한국의 신화는 부동의 것으로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그해 9월, 테헤란 아시아경기에서도 비록 중국에게 모두 패해 은메달 3개에 그치긴 했지만 그런 대로 체면 유지를 해온 편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정확히 10개월…, 한국탁구가 오만한 토끼로 잠들어 있는 동안 유럽의 거북이들은 줄기차게 한국을 따라잡은 격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한국의 패인은 무엇인가? 당시의 탁구 전문가들 그리고 언론 담당기자들의 평은 다음과 같다.
① 출발하기 전 철저한 연습부족이 가장 큰 패인으로 지적되었고 ② 사상 최초로 이룩한 세계제패의 영광에만 집착하여 안일한 자세 속에 체계적인 훈련을 게을리 하여 실력의 향상은커녕 사라예보 대회 때의 실력조차 유지 못한 점 ③ 코칭스태프의 돌연한 개편에 따른 후유증을 치료할 짬이 없었고 ④ 우리의 주 무기인 루프 드라이브나 톱 스핀 등이 세계 각국에서 연구 검토되어 이에 따른 방어술이 연구되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신무기 개발에 소홀했으며 ⑤ 세계제패 전과 같은 집중된 정신훈련이 결여되어 승부의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이전의 아시아경기 때에는 주전인 이에리사 선수가 컨디션이 나빠 패했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선수들의 컨디션이 최상인 상태에서 뜻하지도 않은 체코에게 패해다는 것은 전략적이고 기술적인 지도의 부족이 아닌가하는 질책이 잇따랐다.
이 대회에서 또 하나의 이변은 중국여자탁구가 단체전 준결승에서 소련에게 2:3으로 패하고, 일본이 우리에게 이긴 체코에게 3:0으로 승리하여 결승에서 소련을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한편 남자 단체전에서는 중국이 우승하였고 남자 단식에서는 유고의 슈백, 여자단식에서는 중국의 황석평 선수가 우승하여 세계대회의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복식에서 남자는 스웨덴의 요한슨.뱅슨 조, 여자는 중국의 호옥란.황석평 조가 우승했으며 혼합복식에서는 유고의 스티란치.팔라티누티 조가 우승을 자치했다.
이렇게 전 종목에서 참패한 우리 선수단은 항상 웃는 얼굴로 국민적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이번만은 깊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마중 나온 가족 그리고 탁구인 및 보도진에게 2개월 후의 세계대회의 각오를 다짐하면서 공항을 벗어났다. 그때 우리 선수단의 가슴엔 자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SOC대회 참패 교훈 삼아, 54일간의 시련 돌입
제17회 스칸디나비아 오픈선수권대회(SOC)에서 참패를 당하고 돌아온 한국여자탁구 대표 팀은 남자팀과 함께 75년 2월 인도 캘커타에서 개최되는 제33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계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귀국한지 5일 만인 12월 9일 입소식을 갖고, 신진공고 체육관에서 54일간의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새로 선임된 박성인 감독을 위시한 남녀 코치, 남자선수 5명과 여자선수 6명의 총 14명으로 구성된 선수단은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영하의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고된 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까지 4단계로 나누어 구호를 설정했다.
① 우리를 알자 ② 상대를 알자 ③ 후회 없이 싸우자 ④ 마무리를 잘하자 라는 구호로 훈련시작 전 필승을 다짐했다.
73년 사라예보 제 32회 세계대회 이후 평가받을만한 기회가 없어 우물 안 개구리 격이 되어버린 우리 팀의 실력을 정확히 분석하고 힘과 기술적인 면에서 월등하게 비약, 수준이 높아진 유럽탁구를 연구한 후 경기 위주의 실전연습에 중점을 두었다.
박성인 감독은 최선을 다한 후 겸허히 결과를 기다리겠다면서 기술의 훈련 뿐 아니라 정신력 집중에 주력한 훈련계획을 피력했다. 박종호, 유진규 코치의 지도로 남녀 선수 11명은 겨울의 찬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7시 기상, 서대문 응암동 로터리를 도는 로드웍으로부터 훈련을 시작, 체력훈련 1시간 30분, 기술훈련 5시간이란 하드 트레이닝을 치르며 세계정상 유지를 위한 노력에 노력을 경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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