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사진 여행 (5) -
길림성 집안(集安), 고구려 유적지 답사
아침엔 서파(西坡), 오후는 남파(南坡)로 하루에 두 번씩이나 백두산을 오르고, 그 때마다 확 터인 천지(天池)를 볼 수 있
었던 어제의 감동이 통화(通化)에서의 이튿날 아침까지도 긴 여운으로 남는다. "백두산은 백 번을 올라야 겨우 두 번 만
볼 수 있다." 는 우스개 말도 있는 것 보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송강하(松江河)에서 집안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통화
는1210년 우당 이회영 선생이 세웠던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우국선열들을 기리며 아침 길 나서서 2시간을 달려
집안(集安)으로 왔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만포시와 접해 있는 집안은 고구려의 도읍지 국내성(國內城)이었던 곳,
이곳엔 고구려 중흥을 이끈 위대한 정복자인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을 비롯한 많은 고구려유적이 아직 남아 있다. 전
날의 백두산에서와 달리 한 낮의 집안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호태왕비(好太王碑)와 호태왕릉을 찾았다. 옛 국내성의 동쪽 언덕을 일컷는 국강상(國岡上)에 있는 호태왕비의 이름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다. 태왕의 시호(諡號)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
(長壽王)이 세웠다. 글자를 줄여 안내하고 있는 호태왕비는 높이 6,39m, 가로 2m, 세로 1,48m의 거대한 사면 직사각형
자연석 비다. 풍화에 대비하고 훼손을 막기 위해 비각(碑閣)을 세워 그 안에 안치하고 있었다. 이어 지근에 있는 호태왕
릉을 찾았다. 넓다란 구릉에 가산(假山)을 만들고, 그 산꼭대기에 능침(陵寢)을 안치(安置)한 큰 릉(泰陵)이었다. 능을
오르는 돌무지 언덕에, 마치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으아리꽃이 때맞춰 하얗게 피어 반긴다. 태왕의 호의이리. 능
침 앞에 서는 순간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손 모아 합장(合掌)으로 예를 표하고 돌아 섰다.
다시 장수왕릉 찾았다. 호태왕릉에서 2km 거리의 집안시 토구자산(土口子山) 언덕에 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고
구려 제 20왕에 오른 왕의 능은 거대한 돌무지무덤인 석총(石塚)이다. 1,000여년 긴 세월의 풍화(風化)를 겪으면서도 처
음처럼 완벽한 형태로 지금껏 유지되고 있는 모습에선 경외감마져 든다. 빗속 서둘러 참배를 마쳤다. 집안에서의 마지
막 일정은 시(市) 중심가에 있는 옛 국내성(國內城) 성곽 답사. 하지만 이곳은 다음 일정에 쫓기어 밟아 보지도 못하고
스치고 지났다. 주마간산이었다.
【 1 】광개토대왕릉 편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391~412) - 고구려 제19대 왕(재위 391~412년).
위대한 정복자이며,고구려의 중흥을 이끈 왕.
- 광개토대왕릉에서 본 길림성 집안(集安) 시내와 건너 편 북한 자강도 만포시 압록강변 산
- 호태왕릉 관리사무소 겸 능 출입구
- 호태왕릉 관람도
- 광개토대왕 비각(碑閣)
- 비각 담장 왼쪽에 호태왕릉이 설핏 보인다.
- 호태왕릉 가는 길
- 호태왕릉 / 인공으로 만든 왕릉 산(山)
- 으아리 덩굴꽃
- 능산(陵山) 위의 광개토대왕 능침
- 호태왕릉 능침 석실
【 2 】장수왕릉 편
장수왕 (394~491) - 고구려 제 20대 왕, 광개토대왕의 장남으로78년 간 재위 (413~491).
서기 427년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남진 정책을 폈었다.
- 집안 시내에 있는 장수왕릉 안내 길 표지판
- 장수왕릉 관람도
- 장수왕릉 출입문
- 장수왕릉
- 피라미드 형 왕릉을 보호하는 거대한 붙임 석
- 장수우물 각
- 장수정 우물가의 앵두나무
- 장수왕릉 동반무덤 ' . 비빈의 무덤으로 사료되며, 고인돌형 석실이 있다.
▣ 달리는 차창가로 담아 본 고구려 유적
- 집안 시내에 있는 국내성(國 內城) 성곽( 석축처럼 낮다)
- 이름 모를 고구려 옛 석총
- 이름 모를 고구려 옛 석총
- 집안시 외곽의 압록강과 강변의 북한 농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