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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라이프, 그리고 배려들
- 몽골 여행기
이주언
◇ 출발하며
드디어 맞이한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몽골 여행에 나선다. 아침 9시부터 ‘럭키브릿지 여행사’에서 제공한 소형 버스가 픽업을 시작! 김해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4박5일 동안 함께할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창원문협 회원은 윤재필 회장님, 공영해 선생님, 최영인 선생님, 이둘점 선생님, 박성은 선생님(신입 회원), 이희경 사무국장님, 박은형 시인, 그리고 나, 이렇게 모두 여덟 명. 그 외 회장님의 지인 아홉 분을 합쳐 17명의 소대가 꾸려진다.
◇ 울란바트로 입성
비행기 착륙 전 몽골 땅의 첫인상은 평화로웠다. 구릉처럼 나지막한 산과 그 사이 펼쳐진 초원들,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광활한 초록의 공간이 부러웠으며, 도시 쪽으로 점점이 모여드는 집들도 예뻤다.
징기스칸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빠기’라는 가이드와 ‘볼트’라는 운전기사를 만났다. 몽골의 말은 따라 하기 힘든 발음이어서 일종의 애칭으로 만든 이름이다. 우리의 기분과 안전을 좌우할 두 젊은이가 믿음직스러웠다. 참고로 ‘빠기’는 부산 앞바다를 처음 봤을 때의 감격 때문에 부산을 제2의 고향이라 불렀으며, 인천에서 4년간 공장 일을 하면서 한국말을 배웠단다. 재치 있고 영리한 청년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울란바트로 시내의 ‘자이승 전망대’, 반지 모양의 구조물과 승전탑의 내용을 보면 몽골과 러시아의 친밀도를 체감할 수 있다. 몽골인은 중국에 대해서는 반감을, 러시아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감을 갖고 있다. 중국의 지배를 약 200년 정도 받아오다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이 되어 그렇단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으로 갔다.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이태준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운반하고 의열단 활동도 하신 독립투사였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몽골까지 오게 된 이태준 선생은 의사였다. 선생은 몽골에 만연하던 질병을 퇴치하여 1919년 몽골 정부로부터 ‘에르덴 오치르’라는 훈장까지 받았다. 이 복잡한 울란바트로 시내에 이태준 선생의 공원이 있다는 것은 몽골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함께 전해져 온다.
한반도의 7배 되는 땅에 인구 300만 명 정도 살고 있는 몽골. 그만큼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다. 그러나 울란바트로는 종일 교통 체증에 시달리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바로 옆에 넓은 초원을 두고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사는지 우습기도 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울란바트로는 80만여 명의 인구를 예상하고 도시계획을 짰단다. 그런데 현재 시민이 160만 명 정도로 늘어났으니 복잡할 수밖에 없다. 유목민은 이제 40% 정도이며, 몽골 인구의 절반 이상이 울란바트로에 모여 살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의 서울 집중 현상을 생각해보면 웃을 일도 아니다.
◇ 간등사원 - 천진벌덕(징기스칸 동상)
‘라마다호텔’에서 첫 밤을 묵은 후, 울란바트로 시내의 ‘간등사원’으로 갔다. 몽골 종교의 80%를 차지한다는 라마불교 사원이고 스님의 옷차림도 달라이 라마와 비슷했다. 또 마니차를 돌리는 풍속도 티벳불교를 연상케 한다. 마니차를 돌리는 일은 불경을 읽을 수 없는 일반 대중이 부처께 올리는 기도와 같은 것이다. 우리 일행도 시계 방향으로 마니차를 돌리며 각자의 기도를 올린다. 사원은 몽골형, 티벳형, 중국형의 세 가지 스타일의 건축물이 있어 몽골인의 개방성과 수난사를 엿보게 한다.
사원을 둘러보고 울란바트로 시내를 겨우 빠져나와 ‘궁갈로트’ 쪽으로 2시간 정도 이동이 시작된다. 몽골의 고속도로는 우리의 국도와 비슷한 느낌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초원을 달리며 몽골인들의 전통적 생활을 엿본다. 게르는 대부분 2개 정도가 나란히 있다. 자식이 결혼하면 새 게르로 신혼살림을 내주고, 목축과 안전을 위해 함께 사는 것 같다.
울란바트로를 좀 빠져나오자 공동묘지가 보인다. 몽골에서는 매장하거나 화장을 한단다. 묘지는 두 가지 모습이었는데 몽골 스타일은 단순․정갈해 보이고, 카자흐 묘지는 작은 집을 지어놓은 듯 보였다. 몽골에서는 부모가 죽은 지 3년 동안은 묘지에 가지도 않는다고 한다. 헐~ 우리나라는 3년 동안 부모의 묘지 곁에서 사는 게 전통이었다고 말하자 그들은 죽은 혼이 따라 올까봐 두려워서 그리 한단다.
천진벌덕이라는 곳에 세워진 징기스칸 동상을 잠시 둘러보았다. 이곳은 징기스칸의 고향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1177년 타타르족에게 빼앗겼던 아내를 되찾고 승전한 것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장소라 한다. 어마하게 큰 징기스칸 기마상은 자신의 고향 쪽으로 말 머리를 향한 채 위압적으로 서 있다. 멀리 여행객들이 동상 안쪽을 통해 4~5층 건물 높이쯤 되어 보이는 말의 갈기까지 올라가 말과 같은 시선으로 초원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몽골 음악은 힘차고 기상이 넘친다. 가이드가 장단에 맞춰 잠시 춤을 춘다. 남성미와 힘이 넘치는 춤이었다. 그 춤을 본 일행은 아쉽게도 두어 명 뿐, 그래도 박수갈채!
◇ 궁갈로트
궁갈로트는 철새 등의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다. 이 지명에서의 ‘갈로’는 ‘오리’라는 뜻이란다. 새가 많이 살거나 많은 철새가 경유하는 지역인 것 같다. 계속 초원을 가르며 달리다 수 백 마리쯤 되어 보이는 가축의 무리를 만났다. 우리가 함성을 지르자 버스가 잠시 멈췄다. 양, 염소, 소, 말 등의 무리가 도로를 건너다니기도 하고, 도로 곁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기도 했다. 수백 마리 가축의 무리를 가까이서 보니 신기했다. 그리고 초원에는 키 작은 쑥부쟁이와 들꽃들이 많았고, 낯선 허브가 가득해 공기의 냄새도 독특했다.
공영해 선생님은 들꽃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으시고, 우리는 초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며 기록을 남긴다. 이렇게 초원에 취해 있으니 운전기사 ‘볼트’는 아예 돗자리를 들고 나온다. 초원에 한번 누워보라는 것이다. 초원에서 사무국장님과 최영인 선생님이 준비해온 구운 계란, 삶은 계란을 먹으니 마치 소풍 나온 기분이었다. 많은 것들을 준비해 오신 두 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 ‘볼트’는 공영해 선생님께서 들꽃에 관심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두꺼운 식물도감을 자기 집에서 가져오기도 했다. 몽골의 야생초들을 알리고 싶어 하는 마음과 여행객의 호기심을 채워주려는 마음, 애국심과 배려가 빛을 발한다. 도로에서 가축이 다치면 누가 물어주는지 일행이 묻자, 옛날에는 전부 운전자가 물어주었으나 지금은 반반 책임이란다. 가축이 도로에 나오지 않도록 주인이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게르 도착! 우리의 두 번째 숙소는 ‘스텝 노마즈 캠프(Steppe Nomads Camp)’다. 초원에서의 유목이 실감난다. 게르 안에는 네 개의 침대와 난로가 있었다. 비가 오면 게르를 덮은 양가죽 냄새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처음엔 냄새 난다고 코를 막던 일행도 서서히 적응되는 모양이다. 짐을 풀고 잠시 침대에 누워 쉰 뒤, 저녁식사 시간까지 숙소 옆 ‘헤롤렌 강’에서 송어 낚시 체험에 들어갔다. 강가로 가는 도중에 미끼로 쓸 메뚜기를 잡으려 뛰어다니는 가이드 ‘빠기’는 부시맨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사무국장님이 먼저 메뚜기를 잡았다. 낚싯대 몇 개를 던지고 있으나 송어는커녕 피라미도 안 잡힐 분위기. 박성은 선생님과 나는 초원을 걸어보기로 한다. 비가 올 듯 하늘이 컴컴해지고 저 멀리 검은 물기둥이 보인다. 그게 실제 비 오는 물기둥인지 궁금했고 신기했다.
회장님이 준비하신 보드카와 와인을 겸해 쇠고기, 양고기, 닭고기가 섞인 저녁식사는 즐거웠다. 9시가 되자 비 그친 강가로 나가 캠프파이어를 즐긴다. 불기둥이 솟아오르자 우리는 둘러서서 추억의 유행가, 동요 등을 부르고 게임도 한다. 그리고 차례로 자기소개 인사를 하자 서로의 관계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여기서도 최영인 선생님과 이희경 국장님의 실력 발휘! 정말 재주꾼들이시다. 밝은 달빛 아래 우리의 게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정말 편안하고 목가적이었다. 난로를 피우니 금방 따뜻해져 준비해간 침낭은 여행 내내 짐이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다른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궁갈로트 오가는 길에는 두 개의 큰 호수가 길 양쪽에 있다. 온갖 새들과 말들이 와서 물을 먹는 모습을 보니 자연 속에 우리가 들어왔음이 실감난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 또 사진 기록을 남기기 위한 포즈들! 자연과 어우러져 시야가 즐겁다.
◇ 즉흥 ‘민가 게르’ 방문
우리는 여행자 숙박용 게르가 아닌 민가의 게르를 방문하고 싶었다. 지나가다 대여섯 채의 게르가 있는 곳에 버스는 멈추었고 ‘빠기’가 주인에게서 방문 허락을 받아온다. 몽골에서는 길손들을 위한 깊은 배려가 전통인 듯하다. 집을 비울 때도 항상 문을 열어놓고 찻잔과 찻물 등을 준비해놓고 나간단다. 먼 길을 다니는 사람들이 게르만 보이면 주인이 있든 없든 언제든지 들어가 차를 마시고 갈 수 있게 말이다. 마음이 무척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게르 밖에는 두 개의 태양광 판이 있고, 지붕에는 치즈를 만드는 듯 우유 덩이들을 건조시키고 있었다. 게르 안에는 양쪽으로 두 개의 침대가 있고 그 사이에 소파와 옷장이 있으며, 제일 가운데에 난로가 놓여 있었다. 들어섰을 때 왼쪽은 남성의 공간으로 침대 곁에 각종 도구들이 있었다. 오른 쪽은 여성의 공간으로 부엌이 있는데, 살림이 정말 간결했다. 계속 옮겨 다녀야 하니 짐을 최소화 해야겠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무소유의 삶이었다. 이에 비하면 나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다. 물건도, 인간관계도, 소속된 여러 단체도 정리 불능 상태에 있음이 실감난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간결한 살림과 간결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부러웠다.
안주인과 예닐곱 살의 소녀가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손님이 온다 하면 엄청난 스트레스 받으며 밀린 청소, 빨래, 음식 하느라 난리인데 편안하고 당당하게 손님을 맞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안주인이 손수 만든 마유주와 과자를 내놓는다. 마유주는 알콜 농도 2% 정도의 우유발효 음료로 우리나라의 막걸리 비슷한 것인데, 약간 시큼한 것이 요구르트 맛도 느껴졌다.
게르 바깥에는 두 소년과 어른 몇이서 말을 타고 양떼와 야크 떼를 몰고 있었다. 아직 어린 소년도 말을 능숙하게 달리며 자신의 몫을 해낸다. 이 아이들도 방학이 끝나면 학교 근처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말들을 빨랫줄 같은 데에 묶어 놓는 게 흥미로웠다. 고정 효과는 전혀 없어 보이고 다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말들에게 부여하는 것 같다. 방문을 마치고 버스를 타러 가는데 바로 옆 게르에서 할머니 한 분 나오셔서 일행이 함께 사진을 찍게 허락하신다. 조금 후 또 한 분의 할머니가 그 게르에서 나오신다. 양가 어머니를 함께 모시는 건지 궁금했지만 소통 불능. 아마 대가족이라 다른 집보다 게르가 더 많았던 모양이다.
◇ 테를지 국립공원
세 번째 숙소가 있는 테를지 국립공원, 공원 입구의 고개에 올라서자 테를지의 일부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고개에는 독수리가 네 마리 있었다. 뭉툭하고 긴 장갑(?)을 끼고 독수리를 들어 올려본다. 가벼운 독수리를 선택했음에도 내게는 무척 무거웠다. 팔을 위로 뻗칠 때마다 날개를 활짝 편다. 그 좁은 나무둥치 위에 묶인 채 관광객을 기다리는 독수리들이 안쓰러웠다. 영영 야생의 자유를 찾아가지 못할 것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테를지는 정말 아름답고 보기 드문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초원, 습지, 산지의 만물상 바위 등 모든 것들이 특이하여 눈길을 끈다. 온갖 형상의 바위들을 보며 일행은 무슨 모양인지 추측하기 바빴다. 테를지에서는 ‘아리야발 새벽사원’으로 먼저 갔는데, 러시아인 젊은 남녀가 우리 버스를 세웠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많이 걸어 지친 듯 보였다. 사원 입구까지 함께 버스를 타고 갔다. 우리 일행이 사원으로 올라갈 때 그들은 사원 아래 텐트 칠 장소를 물색하였다.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그런 자유로운 여행이 참으로 부러웠다. 언어소통과 용기와 건강, 그리고 젊음이 있어야 가능한 여행이리라. 사원 뒷산에는 큰 그림이 그려진 바위가 셋 있고, 글씨가 쓰인 바위가 있는데 그 글이 ‘옴마니 반메홈’이란다. 몽골인들은 바위에 조각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는 빠기의 설명이 곁들여진다. 자연을 생긴 그대로 보존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리라. 햇볕이 강한 낮이라 덥고 지칠 것 같아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여성은 사원의 계단 오르기를 포기하고 사원 입구 그늘에서 쉬었다.
일행이 절에서 내려오자 거북바위를 향해 갔다. 근처의 선물매장엔 온갖 가죽 제품과 양모 제품들이 우리를 유혹했는데 가죽 제품의 싼 가격이 놀라웠다. 야크 털 등산양말과 핸드 메이드 펠트 등의 간단한 선물을 산 후, 숙소로 간다. 이 숙소는 거의 한국인 손님만 받는단다. 나라별 전문성을 키워서 손님을 받는 테를지 숙소들의 경영 방침이 좋아 보인다.
양갈비 점심을 먹고 우리는 승마장으로 갔다. 말들의 무리에는 대장말이 반드시 있어서 그가 모든 말들을 인솔하고, 위기에 처하면 이 대장말이 제일 먼저 나서서 자신의 무리를 위해 싸운다고 한다. 사람보다 못할 바 없는 동물이다. 또, 말의 머리를 때리면 절대 안 된다고 일러준다. 빠기가 어릴 때 말의 머리를 때리다 할아버지께 혼이 난 경험도 들려준다. 말을 존중하는 몽골인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승마장에서는 헬멧을 쓰고 주의사항을 들은 후 기마병처럼 출발! 한 명의 마부가 두 손님의 말을 끌며 함께 승마를 한다. 안전을 위해 대부분의 말들이 걷는다. 조금 달릴 때가 더 재미있다. 회장님의 지인 분은 혼자서 말을 타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말이 계속 걸어가자 최영인 선생님은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한다. 하지만 말들은 이탈하지 않고 어린 소년 마부의 말을 따라갈 뿐이었다. 제법 오랜 시간 말을 타다보니 나도 혼자서 말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었다. 테를지에는 승마팀들도 많이 와서 배낭에 음식을 넣어 다니며 몇 날 며칠 말달리곤 한단다. 승마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숙소로 와서 씻고 몽골 대표음식 ‘허르헉’을 먹었다. 양고기 찜요리 종류인데 우리의 수육처럼 담백한 맛이다. 다들 맛있다는 평을 하며 보드카나 와인을 겸해 먹는다. 물론 여행사 대표님이 준비한 깻잎과 젓갈, 최영인 선생님의 김가루와 고추장, 박은형 시인의 김치와 고추장 등이 있음으로써 식사의 기쁨은 배가 된다. 그리고 초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니 ‘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화가 떠오른다. 대자연 속 석양을 바라보던 여주인공이 부럽지 않다.
9시에 전통예술 공연과 천문 체험이 시작되었다. 알바생들의 공연이라지만 감동적이었다. 특히 모링호르(마두금) 연주는 더 인상적이다. 두 줄의 현으로 7음계의 음을 다 내므로 무슨 음악이든 연주 가능하다고 한다. 마두금은 우리의 해금과 편경처럼 유네스코 문화재에 등록되어 있단다. 마두금으로 내는 말울음 소리는 실제의 말울음과 영판 똑같다. 힘차면서도 은근한 슬픔을 자아내는 곡들이 몽골리안 음악인 듯하다. ‘아리랑’ 연주가 나오자 모든 여행객들이 한마음으로 합창을 하기도 했다. 또 ‘허미’라는 노래는 사람의 목소리로 내는 또 하나의 악기 소리 같았다. 배, 가슴, 성대를 이용해 저 아래의 몸속 소리를 끌어올린다. 잠시만 흉내 내도 목이 아픈데 몇 곡조를 뽑아 올리는 몽골 국악인들은 성대가 온전할까? 그리고 예쁜 소녀가 전통춤을 추어 갈채를 받았다. 공연 중 제공된 ‘수태차’는 따뜻이 데운 우유차다. 숙면에 도움이 될 듯하였다.
공연 후 천문 전문가의 설명을 들었고, 그가 골라두었던 김중식 시인의 시도 감상하였다. 유성과 관련한 시의 마지막 구절 “포기한 자/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여름 하늘에서 별자리 찾는 법 등의 설명이 끝난 후, 우리는 밖에 비치된 천체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의 별을 살펴보았다. 춥고 늦은 시각이라 겨우 6명만이 망원경을 차지하게 되었고, 전문가 선생님이 초점을 맞춰주는 대로 별을 살폈다. 입에서 감동의 소리가 튕겨져 나온다. 토성과 그 주변의 띠를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달 표면의 분화구도 보였다. 견우성와 직녀성, 안드로메다 은하의 성운들, 북두칠성 꼬리별 등 다양한 천체의 모습이 망원경을 통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다. 우리가 늘 붙박여 사는 이 지구는 대우주에 비해 얼마나 미미한 공간인지, 우물 속 개구리인 줄도 모르고 사는 우리는 또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온갖 생각이 들게 한다.
나무 때는 난로를 피워 따뜻하게 잠들었으나 새벽에는 추웠다. 난로지기는 전통예술 공연을 했던 알바생이었다. 새벽에 숙소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오래 기다리고 섰다가 문을 열어주면 난로를 피워주고 간다. 몽골인들 마음의 깊이와 고요가 전해졌다.
다음날 아침, 짐을 챙겨 게르를 떠나야 했다. 많은 감동을 안겨준 숙소의 이름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버스 타고 나갈 때 숙소 입구 저 아래 입간판 있는 데서 잠시 차를 세워 달라 했더니, 가이드가 직접 가서 찍어오란다. ‘헐~ 다리도 쬐끔 불편한데… 흥! 칫!’ 설명하기도 싫다. ‘BAYAN KHAD’라고 쓴 커다란 입간판의 사진을 찍어와 물었더니 ‘바야하르’라고 읽으며 ‘부자 바위’라는 뜻이란다. ‘바야하르 캠프’, 한국인을 배려하는 캠프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잠시 궁금하기도 했지만 “굿바이 바야하르!” 그냥 출발이다.
테를지를 떠나 울란바트로로 가는 길,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양들과 달리 모습이 우아하다. 발밑에는 수많은 들꽃들이 깔려 있어 더욱 목가적 풍경을 자아낸다. 문득, ‘말들은 들꽃도 뜯어먹을까’ 생각하는데 “몽골은 행복한 나라죠”라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경제적으로 힘든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높은 것 같다. 욕심 부릴 것이 없으면 행복지수가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울란바트로로 이어지는 초원을 계속 달렸다.
◇ 다시, 울란바트로
울란바트로에는 톨(Tuul)강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수도 근교의 강가에 간간이 게르가 눈에 띄었다. 소박한 게르는 우리의 돈으로 약 150만원 정도, 고급스럽게 장식된 게르는 500~1,000만원 정도까지 간단다. 소박한 게르 한두 개에 간편한 살림 도구, 그리고 배고프지 않으면 만족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경제발전을 이루며 점점 도시화 되어간다.
울란바트로에 도착해 먼저 ‘겨울왕궁’으로 갔다. 입구에 ‘BOGD KHAAN PALACE MUSEUM’이라는 간판이 있다. ‘복드칸’은 티벳의 라마불교 스님이 왕이 된 경우라 한다. 1924년까지 이 왕궁에서 살았던 왕은 8대 복드칸이었으며, 부인은 몽골인 공주로 아주 영리하고 기상이 씩씩했단다. 국가의 왕으로서 티벳의 스님을 모셔온다는 것이 약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환생을 믿는 풍습, 달라이 라마를 등극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모두 여덟 분의 복드칸이 있었는데, 그중 2대 복드칸만 몽골인이었고 나머지 일곱 분은 모두 티벳 스님이었다고 한다. 부부의 침대도 따로 놓여있는데, 이는 복드칸이 스님이므로 부부관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애마부인처럼 왕후가 초원을 많이 달리다 보니 기상이 씩씩해진 게 아니었을까, 하는 장난스런 상상이 든다. 종교와 정권이 결합된 형태의 정치 스타일이 근대에 존재했다는 것이 특이하지만, 아마 일본의 천황처럼 상징적 존재였을 것이다.
겨울왕궁도 티벳 사원, 중국 건축, 러시아 건축 등의 디자인이 혼재되어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중국식 건물에 달린, 러시아풍의 동판 차양이다. 우리의 강릉 선교장 열화당 건물에 달린 동판 차양과 거의 같다. 러시아 공사가 선교장 주인에게 선물로 지어준 차양이니 그럴 것이다. 왕궁 안에는 탱화가 많았고, 불상, 전통 악기, 왕의 의복들과 생활용품들, 그리고 궁중에서 쓰던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 복드칸 부부의 사진을 보니 왕은 서양인처럼 시원스럽게 생겼고, 왕후는 전통적인 몽골인의 얼굴이었다.
다음 코스는 시내의 어느 공연장. 국악예술인들의 몽골 전통음악과 춤, 그리고 한 소녀의 묘기를 보았다. 서양인이 절반 이상 들어온 작은 공연장은 자리가 꽉 찼다. 또다시 모링호르(마두금)와 허미(성대노래?) 소리에 빠져든다. 그 외에도 심벌즈 같은 것, 우리 민속악기 가야금, 양금 같은 것, 그리고 여러 가지 관악기 등이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힘차고 자유롭게 울림을 준다. 노래는 약간 중국풍이 나기도 하고 힘찬 몽골풍이 나기도 했다. 누더기를 걸치고 신들린 듯 추는 춤도 있었다. 샤먼의 춤 같았다. ‘버’라는 몽골 샤먼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방송을 인상 깊게 본 적 있었는데, 그것과 비슷하였다. 사진을 찍어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버’가 맞다며 ‘버어’라고 길고 깊게 발음한다. 여기서도 ‘아리랑’ 연주가 나와 합창을 하니 서양인들이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그 후 그들 나라의 음악도 연주되자 박수로 장단을 맞춘다. 역시 이곳 예술인들도 여행객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이 공연이 몽골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울란바트로 시민은 그 넓은 초원을 비워두고 도시에 몰려들어 매연과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이런 점은 세계 모든 도시의 공통점인 동시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명의 편리와 자본의 유혹은 떨치기 힘들다. 특히 나처럼 문명의 편리를 맛 본 자는 결코 소박한 삶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걸 접하지 않았다면 나도 자연인으로서의 여유와 만족을 누리지 않았을까 싶다. 도시의 많은 현대인들이 노마디즘을 꿈꾸지만 물질문명의 유혹으로 인해 결코 실행하지 못한다. 몽골 초원의 사람들은 이런 무소유와 노마디즘의 삶을 살고 있다.
인도 여행에서 목격한 무소유는 가난이었고, 인도를 떠나올 때는 마음이 아팠었다. 그러나 몽골의 초원에서 목격한 무소유는 노마디즘이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였다. 결국 김중식 시인의 시 구절이 여행의 마무리를 예견한 셈이다. “포기한 자/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 초원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족쇄에 제 운명을 맡기지 않은 자들이다. 자유롭게 떠돌며 물질만능을 포기한 자들이다. 도시인의 이기로 뭉친 나로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삶이란 걸 알면서도 부럽다.
◇ 해단식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시각으로 볼 때, 4박5일은 결코 짧지 않다. 마지막 숙소인 라마다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윤재필 회장님께서 해단식 자리를 마련하셨다. 몸은 피곤하지만,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을 일정의 마무리 자리라 일행 모두가 참석하였다. 그제서야 회장님의 지인 중 다섯 분은 창원시청 공무원 퇴직자들임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점잖으시더니만…’ 하는 생각. 그리고 여행사 대표님과 그녀의 지인인 언니분, 회장님의 친구분, 회장님의 지인 어르신. 이게 비문협회원 일행, 아홉 분에 관한 신상정보의 모든 것이다.
보드카와 와인, 과일 등으로 쫑파티를 하는데, 느닷없이 우락부락하고 박력이 넘치는 몽골인 남성이 우리 자리로 온다. 몽골의 스타 개그맨 ‘뻐여’라는 사람이란다. 물론 그의 실명은 발음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러나 몽골인들에게도 ‘뻐여’라고 하면 다 통한단다. 몽골 연예인 에이전시 대표이고 여러 가지 사업도 한단다. 한국을 오가며 사업도 하는 모양이다. 그가 로비에서 우리를 보았다며, 가이드를 찾아와 한잔 사고 싶다고 했단다. 물론 거부할 이유가 없다. 몽골어와 한국어가 왔다갔다 하며 형제애를 나누듯 시끌벅적 교감을 나누었다. 한국 오면 연락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으며 회장님께서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아마 이게 일회성 만남일 터이지만 짧은 인연에 대한 아쉬움은 그렇게 표현된다.
짧은 인연에 대한 아쉬움이 어디 ‘뻐여’에게 뿐이랴. 함께했던 가이드 ‘빠기’와 운전기사 ‘볼트’ 그리고 17명의 일행은 정말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채 헤어졌다. 물론 이희경 국장님이 9월 14일 ‘창원문학제’에 초대를 잊지 않았으므로 일행 분들은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참가하는 문협회원의 수가 더 적어서 출발 전에는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번 몽골 여행은 나의 기대를 꽉 채워주었다. 이런 여행 아이디어를 내시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신 회장님, 간식과 상비약 등 많은 준비를 해 오신 사무국장님, 회원들 먹거리를 많이 챙겨 오신 최영인 선생님, 그리고 밑반찬을 끝까지 책임지신 대표님 등 많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행복과 기쁨은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으로 인하여 누릴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누어드린 것이 거의 없어 죄송스럽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통했으리라 믿고 싶다. 마지막으로, 몽골리안의 유목, 자유, 미니멀 라이프가 영원하기를!
첫댓글 우와~
이주언 샘 몽골여행기 정말 잘 읽었어요
4박5일 동안 경험한 것들을 다방면의 지식과 접목시킨 글이라 품격이 있네요
오래 전에 간 몽골여행이 다시 떠오르며 한껏 분위기에 젖었네요
울란바트르는 여전히 공해와 복잡한 생활환경이고 민가 게르의 구조도 궁갈로트도 테를지의 아름다운 풍광도 변함이 없군요ㆍ 마유주와 지붕 위 건조되어가는 치즈의 맛이 떠올라 입맛을 다시게 하네요~~
무엇보다 열 일곱분이 함께한 친교의 시간이 부럽네요. 넉넉한 마음들이 고스란히 보였구요~
이제 여행에서 돌아왔으니 익숙한 삶의 시간들이 더 빛나게 보이겠군요~
주언 샘 덕분에 평온한 시간이었어요
수고에 감사드려요~~~♡
이주언 선생님 ~~
또다시 새록새록 생각나네요~
넘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동이 선생님, 국장님~
몽골 다녀오셔서 더욱 공감해주시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선생님~♡
꼼꼼한 기행문을 읽고 아쉬움이 더 술렁거립니다.ㅎㅎ 감사합니다.
이주언 샘 고맙습니다. 여행의 피로도 덜 풀리셨을텐데 이렇게 리얼한 후기를 쓰셨으니 말입니다.
몽골인의 정신과 문화가 곳곳에 스며 있어 감흥을 주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