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특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여느 사극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인물이 등장했다. KBS2 ‘천명 :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의 주인공 최원(이동욱). 직업은 내의원 의관이지만 나랏일이고 웃전이고 안중에도 없이 오직 딸아이 랑(김유빈)이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는 인사다. 그리하여 얻은 별명이 ‘조선판 딸바보’. 괜히 실력을 드러냈다가 정권 다툼이 한창인 왕실과 얽힐세라 일부러 몸을 사린 채 갈 짓자 걸음을 걸어온 그. 그럼에도 아뿔싸, 운수가 불길했던지 운명의 장난인지 살인 누명을 쓰고 도망치는 신세가 됐지 뭔가. 날이면 날마다 쫓기는 중에도 자신이나 사지에 몰린 세자(임슬옹)보다는 오매불망 딸 걱정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최원. 그는 과연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 부녀가 몸을 숨긴 산채로 찾아가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봤다. (참여: 이진서 감독, 이동욱, 정석희 칼럼니스트)
정 : 산채 정경이 제법 운치가 있어요.
이진서 : ‘쾌도 홍길동’ 때 지어진 세트에요. 제가 참여했던 ‘최강칠우’도 이곳에서 찍었죠.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캐릭터를 시청자와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정 : 방금 ‘최원’ 부녀의 절절한 이별 장면을 목격했는데요. 나라보다 자식, 그것도 딸이 우선인 사극 주인공은 처음 봅니다.
이진서 : 작가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새로운 캐릭터를 요구하기도 했고요. 최민기 작가와는 단막극부터 오래 함께 작업을 해왔는데 재미와 감동은 물론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캐릭터를 시청자와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정 :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이 뒤섞여 있고 거기에 추리와 추격전까지 더해졌어요. ‘거북 龜‘의 비밀을 봐도 그렇고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여요.
이진서 : 기획단계에서부터 수도 없이 회의를 해가며 정교하게 맞춰놨어요. 도망자 플롯의 드라마를 기획했던 건데 현대물로는 이미 많이 나왔잖아요. 사실 사극 연출은 처음이라서 기존의 사극 드라마, 영화를 많이 보기도 했고 자료 취재도 많이 했어요. 픽션과 논픽션의 조화가 관건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존의 사극들에 답이 있더라고요.
정 : 이동욱 씨는 사극도 아이 아빠 역할도 처음인데요. 고민이 좀 되셨겠어요.
이동욱 :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둘 다 언젠가는 해볼 역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시놉시스와 대본이 좋아서 하고 싶었습니다.
이진서 : ‘최원’ 역이 까칠한 면과 밝고 긍정적인 면, 또 부성애와 멜로를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역할이라 쉽지 않아요.
정 : 게다가 허구한 날 추격신이라서 위험천만인 순간이 많더군요. 벼랑 끝이었다가 숲 속이었다가, 장소 이동도 잦고요.
이동욱 : 그렇죠? (웃음) 그런데 대본을 다 보고 시작한 일인 걸요. 저야 괜찮지만 랑이(김유빈)를 안고 지붕을 건너뛰는 장면에서는 걱정이 많이 됐어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거구나, 그때 진짜 느꼈어요. (웃음) 나중에 물어보니까 하나도 안 아팠다고 하더라고요. 다행이죠.
정 : 동궁전 화재 장면은 특히 위험해 보이던데 CG가 많이 들어갔나요?
이진서 : 80퍼센트 정도가 실제라고 보시면 돼요.
이동욱 : 힘들었죠. 옷에 불이 붙을 뻔 했으니까요. 그런데 감독님과 카메라 감독님께서 꼼꼼히 준비하신 덕에 예상 외로 빨리 찍었습니다.
이진서 : 저희가, 제가 가장 걱정을 많이 하죠. 주연배우가 다칠까봐.
이동욱 : 진짜요?
이진서 : 그럼요. (웃음) 보시는 분들은 걱정이 되겠지만 안전장치도 다 해두고,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한 촬영은 아니었어요.
되도록 실록의 연대기와 맞춰서 진행하려고 해요
정 : 중반을 넘어섰는데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분이잖아요. 그래서 어째 보는 내내 심란해요.
이동욱 : 그렇죠. 결과가 역사에 남아 있으니까요. 제가 만약 인종의 어의가 되어 궁궐에 남는다면 저도 위험한 거예요. 인종이 갑자기 서거하시면 저도 목숨이 날아갈 테니까. (웃음)
정 : 궁에는 ‘장금’(김미경)이 계시잖아요? 아, 그런데 장금이는 중종이 어디론가 떠나 보내지 않나요? MBC '대장금‘에서 그랬던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천상 ‘최원’이 어의가 되겠네요.
이진서 : 중종이 붕어하실 때 ‘장금’이 지켜봤다고 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드라마 ‘대장금’은 그 부분을 실록과는 다르게 해석을 한 것이고요.
정 : 역사는 될 수 있으면 흔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드라마를 보고 역사를 그대로 인지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이진서 : 결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되도록 행복하게 살게 하고 싶어요. (웃음) 아무래도 최원과 다인(송지효), 랑이가 함께 떠나는 것이 좋겠죠?
정 : ‘천명’은 사소한 배역일지라도 다들 살아 움직여서 좋아요. 하지만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분산되는지라 정작 주인공은 서운할 수도 있겠어요.
이동욱 : 상대적으로 제 분량이 줄어서 덜 힘드니까 다행인데요. (웃음)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캐릭터가 살아있는 것이 좋아요. 제가 가서 그 캐릭터에 맞추면 되거든요. 말씀하셨듯이 다른 캐릭터를 부각시켰던 것들이 결말에는 ‘최원’에게로 모여 뚫고 나갈 힘이 되리라 믿어요. 그래야 시청자들께서 속 시원해 하시겠죠? 어쨌든 뭐, 이 드라마는 저만 잘하면 돼요. 다들 잘 하시니까. (웃음)
이진서 : 중간에 작가진에서 애정을 갖고 있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다 보니 주인공에게 집중이 안 되는 면이 있긴 해요. (웃음) 이동욱 씨가 가장 잘 하는 연기가 멜로잖아요. 멜로에 빨리 불이 붙어야 하는데 저희는 아직 밑밥만 깔아놨고 뒷부분에 스토리가 준비 되어있으니까요. 기대해주세요.
이동욱 : 이렇게 수염을 달고는 저도 그다지……. (웃음) 그래도 딸하고는 많이 하고 있어요. (웃음) 제가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정신연령도 비슷하거든요.
정 : 이 드라마가 이동욱 씨 연기 인생에 한 획이 되겠죠?
이동욱 : 네, 힘든 만큼 배운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고, 잘 겪고 나면 좋은 자양분으로 쌓이겠죠. 사실 시청률이 다는 아니지만, 속상하기도 합니다. 괜히 이 작품을 한다고 욕심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다른 배우면 더 잘 됐을 것 같기도 하고요. 중요한 것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잘 마무리 짓는 거겠죠.
외모는 아예 포기한 상태로 촬영하고 있는걸요
정 : 지금은 다른 배우가 하는 ‘최원’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이동욱 : 대부분 10회 넘어가면 다 그래요. (웃음)
정 : 사극이고 홀아비 역할인데 키도 크고 훤칠해서 귀화한 조선인 같다는 말도 있었어요. (웃음) 후리후리한 남자가 아기를 안고 뛰어가니까 아빠 같은 느낌은 솔직히 안 들더라고요. 물론 초반에 말이에요.
이동욱 : 오빠 같았나요? (웃음) 외모는 아예 포기한 상태로 촬영하고 있는걸요.
정 : 오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동생 ‘우영’ 역의 강별 씨와는 진짜 오누이 사이처럼 각별해 보여요.
이동욱 : 우리 여자 캐릭터들이 다 귀엽잖아요. ‘랑이’부터 ‘우영이’, ‘다인’도 ‘소백’(윤진이)도 다 예쁘죠. (웃음) ‘소백’은 조금 전에 보셨죠? 아직 신인이지만 아주 열심이고 준비를 잘해와요. 그리고 ‘이호’ 역의 임슬옹 씨는 캐스팅 때 감독님이 살짝 의견을 물으셨어요. 잘한다고 제가 추천했죠. 전에 일을 함께 한 적이 있는데 괜찮은 친구더라고요. 슬옹 씨도 저도 사극이 처음이라서 논란이 있긴 하지만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슬옹 씨의 경우 한 꺼풀 씌워서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정 : 산채는 화기애애한 반면 궁궐은 늘 웃음기 없이 살벌하잖아요. 현장 분위기가 많이 다른가요?
이진서 : 전혀 그렇지 않아요. 똑같이 즐겁습니다. (웃음) 비주얼 컨셉트를 음침하게 잡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의도한 부분이었어요. 어둡고 심각한 궁궐 분위기를 풀어줄 인간적이고 서민적이면서 밝은 세상이 바로 산채죠. 다들 연기도 잘 하시고, 촬영장 분위기는 중견 배우들 덕분에 항상 좋습니다. (웃음)
정 : 궁궐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는 역시 ‘문정왕후’(박지영)죠? 박지영 씨의 연기, 마음에 들어요.
이진서 : 영화 ‘후궁‘에서 워낙 강한 인상을 주셔서 이미지가 겹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었는데, 주변 의견들이 영화는 영화고 안방극장이니까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어요. 박지영 씨 본인도 잠깐 고민을 하다가 흔쾌히 하시겠다고 하셨죠. 내공이 대단하세요.
정 : ‘랑이’가 없는 ‘천명’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와서 보니 유빈 양이 연기를 정말 좋아서 하는 게 느껴져요. 아직 어린 나이에 힘든 내색도 없이 계속 방글방글 웃고 있더군요. 그러다 촬영이 시작되면 거짓말처럼 눈물이 뚝뚝.
이동욱 : (진짜 아빠처럼 신이 나서) 그렇죠? 우리 드라마의 보물이에요.
이진서 : 사실 편성 확정이 나기 전에 접촉을 했습니다. 다른 배우들은 대체가 가능할 것 같았는데 ‘최랑’만큼은 유빈 양이어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캐스팅을 해놨어요.
정 :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민도생’(최필립), 처음엔 한심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곳곳에 숨겨진 그의 발자취를 보면 진국도 그런 진국이 없어요.
이진서 : 작가도 그를 살리고 싶어 했어요. 우리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아쉽게 생각해요.
정 : 홍역귀 ‘이정환’(송종호)도 매력적인 인물인데 사람이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지. 이젠 좀 반격에 나서나요?
이진서 : 그럼요. 이제는 당하지만은 하지 않습니다. 오래 기다려주신 시청자 분들께 카타르시스를 선사해드려야죠.
이동욱 : 그런데 감독님 연출을 찬양하는 팬들이 많던데 그 점,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진서 : 왜 갑자기……. (웃음) 좋은 스텝들이 모여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연출도 같이 칭찬을 받는 것 같아요. 드라마는 종합예술, 감독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동욱 : 다시 사극에 도전하실 건가요?
이진서 : 그건 상황에 따라서요. (웃음)
Epilogue ‘랑이’와 ‘최원’의 투샷을 찍을 때도 ‘거칠’(이원종)이며 ‘임꺽정’(권현상)을 비롯한 산채 식구들은 유빈 양의 감정선을 위해 내내 자리를 지켜줬다. 그들 중 단아한 눈매의 처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으니 바로 ‘덕팔’(조달환)의 처(박그리나)다. 최원에게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준 그녀. “서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민 주부라는 분이 남기신 거북 ‘구’자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말입니다. 민 주부라는 분은 사람들이 서방님을 놀리는 걸 아주 싫어하셨다고 합니다. 서방님의 등 모양을 가지고 그렇게 놀리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그러신 분이 어찌 자기를 가리켜 거북 ‘구’자를 남겼겠냐고요.” 이 대사 때문에 ‘천명’이 더 좋아졌었다. 그랬던 그녀가 tvN ‘나인’에서 ‘박선우’(이진욱)와 나란히 뉴스를 진행하던 ‘이주희’ 아나운서라는 걸 알랑가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