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30분 / - 정건섭
안개열차
"안개가 굉장하죠?"
"원--이렇게 코앞도 분간할 수 없으니. 영동에서 오는데 시간이 무척 걸렸어."
서울역 대합실에 모인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여기저기 웅성거리고 앉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21시 45분 경부선 특급열차가 개찰되기까지는 아직도 30분이나 남았다.
초저녁부터 한강을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 안개는 삽시간에 서울 전역을 뒤덮어
버렸고 자동차는 라이트를 켜고도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광장의 시계탑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깔려 야간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한가닥 불안감을 떨어 버릴 수가 없었다.
"내일 갈까 봐."
베이지색 바바리 코트를 어깨에 걸친 20대 초반의 여인이 사내의 팔에 몸을 밀착시키며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뭐 할 수 없지. 한 삼십 분만 기다리면 될 텐데 뭘. 내친김에 내려가자구. 춥지는 않아?
"약간! 그런데 실내는 따뜻할까? 침대차는 처음이야."
"촌놈. 들어가 봐. 생각보다 훨씬 포근해. 커피 하나 뽑아 줄까? "싫어, 그냥 여기 있어."
사내는 여인의 어깨를 감싸며 대합실을 둘러 보았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서성이며 시계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끄덕이며 졸기도
하였다. 더러는 자판기에서 뽑아낸 커피로 몸을 덥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때 '번쩍'하고
자동 전자 시계에서 자색 불빛이 나오더니 '21:45'라는 글시가 조명되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서서히 몸을 움직여 열을 지어 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합실에 퍼졌다.
"경부선 21시 45분 경부선 특급 열차를 기다리시는 분께 알립니다.
잠시후 개찰이 시작되오니 일렬로 질서있게 서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경부선 21시 45분 특급 열차를 기다리시는 분은 잠시후
개찰이 시작되오니 일렬로 질서있게 서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내의 팔에 매달려 있던 여인이 여행용 작은 가방을 들어 남자에게 넘겨 주고는
해죽 웃었다. 남자는 무표정하게 가방을 받아 어깨에 메고는 주머니에서 승차권을
두 장 꺼내 손가락을 집게처럼 오므려 표를 끼웠다. 이 두 남녀 뒤에는 신부 한 사람이
검정 서류 가방을 들고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개찰 안내 방송이 나온지 5분이
지났는데도 개찰원이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열을 흐트리기시작하였다.
더러는 쭈그리고 앉기도 하고 더러는 가방을 내려놓고 깔고 앉기도 하였다,
무료했는지 신부는 품속에서 포켓용 책을 꺼내 읽었다.
"신부님 빨리 가세요."
뒤에 있던 청년이 신부를 툭 치자 그 때서야 개찰이 시작된걸 알고 가방을 들고는
바삐 걸어 앞선 남녀를 따라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21시 45분 대합실 여행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개찰원이 다시 모자를 만지며 돌아서려고 할 때 커다란 비닐백을
질질 끌며 40대 중반의 남자가 들어섰다.
"어이구 늦을 뻔했네."
사내는 표를 개찰원에게 내밀었다. 125 열차편 03-03침대 차표였다.
차표에 구멍을 뚫어 표시를 한 후 사내에게 되돌려 주던 개찰원이 사내를 보자 흠칫
놀라며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개찰원의 표정을 보던 사내가 씩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가방을 끌고 대합실을 빠져 나갔다. 가방은 바닥에 바퀴가 달려 있는지
크기가 무게보다는 쉽게 사내의 손에 끌려나갔다. 개찰원은 이런 사내의 뒷모습을
다시 돌아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되돌아갔다.
125편 경부선 특급 열차에는 일반 특급 객차 뒤에 세 차량의 침대 칸이 마련되어 있다.
침대차는 21시 정각 두 번에 걸쳐 운행되고 있다. 침대 열차 내에는,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 침대가 아래위층으로 마련되어 있고 한쪽편에 6개 즉 아래위로
12개의 침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좌우로 12개씩 24개의 침대가 이런 차량의
3대나 딸려 있었다. 침대 객차에는 세 명의 승무원이 차량을 커버하며 서비스하고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낑낑거리며 침대 구석에 밀어넣는 사내는 힘이 들었는지 잠시 수건으로
땀을 닦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선생님, 표 주십시오."
승무원이 사내에게 다가왔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표를 꺼내 승무원에게 내밀었다.
사내에게서 표를 받던 승무원이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고 흠칫 놀라며
"대전 도착 10분 전에 깨워 드리겠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03-03, 즉 침대 3호 열차 3호실 하단 침대가 이 사내의 좌석이었다.
사내는 신발을 벗어 침대 밑 통로에 가지런히 놓고 열차측에서 준비해 준 슬리퍼로
바꿔 신고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40대 중반의 주름이 약간 져 있는 얼굴에는
수심에 찬 듯 우울해 보였다. 그러나 체격은 건장하여 어깨가 딱 벌어져 있고 강인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흔들'하고 열차가 움직이자 사내는 슬리퍼를 벗어 구두 옆에
가지런히 놓고는 침대속으로 들어간 후 커튼을 닫았다. 침대는 무척 단조로웠다.
상하단의 침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외에는 식당차도 휴게실도 없었다.
누울 수 있다는 장점 외에는 일반 객차와 별다른 점이 없었다. 아니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적적하고 무료한 구조였다. 옆사람의 얼굴을 본다거나 또는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여행 특유의 즐거움도 허락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복도를 거닐수 없고, 흔한 음료수나 군것질 거리를 파는 홍익회 사람들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소지품은 자기 침대에서 자기가 관리하게 되어 있는데,
허술한 커튼을 열고 잠든 새에 도난당할 우려를 생각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이 차내를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사람은 오직승무원뿐이었다. 가정을 지키듯 자기
소유의 침대는 자기가 책임져야 했다.
침대 열차는 세 개의 차량을 세 명의 승무원이 커버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승객으로부터 거둬들인 표를 점검하여 목적지에 닿기 십 분 전에 승객의
잠을 깨우고 표를 되돌려 주는 일 외에는 이따금 한 번씩 둘러보기만 하면 되는 지극히
단조로운 업무였다. 열차는 서서히 서울을 빠져 궤도를 따라 수원 방면으로 달리고
있었다. 짙은 안개를 벗어나자 이번에는 먹물 같은 어둠이 창 밖의 시야를 가렸다.
누워 있던 사내가 머리맡에 스위치를 눌렀다. 좁은 침대차 안이 작은 조명 시설에
조금 밝아졌다. 그는 다시 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는 누워서 담배를 꺼내며 커튼을
약간 열었다. 바로 맞은편 침대차 손님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쪽 침대차의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사내는 슬리퍼를 신고 반쯤 열려 있는
맞은편 침대 커튼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안하지만 성냥 좀... 아이구 영감님이시군요. 죄송합니다."
"원, 별말씀을. 자 라이터를 빌려 드리죠. 멀리 가십니까?"
영감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사내의 입에 갖다대며 불을 붙여 주었다.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사내가 영감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대전에 급한 일이 있어서요. 몸 컨디션이 나빠 침대차를 탔는데요,
오히려 일반 객차보다 더 불편한 것 같아요. 조명이 어두워 책도 못읽고..."
영감도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사내는 자기 침대로 되돌아왔다.
불을 끄고 커튼을 약간 열어 놓았다. 영감이 사용하고 있는 침대의 윗칸과 사내의
윗칸 침대는 손님이 없는지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다. 통로에는 신발과 슬리퍼만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승무원도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계는 22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내는 복도를 살펴보고는
신발을 복도 중앙으로 조금 밀어놓고 실내등을 다시 켜 놓고는 잠자 코 누운 채
발가락으로 커다란 가방을 툭툭 치고 있었다.
이때 화장실을 가려는지 베이지색 바바리를 어깨부터 치렁치렁 내리걸친 여인이
걸어나오다가 복도 중앙에 밀어놓았던 사내의 신발을 밟아 버렸다.
"어머 죄송해요, 미처 못 보았어요."
여인은 열려진 커튼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사내에게 사과하려고 머리를
돌리다가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빨려들 듯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다시 나와 위층의 사내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이를 바라보던 03-03 침대차의 사내가 의미 모를 웃음을 씩 웃고는
신발을 털고는 처음의 제자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커튼을 닫고 조명을 끄고는
죽은 듯이 조용히 누웠다. 전자 손목 시계의 버튼을 누르자 라이트가 파란색으로
켜지며 22시 35분을 가리킨다. 밤 10시 35분이었다. 시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사내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125편 특급 열차가 천안에 도착한 것은 정확하게 23시 정각이었다.
침대차는 여전히 조용하고 일반 객차에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역사로 빠져 들어갔다.
사람들은 검표원에게 표를 던져주고는 추운듯 어깨를 움츠리며 어둠 속을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
열차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꿈쩍하고는 다시 철로를 따라 다음 정차역인 대전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승무원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23시 35분 이제 25분 후가 되면 대전에 도착할
시간이다. 도착 10분 전에는 대전 손님을 깨우고 하차 준비를 시켜야 한다.
대전 손님은 세 사람이었다. 02-14호의 장교 한 명, 그리고 01-7호의 임신부 한 명,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왔던 이상한 사내
즉 03-03호의 손님이었다.
보관하던 표를 꺼내 나눠 줄 준비를 하고 복도를 내다 보았다.
1호차에서 3호차까지 둘러보았다. 신발이 그대로들 있는 것으로 화장실을 간 사람은
없는 듯싶었다. 기척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깊은 잠에 빠져 든 것 같았다.
단 1분이라도 더 단잠을 자도록 방치해 두는 게 승무원의 임무 중 하나였다.
깨어 있는 사람과 단잠을 자고 있는 사람과의 시간은 개념부터 틀리다.
승무원은 각 차량의 내릴 사람들의 신발을 확인하고 다시 1호차로 옮겨왔다.
그리고 작은 승무원실로 돌아와 잠시 쉰 후 시계를 보았다. 23시 45분 시계를 확인한
승무원은 세 사람을 깨우려고 통로로 나와 3호차로 들어오는 순간 화장실에서
나오는 영감과 마주쳤다. 03-15, 즉 03-03호 사내의 맞은편 침대 노인이었다.
"영감님 춥지 않으십니까?"
승무원이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자
"아주 좋습니다."
하고는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시속 120Km로 질주하던 열차가 대전이 가까워 오자
속도를 늦췄다. 영감이 침대 속으로 들어가자 승무원은 03-03호의 이상한 손님을
깨우려고 커튼에 손을 대다가 흠칫 하고 멈춰버렸다.
"어디 갔지?"
하고는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닌데, 거기는 지금 노인이 나왔으니까 있을 리가 없고..."
승무원은 1호차와 2호차의 대전 하차 손님에게 표를 나눠 주고 다시 03 -03호
침대칸 앞으로 왔다
23시 35분 1차 순회 점검할 때는 멀리서는 보았어도 슬리퍼 옆으로 분명히 한 켤레의
구두가 있었다, 그런데 표를 넘겨 주려고 10 분 후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신발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한데?"
혼자 중얼거리며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침대에는 커다란 가방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그 이상한 손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조금 전에도 있었는데... 화장실에선 노인이 나왔으니 거긴 없을 테고."
1, 2, 3호차 통로는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칸막이를 뜯어냈다,
만일 누군가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면 쉽사리 눈에 뜨일 텐데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승무원은 열차의 비어 있는 칸과 승강구를 뛰어 다니며 찾아보았지만
그 이상한 사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승무원은 다시 03-03 침대로 돌아왔다. 사람의 앉은키만큼이나 커다란 가방을
들여다보던 승무원은 지퍼가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열어보려다 말고 1호차
승무원실로 되돌아가 다른 승무원을 데리고 왔다.
"이봐, 여기 이상한 일이 생겼어. 이 랜턴(대형 손전등)을 비춰 줘. 가방 좀 열어보게.
여기 승객이 없어졌단 말야."
승무원은 동료에게 랜턴을 맡기고 불빛을 비추게 한후 지퍼를 열어 젖혔다.
가방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커다란 손이 흔들거리며 빠져나왔다.
"악 사람이... 시... 체야... 시체."
이 때 덜컹하며 열차가 멈추어 섰다. 대전에 도착한 것이다.
열차가 잠시 연착되고 대전 경찰서에서 형사, 검시관, 사진사가 각 한명씩 동원되었다.
현장에는 빈 콜라병 하나, 담배 꽁초, 그리고 시체와 시체가 들어 있는 대형 비닐
가방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승무원 외에 이 칸에 타고 있던 사람을 보신 분은 없습니까?"
형사는 침대에서 시체가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통로로 우르르 몰려나온 승객에게
소리 질렀다. 그리고 승무원을 양쪽 승강구에 세워 놓고 승객이 있는 침대까지 일일이
조사하였다. 조사가 끝나자,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영감이 가방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제가 보았습니다. 서울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제게서 담뱃불을 빌려간 일이 있었죠."
"감사합니다. 누구 또 다른 분은 없습니까? 미안하지만 이 칸에 타고 있던 사람을
목격한 사실이 있거나 아는 분이 있으면 좀 도와주십시오."
형사가 승객의 도움을 받고 있는 동안 사진사는 시체를 가방에서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검시관은 눌린 자국이 있는 목부분을 검사하고 있었다.
"이 형사님."
사진을 찍으려고 렌즈를 시체의 얼굴에 대던 사진사가 통로를 향해 소리 질렀다.
"이 형사님, 이 형사님. 이 사람이..."
"뭐야, 왜 그래."
"이 사람 탤런트 고강진이에요."
"뭐? 고강진."
'고강진'이 시체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나오자 통로에서 웅성거리고 서있던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벌린 채 닫을줄 모르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다가는
우르르 하고 시체 곁으로 달라붙었다.
"고강진이래."
"아니 고강진이 왜 여기서 죽었지."
제각기 생각나는 대로 떠들고 있었다. '고강진.' 2, 3년 전부터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이제는 명실공히 톱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미남형 스타 고강진.
그 유명한 인기 절정의 탤런트가 열차 침대 속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시체의 주인공이 고강진으로 밝혀지자 남자의 팔에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있던
바바리 여인이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저 -- 형사님. 이 칸에 타고 있던 사람 저도 보았어요."
아직은 얼굴이 파랗게 굳어진 채, 그러나 호기심만은 어쩔수 없었는지 연신 흘끔거리며
시체를 훔쳐보았다.
"감사합니다. 열차는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습니다. 목격하신 분께서는 보신
대로 진술만 해주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대전경찰서로 자리를 옳기겠습니다.
목격자 승객 되시는 분은 저희들이 책임지고 목적지까지 도착하시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형사는 시체가 들어 있는 가방과 사진사, 검시관 그리고 범인 목격자를 인솔하고
열차에서 내렸다. 이들이 출구에서 빠져나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열차는 덜컹 하고
움직이며 다음 역인 대구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가방 손잡이는 절대 손대지 말고 나머지 분들은 이쪽 사무실로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이 김군, 가서 사람 숫자대로 커피 좀 뽑아 오고. 그리고 이 순경, 과장님한테
빨리 전화해서 오시도록 해. 그리고 텔렉스 올려 보내고... 어이 그 쪽엔 손대지 말라니까."
대전 경찰서 형사과 이민우 형사는 자신만만하고 민첩하게 하나하나를 지시했다.
조금도 당황하거나 서둘지 않았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선 이후에라도 참고가 되도록 주소를 기록하겠습니다."
이 형사는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 그리고 뒤늦게 목격자로 나타난 신부, 영감의
순서대로 주소를 기록하고 메모 노트를 꺼냈다. 열차 승무원이 어딘가에 열심히
전화를 걸고 있었다.
"서울에서 약 한시간 반 정도 있으면 전문 형사님들이 내려올텐데, 어떻습니까?
기다리시는 동안 저희들이 마련한 숙소로 가셔서 피로를 푸시는 게...
그 때까지만 기다리시면..."
일행은 경찰 호의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경찰에서 제공한 차량으로 대전역
맞은편 중앙 관광호텔로 자리를 옮겨 각자 방을 하나씩 제공받았다.
선잠을 깼지만 누구도 잠을 이루는 사람은 없었다. 열차가 대전에 도착한 것이 00시 05분.
지금이 01시 40분이니까 그 동안 1시간 35분이나 지났다. 이민우 형사와 열차 승무원이
무엇인가 열심히 의견을 나누며 메모도 하고 시계도 들여다 보았다.
이 때 구내 전화가 따르릉 울려 왔다.
"이 형사님 여기 정문인데요. 서울에서 수사 본부 사람들이 내려 오셨습니다."
"알았어."
이민우 형사는 수화기를 놓고 건물 현관 쪽으로 뛰어나갔다.
현관마당에는 마크V에서 서너 명의 사람이 내려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담당이십니까? 서울 특별수사반 박문호라고 합니다."
"이거 밤중에 내려오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민웁니다."
문호는 이 형사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지은 청사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내부 분위기도 산뜻하게 보였다.
"저, 과장님이십니다. 이쪽은 서울 수사반에서 오신 박문호 씨이구요"
이 형사는 박문호와 자기 과장을 소개시켜 주고 의자를 당겨 두 사람 옆에 앉았다.
과장이 담배를 꺼내 권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문호가 과장과 이 형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일단 자리를 옳기시죠. 지금 중앙 관광호텔에 참고인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내리셔야 할 신부님 한 분과 부산에서 내리실 분 세 분이 계시는데 빨리
참고진술을 받고 돌려보내 드려야 하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그분들께 폐를 끼쳐 드리면 안돼죠. 빨리 그곳으로 갑시다."
문호는 이민우 형사를 앞세워 목격자들이 투숙하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대전의 밤거리는 지방도시답게 비교적 조용하였다. 일없이 배회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밤새워 영업하는 술집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작은 건물들이 고만고만하게
어깨를 맞대고 서있었다.
대전 중앙 관광호텔은 대전의 명성에 비견할 만큼 훌륭한 호텔이었다.
수퍼마켓과 나이트 클럽이 한 건물을 점유하여 쓰고 있었다. 문호는 작은 홀로
안내되었다, 호텔측에서 준비했는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웨이터가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 개의 편안한 의자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잘 정돈된 채 나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이민우 형사가 들려 준 사건의 대략적인 경위를 생각하며 볼펜과 백지를
테이블을 위에 올려 놓고 참고 진술인들의 증언을 들을 준비를 하는 동안 호텔 종업원은
각 방에 연락하여 사람들이 모이도록 했다.
"밤늦도록 죄송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라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사건 내용이야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고 또 사건 자체가 너무 기묘해서 경찰측인
저희들로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정하게 정지된 지역에서 난 사고라면 여러 각도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볼 수도
있겠는데 시속 120Km로 달리는 열차 속에서 시체만 발견되었기 때문에 범인 목격자인
여러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할 방법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민우 형사가 참고진술인들에게 조리 있고 설득력 있는 인사말을 한 후 박문호
형사에게 다음 일을 맡겼다.
문호는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며, 마치 얼굴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 읽으려는 듯
눈빛을 밝혔다.
"감사합니다. 특별 수사 본부 박문호 형삽니다. 지금 막 서울에서 달려왔습니다.
이미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다시피 피살자는 유명한 탤런트이고 범인은 열차 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범인을 목격하신 분들은 여기 계신 여러분과 승무원 한
분뿐입니다. 되도록 자세하고 확실하게 보신 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느 분이든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먼저 말씀 드리지요."
들고 있던 작은 여행용 가방을 옆으로 밀어넣고 나선 사람은 범인이 타고 있던 03-03호의
바로 맞은편 03-15에 타고 있던 영감이었다.
"부산에 일이 좀 있어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침 사고가 난 침대 맞은편에
제가 있었죠. 서울을 떠난 지 한 십분이나 되었을까요. 맞은편 침대에 있는 사람이
잠이 오지 않는지 부스럭거리다가는 제 침대 커튼을 열고는 얼굴을 들이밀며 담뱃불을
빌려 달라더군요. 아주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습니다. 몸은 크고 건장한데
얼굴이 좀...아무튼 두 눈동자가 매섭게 생기고 좀 인상이 험악해 보이..."
"어? 그게 아닌데."
영감의 말을 듣고 있던 열차 승무원과 베이지색 바바리의 여인이 동시에 눈이 휘둥
그래지며 영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이번에는 문호와 이민우 형사가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아녜요, 두 눈동자가 매섭다뇨..."
베이지색 바바리의 여인이 손을 좌우로 흔들며 영감을 향해 말을 꺼냈다.
"제가요... 음, 화장실을 가려고... 저는 03-19호에 타고 있었거든요. 화장실을 가려면
그 침대 앞을 통과해야 했어요. 그런데 그 사라졌던 사람의 칸 앞에서 그만 실수로
그 사람이 벗어놓은 신발을 밟아 버렸거든요. 그래서 그 신발을 밀어놓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머리를 돌리는데... 글세... 어휴, 인상이 얼마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찌나
무서웠던지 기겁을 하고 되돌아갔죠. 그래도 무서워서 위층 이분한테 갔어요.
올라가서 그 얘길 했더니 남의 속도 모르고 웃더니, 그럼 2호차 화장실을 쓰라고
해서 그쪽을 사용하고 왔죠. 얼굴이 너무 무서웠어요. 아이 끔찍해.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자식이 고강진씨 살해범이잖아요. 할아버지는 잘못 보신 거예요. 두 눈이 날카롭다뇨.
어휴, 애꾸에 그 인상하고는..."
하며 옆 사내의 팔을 잡았다.
"어? 그럼 이상한데?"
이번에는 범인을 잠깐 보았다는 신부가 나섰다.
"저는 03-17호에 타고 있었거든요. 그 침대와는 대각선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잠깐이긴 하지만 비교적 자세히 본 셈이에요. 제가 승차해서 표를 승무원에게 넘겨
주고 짐을 챙긴 다음 침대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열차가 떠나기 직전에 이 문제의
사나이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올라왔어요. 처음엔 자세히 못 봤는데 가방을 안에다
밀어넣고는 잠시 후 제가 하듯 그 사람도 침대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는데, 글쎄요...
제 기억으로는 눈이 멀쩡한 것 같았어요. 만일 눈동자가 이상하다면 제가 못 볼
리가 없죠. 그 후론 저도 죽 잠을 잤는데 대전이 가까와서 소란스러운 말소리에 잠이
깬 거죠... 글쎄요, 그런데 확실히는 모르죠. 모든 사람이 다 까만 눈동자를 갖고 있게
마련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본게 착각을 일으켰는지. 글쎄... 그게."
"잘들 좀 기억해 주십시오. 범인이 애꾼지 아닌지 수사상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니깐요.
물론 어두운 열차에서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기억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허지만 이건..."
"사라진 사람이 애꾸인 건 확실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보담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닙니다, 절대..."
승무원의 말을 가로챈 영감이 정색을 하며 나섰다.
"내 눈은 절대 확실합니다. 그는 바로 내 앞에 얼굴을 내밀고 담뱃불을 붙여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 준 다음 그 사람과 몇 마디 얘기까지 나누었는데요 뭘.
그는 절대 애꾸는 아니었습니다."
"허 참, 영감님도 답답하십니다, 영감님은 잘못 보신 거예요.
제가 그 사람의 승차권을 회수하려고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 분명히 왼쪽
눈동자가 없는 애꾸였어요. 애꾸일 뿐 아니라 얼굴이 아까... 저 아가씨 말대로
얼마나 음산하고 무서웠다구요. 기분이 나빠 얼른 돌아섰죠. 정말 기분 나쁜
얼굴이었습니다."
승무원은 턱도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문호는 이렇다저렇다는 의견 한 마디 없이 진술 하나하나를 열심히 메모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지금까지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면 사라진 사람은 애꾸가 틀림없습니다.
두 사람이나 얼굴을 보고 놀랐다면 죄송하지만 신부님이나 영감님은 아무래도
눈동자에 관심없이 그냥 지나치신게 틀림없을 겁니다. 애꾸를 애꾸가 아닌 것으로
지나쳐 볼수는 있어도 애꾸가 아닌 것을 애꾸로 착각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다음 그 사라진 범인을 최후로 목격하신 것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기억나는 대로..."
신부와 영감과 승무원은 서울을 출발할 때 부딪치고는 이후 얼굴은 못 보았다고 했다.
이때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인이 신부를 흘낏 쳐다보고는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화장실을 갔다와서는 이내 잠이 들었죠. 그런데 얼만가 시간이 지났을 무렵 덜컹
하고 진동이 왔어요. 잠이 깨서 잠깐 누워 있다가 차가 다시 출발할 때쯤 시선이 우연히도
그 이상한 침대의 사내가 있는 쪽으로 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담배 연기가 커튼 사이로
빠져나오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차가 떠날 때 그 사람은 분명히 거기 있었어요."
노인도 승무원도 신부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있던 승무원이 탁자를 툭치며 문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대전에 도착하기 25분 전에도 침대에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보관하고 있는 승객의 승차권을 목적지에 닿기 10분 전에 승객에게
되돌려 줍니다. 이 열차가 대전에 도착하는 시간은 00시 05분이거든요.
제가 자정 25분 전에 한 바퀴 순찰을 돌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전에서 내려야 할
승객이 사라진 애꾸 외에도 두 사람이나 더 있었거든요, 세 분의 동정을 살펴보려고
돌고 있을 때 분명히 03-03 침대 밑에는 구두가 있었습니다.
한 7,8m 전방에서 신발이 있는 걸 확인했죠. 불도 꺼져 있는지 깜깜하고 해서 잠을
자고 있나 보다 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표를 체크해서 뽑아놓고 담배를 한대
피우고 나니 대전 도착 15분 전이 되었어요. 천천히 일어나서 표를 되돌려 주려고
3호차부터 갔는데 신발이 없어서 커튼을 열어보니까 사람까지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그 애꾸는 밤 11시 35분부터 45분 사이에 없어진 것입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애꾸냐 아니냐 이게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이놈이 십 분
동안에 어디로 꺼졌느냐 이겁니다. 침대엔 가방만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참나 기가 차서..."
문호는 장황하게 설명하는 승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혹시 창문으로 탈출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창문은 구조상 사람이 드나들 면적이 못됩니다. 난장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 큰 덩치로... 더구나..."
"그렇다면 열차 내에 어딘가 숨어 있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
문호가 승무원을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승무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을 펴보였다
"제가 가보지 않은 곳은 화장실 한 곳뿐이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표를 주려고 03호 침대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이 영감님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마친 후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들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승강대며 침대며 손님이 있건 없건 모든 구석구석 깡그리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애꾸는 어디서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대전에서 열차가 멈추고
경찰이 올 때까지 어느 누구도 출입을 못하도록 문을 닫아놓았죠. 경찰이도착한 후
저희들과 합동해서 또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열차가 멈춰 있는 상태라면
범인이 어디론가 도망쳤다고도 할수 있겠지만 그 때 열차는 최고 속력으로 달리고
있을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러니까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열차
내에서 10분만에 연기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자 형사들은 물론 승객들까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열차밖에 매달려 몸을 숨긴다는 것은 구조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승무원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또 열차 내에 숨어 있는다고 해도 일반 객차와는 분리되어 있는 침대차 1, 2, 3호차에
국한된다. 특히 대전에 도착할 시간이면 1, 3호차 승강구에는 승객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승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양 출구에도 언제나 승무원이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무실에 드나들거나 쉬기 위해서 자리를 비우기도 한다. 열차가 서울을
떠나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내릴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승차권을 수거한 승무원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대전 도착 30분 전까지는 비교적 자유스럽고 편히 쉴 수 있었다.
오늘도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천안 하차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범인이 대전 도착
직전까지 차내에 있었다는 것도 승무원과 승객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시속 120Km로 달리고 있는 초고속 열차에서 범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범인이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대전역을 기점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25분 거리, 그 철로의 주변에 범인으로 지목된 애꾸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완전히 불가사의한 사태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10분, 그 10분의 짧은 시간에 달리는 열차 속에서, 그 작은 공간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발생되었기에 사람이 연기처럼 사라진단 말인가.
되는 대로 떠들어대던 승객들과 승무원 그리고 대전 현지 경찰과 서울서 내려온
특별 수사반 요원들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말을 잃고 말았다.
경찰측은 일단 참고진술인들을 목적지로 되돌려 보내기로 하고 차편을 마련하려
했지만 승객들은 비로소 피로가 엄습해 오는지 호텔에서 잠을 좀더 자고 아침에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 왔다.
수사진은 호텔을 떠나 대전 경찰서로 철수했다.
수사는 뒷전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황 판단마저 어려운 실정이었다.
승무원과 바바리 여인이 사라진 사람을 애꾸로 보았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진술로
보아야 했다. 그런데 왜 영감은 그가 애꾸가 아니라고 딱 잘라 단정을 했을까.
아무리 어두운 장소라고 해도 사람의 눈이 애꾸인가 아닌가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 영감은 라이터로 담뱃불까지 붙여 주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애꾸가 침대칸의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초고속으로 달리는 열차 속에서 사라진 사건이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그는 안개 같은 사람인가?
아무래도 쉽사리 풀려갈 것 같지는 않았다. 문호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생각에
잠기고 있었고 이민우 형사와 형사 과장은 얼굴을 찡그리고 앉아 진술인들의
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형사가 꽁초를 구둣발로 밟아 뭉개며 문호를 바라보았다. 문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03시 20분. 사건 발생 후 벌써 세시간이나 지났다. 이 때 전화가 따르릉 걸려 왔다.
대기중이던 순경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네? 서울이라구요. 특수반... 아 네, 지금 계십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바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받던 순경이 수화기를 들고 문호를 바라본다.
"서울입니다. 전화 받으세요."
문호는 성큼성큼 걸아가 수화기를 빼앗듯 나꿔챘다.
"나 박문홉니다."
"아-- 박 선배님, 저 이승룡입니다. 고생 많으시죠."
고강진 피살 사건을 최초로 보고했던 후배 형사였다
"음, 나는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로."
"저, 서울서도 난리가 났어요."
"난리!"
"예, 새벽 1시 15분경 보고가 들어왔어요. 마포 경찰서에요.
진남포라는 조연급 탤런트가 피습을 당했어요. 지금 관할 경찰서에서 출동해서
수사중입니다. 피습자는 인근 병원에서 가료중이고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죽은 고강진이나 진남포가 모두 S-TV의 전속 배우이고 또 비록 조연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비중이 있는 역을 맡은 배우라는 거예요."
"알았어. 고강진 피살 사건도 어차피 여기서 해결되긴 틀렸어. 내 곧 서울로 올라갈께.
시체는 앰블런스에 실어서 경찰 병원으로 옳길 테니 S--TV에도 연락해 놓으라구, 알았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문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떠올랐다,
하룻밤 사이에 두 사람의 탤런트가 그것도 한 방송국의 전속 배우가 같은
시간대에 당한 것이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이승룡의 말대로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서 어떤 배우가 또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고강진 말고 진남포라는 배우가 또 당한 모양입니다,
죽지는 않고 피습을 당한 모양인데... 다른 배우들이 또 당할까봐 걱정입니다.
고강진 살해도 서울서 이뤄진 게 분명하니 일단 저희들은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시체를 서울로 옮기도록 손 좀 써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수사진을 동원해서
천안부터 대전까지도 철로변도 조사 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범인의 시체가 발견될지도
모르니까요. 또 가능하면 호텔이나 인근 여관도 검문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문호는 대전 경찰서 형사 과장에게 협조를 구하고 과장은 노트에 일일이
메모를 하고 있었다.
"아 ! 그리고 김 형사. 김 형사는 여기 남아서 돕도록 하고, 천안, 대전 간 열차,
고속버스 시간표까지 정확히 알아놔. 밤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울, 천안, 대전
그리고 그 반대로 대전, 천안, 서울의 순서대로...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여기서
협조하도록."
문호는 수행해 온 부하 요원에게 지시하고 광장으로 나가 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연예인 피습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좀 오래된 얘기지만 가수 N씨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객석에 있던 젊은이가 느닷없이 뛰어올라 깨진
유리병으로 얼굴을 난자하여 장기간의 수술을 요하는 상처를 입힌 일도 있었고,
또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느 가수는 매일 밤 심야에 협박 전화를 걸어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정신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연예인사건은 이러한 가해 작용뿐
아니라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기 자신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위장 피습을 가하는 일도 있었고,
스스로 가십을 조작하여 언론에 흘려보내는 일도 있었다.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비단 우리 나라뿐만은 아니었다.
비틀즈로 유명한 존 레논의 피살도 아무 이유없이 자행된 사건이었고 마릴린 몬로의
자살은 아직도 확실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연예인들을 둘러싼 범죄는 때로는 냉혹한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원인이나
행위의 이유가 금세 밝혀지는 게 특징이기도 하다. 외국의 경우 인기 여우와 기업인
혹은 정객간에 얽힌 치정을 은폐시키기 위해 고도의 수법으로 살해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고도의 수법으로 연예계의 이제까지 쌓였던
아주 어둡고 눅눅한 비리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일어났다.
죽은 고강진 배우 하나라면 치정 사건이나 인기 시샘을 낸 다른 누구의 짓이라고
쉽사리 상상할 수도 있지만 살해 직전에 목숨을 건진 진남포를 생각하면 반드시
그것만은 아닌 듯 싶기도 했다.
--고강진이란 배우는 어떤 사람이며 그 주변 인물은 어떤 사람들일까.
진남포 사건과 고강진 사건은 어떤 연결성이 있는 것일까.
혹 방송국 자체 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방송국 대 방송국의 경쟁도,
기업 대 기업의 경쟁 못지 않게 치열하다는데 만일 이러한 경쟁이 빚은 살인과 피습
사건이라면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사건은 아닐까.
그건 그렇고 도대체 범인은 어디로 연기처럼 사라진 것일까. 불과 10분 사이에
범인이 모습을 감추었다면 범인은 그 짧은 시간에 열차를 탈출했다는 논리인데
초고속으로 달리는 특급 열차에서 과연 범인은 어떻게 탈출할수 있었는가,
숨는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다. 열차 그것도 1, 2, 3호차의 한정된 침대차에서
손바닥 보듯 열차의 구조를 훤히 아는 승무원을 속이고 어디로 숨는단 말인가.
애꾸가 범인은 누구이며 그는 왜 죽어 버린 고강진을 침대에 버리고 사라졌을까.
더구나 이것은 사건의 양상으로 보아 절대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치밀한
계획하에서 짜여진 계획적 범죄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실올처럼 밀도 있는 연극을 연출해 낸 범인의 뒤에는 어떤 그림자가 버티고
있는 것일까--
서울로 돌아오는 문호의 머리는 착잡하였다, 고정된 장소에서는 그래도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하면 실올 같은 단서라도 잡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열차의 경우는
현장을 한없이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서라고는 대형 가방과 담배 꽁초 그리고
비어 있는 속이 메마른 콜라병 하나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사 방향을 잡아 야
할지 앞이 캄캄하였다.
"박 선배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앞 좌석에서 턱을 괴고 앉았던 후배 형사가 불쑥 물어왔다.
문호가 손수 지명해서 대동한 형사였다. 머리가 좋고 재치 있거나 회전이 빠른
그런 형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매우 침착하고 부드러우며 생각이 깊고 조심스러운,
한 마디로 신중파 형사로 알려진 그런 인물이었다. 날렵하고 재빠른 형사보다 이런
성격의 스타일이 이번 사건에는 훨씬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D대학 경찰 행정학과 4회 졸업생. 그러니까 문호보다 4년 후배되는 동문이기도 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지금까지 곰곰이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고강진 사건과 진남포 사건은
별개가 아닌가 싶어요."
"어째서지?"
"물론 서울에 도착해서 수사를 해봐야 알겠지만요. 고강진은 계획적인 살인 같구요,
진남포는 우발적인 사고 같아요. 우연히도 그게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자꾸만 연관되어 생각되어 지는데 따로 분리해 보면 진남포 사건은
그저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사고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요.
사실 제겐 선배님이 잘 모르시는 면이 있어요. 저는..."
"뭐, 어떤 것인데. 내가 잘 모르고 있는 자네의 다른 면이..."
"별건 아니구요. 사실 저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영화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사생활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이에요. 사실 고강진이야 요즘에 반짝 인기를
얻은 탤런트지만요, 진남포는 어려서부터 영화계에 데뷔한, 아주 갈고 닦여진 배우거든요.
특히 진남포는 액션 배우로만 일관해 온 성격파였죠. 영화가 빛을 잃자 한동안 영화에
뜸하더니 S-TV에서 스카웃한 모양인데,
아마 이번 사건은 어디서 싸움에 휘말려 들었거나 아니면 요즘 젊은 애들이
액션 배우라니까 집적거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에 유명했던 액션의 대스타들,
이를 테면 장동휘나 박노식 같은 배우들도 실제 배우이기 이전에 주먹이라면 한가닥하던
사람들이었거든요. 박노식 같은 이는 세계 챔피언이었던 황금의 왼팔이라는 김기수
선수와도 링에서 맞붙은 적이 있는 권투 선수였구요. 장동휘 씨도 인천에서 떠들썩하던
주먹이었으니깐요. 50년대에 지방 공연을 가면 이런 배우들이 영화에서만 주먹왕이지
실제야 뭐 별 볼일 있었겠느냐는 식으로 동네 건달들이 싸움을 걸어오곤 했죠.
지금 같은 세상이면 배우들이 피하죠.
인기 관리상 대들어 싸울 수도 없고 또 잘못하면 치료비 물어 주기 십상이니까요.
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게 아니었어요.
건달들 중에 제일 왕초를 불러 한 방에 보내면 바로 그게 신화가 되고 인기 관리에도
도움이 되었거든요. 맞은 쪽이 깨끗이 승복하는 소위 '멋'이 있었어요.
왜 이소룡 있잖아요. 그 배우도 사실 실생활에선 많은 도전을 받았어요.
이소룡이 죽었을 때 영화 잡지에 이런 가십이 난 일도 있었죠.
한국 태권도 선수와 겨루다가 뇌에 손상을 입은 게 죽은 원인이 되었다구요.
사실 진남포도 부산에서 이름난 싸움꾼이었습니다. 이름도 말이죠,
자기가 누비던 부산의 남포동 이름을 따서 '진짜 남포동'이라 해서 '진남포'라고
예명을 바꾸고 영화계에 데뷔했죠. 그 사람 데뷔할때가 60년대 초였죠.
'두만강아 잘 있거라' '안개 낀 부두' 같은 액션 영화가 판을 치던 때인데 이 무렵
액션 전문 영화사가 있었어요. 최두관이라는 분이었는데 이 사람이 부산 촬영지
물색차 갔다가 마침 자갈치 시장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골목에 이르러 진남포를
발견하고 스카웃했죠. 체격 좋고 싸움 잘하고 아직 나이 어리고...
얼굴이 좀 뭣해서 큰 빛은 못 보았어요. 워낙 한다하는 대스타들이 많기도 했구요.
자연히 조연급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를 풍미하던 배우였어요.
에, 제 생각에는 그 사람이 시비하는 사람들을 피하기만 하다가 당하기만 하고 만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거죠."
"자넨 어떻게 그렇게 옛날 배우들의 일까지 자세히 알고 있나. 정말 내가 모르고 있던
면인데, 참고가 크게 될 것 같아. 그래 진남포하고는 아는 사인가?"
"웬걸요. 사실은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쬐그만 영화관을 하나 경영하신
적이 있었어요. 자연 분위기가 그쪽으로 몰리게 되죠. 이것저것 영화 잡지도 많았구요.
이따금 지방 공연 오는 악극단에 배우 한두 명이 간판으로 따라와 노래 한두 곡 부르곤
했죠. 그 때 진남포도 한두 번 본 기억이 있어요."
"음... 그거 잘됐구만. 서울 가면 일을 나누자고. 난 고강진을 맡을 테니까 자넨
진남포를 맡아. 껄렁거리는 놈들 조사해서 아주 이번에 뿌릴 뽑자구. 직업상 약한
편에 있는 배우들 보호 좀 해야지... 에이, 인기인 그것도 못해 먹을 짓이야."
최찬일 형사는 어렸을 때 아버지 몰래 극장에 들어가 못생긴 진남포가 멋지게 노래
부르던 기억을 감감히 떠올렸다. 무대에서 노래 부르던 진남포는 지금 누구에겐가
피습을 당해 중태에 있고 객석에 앉아 숨어 노래를 들으며 멋지다고 생각하던 자기는
형사가 되어 범인을 잡아 주기 위해 뛴다는 것을 생각하니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참으로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찬일은 약간 흥분되는 가슴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차는 톨 게이트를 지나 수원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부우연 안개가 그대로 있어서
가까운 거리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한기가 으스르 몰려왔다. 문호는 피우던 담배를
부벼끄고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며 사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금년엔 정신 없는 일만 생기는 구만."
혀를 쯧쯧거리며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토곡리 사건이 끝난지도 벌써 두 달이나 되었죠?"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신문에서는 환상적인 살인이라고 대서 특필하였지.
처음부터 그 사건에 뛰어들었던 Q신문 민 기자가 실감 나게 썼더군.
그 친구 머리가 보통 아냐. 만약 신문 기자 그만두고 형사계로 나서면 크게 한몫 할 거야.
생각해 봐 방문이 모두 안에서 잠겨 있고 거기서 화재는 나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손목 잘린 시체가 발견되고, 손목은 엉뚱한데서 발견되고...
사람 환장하겠다더군. 오죽하면 신문에서 덫에 걸렸다고 '덫'이라는 제호를
대문짝 만하게 올려놨겠어. 그 사건이 터지고 두 달도 안돼 또 이런 사건이 터지니...
아니 십 분 전에 있던 애꾸, 이 자식이 도대체 어디루 어떻게 꺼졌느냐 이거야.
사람이 무슨 연기도 아니구 물도 아니구. 참 웃기는 구먼...
날이 밝으면 서울역에 가서 침대차 구조를 좀 살펴봐야겠어.
시속 120Km에서 뛰어내리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 어딘가 숨은 게 틀림없을 텐데.
열차 승무원이 숨은 곳을 모를 리도 없고.
그 승무원 얘기로는 숨는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또 그렇다치구 도대체 한 사람을 놓고 한쪽은 애꾸다, 또 한쪽은 아니다.
난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그 신부도 그렇고, 사람을 보면 제일 먼저 보는 곳이
상대방 눈동자라구.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두 사람이나 눈동자가 없는
허연 애꾸라면 틀림없는 애꾼데,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이 차 좀 세워, 빨리."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차를 멈추게 한 문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뚱거리더니
기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수원 톨 게이트 바로 앞이에요."
"그래? 그럼 차를 톨 게이트에서 돌려서 빨리 대전으로 내려가 빨리. 전속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