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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만의 귀대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육사 11기) 소장이 이끄는 하나회 소속 신군부는 일명 ‘생일잔치(12·12 거사 암호명)’라는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가장 큰 걸림돌로 판단한 특수전사령부(이하 특전사)의 무력화를 위해 전두환은 특전사령관 정병주(육사 9기) 소장의 연행을 지시한다. 이에 특전사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육사 13기) 준장은 15대대장 박종규(육사 23기) 중령에게 명령을 내린다.
박종규는 포박용 태권도 도복 띠와 M16소총으로 무장시킨 체포조 10명과 지역대 38명을 편성해 특전사 본청을 기습한다. 그는 김오랑의 육군사관학교 2년 선배이자 간부 관사 아파트 이웃에서 살며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다. 한편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맞서는 상황이다.
김오랑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권총의 삽탄상태를 재확인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보안사 소속 특전사 보안반장 김충립(학군 6기) 소령의 표정 역시 굳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보안사로부터 정병주 사령관의 병력동원 상황을 점검해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고 비서실에 와 있던 중이었다.
김오랑은 그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정병주 사령관이 무장출동 대기 지시를 내리고 얼마 후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이 찾아왔을 때였다. 정병주를 만나고 나와 침통한 표정으로 떠나던 모습이 생생했다. 최세창이 나가자 김오랑은 자기 책상에 앉아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었다. 그러자 김충립이 왜 실탄이 필요하냐며 말리듯 물어왔다.
“보안사에서 사령관님을 잡으러 올 것 같아서···.”(평전 《김오랑》중에서)
“갈겨!”
드르르르르 드르르르르 드르르르르···
탕탕탕 탕탕탕 탕!
교전 끝에 정병주는 왼팔 관통상을 입고 김오랑은 6발의 총탄에 쓰러지고 만다.
그 후 남편을 잃은 충격까지 겹쳐 결국 실명한 아내 백영옥은 봉사단체를 통해 어려운 이웃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삶의 의욕을 찾아간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청문회를 계기로 12·12가 세상의 이목을 끌자 그녀는 남편의 명예를 바로 세우려고 중령 진급과 무공훈장 추서를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마침내 그녀의 노력 등으로 1990년 1월 김오랑은 중령으로 추서되었지만 무공훈장에 대한 성과는 없었다. 그해 12월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외압으로 소송에 어려움을 겪던 중 1991년 6월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다.
김오랑의 죽음은 역사의 비극이자 자성의 울림이 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한 가정의 몰락이었다. 자식의 죽음조차 모른 채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동생을 잃은 슬픔에 화병 등으로 고생하다 결국 암 투병 끝에 눈을 감은 큰형. 증언에 따르면 김오랑이 죽자 그의 가족들은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고 전 재산을 잃는 등 비극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과 싸우다 의문사를 맞은 백영옥.(평전 《김오랑》중에서)
어두웠던 역사의 한 페이지는 그렇게 무참히 찢겨나가는 듯했다. 김오랑의 실체가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은폐됐으며 남겨진 유족까지 군사정권으로부터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3년 5월 철의 장막보다 더 두꺼운 그 가리개를 벗겨내려는 움직임 하나가 있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보좌관으로 반란군의 청사 점령과정에서 머리 부상을 입고 강제예편당한 김광해(단기사관 1기, 예비역 육군중령)가 주인공이다. 그가 고급장교 출신으로는 처음 전두환·노태우를 반란죄와 살인죄로 고발한 것이다. 하지만 총칼 앞세운 무소불위 권력으로 뿌리내려온 세력을 송두리째 뽑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의를 지켜내려는 눈은 대한민국에 살아 있었다. 특전사 후배이기도 한 김준철(학군 28기, 예비역 육군대위)이 김오랑의 넋을 기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위 임관 후 맹호부대를 거쳐 특전사에서 근무하다가 훈련 중 다리부상으로 전역한(상이군인) 상태였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지난 1994년 검찰 조사과정에서 알려지게 된 김오랑의 셋째형 김태랑과 장조카 김영진을 접촉한 후 1995년 ‘김오랑 중령 추모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1996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전두환과 노태우는 단죄되고 동조자들 역시 내란과 군사반란 혐의로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12·12가 정식으로 ‘군사반란’이라고 최종판결 확정된다. 그때까지 ‘12·12 사태’ ‘12·12 사건’ 식의 모호한 표현으로 합리화하고 얼버무리려했던 무리들 이마에 ‘쿠데타’라는 화인이 새겨졌다.
추모회에서 이를 기념하고 김오랑의 명예회복과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18년 만에 처음으로 추모식을 가졌다. 그 후 매년 6월 6일과 12월 12일 두 차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추모식과 행사를 벌이며 김오랑의 명예회복에 심혈을 기울여오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오랑에 대한 평가는 유보된 채 12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다. 2009년 김준철은 그동안의 노력을 당시 한나라당 김정권 의원(김해 갑)에게 알려 대표발의로 김오랑에 대한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된다. 건의안 통과를 위해 직장마저 그만 둔 그는 육군사관학교, 국방부, 국회 앞에서 1인 캠페인을 벌인다.
공허한 메아리만이 돌아왔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끝에 떠오른 것이 김오랑 평전. 그의 존재와 정신이 담긴 책을 등 돌리고 눈 가리고 있던 사람들 앞에 펼쳐주고 싶었다. 그들이 끝내 외면해도 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읽고 공론을 모아주기를 소망했다.
2010년 모 신문사 기자 출신에게 자료를 전달하며 평전집필을 의뢰하게 된다. 적지 않은 금액을 들여 시작된 작업은 그러나 일 년이 다 돼가도록 성과 없이 의혹만 남겼다. 무슨 이유였는지 결국 원고지 한 장 받지 못한 채 거액의 집필대금만 날려버렸다.
다시 좌절에 빠졌다. 아무도 그와 같은 처지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접하게 된 책 한 권. 출판사를 통해 작가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런 인연으로 내가 김오랑 평전을 쓰기 시작하여 2012년 10월 마침내 빛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그가 건네준 자료를 받아봤을 때는 사실 막막했다. 어느 정도 얼개를 끌어내기에 어렵지 않았지만 실제 원고지로 옮겨질 수 있는 부분은 부족했다. 워낙 김오랑에 대한 자료가 없었던 탓이었다. 나머지를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이나 그럴 듯한 미화작업으로 채울 수만은 없었다. 한 인물의 일대기를 나열하고 사적인 일화들로 꾸미는 전기(傳記)가 아닌 비평이 가미된 평전(評傳)이어야 했다. 우선 현대사에 대한 재 탐구와 우회적인 통로를 통한 자료 발굴을 병행했다. 무엇보다 김오랑의 정신에 대한 이해와 가치성에 부각에 심혈을 기울였다.
처음 며칠간은 김오랑의 사진 앞에서 아무런 대답조차 해주지 않는 무심한 얼굴하고만 대화를 나눴다. 그와의 소통이 먼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가 숨지던 그날 밤, 교련복을 즐겨 입던 고교생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행여 독서실 핑계 삼아 밤늦도록 친구들과 쏘다녔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지나 않았을까. 하나의 대답을 낳기 위한 자문들이 내부에서 자성처럼 울렸다.
어느 순간부터 김오랑이란 인물에 대해 몰입하듯 매료되어갔다. 단순히 책 한 권을 집필해 수익을 얻는 차원과 서둘러 멀어지고 싶었다. 김오랑 추모회에서 제시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라는 봉투 속 고료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도 되었다. 부족한 것은 내 이름을 건 결과물로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채워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잊혀져가는 참군인의 한 사람을 어떻게 반란군이 난사한 총탄보다 더 큰 흔적으로 세상에 내놓느냐 하는 것이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부터 무거워졌다. 감기몸살에 치통, 두통, 복통까지 반란처럼 고개 쳐든 것들과도 싸웠다. 유유자적 유람하듯 취미로 글을 쓰고 문학이 아닌 글짓기를 하며 살고 싶다는 충동과도 두어 번 다퉜다.
이미 이 땅에 없는 한 사람의 영혼과 동거하며 집필하기를 수개월. 오랜 산고를 거쳐 세상에 던져줄 의미 하나가 탄생된 것이다. 다른 원고청탁은 물론 평균 이틀이 소모되는 술자리들은 일체 사양한 채 오직 그의 식어가던 심장에만 매달려 보낸 시간이었다. 배고프고 막막하고 불안했지만 신났다. 글을 쓴다는 것이 원래 그랬다.
기대와 달리 출간이 녹록치 않았다. 제18대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점이라 그랬는지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다. 어렵게 인연이 닿으면 불리한 조건을 내걸기 일쑤였다. 그러다 리영희, 노무현, 이회영, 송건호의 평전을 낸 바 있는 한 곳과 손잡을 수 있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육군사관학교장, 특전사령관, 공수특전여단장들에게 보냈다. 대선이 끝난 뒤 국회 국방위원회와 행안위원회 의원들에게도 보내 추모사업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들 모두가 김오랑의 곧은 목소리를 들어주리라 기대했다. 그의 정의로운 가슴을 읽고 반성과 개선의 눈을 떠주기를 바랬다. 또한 ‘장병 정신교육 기본교재’에 김오랑의 군인정신을 포함하도록 국방부에 촉구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국회 해당 위원회에서 미미하게나마 움직임을 보였다.
이미 7월 말에 민주통합당 민홍철 의원(김해 갑) 등 21명이 김오랑에게 무공훈장을 추서하고 그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 경내에 추모비를 세우도록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의한 적이 있다. 결의안은 법안심사소위에 회부됐지만 상정되지는 못한 채 계류 중이었다.
소극적인 반응에 대해 김준철은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19대 국회에 김 중령의 육사 25기 동기인 강창희 국회의장과 새누리당 황진하 의원이 있지만 모두 하나회 출신이어서 도움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안일한 불의보다 험난한 정의를 택한 김 중령의 정신을 우리 군과 사회에 알리려면 결의안은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는 의지를 이어간다.
강창희와 황진하 이외 김오랑의 육군사관학교 제25기 동기 가운데 잘 알려진 인물이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 원장이다. 김오랑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될 때 절친했던 그가 묘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육군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을 강력히 비판했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 매번 진급에 고배를 마셨다.
그 밖에도 권경석(17,18대 한나라당 의원), 서종표(18대 민주통합당 의원)를 비롯한 많은 동기들이 곳곳에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을 역임한 안광찬,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때 작전지역을 담당한 제23사단장 출신으로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는 백남환, 제3사단장을 역임했고 동양대학교 교수로 있는 안충준,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여 관동대학교 교수로 있는 임인창, 육군 제7군단장과 교육사령관 등을 지낸 후 군인공제회 이사장을 역임한 김승광 그리고 합참의장을 역임한 김종환, 특전사령관을 역임한 김희중과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낸 박준근 등을 꼽을 수 있다.(평전 《김오랑》 중에서)
이들 가운데 백남환 등은 평전에 많은 증언과 사진자료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에 한편 진한 잉크를 마련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김오랑 평전이 출간되었지만 워낙 서슬 퍼런 신군부 세력에 의해 가려졌던 인물이라 당장의 반향은 불러오지 못했다. 일단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몇몇 언론매체만이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위해 펜을 들었다.
12.12 사건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고자 반란세력과 교전하다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일대기를 그린 평전이다. 김오랑은 자신의 삶에 무척 충실했으며 정의가 아니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비록 그는 작았지만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군인정신은 활화산과 같았다. 저자는 “김오랑은 전두환, 노태우 등 반란세력이 만든 오욕의 역사 한 귀퉁이에 작은 빛을 비추고 떠남으로써 참군인이 됐다”고 설명한다.(<천지일보> 2012.10.24)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고자 반란세력과 교전하다가 숨진 김오랑 소령의 일대기를 그린 평전. 그는 전두환·노태우 등 반란 세력이 만든 오욕의 역사에서 참군인으로 한평생을 살아 작은 빛이 됐다. 12·12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추적과 취재를 담았다.(<한겨레> 2012.10.26)
김오랑 중령 추모회에 따르면 작가 이원준씨와 추모회 운영자 김준철(예비역 특전사 대위)씨는 지난 10월 말 김 중령의 일대기를 조명한 평전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을 출간했다.
이 책은 김 중령의 출생과 어린 시절, 육군사관학교 입학부터 전방사단과 특전사령부에 이르는 군 생활, 12·12 쿠데타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반란군에 맞서다 사살되기까지 그의 일생과 국내 정치상황 등을 다뤘다.(<연합뉴스> 2012.12.14)
바라던 평전이 출간되고 맞이한 12월 12일 김오랑 제33주기 추모식의 감회는 남달랐다. 추모회 관계자와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조촐하게 열렸지만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가장 먼저 반색하며 호응한 것은 김오랑의 고향 경남 김해시였다.
추모회는 같은 날 김해 시내에서 동상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 일일찻집 행사를 연다.
김해시 봉황동 YMCA 1층 커피숍에서 열린 일일찻집. 행사를 기획한 기념사업회 김지관 사무국장과 공연기부 모습(사진:김오랑 기념사업회)
한편 기쁨과 함께 눈물을 흘려야했던 사람은 김오랑의 셋째형 김태랑(78)이다.
김오랑 평전을 보는 김태랑(사진:<부산일보>)
김오랑보다 8세 위인 그의 막내 동생에 대한 사랑은 유독 컸다. 1965년 김오랑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 쥐어준 편지에 그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다.
육군사관학교 정문까지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시작된 편지에는 태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동봉되어 있었다. 항상 가족들이 응원을 하니 건강하게 잘 지내고 반드시 멋진 군인이 되어 다시 만나자는 염원을 또 확인할 수 있었다. 편지 가운데 유독 머릿속 가득 들어차게 하는 단어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의지와 노력’이었다. 김오랑은 다시 한 번 태랑의 격려와 우애 속에서 각오를 다졌다.(평전 《김오랑》 중에서)
김태랑은 김오랑이 어린 시절부터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비운의 죽음을 당할 때까지 늘 정신적인 기둥 역할을 해주던 존재이기도 했다.
더 기쁜 소식이 들려온 것은 다음해인 2013년 4월 29일이다.
김오랑의 명예회복과 예우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이날 국회 본회의는 민홍철 의원이 대표 발의한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을 재석 227명에 기권 6명, 찬성 221명의 압도적인 지지로 가결했다. 제17, 18대 국회에서도 각각 발의됐던 결의안은 민홍철 의원에 의해 세 번째로 제19대 국회에 제출돼 지난 22일 국방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처음 반대를 했던 이유에 대해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당초 국방위 법안심사소위는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을 의결해 전체회의로 상정했지만,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의 반대로 ‘무공훈장’에서 ‘무공’을 빼고 결의안이 통과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새누리당 소속 국방위원들 사이에서도 결의안을 놓고 찬반 의견이 갈렸다. 특히 모두 국군기무사령관을 지낸 송영근 의원과 김종태 의원 사이에는 결의안을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송 의원은 “12·12는 법원 판결로 군사반란으로 규정이 돼 있다, 국방부에서 이와 같은 사람의 공적을 기려줘야 앞으로 상무정신이 살아나고, 진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반면 김 의원은 “여기 있는 예비역·현역 모두 반란군의 후배다, 당시 임무 수행에서 김관진 장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며 “안보 상황이 위태로운 이 시기에 군을 분열시키는 논란은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통합당 김재윤 의원은 “12·12는 군사 반란으로 이미 대법원 판결이 났고, 전두환 장군과 쿠데타군이 처벌받았다”며 “그렇다면 고 김 중령은 단순히 상관 신변을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역할을 하다 이 땅을 떠난 것”이라고 말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결의안에 대해 “대법원의 판결은 존중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답변해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오마이뉴스> 2013.4.22)
국회의 결의안 논의과정에서 국방부와 안행부 등 관련부처는 김 중령의 희생이 ‘전투 참가’ 등 상훈법의 규정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29일 국방위원회는 심사보고를 통해 상훈법에 따르더라도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으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요건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뉴시스> 2013.4.29)
고대하던 무공훈장이 아니라 보국훈장으로 최종 결정이 났다. 무공훈장(武功勳章)은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보국훈장(保國勳章)은 ‘국가의 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해석의 차이였겠지만 명예회복이라는 더 뚜렷하고 큰 훈장을 받았다고 위안 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비로소 동생의 명예가 바로 세워진 것에 김태랑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5월 21일 발행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동생이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한겨레>는 이와 관련해 ‘역사적 평가는 34년 만에야 비로소 바로잡혔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권력을 잡기 위해 일으킨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숨진 이름 없는 사병과 하급 장교의 유가족에게도 사과하지’ 않은 전두환은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덧붙인다. 또한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 수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지만 국방부의 반대로 무공훈장은 훈장으로 바뀌었다’면서 결의안이 법적인 강제성이 없어 그마저 실천될지도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전망한다.
김오랑 추모회의 행보가 본격적으로 빨라졌다. 행사가 있은 7월 11일은 비가 내렸다. 1부는 ‘참군인 김오랑 추모제’, 2부는 ‘참군인 김오랑 기념사업회 창립총회’로 진행되었다. 이 시점부터 ‘추모회’는 ‘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달리하게 된다.
기념사업회 양일석·김용환 공동대표, 민주통합당 민홍철 의원, 김형기 현충원장, 이계안 전 의원, 유가족 김태랑, 김영진을 포함해 동창과 지지자 등 40여 명이 참석해 김오랑을 추모하고 훈장 추서와 추모비 건립 실행을 요구했다.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자 김오랑의 김해농업고등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동기인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학장 양일석의 기념사 일부다.
어릴 적 이름 호랑이, 그 별명을 불러본다. 대체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냐? 대한민국 역사의 하늘에 뜬 큰 별이자 현대사에 길이 남을 참군인 김오랑을 추모하고자 이 자리에 섰다.
김태랑은 감사하다며 동생을 역사의 별로 다시 뜨게 해준 사람들 덕분에 지금이 있다고 심정을 드러냈다.
특히 눈길은 끈 것은 군사반란 때 보안사 소속 특전사 파견 보안반장으로 신군부 쪽에 섰던 김충립(현 기독자유민주당 대표)이 참석한 점이다. 그는 김오랑이 사망한 특전사령관실 현장에 바로 직전까지 남아있었던 인물로 평전집필을 위해 그날의 생생한 현장증언을 들려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박종규가 사전에 대화를 시도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텐데 무작정 사격을 가해 김오랑이 대응하다 죽은 것이라고 회고한다. 뒤이어 가슴이 아프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는데 12·12 군사반란 참여 장교가 김오랑의 유족을 직접 만나 사과한 것은 처음이다.
행사 소식은 요란하지 않게 보도되었다. 반란군의 일원과 그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코자 했던 진압군의 유족이 34년 만에 만났다고 시작된 기사는 행사의 풍경을 담담히 싣고 있다.
취재를 한 <한겨레>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당시 신군부 인사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한 줄로 그날의 명암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참여정부 시절인 17대 국회와 이명박 정부 시절인 18대 국회 때 잇달아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이 발의됐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국회는 지난 4월 29일 결의안을 여야합의로 통과시켰다. 국방부는 5월 9일 김 중령이 무공훈장 수여대상인지 안전행정부에 상훈법에 대한 유권해석을 의뢰했다. 안행부는 스스로 결론내지 못하고 최근 법제처에 재차 유권해석을 의뢰해 답변을 기다리는 상태다.(<한겨레> 2013.7.11)
김해 시민들은 더욱 더 김오랑의 가치를 알리고 기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8월 김오랑이 태어난 김해시 활천동 주민자치위에서 회의 결과 ‘김오랑 중령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의결한 것이다. 김해지역에서 김오랑을 널리 홍보하고 있는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김지관의 공이 컸다. 그가 활천동 주민자치위를 방문해 가진 브리핑과 영상물의 시연 을 통해 일구어낸 성과였다.
기쁨 뒤에는 슬픔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인가.
8월 17일 12·12 군사반란 때 반란군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병력출동이 이뤄졌던 진압군 측 특전사 제9공수여단장 윤흥기(갑종장교단 35기, 예비역 육군소장) 장군이 80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신군부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가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역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반란죄로 고소한 바 있다.
반란군에 맞서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던 정승화(육사 5기, 육군참모총장), 정병주(육사 9기, 특전사령관), 장태완(육군종합학교 11기, 수경사령관), 안종훈(육사 9기, 육본 군수참모부장), 김진기(갑종장교단 6기, 육본 헌병감), 하소곤(갑종장교단 1기, 육본 작전참모부장) 장군 등이 이미 세상을 등진 상황에서 들려온 또 하나의 비보였다.
11월 7일 김해시 활천동 동사공원에서 김오랑 추모 일일찻집 행사가 열린다.
김해시 활천동 동사공원에서 열린 김오랑 추모 일일찻집(사진:김오랑 기념사업회)
일일찻집은 김오랑의 홍보영상물 상영과 추모공연 그리고 주점운영으로 진행됐는데 수익금은 추모공원과 추모비 건립에 쓰일 예정이다. 김해시에서도 김오랑을 추모하기 위한 공원건립을 결정하고 부지물색에 나섰다. 김오랑 기념사업회와 김해시가 구상하는 추모공원은 2014년 상반기 완공이 목표다. 추모비는 공원 내 건립되며 김오랑의 활동내용과 추모사가 새겨진다.
<부산일보> <경남매일> <뉴시스> 등에서 기사를 다뤘는데 소위 일컫는 4대 일간지 3방송에서는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2014년 1월 17일 <문화일보>는 ‘역사적 재평가를 받은 시기를 생각하면 김 중령에 대한 훈장 추서는 늦은 결정’이었음을 알린다. 그러나 고무적인 것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진 최근 상황에서 이번 훈장 추서를 통해 신뢰를 다소 회복하고 후배 군인들에게도 좋은 본보기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는 점’이었음을 강조한다. 김오랑은 반란군에 의해 35년 전 숨을 거뒀지만 그는 ‘참군인으로 국민과 육사 후배들에게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녘의 훈풍에 제주도에서도 한 자락을 보태주었다. <제주일보> 박상선 편집부국장은 2014년 1월 20일 ‘정치적 쿠데타 세력에 맞서 총탄 6발을 맞으면서도 상관을 지키려 했던 김오랑 중령의 군인 정신이 더욱 빛나는 요즘이다’면서 ‘김 중령 같은 참군인을 위해서는 국민 세금으로 바벨탑에 버금가는 추모비를 세워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는 목소리를 낸다.
2월 19일 <부산일보>에 실린 수필가 양민주의 칼럼 〈김해 사람의 기질〉을 요약해놓은 것이다.
기질은 일반적으로 성격의 유전적, 생물학적 기반이다. 나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김해에 터를 잡고 들어와 50대 중반을 살고 있으니 김해사람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김해사람의 기질은 타고나지 못했다. 타고나지 못한 김해사람의 기질은 과연 무엇일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나는 김오랑 중령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김해의 ‘김해뉴스’에서 김오랑 중령의 기사를 처음 접한 것은 2012년 말쯤으로 기억된다. 관련 기사가 지금까지 대략 40여 차례 보도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국가와 겨레를 위하여 죽음도 불사한 참군인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 김오랑 중령의 기사를 취재하는 기자를 만난 적이 있다. “김오랑 중령은 김해사람의 기질 자체”라는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공감했다.
삼일절을 앞두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제의 불의에 맞서 저항하다가 투옥된 김해사람들로 해서 부산의 감옥이 비좁을 정도였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이것만 보아도 김해사람의 기질을 대충 알 수 있다.
2월 18일 자 김해뉴스에는 속보로 “고 김오랑 중령, 3년 전 ‘그때 그 자리’에서 훈장 받는다”는 기사가 났다. 주 내용은 김오랑 중령의 참군인 정신을 국가가 인정하여 산화 당시 현장인 특전사에서 오는 4월 1일 창설기념일 때 유족에게 보국훈장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벌써 4월의 봄이 기다려진다.
그 기다리던 4월의 봄이 찾아왔다.
노력의 첫 결실인 훈장 전수식이 열린 것이다. 유가족 김태랑, 김영진을 비롯해 민홍철 의원, 김오랑 기념사업회 양일석·김용환 공동회장과 김지관 사무국장, 김준철 사무처장이 참석했다. 김해시 활천동 주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추모사업 소위원회와 김오랑의 고교 동기 그리고 지인들도 자리를 빛내주었다.
소식을 전한 <국방일보>는 상대적으로 김오랑 관련 기사를 짧게 처리한 것이 눈에 띈다. 기사 제목 ‘조국이 준 명예, 軍에 다시 바치다’에 걸맞게 먼저 ‘지난 1월 6·25전쟁 국가유공자로 추서된 고(故) 최희화 참전용사의 유족들이 고인이 받은 화랑무공훈장을 특전사에 기증했다’는 소식을 다루고 있다. 남다른 장엄함에 싸인 김태랑은 이해가 되어도 우연일지 받는 장면과는 달리 주는 장면에서 특전사령관 전인범(육사 37기)이 미소를 아끼고 있다. 화랑무공훈장의 의미도 높지만 왜 하필 그날이어야 했을까?
김오랑만을 위한 날이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김오랑이 생전 뼈를 묻고자 다짐했던 특전사의 ‘창설 56주년을 맞아 특전의 날 행사를 하고 부대 탄생 기념일을 축하’한 날이라 그나마 뜻을 함께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전체 기사 17개 문장 가운데 김오랑에 대해서는 불과 3개 문장으로 끝나고 있어 섭섭함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특전사는 이날 군인으로서 살신성인 정신과 책임감을 보여준 고 김오랑 중령에 대한 훈장 전수식도 함께 거행했다. 정부는 지난 1월 국무회의에서 훈장을 추서하는 내용의 수여 안을 의결한 바 있다. 특전사는 고 김오랑 중령의 가족에게 최고의 예를 갖춘 공식 부대 행사로 훈장을 전수했다.
한편 다른 언론사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다.
“고 김오랑 선배님은 육사 25기로 임관한 이후 11년 가까운 군복무 기간 동안 줄곧 자타가 공인하는 올곧고 우직한 군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고 또 그렇게 행동했던 참군인이었습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고 김오랑 선배님이 보여주신 책임 의식과 그 의기를 우리 특전사 전 장병들은 가슴에 아로 새겼습니다.”
1일 오후 2시 서울시 송파구 거여동 육군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는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당시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보호하려다 반란군의 총탄에 숨진 고 김오랑 중령에 대한 훈장 전수식이 열렸다. 김 중령이 숨진 후 35년 만의 일이다.
전인범 특전사령관(육군 중장)은 축사를 통해 “김오랑이라는 군인은 역사 속에 산화했지만 그의 정신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서 김 중령을 추모했다.
특전사 창설 56주년을 맞아 거행된 이날 훈장 전수식에는 전 사령관을 비롯한 부대 관계자들과 민홍철 국회의원, 김 중령의 유족과 고교 동창, 고인의 고향인 경남 김해시 주민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전수식에서는 특전사 예하 여단 장병들이 도열한 가운데 각각 고인의 영정과 훈장을 든 셋째형 김태랑씨와 장조카 영진씨가 사열차를 타고 장병들의 사열을 받았다.
지난 2013년 4월 22일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이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했고 같은 해 4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후 정부는 지난 1월 14일 이를 수용하여 국무회의에서 고인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하는 영예 수여안을 의결한 바 있다.
전수식을 마친 유가족과 친구들은 김 중령의 묘소가 있는 동작동 국립묘지로 자리를 옮겨 고인의 영전에 훈장을 바쳤다.
태랑씨는 ‘훈장이 너무 늦게 수여된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디고 느려 보이지만 이렇게라도 동생의 의로운 죽음을 알아주는 세상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12·12 관련자들이 사과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사과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인데 그 사람들이 그럴 수 있겠느냐, 동생의 죽음과 그 사람들의 행위는 마치 시소처럼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이 내려갈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 중령의 증손녀 진은(초등 5학년)양은 “작은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몰랐는데, 오늘 군인아저씨들이 작은 할아버지의 사진에 경례를 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진은 양의 아버지 봉주(고인의 조카)씨는 “아직 딸이 어려서 12·12가 뭔지,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오늘 뜻 깊은 날을 맞아서 역사를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학교에 현장학습 신청을 하고 딸을 데려왔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에는 고인이 나고 자란 경남 김해시 활천동 주민 20여 명도 함께 자리했다. 지난 해 국회에서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이 통과된 후 활천동 주민들은 일일찻집을 열어 고인의 동상 건립비용 1700여만 원을 마련했다.
활천동 주민자치위원회 허정기 위원장은 “김 중령은 고향을 빛내신 분이니 우리가 힘을 모아서 동상과 추모비를 제작하고 있다, 고인의 군인정신과 의로운 죽음이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해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비해 고인의 모교인 육사와 순직 장소인 특전사 영내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안은 군 내부의 반대로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육사 측은 “현재 육사에는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 강재구 소령, 심일 소령 3명만 동상이 건립되어 있는 바, 그 대상은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부정적 의견을 냈고, 특전사 측도 “순직한 모든 장병의 이름을 새겨두고 있는 부대 내 충혼탑에 김오랑 중령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추모비는 의미가 없으며, 부대 내에 특정인의 추모비는 세워져 있지 않기에 (건립이) 어렵다”는 답변을 한 바 있다.
참군인 김오랑 기념사업회 김용환 공동대표는 “12·12 당시 ‘몸을 피하라’는 전화를 받고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적극적으로 반란에 대항했던 김 중령 같은 분들이 있어서 군의 역사가 오역만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면서 “오늘 훈장 수여는 이 분의 정신을 군 후배들에게 심어주는 데 첫발을 디뎠다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앞으로도 고인의 추모비를 육사와 특전사에 세우는 일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훈장 전수식에 앞서 열린 역대 특전사령관 초청행사에는 4대 사령관 정호용 예비역 대장을 포함한 8명의 전임 사령관들이 참석했다.(<오마이뉴스> 2014.4.1)
35세의 나이에 죽어 35년 만에 그 죽음을 인정받은 김오랑.
정말 35년 만의 당당한 귀대였는가!
파란곡절 속에 어렵게 돌아왔는데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김해뉴스 157호(사진:김오랑 기념사업회)
세상에 늦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란 결코 없다는 말을 되새겨본다. 그러나 빠를수록 좋은 것은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보다 선명한 세움이 우선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야 평전을 읽었다는 독서광으로 알려진 소설가 장정일의 관심에 그의 장편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제목을 그대로 화답 삼아본다.
뒤늦게 이원준·김준철의 <김오랑-역사의 하늘에 뜬 별>을 읽었다. 김오랑은 1944년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좋은 쇠는 못이 되지 않고 좋은 사람은 군인이 되지 않는다는 옛말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부모에게서 들었던 나라 없는 설움과 그가 일곱 살 때 체험한 한국전쟁은 김오랑을 육사로 이끌었다. 이처럼 그 당시 육사를 지원한 생도 가운데는 조국의 초석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을 가진 이가 많았다.
1965년 육사 제25기 생도가 된 그는 1969년 졸업과 함께 육군 소위가 됐고, 이듬해엔 베트남으로 파병되어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그곳에서 펜팔을 통해 부산의 여대생 백영옥을 사귀고 14개월 만에 귀국하여 결혼했다. 그 후 특전사 중대장을 맡았던 그는 육군대학을 수료한 1979년 편한 보직을 마다하고 또다시 특전사 배속을 자원한다. 야전 지휘관을 원했을 그에게 내려진 최종 보직은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다. 사령관 비서실장은 진급의 자산이 된다지만, 여러 증언을 들어 보면 그는 천성이 성실하고 임무에 충실한 무장이었지 정치군인이 될 수 없었다.
같은 해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을 당했다.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꿰어 찬 전두환과 신군부는 급하게 <5·16교본>까지 만들어 회람하면서 정권 찬탈 음모를 꾸몄다. 그런 기미를 감지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을 벽지로 좌천시키려고 하자 불법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하극상을 벌인 게 12·12 사건이다. 전두환은 정승화를 체포하기 위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협조를 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특전병사로 구성된 체포조를 특전사령부로 보냈다.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6발의 총탄을 맞고 사령관실에서 즉사했다.
1997년 대법원은 12·12를 군사반란으로 확정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군사반란을 막으려다가 희생당하거나 강제 전역을 당한 군인들에게 포상을 해야 맞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군인이 정도를 따르며 생명까지 던져 나라를 지키겠는가? 2009년부터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을 위한 청원이 이어졌으나 국방부의 몽니로 무산되다가 최근 보국훈장을 추서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이 나왔다. 그러나 무공훈장 추서와 육사 안에 추모비(동상)를 세우는 것은 기각됐다.
이 책은 국방부의 거부 논리를 정밀하게 논박하고 있지만 최종 목표는 서훈이나 추모비 건립이 아니라, 김오랑 중령의 순직을 국방부의 정훈교재 삼아 참군인 상(像)을 세우는 것이다.
육사의 교훈은 사리를 분별하고 어진 감성과 신의를 바탕으로 어떠한 위험에서도 옳은 일을 실천한다는 ‘지(智)·인(仁)·용(勇)’이다. 이런 모호한 교훈은 전두환과 같은 반역 도당을 방지하지 못했다. 지은이들은 군인정신은 수백 년 전의 신화를 되뇌거나 왕조 시대의 위인을 들먹일 것이 아니라, 현대사를 증언하고 현대사를 거쳐 완성된 이 시대의 모델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책이 없으면 발을 뻗고 잘 사람과 희희낙락할 후손은 누구이겠는가? 너도 나도 이런 책을 읽는다면 쥐새끼처럼 구멍을 찾을 자는 또 누구이겠는가? 그저 지은이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장정일의 독서일기’ <한겨레> 2014.3.9)
아래는 내가 장정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 전인 지난 2013년 12월 12일 김오랑 앞에 바친 추모시다.
참군인 김오랑
죽어서 길이 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누구나 가리킬 수 있어도 쉬이 갈 수 없는
그러나 가야만 하는 험난한 길
그의 일념에서 발사된 총탄은
반란의 심장을 관통하는 일갈이었습니다
식어가는 가슴으로 흘린 눈물은
알알이 미래를 염원하는 절규였습니다
붉게 피어 처연한 핏자국은
애달픈 조국에 걸어둔 거울이 되었습니다
그가 수호코자 했던 것은 군인의 자리였습니다
忤逆의 소용돌이는 서른다섯 숨결 앗아갔지만
탁류의 시간 속에 싸늘히 묻힌 영혼이었지만
역사는 이제야 가슴 열어 그를 뜨겁게 안으려합니다
正이 참이 되는 나라 위해 넋을 어루만지고
표상을 세우려는 노력이 꽃피우고자 합니다
동상이 없어도 추모비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이미 올곧게 선 대한민국의 지표입니다
불의의 길이 아닌 정의의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이 땅 깊은 곳에 뿌리 내려 곧추 하늘로 세워진
다시는 그를 외고집 바보라 부르지 않으렵니다
무거운 군화의 늘보라 여기지도 않겠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을 지키다 서둘러 떠난
역사의 하늘에 뜬 하나뿐인 찬란한 별입니다
대한국민, 대한군인 脈 속에 영원히 사는 빛입니다
참군인의 한 사람, 정의로 요약되는 한 사람
세상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길이 된
그 설레는 이름 다시 불러봅니다
김! 오! 랑!
1944년에 태어난 김오랑은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의 가슴은 격동의 현대사를 거쳐 완성된 이 시대 군인들의 교훈일지 모른다. 익히 알고 있지만 쉽게 실천할 수 없었던 양심이다. 김오랑이라는 짧은 역사는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무한하다.(평전《김오랑》중에서)
6월 6일, 김오랑의 흉상이 김해시 삼정동 삼성초등학교 앞 공원에 세워졌다. <김해뉴스>는 ‘김해가 낳은 참군인 고 김오랑 중령이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로 소식을 전한다. 덧붙여 ‘정부가 세워야 할 공식 추모비는 아직 건립되지 않았지만’ 김오랑을 기억하는 ‘고향이 그의 흉상을 세웠다’고 현실을 조명하고 있다.
정의의 또 다른 이름, 참군인 김오랑!
이제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이승에서는 차마 껴안을 수 없었을 사람들의 손까지 잡고 용서하여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훗날 만나면 막걸리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
첫댓글 이원준작가님이 보내주신 글인데. 이런 사진이 빠졌네요.
고생 하셨습니다. 이렇게라도 고인의 명예가 조금이라도 빛을 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