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위 |
본관성씨 |
인구수 |
순위 |
본관성씨 |
인구수 | |
1 |
김해김(金:가락) |
3,767,061 |
76 |
풍천임(任) |
103,108 | |
2 |
밀양박(朴) |
2,704,617 |
77 |
원주원(元) |
102,748 | |
3 |
전주이(李) |
2,379,537 |
78 |
여양진(陳) |
100,233 | |
4 |
경주김(金) |
1,523,468 |
79 |
나주나(羅) |
99,089 | |
5 |
경주이(李) |
1,217,279 |
80 |
합천이(李) |
98,595 | |
6 |
진주강(姜:진양) |
941,087 |
81 |
기계유(兪) |
97,382 | |
7 |
경주최(崔) |
876,729 |
82 |
영천이(李:寧川) |
95,473 | |
8 |
파평윤(尹) |
846,632 |
83 |
경주배(裵) |
90,027 | |
9 |
광산김(金) |
750,701 |
84 |
영양천(千) |
83,990 | |
10 |
청주한(韓) |
597,596 |
85 |
초계정(鄭) |
83,311 | |
11 |
안동권(權) |
558,574 |
86 |
청풍김(金) |
82,882 | |
12 |
안동장(張) |
538,803 |
87 |
나주정(丁) |
82,554 | |
13 |
평산신(申) |
460,238 |
88 |
경주손(孫) |
81,550 | |
14 |
금녕김(金) |
424,323 |
89 |
벽진이(李) |
80,662 | |
15 |
순흥안(安) |
417,591 |
90 |
순천박(朴) |
75,888 | |
16 |
동래정(鄭) |
414,782 |
91 |
온양방(方) |
75,265 | |
17 |
달성서(徐:대구) |
398,343 |
92 |
진주유(柳) |
72,827 | |
18 |
구.안동김(金) |
398,240 |
93 |
고성이(李) |
71,910 | |
19 |
남양홍(洪:당홍) |
382,077 |
94 |
삼척김(金) |
71,764 | |
20 |
해주오(吳) |
377,005 |
95 |
곡부공(孔) |
68,951 | |
21 |
남평문(文) |
343,655 |
96 |
연안김(金) |
68,939 | |
22 |
전주최(崔) |
342,849 |
97 |
안동장(張) |
64,814 | |
23 |
제주고(高) |
317,967 |
98 |
성산이(李) |
64,735 | |
24 |
경주정(鄭) |
300,731 |
99 |
무안박(朴) |
64,695 | |
25 |
창녕조(曺) |
299,642 |
100 |
고흥유(柳) |
64,465 | |
26 |
수원백(白) |
295,640 |
101 |
청도김(金) |
64,383 | |
27 |
한양조(趙) |
273,408 |
102 |
성주배(裵) |
64,289 | |
28 |
나주임(林) |
262,862 |
103 |
영양남(南) |
62,761 | |
29 |
문화유(柳) |
255,632 |
104 |
여주이(李) |
61,907 | |
30 |
밀양손(孫) |
243,655 |
105 |
탐진최(崔) |
61,841 | |
31 |
연일정(鄭) |
237,218 |
106 |
월성이(李) |
61,823 | |
32 |
함안조(趙) |
231,728 |
107 |
인천이(李) |
61,045 | |
33 |
진양정(鄭:진주) |
231,289 |
108 |
평강채(蔡) |
59,953 | |
34 |
창원황(黃) |
220,810 |
109 |
예천임(林) |
59,720 | |
35 |
의성김(金) |
219,947 |
110 |
진보이(李:진성) |
58,877 | |
36 |
남원양(梁) |
219,911 |
111 |
배천조(趙) |
58,,593 | |
37 |
여산송(宋) |
200,323 |
112 |
상산김(金) |
57,836 | |
38 |
평택임(林) |
194,550 |
113 |
영산신(辛) |
56,301 | |
39 |
은진송(宋) |
179,247 |
114 |
원주이(李:1) |
56,001 | |
40 |
해주최(崔) |
161,782 |
115 |
압해정(丁) |
55,893 | |
41 |
강릉유(劉) |
161,634 |
116 |
나주정(鄭) |
55,684 | |
42 |
창녕성(成) |
158,335 |
117 |
평창이(李) |
55,487 | |
43 |
연안차(車) |
154,641 |
118 |
강릉함(咸) |
54,973 | |
44 |
성주이(李) |
153,146 |
119 |
죽산안(安) |
53,522 | |
45 |
단양우(禹) |
152,298 |
120 |
광주안(安) |
53,496 | |
46 |
강릉김(金) |
150,576 |
121 |
보성오(吳) |
52,543 | |
47 |
진주하(河) |
148,208 |
122 |
전주김(金) |
52,251 | |
48 |
이천서(徐) |
144,204 |
123 |
파주염(廉) |
51,143 | |
49 |
신인주(朱) |
142,590 |
124 |
신천강(康) |
50,712 | |
50 |
하동정(鄭) |
142,418 |
125 |
동복오(吳) |
50,648 | |
51 |
광주이(李) |
141,830 |
126 |
영월신(辛) |
49,676 | |
52 |
여흥민(閔) |
137,314 |
127 |
옥천조(趙) |
48,637 | |
53 |
강릉최(崔) |
132,300 |
128 |
연주현(玄) |
48,154 | |
54 |
의령남(南) |
130,179 |
129 |
부안임(林) |
48,042 | |
55 |
현풍곽(郭) |
127,322 |
130 |
부안김(金:부령) |
47,696 | |
56 |
장수황(黃) |
126,810 |
131 |
전주유(柳) |
47,383 | |
57 |
연안이(李) |
126,569 |
132 |
영일정(鄭) |
46,922 | |
58 |
김해김(金;우륵) |
125,277 |
133 |
교하노(盧) |
45,812 | |
59 |
정선전(全) |
124,993 |
134 |
순천김(金) |
45,622 | |
60 |
평해황(黃) |
124,072 |
135 |
재령이(李) |
45,417 | |
61 |
김해허(許) |
121,603 |
136 |
죽산박(朴) |
45,058 | |
62 |
선산김(金:일선) |
120,214 |
137 |
초계변(卞) |
43,669 | |
63 |
함안이(李) |
119,174 |
138 |
덕수이(李) |
43,505 | |
64 |
반남박(朴) |
118,838 |
139 |
성주도(都) |
42,610 | |
65 |
충주지(池) |
118,410 |
140 |
장흥고(高) |
41,641 | |
66 |
고령신(申) |
117,333 |
141 |
달성배(裵) |
41,267 | |
67 |
양천허(許) |
114,863 |
142 |
나주김(金) |
41,257 | |
68 |
영월엄(嚴) |
114,191 |
143 |
남원양(楊) |
40,993 | |
69 |
천안전(全) |
114,016 |
144 |
거창신(愼) |
40,031 | |
70 |
제주양(梁) |
113,419 |
145 |
금성나(羅) |
39,903 | |
71 |
전의이(李) |
112,087 |
146 |
원주변(邊) |
39,604 | |
72 |
능성구(具) |
111,747 |
147 |
진주소(蘇) |
38,604 | |
73 |
담양전(田) |
109,213 |
148 |
양성이(李) |
38,302 | |
74 |
함평이(李) |
103,698 |
149 |
광주노(盧) |
38,073 | |
75 |
함양박(朴) |
103,220 |
150 |
삭녕최(崔) |
37,872 |
⑦한국성씨의 유래(有來) 목록가기
우리 나라의 성(姓)은 중국에서 유입한 후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姓)을 사용한 것은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地域), 산(山), 강(江) 등을 성(姓)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살았으므로 강(姜)씨라고 하고,-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상았으므로 성을 희(姬)씨라고 하고,-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살았으므로 성을 요(姚)씨로 한 것은 이것을 입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 때에는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기록되었다.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종친회(宗親會)와 화수회(花樹會)란? 목록가기
종친회(宗親會)와 화수회(花樹會)란 다같이 그 명칭만 다를 뿐 모두 동성동본의 일족이 모여 조직한 친목조직이요, 친목단체를 뜻한다. 이들 명칭 외에도 각 성씨에 따라서 대종회(大宗會). 종문회(宗門會). 동종회(同宗會). 종회(宗會)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명칭별로 그 예를 들어보면 가락중앙종친회를 비롯하여 경주김씨. 단양우씨 등은 종친회(宗親會)란 명칭을 쓰고, 표암공후손이씨화수회를 비롯하여 전주최씨나 성주이씨 등은 화수회(花樹會)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밖에 평산신씨나 밀양박씨는 대종회(大宗會), 고씨는 고씨종문회 등의 종문회(宗門會), 동래정씨나 연일정씨는 동종회(同宗會), 진주강씨나 창원황씨 등은 창원황씨중앙종회 등, 종회(宗會)란 명칭을 쓴다. 이밖에 전씨 대동종약원(全氏大同宗約院).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등의 명칭도 사용하고 있다. 이들 명칭은 명칭이야 어떻든 조직의 기본성격은 같지만,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파계(派系)가 많은 집안은 중시조(中始祖) 또는 파조(派조)나 입향조(入鄕祖)를 중심한 종회(宗會)를 조직하는데, 이를테면 "파평윤씨 노산종회(坡平尹氏 魯山宗會)" 하는 식으로 파별(派別) 또는 지방별(地方別)로 조직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때 대종회나 중앙종회는 이들의 중앙본부 내지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
이러한 조직으로 그 규모가 가장 크기로는 가락중앙종친회. 표암공후손화수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등이 대표적이다. 가락중앙종친회는 가락국 수로왕에 연원을 둔 김해김씨와 허씨. 인천이씨 등을 총망라한 사단법인체로서, 그 규모면이나 조직면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 전주이씨의 경우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종회" . "전주이씨 밀성군파종회" 하는 식으로 70여개의 파별 종회가 있으며, 이들을 통할하는 중앙본부가 즉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다. 이 종약원은 전국의 각 시.군에 지원(支院)을 두어 연락을 취하고 있다. 표암공후손 이씨화수회는 경주이씨를 중심으로 하여 표암공 이알평에 뿌리를 둔 10여본(本)에 이르는 이씨들의 연합조직체이며, 산하조직으로 각 도지부와 군화수회를 갖고 있다. 이들 각 성씨들은 그들대로 각기 따로 화수회 조직을 갖고 있으므로 표암공후손 화수회는 이들의 총연합회가 된다. 이러한 연합체 조직은 특히 60년대 이후 마치 유행처럼 확대 발전하여, 예컨데 "차류대종회(車柳大宗會)" . "전국노씨화수회 중앙총본부" . "전국임씨 대동화수회" 등등 본관과 관계없이 동성(同姓) 전체를 총망라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
종친회나 화수회 중에서 재원(財源)이 튼튼한 단체는 시중 빌딩에 사무실을 차리고 사무국 조직을 갖추고 있는데, 어느 단체이든 제일의(第一義)로 "숭조목종(崇祖睦宗)"을 내세우고 있다. 이들의 사업 중, 조상의 묘소 . 제향(祭享) 등을 관리하고 문중 재산을 돌보며 또 시조(始祖)나 현조(顯祖)를 기리는 기념사업 등이 일들은 "숭조(崇祖)" 사업이며, 한편 족보 편찬 작업이나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회원의 자제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든가, 야유회 등의 친목모임을 갖는 등의 일들은 "목종(睦宗)" 사업에 속한다. 그들 단체 중에는 "표암회보"니 "가락회보"니 하듯 기관지까지, 월간 혹은 계간(季刊)으로 발행하는 단체도 있으며, 또 씨족의 약사(略史) . 세계분파도(世系分派圖) . 가경(家鏡) . 관면록(冠冕錄) . 선조명감록(先祖名鑑錄) 등 여러가지 책자를 발간하기도 한다. |
⑫귀화성씨(歸化姓氏)의 고찰(考察) 목록가기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귀화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초엽이며, 그때는 주로 수(隋), 당(唐)의 중국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宋)나라 사람을 비롯하여 몽골계, 여진계, 위구르계, 아랍계, 베트남계, 일본계 등의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귀화한 동기는, 대체로 ①정치적 망명 혹은 유배로 귀화한 사람. ②항해 도중에 풍랑으로 표착(漂着)하여 귀화한 사람. ③전쟁이나 내란으로 피란 왔다가 전란 중에 귀화한 사람. ④국가간의 왕실 시종관계(侍從關係)로 따라 왔다가 귀화한 사람. ⑤고려 말엽에 역대 왕이 원(元)의 공주를 왕비로 삼게되면서 그들을 수행해왔다가 귀화한 사람,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대체로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집중적으로 귀화하고 있다. 광주노(盧)씨. 함열여(呂)씨. 평택임(林)씨. 면천복(卜)씨 등은 당말(唐末) 혹은 당이 망하고 송(宋)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기까지의 이른바 후5대(後五代: 10세기) 때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반면, 함종어(魚)씨. 신안주(朱)씨. 충주지(池)씨. 달성빈(賓)씨. 서산정(鄭)씨. 거창장(章)씨. 황주변(邊)씨 등은 여진족인 금(金)나라가 중원을 석권하던 남송(南宋)시대, 혹은 몽고족이 금과 남송을 공략하여 중원을 휩쓸었던 12~13세기에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또 밀양당(唐)씨. 아산장(蔣)씨. 청해이(李)씨 등은 몽고족인 원(元)이 명(明)의 핍박을 받아 북쪽으로 밀려나던 14세기 후엽에 귀화했는가 하면, 17세기 초엽 후금(後金)에 의해 명(明)이 멸망하던 무렵에는 많은 명인(明人)이 귀화했다. 이밖에 진주사(謝)씨. 요양자(慈)씨. 대구빈(彬)씨. 광주모(毛)씨. 예산연(連)씨. 하남정(程)씨 등은 조선조 말기 이후에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귀화한 동기를 예로 들어보면,
(중국계) 평해.장수.창원황씨(平海.長水.昌原黃氏) 우리나라황씨의 도시조인 황락(黃珞)은 원래 중국 후한의 유신(儒臣)이었는데, 그가 한나라 광무제 건무 4년(신라 유리왕 5년=28)에 교지국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착(漂着)하여 그곳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다.그의 아들 갑고. 을고. 병고가 각각 평해.장수.창원황씨의 원조(遠祖)다.
(중국계) 연안이씨(延安李氏) 당(唐) 고종 때의 사람인 이무(李茂)는 660년 당군이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침공할때 소정방의 휘하로 참전했다가 귀국치 않고 신라에 귀화, 연안백에 봉해졌으며, 그 원손(遠孫)이 연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중국계) 옥천육씨(沃川陸씨) 중국 절강성 소헌부 사람인 육보(陸普)가 후당 천성 2년(신라 경순왕 원년=927)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신라에 파견되어 왔다가 경순왕의 부마가 되고 관성군에 봉해졌다. 관성은 옥천의 고호이다. 이로부터 그의 자손들이 충북 옥천땅에 세거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관성군의 묘는 옥천 화인리 뒷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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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계) 연안인씨(延安印氏) 시조 인후(印侯)는 '고려사'에 의하면 그는 몽골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후라타이'이다. 1275년(고려 충렬왕 1년) 충렬왕비인 원나라 황녀 제국공주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화하여 1309년(충선왕 1) 평양군으로 봉해지고 자의도첨의사사가 되었으며 검교정승을 지냈다. 아들 인승단(承旦)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연안으로 하였다.
(여진계) 청해인씨(靑海李氏) 시조 이지란(李之蘭)은 "황송통보(皇宋統譜)"에 의하면 중국 남송의 충신이며 당대의 명장 악비(岳飛)의 다섯째 아들 정(霆)의 6세손이다.그후 원나라에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을 지낸 아원(雅遠)의 아들 두란(豆蘭)이 천호를 승습(承襲)하고 여진족의 풍습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따서 동으로 성을 바꾼 후 고려 공민왕 20년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 북청에 거주하면서 이씨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태조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에 오르고 청해군에 봉해졌으며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후손들이 악비장군의 고향인 중국 청해을 본관으로 하였다.
(위구르계) 경주설씨(慶州偰氏) 시조 설손(偰遜, 호는 근사재)은 원래 회골(위그르)사람이다. 조상이 설연하에 대대로살아서 성을 설이라고 했다고 하며 태전 설극직의 8대손이라고 한다. 설손은 원나라에 귀화하여 단주태수 벼슬을 지냈으며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시인이다. 그가 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가있었는데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귀화자 공민왕이 그를 대접하여 부원후에 봉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설장수(시호는 문정)가 경주로 본관을 하사 받아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아랍계) 덕수장씨(德水張氏)
시조 장백창(張伯昌, 일명 장순용, 시호는 공숙)은 아랍(이슬람)계 사람으로 원나라 세조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1275년(고려 충렬왕 1년) 충렬왕비인 제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덕수현에 살면서 금자광록대부,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덕수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덕수현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덕수를 본관으로 하였다.
(베트남계) 화산이씨(花山李氏)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의 왕 이천조(李天祚)가 트란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둘째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1226년(고려 고종 13년) 배를 타고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피난왔다. 이를 들은 고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화산군에 봉하고 그 곳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화산으로 하였다.
(일본계) 우록김씨(友鹿金氏: 賜姓 金海金氏) 문헌에 전하는 일본계의 귀화인으로는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인 충선(忠善)이 있다. 그의 본명은 사야가(沙也可)로서 1592년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이 되어 3천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했다가 조선의 문물과 인정풍속을 흠모한 끝에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부(歸附)하여 귀화인이 되었다. 뒤에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종2품인 가선대부에 오르고 도원수 권율 등의 주청에 의해 김충선(金忠善)이란 성명과 김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병자호란 이후 달성군 우록동(友鹿동)으로 은퇴하여 살았다.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5남1녀를 낳고 72세로 죽었다. 그의 후손은 15대에 이르고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많이 살고 있어 우록김씨(友鹿金氏)라고도 불린다.
발해의 유민(遺民) "고려사"에 맨 먼저 등장하는 귀화인은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을 비롯한 유민들이다. 발해는 고려가 건국된 직후인 태조 9년(926)에 글안(契丹)에게 멸망했는데. 이때를 전후해서 많은 발해의 유신과 유민이 잇달아 고려에 망명, 귀화했다. 이 무렵에 투하해 온 발해인 은 전후 수만 호(數萬戶)에 이르는데, 발해의 왕족인 대씨(大氏)만도 대광현을 비롯하여 대화균. 대유범. 대원균. 대복예. 대심리 등의 이름이 보이고, 이밖에도 박어. 오흥. 김신. 신덕. 은계종. 홍견. 정근. 진림. 박승 등의 이름이 있는데, 이들은 대개 발해국의 지배층이었던 신료로 생각된다.
몽고계와 아압계 및 위구르계 원나라에 복속되었던 고려 말엽에는 귀화인도 그 양상을 달리한다. 1232ㄴ녀(고종 18년)에서 1257년 까지 무려 27년 동안에 걸쳐 일곱 차례나 몽고의 치밉을 겪은 고려는, 1270년(원종2년), 전란 중에 강화로 옮겼던 수도를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게 되면서부터 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100년 동안 원의 적극적인 간섭을 받아 고려의 역대 왕(王)은 원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았으며, 왕자는 볼모로서 원의 수도인 북경에 가서 머물러 있다가 원제(元帝)의 부마(駙馬)로서 고려의 왕위를 계승하게끔 되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이 곧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충선왕. 충숙왕.충목왕은 몽고 여인에게서 태어난 왕이었다. 그런데, 원대(元代)의 귀화성씨들이 대개 이 무렵에 원의 공주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 당시이 귀화성씨 중 청주양(楊)씨. 풍천임(任)씨. 덕수장(張)씨. 연안인(印)씨. 곡산(連)씨 등의 시조는 충렬왕비인 제국공주(齊國公主:원 세조 쿠빌라이 딸)를 따라온 것으로 되어있고, 원주변(邊)씨. 창원황(黃:石奇)씨. 개성로(路)씨. 개성용(龍)씨. 창원공(孔:曲阜)씨. 안음서문(西門)씨 등의 시조는 공민왕비인 노국공주(원 魏王의 딸)를 따라온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사"에 보면 충렬왕 3년(1277)에, 제국공주를 따라온 겁령구(怯怜口: 私屬人) 들에게 성명을 내려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즉 홀라대는 인후(印候)로, 삼가(三哥)는 장순룡(張舜龍)으로, 식독아(式篤兒) 는 노영(盧英)으로, 오십팔(五十八)은 정공(鄭公)으로 사성명(賜姓名)하고 각각 장군 혹은 중랑장에 임명한 것이다. 이들은 공주(忠烈王妃)의 측근에서 국내정치에도 적극 참여하게 되는데, 그중 인후(印候)는몽고인으로서 연안인씨(延安印氏)의 시조이며, 장순룡은 아라비아(아랍계: 서역大食國) 사람으로 덕수장씨(德水張氏)의 시조가 된다. 뒷날인 공민왕 7년(1358)에 설손(偰孫)이란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는데 그는 위구르 사람이다. 또 이 무렵에 귀화하여 통역을 맡은 이현(李玄)도 위구르 사람이다.이들 중 설손은 경주설씨(慶州偰氏)의 시조이며, 이현은 임천이씨(林川李氏)의 시조가 된다. 오늘날 족보상에 나타나 있는 귀화성씨 가운데 상당수는 정사(正史)나 야사(野史)에 귀화(歸化)한 성씨임이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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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中國系] 성씨 일람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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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각국의 보학(譜學) 목록가기
◎외국인의 보학(譜學) 족보는 한국이나 동양의 일부 국가에만 있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은데, 사실상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족보가 있다. 세계 각국의 많은 나라에는 이미 족보학회(族譜學會)가 있고, 또한 족보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서관이 있는 나라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국의 족보 전문도서관에는 마이크로 열람기만 해도 300대가 있어 하루에 수백 명의 열람자가 도서관에 모이고 있다. 미국의 족보전문 도서관에는 족보가 마이크로 필름화 되어 있으며, 족보학회가 창립된지 80년이 넘어 많은 학자들이 여러가지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족보학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는 일본가계도 학회(日本家系圖學會)가 있어 전국적으로 지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매월 정기적으로 '성씨와 가문(家紋)'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씨가문 연구회(姓氏家紋硏究會)가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도서관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하버드 대학에서는 우리나라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족보들을 마이크로 필름화하여 보관하고 있다. 미국의 일부 대학에서는 계보의 작성법을 학과에 편성해 놓고 연구발표회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이외에도 일본의 동경대학과 경도대학, 중국의 남경도서관과 중국과학원, 북경도서관, 프랑스의 극동학원, 베트남의 국립도서관 등에 동양의 족보들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지금까지 족보가 없는 민족 가운데는 잃어버린 조상을 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유럽의 민족주의 국가에서는 지난날의 잡혼(雜婚)에 의한 질(質)의 저하를 막기위해 혈통을 존중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같이 오늘날에 있어서 족보는 세계 각국에 널리 보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가장 잘 발달된 족보라는 정평이 나있지만, 오히려 우리 나라보다도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외국 성씨의 유래와 족보에 대한 연구가 그 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연구 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현재 족보가 보존되고 있는 외국의 도서관이나 학술단체는 다음과 같다. 미국: 컬럼비아 도서관, 하버드대학 도서관, 유타세계 계보협회 계보도서관. 일본: 동경대학 도서관, 국회도서관, 동양문고, 동도대학 도서관, 내각문고, 동경교대 도서관. 중국: 남경도서관, 중국과학원, 북경도서관. 프랑스: 극동학원, 아세아협회. 베트남: 국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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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성씨(姓氏) 외국에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미국,영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브라질 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여자는 결혼전의 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남편의 성을 사용 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경우는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나, 법률로는 부부가 서로 의논하여 어느 한쪽의 성을 사용하거나 각자의 성을 사용 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 자기의 성명(姓名)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는 아내는 자기의 본성(本性)위에 남편의 성(姓)을 덧얹어(합관……合冠) 사용하는 복성주의(複姓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女子)의 성명(姓名)은 「남편의 성<姓> + 자기 성<姓> + 이름)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의 성은 두 글자 성씨가 된다. 또한 지구상에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국가도 많다. 또한 정치 지도층만 성(姓)을 갖고 있는 나라도 많다. 동남아시아의 버마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통령이건 일반 국민이건 모두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개인적인 필요나 취미로 이름 위에 이것저것 덧붙여 사용한다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전 UN사무총장 「우 탄트」처럼, 이름 위에 '우'나 '몽'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 와 "몽"이 우리나라의 김씨나 이씨 만큼 많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 이다. 그러나 '우'자(字)는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며, '몽'자는 미혼의 젊은 이에게 붙이는 것으로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한다고 한다. 일본의 성씨는 매우 복잡하고 그 숫자로도 13만 2천여 성씨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민족중의 하나다. 일본의 성씨는 두 글자, 즉 복수(復數)로 되어 있는 것이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는 한 글자(單數)나 세 글자로 되어 있는 성씨도 많다.
일본에서는 각 가문(家門)마다 "가문(家紋)"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가문은 각 가문(家門)마
다 자기 가문(家門)을 표시하는 도안(圖案)으로된 약도(略圖)이다. 특별한 예식, 명절에는 예복
이나 모자에 남녀 모두 이 가문(家紋)을 착복(着服)하여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일본가계도 학회(日本家系圖學會)가 있어 전국적으로 지부가 설치
되어 있으며, 매월 정기적으로 '성씨와 가문(家紋)'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
씨가문 연구회(姓氏家紋硏究會)가 있어 각 지방별(地方別)로 이에 대한 연구(硏究)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
⑨사람마다 성을 가진 것은 고려시대 목록가기
성(姓)을 쓰기 시작한 시기를 사실(史實)로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 있으며, 삼국 시대의 성(姓)으로는 ,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으며, 일반민중의 성은 고려 초기에 일반화되기 시잣하여 고려 후기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노비 등 천민층을 제외한 모든 양인층(良人層)이 성과 본(本)을 가졌음을 고려말 호적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는 저서 "택리지" 총론에서 <신라말부터 중국과 통하여 비로서 성씨를 갖게 되었으나 벼슬한 사족(士族)만이 성(姓)이 있었고, 일반 백성(百姓)은 모두 성이 없었는데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면서 비로서 팔로(八路)에 성을 내려 주어서 모두 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비교적 정확한 기술(記述)이라고 하겠다. | |||||||
고려시대 왕건은 새 왕조의 수립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나 창업에 협력한 중앙세력에게 성(姓)을 내려 주었고, 또 중앙과 연결된 지방세력들(豪族)이 그들나름대로 창성(創姓)하여 성(姓)을 칭하게 됨으로서 새로운 신성(新姓)이 등장하게 되었다. 예컨데 혁명공신인 삼능산(三能산)이 신숭겸(申崇謙)으로, 복사귀(卜沙貴)가 복지겸(卜智謙)으로, 백옥삼(白玉衫)이 배현경(裵玄慶)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성을 내린 것은 사성(賜姓)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들은 각각 평산신씨. 면천복씨. 경주배씨의 시조가 된다. 고려의 개국공신들이 새로운 성씨의 시조로 되어 있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시조 이름] | |||||||
평산신(申)씨 [崇謙] |
경주배(裵)씨 [玄慶] |
면천복(卜)씨 [智謙] |
의성홍(洪)씨 [儒] | ||||
평산유(庾)씨 [黔弼] |
안동권(權)씨 [幸] |
청주한(韓)씨 [蘭] |
문화류(柳)씨 [車達] | ||||
남양홍(洪)씨 [殷悅] |
안동권(金)씨 [宣平] |
청주이(李)씨 [能希] |
파평윤(尹)씨 [莘達] | ||||
홍주홍(洪)씨 [規] |
안동권(張)씨 [吉] |
금천강(姜)씨 [弓珍] |
전의이(李)씨 [棹] | ||||
남양방(房)씨 [季洪] |
인동장(張)씨 [金用] |
양천허(許)씨 [宣文] |
용인이(李)씨 [吉卷] | ||||
면천박(朴)씨 [述希] |
수안이(李)씨 [堅雄] |
아산이(李)씨 [舒] |
철원최(崔)씨 [俊邕] | ||||
이천서(徐)씨 [弼] |
원주원(元)씨 [克猷] |
풍양조(趙)씨 [孟] |
영광전(田)씨 [宗會] | ||||
선산김(金)씨 [宣弓] |
해평김(金)씨 [萱述] |
봉화금(琴)씨 [容式] |
울산박(朴)씨 [允雄] | ||||
중화김(金)씨 [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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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후에도 호장(戶長)계열이 새로운 성씨(姓氏)의 시조가 된다. 성종대(成宗代: 981~997) 이후에는 행정편제가 틀이 잡히면서 지방관제도 정비되어, 그때까지는 호족들의 지배영역이었던 지방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 중앙관리가 수령으로 파견되어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되는데, 이에 따라 과거의 호족들은 더러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귀족(貴族)이 되고, 더러는 지방에 그대로 처져서 그 지위가 격하되어 향리(鄕吏:戶長)가 되는 길을 밟았다. 호장(戶長)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관리를 보좌하여 실제적인 행정사무를 맡아 보았는데, 이들에겐 직전(職田)이란 전지(田地)가 주어졌으며 호장직의 세습과 동시에 직전(職田)도 세습되었다. 고려시대의 호장이었던 인물이 오늘날 많은 성씨의 시조가 된 점은 성(姓)의 일반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호장계열이 새로운 성씨의 시조(혹은 중시조)로 되어 있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
기계(兪)씨 |
천녕(兪)씨 |
광주(李)씨 |
한산(李)씨 |
여주(李)씨 |
성주(李)씨 |
진성(李)씨 |
합천(李)씨 |
원주(李)씨 |
가평(李)씨 |
한산(李)씨 |
하양(許)씨 |
풍산(柳)씨 |
고흥(柳)씨 |
단양(禹)씨 |
의성(諸)씨 |
해주(최)씨 |
수원(崔)씨 |
고령(申)씨 |
아주(申)씨 |
초계(卞)씨 |
순창(趙)씨 |
목청(尙)씨 |
동래(鄭)씨 |
창원(鄭)씨 |
봉화(鄭)씨 |
창녕(成)씨 |
부안(金)씨 |
예안(金)씨 |
영덕(金)씨 |
광주(卓)씨 |
반남(朴)씨 |
고령(朴)씨 |
압해(朴)씨 |
양주(趙)씨 |
여산(宋)씨 |
무송(尹)씨 |
목청(尙)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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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黃)씨 亮沖派 |
경주(金)씨 魏英派 |
연일(鄭)씨 宜卿派 |
안성(李)씨 仲宣派 | ||||
고려시대에 성씨가 일반화하는 한 요인으로, 광종 9년(958)부터 실시한 과거제도를 빼놓을 수 없다. 과거제도의 시작은 , 원래 중국 후주(後周)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여 한림학사가 괸 쌍기(雙冀)의 제안으로 실시되었는데, 왕권의 강화를 위해 지방 호족 출신을 중앙관료기구 속에 흡수하려는 방편으로 채택된 것이다. 이 과거제도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를테면 문종(文宗) 때에는 "호명취사법(糊名取士法)" 이라고 해서 응시자의 성명. 본관. 4대조의 이름 등을 써서 풀로 봉하여 미리 시원(試院)에 제출토록 했다. 처음부터 그랬을 터이지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필수요건으로 성(姓)을 가져야 하고, 본관(本貫:출신지)을 밝혀야만 했던 것이니, 이 과거제도가 성(姓)을 널리 보급하는데 큰 구실을 했음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오늘날 성씨들의 대부분의 시조가 고려 중기 내지 후기의 인물인 점은 이 시기에 성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
그러나 천민층까지 모두 성을 갖게 된 것은 신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임진왜란(1592) 이후 한말 이들 천민층이 전쟁터에서 특별한 공훈을 세우는 경우에는 노비(奴妃)신분에서 풀어주어 평민(平民)신분으로 인정해 주었으며, 전란후 사회체제의 변동에 따라 하급관리(胥吏:서리 등)로 등용되기고 했다. 노비들이 양인(良人)으로 신분상승을 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양인층(良人層) 이상만 가질 수 있었던 성(姓)을 그들도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을 타파한 것은 성의 대중화를 확대하는데 촉진역할을 하였다. 갑오개혁(甲午改革:甲午更張) 안(案) 중 신분제도와 관련된 것은 1. 문벌(門閥)과 양반(兩班). 상민(常民) 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2. 역인(驛人). 창우(唱優). 피공(皮工) 등의 천민(賤民)대우를 폐지한다는 것 등이다. 한편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다 성(姓)을 갖게끔 되었으며, 따라서 그때까지 성(姓)이 없던 사람들도 모두 성을 만들어 갖게 되었으며,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하면서 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본인의희망에 좇아서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전주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씨, 경주 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각기 출신지의 대성(大姓)이나 문벌(門閥)을 본따서 성을 지어주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
소스:
아바사 카페에서 가져옴.
첫댓글 자료가 업그레이드가 제대로 안되어 있어 아쉽습니다. 진송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