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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1월 3일(제44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여호수아 3:7-17
제목 : 내 인생의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가 어디일까요? 대통령의 자리일까요? 대기업 회장의 자리일까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몹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잘나가던 세계적인 기업인 삼성전자의 회장이 기업 침체로 몹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가 어디일까요? 희망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라면 한 그릇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슴 설레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곧 광야 생활 40년을 끝내고, 그렇게도 그리고 기다렸던 약속의 땅 가나안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하면서 40년 동안 그렇게 기다리던 약속의 땅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광야생활 40년! 말이 40년이지 그 40년은 보통 긴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나그네로 살아가야 했던 세월이었습니다. 천막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숱한 광야를 가로질러 왔습니다. 낮에는 머리 위에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이고, 사막의 모래는 태양에 데워져서 제대로 신발 하나 신지 못한 백성들의 발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낮이면 그렇게 뜨거웠던 사막이 밤이면 무척이나 춥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수백만 명이 넘는 떠돌이들을 좋아할 민족이 없었습니다. 곳곳에 대적들이 그들의 앞길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들과 전쟁도 많이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생활을 40년 동안이나 해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는 하셨지만, 이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광야 생활은 한마디로 ‘죽도록 고생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불평도 많았고, 원망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유혹되기도 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모세를 원망하다가, 그러면서 하나님을 채찍을 맞기도 하고···.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광야 40년의 생활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고생고생 하면서도 모세를 따라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한 가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 희망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애굽으로 되돌아가버렸거나, 아니면 광야에서 기진맥진하여 다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대한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불평하면서도, 죽도록 고생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한 단계만 넘어서면 그렇게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에 부풀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생각만 하면 너무 기뻐서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가슴 설레게 만든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지금 자기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이 그것입니다. 요단강은 얕은 냇물을 건너듯 그렇게 쉽게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홍해와 같이 크지는 않다 하더라도, 건너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호수아 3장의 말씀을 읽을 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의 위치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강 앞에 가슴 설레며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위치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흔히 광야생활에 비유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삶의 여정이 광야 생활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요단강 앞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단을 건너기는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이 보이지 않아 걱정스럽고 힘들어 보이는 상황이 우리의 지금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의 현실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민들에게 많은 희망은 안겨주었지만 날이 갈수록 실망하는 백성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갈수록 정치에 민족의 내일을 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하던 가나안 땅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약의 희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 앞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어떤 장애물들이 놓여 있다 하더라도 성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희망을 안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온갖 장애물을 건너가서 그 희망을 안고 기쁨의 찬양을 드릴 날이 곧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가정이나 사업의 문제에 요단강처럼 큰 장애물이 있어서 몹시도 힘들어하시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장애물을 건너가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커다란 요단강이 있어서, 넘실대는 홍수로 우리 모든 국민들의 마음에 있는 희망을 침몰시키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우리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이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번영과 행복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로 성장하는데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와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우리들과 우리 민족의 앞날을 희망 중에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반드시 건너가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삶의 장애물도 반드시 건너야만 합니다. 믿음에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도 건너야 합니다. 우리 민족을 힘들게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요단강도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힘으로 건너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방법, 우리의 지혜, 우리의 경험으로는 건널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건너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과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요단을 건너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내 인생의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인도(작전)를 받으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생활을 지나 요단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는 이제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3:1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사람이었습니다(1절). 여리고성 정탐꾼들을 파송했던 싯딤을 떠나 이제 요단강을 건너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였습니다. 그리고 삼일이 지난 후에 관리들을 불러서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이 3-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요단강을 건너는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난 여호수아는 백성을 준비시켰습니다. 백성들에게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꼭 지켜야 할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언약궤와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궤 사이의 거리를 이천 규빗쯤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멀어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가는 길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랐지만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갈 길은 물이 갈라져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또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기 위한 방법으로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일과 성결해야 하는 일은 연결이 안 디는 문제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한다고 요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하나님의 방법을 정리해 보면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가야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뒤를 따르는데 이천 규빗의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성도가 가야할 믿음의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가까이 지내다보면 서로 말로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멀리 지내면 대화가 부족하여 믿음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믿음생활의 지혜입니다. 부부끼리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장 서 나간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드디어 요단강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이 시기는 곡식을 거두는 시기로 요단강 물이 항상 언덕에 넘치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에 들어서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였습니다.
요단강 상류 30km 지점에 있는 아담읍 변방지점에서 요단강 물이 일어나 쌓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아래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강 중심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갈 때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그 바닥이 말라서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마른 땅을 지나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40년 전에 홍해를 건넜던 사건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홍해는 추격해 오는 애굽 왕 바로의 군대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급하게 허겁지겁 건넜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준비하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차분하게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건넌 후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냥 도망하듯 건넜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널 때는 건넌 이후에 무슨 일이 기다리는지 알았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면 가나안 7족속들과의 전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의 고난을 마치고 그들이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 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결코 만만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들 중에 요단강을 죽음의 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틀린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꼭 죽음이라고 표현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요단강에는 더 좋은 상징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야 할 요단강은 영적인 성숙으로 들어가는 문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맞는 해석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그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다른 곳이 아닌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을 고집한 이유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홍해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받는 세례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은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한 단계로 들어가는 성령 세례의 기회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초보적인 믿음의 광야의 방황생활을 정리하고 우리 내면에 있는 죄악의 세력들과 싸우는 성화의 세계로 들어서는 곳이 바로 요단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겐 특별히 성령으로 충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메어할 언약궤의 무게는 보통 남자 네 사람이 메어야할 정도로 무거운 무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데는 큰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당시의 요단강은 곡식을 거두는 시기라서 언덕에 넘칠 만큼 범람하였습니다. 그런 요단강에 언약궤를 메고 들어가는 것은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담력이 없다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를 메면 힘들다고 함부로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성령이 충만해야 가능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생활을 오래한 성도들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들을 뽑아내는 단계로 들어가는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12에서 “...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성도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강은 결코 죽음의 상징으로만 이해될 그런 강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깊은 수준으로 향하는 문으로 비유되어야 할 강입니다. 믿음생활 하면서 반드시 건너야 장애물들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있는 요단강들이 갈라지고 건너가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는지 하나님의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을 여호수아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보면 하나님의 방법이 참으로 비합리적인 방법 같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이 생각할 때에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비합리적인 방법을 통하여서도 기적을 만드시고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심부터 모든 성경의 기록이 인간의 생각과 사고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사는 성도들이 성숙한 믿음의 자리로 나가기 위해서 내 앞에 있는 믿음의 장애물인 요단강을 건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
여호수아 3:5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정복하려면 먼저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개울이 아니라 강이었습니다. 그 때는 곡식을 거두는 시기인 봄이었습니다. 봄이면 북쪽의 헬몬산에서 눈 녹은 물이 요단강으로 흘러들어 강물이 크게 불어나 언덕에 넘치고 물살도 거셌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방법을 찾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는데 배를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성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출애굽과 광야생활 40년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할지라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들어가려면 반드시 성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을 요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내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르며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기를 시도하였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결해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은 재림하실 때에는 죄와 상관이 없는 구원받아 거듭난 성결된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결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힘이 성결, 즉 거룩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② 언약궤를 따르라
요단강을 건너는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 제사장들이 언약궤 메고 앞장서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따라가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하나님의 방법에서 특이한 것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6장의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에도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양각나팔을 불며 앞장서서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 때 백성들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백성들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그 제사장들의 인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언약궤보다 앞서가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기가 앞서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보다 앞서가려고 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대리자인 모세보다 앞장서려고 하고 모세를 무시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하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서 갈 때에 그 교회는 바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백성들이 제사장보다 앞장서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뒤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왜 문제가 발생하고 잡음이 날까요? 목회자보다 앞장서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분을 알아야 하며 자기의 위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따라가는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제사장같이 희생하라
요단강을 건널 때 가장 앞장선 사람들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요단강 언덕이 넘치던 때 언약궤를 메고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의 장소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물로 들어서라고 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홍해가 갈라진 뒤에 백성들이 건넜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는 물이 갈라지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무조건 요단강으로 들어가라는 믿음의 요구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요단강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은 요단강을 돌아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헤엄을 쳐서 갈 수도 없습니다. 배로 건널 수도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장서서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 요단강에 들어서자 요단강물이 갈라지고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본문 16-17절입니다.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마른 땅 위로 건넜던 것처럼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목숨을 걸로 요단강으로 들어갔고 그 믿음 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가는 길을 백성들은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앞에 요단강과 같은 장애물이 닥칠 때 피하려고 하지 말고 언약궤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강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될 것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갈 때 길이 열려질 줄로 믿습니다. 요단강 물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두려워하거나 약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려고 이스라엘 나라의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열하 5:10)고 할 때 화가 나서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종들이 강권할 때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자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14절). 순종이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기적의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가야 하는 길에 장애가 되는 요단강을 갈라 길을 열어주었고, 또 그 강물이 다시 합치지 않도록 요단강 가운데서 막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의 사명입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종들은 제단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성도들의 가정을 위하여 환란의 물결이, 고난의 물결이, 엄습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④ 믿음의 기념비를 세우라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열두 명을 택하여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서있는 요단강 가운데에서 돌을 취하여 강 건너 장막을 칠 곳에 기념비를 세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기적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도 세월이 지나면 자꾸 잊어버리니까 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기념비를 쌓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념비가 있는 성도는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 성도는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네 인생의 요단강을 건너라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은 믿음의 세계를 가기 위해서는 앞에 가로막힌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야 했던 영적인 요단강입니다.
믿음생활의 걸림돌, 기도의 걸림돌, 감사생활의 걸림돌, 봉사 생활의 걸림돌, 이런 것들은 성도들이 반드시 건너야 할 영적인 요단강입니다. 육신의 질병이나 재물의 궁핍, 사람들과의 관계 등도 우리가 건너야 할 요단강입니다. 이런 것들을 믿음으로 건너가야 믿음에 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영적 요단강의 물결이 우리를 휩쓸어 갈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심령,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영혼까지 삼키려고 넘실거립니다. 그래서 성도는 영적인 요단강을 만나면 과감하게 그 장애물을 건너가야 합니다. 영적인 요단강을 건너갈 때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있는 영적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요? 거기에도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① 믿음으로 건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에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기도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합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은 성도의 재산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요단강 같은 세상을 이기는 것은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4-5은 “4 무릇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믿음으로 내 앞을 가로막는 영적 요단강을 건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순종으로 건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는 숙제에 있어서 여호수아가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압니다. 미가 선지자는 6:7-8에서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성도는 어떻게 이런 영적인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완전하게 막아 주셔서,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이 죽음의 요단강, 범람하는 불가능의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요?
여호수아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요단강을 건넜는가를 보면 그 방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대로 우리도 하면 됩니다. 여호수아와 그 당시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가자고 설득을 해서, 싯딤에서 요단강가로 백성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는 곡식 거두는 시기라 요단강 물이 언덕에 넘치는 때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가장 안 좋은 때였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싯딤에서 요단으로 왔지만 언덕을 넘쳐흐르는 요단강을 바라보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그 강가에서 3일을 유숙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언덕을 넘쳐흐리는 요단강물을 보고 믿음이 약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강물을 3일 동안 지켜보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여호수아의 그 결정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22절). 그런 상황이 되면 빨리 요단강을 건너야지 거기에 3일 동안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황을 악화 시킬 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요단강을 넘쳐 흐리는 것을 3일 동안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3일 후에 그 요단강을 건너가자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능히 그들로 그 요단강을 건너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범람하는 강물을 능히 건너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여 그 강을 건넜습니다.
성도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믿음의 장애물인 요단강을 건너려면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최악이 상황에서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는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만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믿은 것은 여호수아만이 아닙니다. 온 백성이 다 믿었습니다.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가자 할 때 아무도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불순종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뒤돌아 가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믿음을 가지고 순종을 했습니다. 이 순종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이 갈라지고 건넌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물은 최고로 많아서 언덕을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강물 속으로 들어가라고 여호수아가 명할 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순종했습니다. 그 범람하는 물속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백성들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순종할 때 요단강물은 갈라지고 그 흘러내리던 물이 완전히 그치고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순종하는 백성들은 그 넘쳐흐르는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불행의 강물, 죽음으로 몰아가는 강물은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건너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에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우리를 행복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단강물을 멈춰 서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범람하는 요단강물도 맨 땅과 같이 건널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난장이인 성 요한은 수도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들의 반열 중 드는 성자였습니다. 그는 절대로 이유를 묻지 않고, 아무런 불평이 없이, 끈질기게 순종하는 인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매우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상관이 있었는데, 그는 난장이인 성 요한에게 터무니없는 일들을 많이 시켰습니다. 난장이인 성 요한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성 요한은 그 모든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을 했습니다. 한번은 유리창 밖으로 그의 저녁 식사를 던져버리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한번은 나이 먹은 수도사가 요한의 순종하는 것을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난장이인 요한에게 그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바위를 그의 문에 굴려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어깨를 큰 바위에 갖다가 대고는 그 일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위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온전히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난장이였지만 요한은 성자의 칭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같은 수도원에 있는 위에 있는 분이 요한에게 마른 막대기를 주면서 땅에 심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매일 물을 주라고 했습니다. 물을 길러 강으로 가야 했습니다. 강은 수도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강까지 가는 길은 뜨거운 모래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난장이 수도승 요한은 절대적으로, 조금도 불평이 없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3년 동안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그 막대기에서 움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고 합니다. 그 명령을 내렸던 수도승은 그 열매를 따가지고는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형제들에게 나눠주면서 ‘이것은 순종의 열매요. 이것을 먹어 보세요’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순종이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불가능의 요단강, 죽음의 요단강, 범람하는 요단강을 건넌 젖과 꿀이 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할 것입다. 이런 순종이 마른 막대기에도 움이 돋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아담으로 부터 흘러 내려서 우리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에덴동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요단강을 건넌 결과
우리가 믿음으로 영적인 요단강을 건너고 나면 얻는 결과가 무엇일까요? 여전히 광야요 사막일까요? 요단강을 건넌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가나안, 헷, 히위, 브리스, 기르가스, 아모리, 여부스). 그 일곱 족속은 신장이 장대하고 거칠며 난폭한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모두 너희들 손에 붙여서 멸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 앞을 가로막는 요단강과 같은 믿음의 걸림돌을 과감하게 건너가면 일곱 귀신과 같은 마귀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 주셔서 성도가 승리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악한 마귀 제아무리 강할 지라도 우리들의 대장 예수 앞서가시니 능히 이기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찍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38년전 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모세에게 보고하기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9).
신명기 28:7은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리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제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능히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 땅을 얻게 됩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질명하고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게 됩니다. 이 은혜를 놓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도가 믿음의 길을 가다보면 요간강 같은 여러 장애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요단강의 장애물을 건너야만 가나안 땅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때로는 요단강과 같은 어려움이, 때로는 태산과 같은 환란이, 때로는 파도와 같은 고난이 닥쳐 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믿음으로, 말씀으로, 기도로, 요단강의 장애물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