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그림 소요정(逍遙亭)이다.
그가 양천현령으로 있으면서 남긴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 중 한 작품이다.
소요정은 조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심정의 호다.
그는 태종이래로 훈구대신 등을 지낸 명문 집안에서 태여난다.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에 오르고 이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정암 조광조 등의 공격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난다. 이곳 양천에 소요정을 짓고 살았다.
그는 소요자적하지 못하고 기묘사화를 일으켜 결국 사사된다.
그후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아들 심사손(沈思遜)마저 사류의 탄핵으로 파직된다.
그는 조광조 등의 사류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맺혀 틈만 노리게 되었다.
마침 1519년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해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게 된다.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홍경주 등과 짜고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암 조광조 등 사류를 일망타진하였다.
남곤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다가 1527년 남곤이 죽은 뒤 좌의정‧화천부원군에 오른다.
그는 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을 아래에 두고 권력을 독점한다.
특히 동궁(후일의 인종)과 인척관계에 있으며 권력경쟁자였던 이조판서 김안로를 귀양보낸다.
경빈박씨의 동궁저주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와의 관련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예(權輗)의 탄핵으로
강서로 귀양갔다가 이항‧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사사(賜死)되었다.
후일 김안로가 패사(敗死)한 뒤에도 그 만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길이 매도되었다.
형제간에 우의는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하며,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智囊)라 불렸다고 한다.
소요정터는 지금 가양동 우체국 뒤편 가양취수장이 있었던 탑산 남쪽기슭 중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추정되는 근거로 그림에서 소요정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탑산 남쪽은 보이지도 않는다.
겸재는 그 시각에 탑산과 광주바위를 그려놓고 있다.
겸재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있던 시절 그린 공암층탑(孔巖層塔)이다.
오늘날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는 이미 고구려 때부터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불리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한강의 주요한 길목 역할을 해왔다.
제차파의란 '구멍이 뚫린 바위' 란 뜻을 한자어로 차의한 지명이다.
여기서 구멍이 뚫린 바위는 강서구 가양동에 '허가바위'를 일컫는다.
이후 8세기 신라 경덕왕때 '공암(孔巖)' 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이 지역은 제양(齊陽) 파릉(巴陵) 양평(陽平) 양원(陽原) 등 많은 이름이 있었다.
조선 후기까지 '공암' 이라는 지명이 가장 널리 그리고 꾸준히 사용되어 왔다.
공암은 겸재의 그림 소요정과 공암측탑에 등장하는 곳이다.
그만큼 공암과 그 일대는 멋진 풍경으로 양천지역의 상징이자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도의 위성사진에서 나타난 공암일대이다.
서한강 지역의 상징이었던 공암은 이제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공암과 그 일대는 오랫동안 옛 모습 그대로 제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80년대부터 한강개발이 본격화 되고 한강변의 고속화 도로인 올림픽대로가 김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 절경을 자랑하던 공암은 육지와 고속도로 사이에 같힌 도심속의 섬이 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특히 90년대 그 일대가 택지지구로 지정되자 자칫 매립되어버릴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옛 빼여난 자연의 풍광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곳으로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