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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하윤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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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반정 후 남명학파는 침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침체속에서‘남명후 일인자’라고 불리는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에 의해 얼마동안 주도되다가 겸재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만한 선비가 배출되지는 못했다. 다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각 고을마다 남명학을 계승하는 선비들이 배출돼 그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진주 단목(丹牧)의 진양 하씨 문중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주 단목의 진양하씨는 시조인 고려 충절신 시랑공 하공진의 12대손인 하기룡(河起龍)이 이주해 정착함으로써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주 지방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알려져 있다. 단목의 진양하씨들이 남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하기룡의 증손 하숙(河淑)의 아들인 위보(魏寶) 진보(晋寶) 국보(國寶) 3형제 때에 이르러서이다. 하위보 하진보가 ‘덕천사우연원록’에 이름이 올라있는 남명 문인들이다. 남명 문인인 하위보는 사천 이씨와 진양 강씨 사이에서 9형제를 두었는데, 하항 하침 하각 하척 하증 하경 하성 하변 하협이 그들이다. 창주 하증을 비롯한 이들은 선대의 유지를 이어 남명학을 가학으로 정착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단목 진양 하씨의 가학으로 정착한 남명학은 그 후손들에 의해 맥을 이어갔는데, 단지 하협의 증손인 인재(忍齋) 하윤관(河潤寬)도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재 하윤관은 1677년 현재의 대곡면 단목리인 단동(丹洞)에서 호(灝)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효성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증조인 단지공(丹池公) 하협은 진사로 급제한 뒤 출사를 하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정진한 선비로 타고난 효성과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로 명성이 자자했다. 바로 위 형인 하협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포로로 끌려가자 생환을 위해 20여년간 한결같이 노력한 일화는 지금도 이 지방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인재는 어릴 때부터 자질이 순후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학업 성취도를 보여 사람들이 한번 보고 크게 될 인물로 인정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과거는 포기하고 다만 향시에 급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인재가 과거를 포기한 것은 현달을 바라지 않고 다만 성현의 학문이 좋아 이를 몸소 체득하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실제로 인재는 도와(道窩) 이덕윤(李德潤), 태와(台窩) 하필청(河必淸), 소암(素菴) 이덕관(李德寬) 등 당시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평생 학문에 정진했다. 인재는 참을 ‘인(忍)’자를 호로 삼을 만큼, 태산같은 마음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당나라 때 장공예(張公藝)라는 사람이 ‘백인(百忍)’을 평생 삶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중국 당나라의 장공예(張公藝)라는 사람은 9대가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의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제사지내러 갔다가 장공예의 집에 들러, 9대가 화목하게 사는 비결을 묻자 참을 인(忍)자를 1백번 써서 대답을 대신 했다고 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진양속지에 “하윤관의 자는 택후(澤厚)요 호는 인재이다. 어릴 때부터 순박하고 고상하여 행실이 절도가 있었다. 글을 읽을 때는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무리하게 재물을 늘이지 말도록 늘 경계를 하면서 “뜻을 손상시키고 허물을 더하는 것이니 심히 옳지 못하다”라고 했다. 인재는 자식과 조카들을 비롯한 집안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베풀려고 노력했다. 마음속으로는 ‘참을 인’자 를 생각하면서, 사사로운 욕심보다는 인을 실천하려는 선비의 도리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효우(孝友)가 남달랐고, 일찍이 덕업(德業)을 이룬 인재는 78세를 일기로 1754년 고향에서 세상을 떠난다. 인재의 학문은 그의 아들인 하응회(河應會)와 손자인 죽와(竹窩) 하일호(河一浩)에게로 이어졌다. 하응회는 1696년 인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이미 성인(成人)의 기질이 있었으며, 집안 일을 주선하면서 ‘내것 네것’을 가리지 않고 성심 성의껏 처리해 친족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주위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다. 손자인 하일호는 타고난 자질이 순후하고 기상이 맑아 사람들이 천성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만년에는 후학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자기 소임을 삼아서 가르치는데는 소학을 먼저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후손들인 국담(菊潭) 하진백(河鎭伯) 낙옹(樂翁) 하태범(河泰範) 등은 계속 남명학을 가학으로 계승해 갔다. 1900년대에 들어와 단지공 종손인 묵재(默齋) 하정근(河貞根)은 ‘지상세제록(池上世濟錄)’엮어 단지공을 비롯한 12대 조상들의 유묵과 유적을 세상에 전하고자 했다. 묵재는 가업을 한말까지 계승해 온 인물로 당시 강우학맥의 정맥이라고 할 수 있는 면우 곽종석과 회봉 하겸진의 문인이다. 대곡면 단목마을에는 단지공이 결혼후 분가해 나올 때 지은 목조가옥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인재공을 비롯한 그 후손들이 이 고택에 살면서 이 지역이 ‘문향(文鄕)’으로 이름이 드러날 수 있도록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 집에는 단지공 때부터 묵재 하정근에 이르기까지 40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고문서와 전적이 보관돼 있다. 단목마을은 지금도 고풍이 배여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고풍스런 마을 모습보다는 400여년을 지켜온 ‘문향’이라는 명성이 더 갚진 것이며, 문향의 명성은 인재공을 비롯한 옛날부터 이곳에 살았던 선비들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사진설명]대곡면 단목마을에는 단지공이 결혼후 분가해 나올 때 지은 목조가옥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인재공을 비롯한 그 후손들이 이 고택에 살면서 이 지역이 ‘문향(文鄕)’으로 이름이 드러날 수 있도록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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