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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광복과 영화계의 부활
1945년 8월 15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 민족이 일제식민지부터 해방된 날이다.그리고 이날은 바로 한국영화가 부활한 날이기도 하였다.사실 해방전 이 땅의 영화는 조선영화령을 앞세운 일제에 의하여 완전히 숨통이 끊어져 있었다. 일제는 이 땅에 있었던 10개의 영화제작회사를 모두 폐쇄해 버림으로써 한국인에 의한 영화제작은 완전히 숨통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8.15 해방으로 인한 우리영화의 부활은 그러므로 영화사적으로 보아 대시대 구분의 분수령이 되며, 민족주권의 영사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는 또 하나의 영화사의 출발이기도 하였다.해방 직후부터 1940년 6.25동란까지의 '해방기'를 개관해 보면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첫째, 영화인의 복귀와 새로운 영화계 형성둘째, 영화제작의 부활-'광복영화'셋째, 민국정부수립 전후의 영화제작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해방과 영화계의 재건은 가장 긴급한 일이었다.첫째로 8.15 해방의 큰 역사가 이룩되자 영화계에는 엄청난 환희속에서 꿈에도 그리던 내 나라의 영화창조라는 의욕을 가지고 영화인들이 다시 모여들었다.그 중에서도 감격스러운 것은 일제말기에 조선 총독부의 영화정책에 불복하였던 사람들의 복귀였다. 이규환감독은 일제에 체포되어 강제노동을 하던 평택비행장에서, 윤봉춘감독은 낙향하여 의정부 근처의 산곡마을에서 집신꼬기와 한글을 가르치다 해방을 맞이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밖에도 부득이 일제말기의 법인 조영과 등졌던 사람들이 영화계에 복귀했다. 그런가 하면 부득이 법인 '조영'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깊은 뉘우침을 안 복귀하였다.그러한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조선영화건설본부가 발족되었다. 영화사의 개척원로인 윤백남을 위원장으로 하여 안석영, 이시우, 방한준, 박기채, 황운조, 양세웅, 이병일, 김학성, 유장산, 김성춘, 최칠복, 고해진, 김흥만 등 주요한 감독,시나리오작가,촬영기사,조명기사,편집기사,녹음기사 등이 중심이 되었다. '조선영화건설본부'는 일제의 법인 조영의 시설과 기재 등을 인수하여 활동에 착수하였다. 1945년 9월 24일에 주한미군정청 보도부에서 이들에게 뉴스영화의 촬영과 제작을 의뢰하게 되어 이들의 활동은 기록 영화에서 시작되었다.그런가 하면 해방직후의 혼란속에서 좌경 영화인들이 조선영화동맹을 결성하여 역시 뉴스영화 제작과 영화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 해방 후 처음으로 영화 감독들의 직능적인 모임인 '조선영화감독구락부'를 만들었다. 1946년 3월 1일에 결성된 이 모임은 해방 직후의 일선영화감독들의 면모를 보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그 동인명단은 다음과 같다.안종화, 이규환, 안석주, 윤봉춘, 이구용, 방한준, 박기채, 전창근, 이병일, 안철영, 최인규, 김영화, 서광제, 신경균, 윤용규, 간사는 안석주, 이병일 이구용 3인이었다.이와 같이 해방후의 감격과 혼란 속에서 영화인들이 복귀하고 영화단체들이 나타나면서 한편 1946년 들어서 영화계의 제작의 기운이 무르익게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1946년 4월 12일에 공포된 군정청 법령제 68호와 같은 해 10월 8일에 공포된 군정청 법령제115호인 바 이것은 일제가 사라진 뒤 최초의 이 땅에 있어서의 영화관계 법령이다.이 법령은 전문 2조로 되어 있는데 제1조에 목적, 제2조에 법률의 폐지, 제3조에서 영화의 허가, 제4조에서 특기할 범죄, 제5조에서 허가 수수료, 제6조에서 형벌 등을 간단하게 규정하고 있다.(제1조) '본령의 목적은 일본의 국가주의적 선전에 이용하기 위하여 전 일본정부가 예술적 오락의 범위를 제한한 영화의 제작 및 영화에 대한 통제를 배제하고 최소한의 통제하에 조선영화산업의 질서 있는 운영을 수행하며 영화내용의 건전한 기초를 확립케 함에 있음'. 군정청 법령에 나타난 영화관계 법령은 위의 취지에서 보는 바와 갈이 일제에 의해 제정된 조선영화령을 폐지하고 매우 간단한 행정적 절차를 규정하여 그 행정적 책임을 조선정부공보부에 이관하게 되었다.해방 당시의 이 땅에는 전국에 140개 정도의 극장이 있었지만 해방 직후의 공연장은 일시 크게 혼란하였다. 배급과 흥행의 계통이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상영하는가 하면 연극도 상연하였고, 그런가 하면 연쇄극이 새삼스레 등장하기도 하였다. 제일극장에서 상영된 "홍길동"(권일청연출, 홍묵당촬영) 장안무대의 출연이 그것이다. 연쇄극은 이외에도 찾아볼 수 있다. 외국영화도 "태평양의 분격"(미국), "미조리선상의 일본항복조인식"(소련), "킹 솔로몬"(영국), "여학생 기숙사 소동기"(프랑스), "춘희"(중국) 등의 영화가 두서없이 상영되고 있었다.아직도 영화제작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해방 후 일년 동안의 이 땅의 영화로는 "해방뉴스"(제1보-제10보) 등의 기록 뉴스영화와 "제주도"와 "신라의 고분" 등의 문화영화를 볼 수가 있었다.그러나 한편으로 내실을 기하여 온 영화제작회사가 출현하면서 마침내 해방기 최초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광복영화의 물결
이러한 가운데 마침내 해방 후 최초의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1946년 후반기부터 대체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까지 사이에 왕성하게 제작,발표된 이 영화의 뚜렷한 경향은 광복영화 또는 해방영화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가 있다.그러한 작품 가운데서 1946년 10월 21일, 구 명치좌였던 국제극장에서 '고려영화사'가 제작, 최인규가 감독한 "자유만세"가 개봉되었다. 이 작품이 말하자면 광복영화의 효시였다. 광복영화의 특징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우선 뒤이어 제작된 이 경향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곧 알 수가 있을 것이다."자유만세"에 이어서 이구영감독의 "안중근사기"(1946년), 윤봉춘감독의 "삼일혁명기"(1947년), 윤봉춘감독의 "윤봉길의사"(1947년), 전창근감독의 "해방된 내고향"(1947년), 김영순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년), 이규환감독의 "민족의 새벽"(1947년), 신경균감독의 "새로운 맹세"(1947년) 등이 제작,발표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최인규감독의 "죄없는 죄인"(1948년), 윤봉춘감독의 "유관순"(1948년), 최인규감독의 "독립전야"(1949년), 윤대용감독의 "조국의 어머니"(1949년), 김성민감독의 "심판자"(1949년), 윤봉춘감독의 "애국자의 아들"(1949년) 같은 작품이 제작, 발표되었다.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복영화는 안중근,윤봉길,유관순,이준 등 일제식민지시대의 애국 독립투서,의사,열사,순교자의 전기와 투쟁실기를 영화화하는데 주력하였다. 또 반드시 실전기 작품이 아니더라도 극영화로 만들어진 소재는 한결 같이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한 인물이며, 일제에 의해서 수난 받는 겨레의 아픔이요 분노였다.해방 직후의 영화가 이처럼 겨레의 해방이라는 커다란 감격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로 보아서 당연한 일이었다. 기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35mm필름으로 제작된 작품이 있는가 하면 16mm필름으로 제작된 작품도 많았다. 관객들 역시 많은 작풍이 기술적으로는 조잡한 면이 있었지만 뜨거운 호응으로 한국영화의 재기를 격려하였다."자유만세"는 전창근각본을 최인규가 연출하였다. 해방 직전에 서울에서 지하조직을 통해서 항일독립운동을 한 독립투사들의 활약을 묘사한 작품이다. 전창근이 주연이었고 황려희,유규선,전택이 등이 공연하였으며, 이 무렵 신인으로써 촉망받던 카메라맨 한형모의 촬영이 돋보였다. "자유만세"는 국내적으로도 크게 감동을 주었지만 당시 중국에도 소개되었는데 장개석총통이 남경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고 크게 감격하여 '자유만세, 한국만세'라는 휘호를 써주었다는 일화도 남겼다.
최인규는 다시 "죄없는 죄인"(1948년)에서 일제에 의해 박해받는 종교인(목사)의 배신과 순교를 그렸으며 두 사람의 목사를 통해 암흑시대를 살아온 겨레의 아픔을 그렸다. 최인규가 시나리오를 썼고 한형모가 촬영(16mm)하였다. 주인공은 이 영화의 원작수기를 썼던 황재경목사가 출연하였다. "자유만세"와 "죄없는 죄인"은 고려영화사의 제작이었다.윤봉춘감독이 만든 "유관순"(48년)은 16세의 순국처녀의 독립투쟁과 옥중고와 순국을 선택한 송죽같은 절개를 그려 관중들에게 슬프고도 뼈아픈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고춘희, 이선경, 이일선, 박순봉 등이 출연했고 손용진이 촬영하였다. 제작은 계몽영화협회였다.해방 직후의 영화제작의 상황을 살펴보면 1946년도엔 4편, 1947년도에 13편, 1948년도에 22편, 1949년도에 20편, 그리고 1950년 6.25때까지가 5편으로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해방 직후의 사회적 혼란과 좌우익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이 극심했던 그 시기에 자유민주주의와 조국의 광복을 강렬하게 표현한 영화는 민중들에게 준 영향도 막대하였다.한편 위와 같은 해방 직후의 '광복영화'에 뒤미처 또 하나의 작품경향을 띄고 나타난 것이 말하자면 1940년대 반공영화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한 반공영화는 해방 후 2, 3년이 지나자 민족을 남북으로 양단한 38선이 뚜렷한 경계선으로 굳어지고 또 여수,순천반란 사건같은 끔찍한 난동사건 등이 영화속에 그려짐으로써 나타나게 되었다.이러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여,순반란사건을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촬영한 김학성 촬영기사의 '여수 순천 반란사건'(1948년), 같은 소재를 극영화로 제작한 한형모감독의 "성벽을 뚫고"(1949년)가 있다. 그 밖에 윤봉춘감독의 "무너진 38선"(1949년)과 이창근감독의 "북한의 실정"(1949년) 등이 민족의 분단과 북한사회의 진상을 생생하게 보여준 작품들이었다.특히 "성벽을 뚫고"는 그 당시 촉망받는 촬영기사였던 한형모의 감독,데뷔작품이었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족의 갈등이라는 테마는 우리겨레로서는 매우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였지만 여수순천사건이 생생하게 그 소재를 제공한 것이었다.동기동창이오 처남(이집길)과 매부(권영팔)간인 두 사람은 여,순사건으로 갈리게 되었다. 반란군이 된 매부는 국군장교인 처남의 포위 속에서 귀순권고를 받게되지만 총으로 대항하여 결국 사살되고 만다.김영수가 각본을 썼고 한형모가 감독과 촬영을 겸하여 차분하게 영상화했다. 안종화의 각본 및 감독으로 만들어진 '나라를 위하여'는 또 다른 사건이었던 지리산공비 소탕작전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토벌대장이었던 공국진이 사건의 수기를 썼으며 영화에도 직접 출연했고 이희숙, 민혜련, 여원조가 공연했다. 토벌작전 중 부상한 공비 두목을 생포 치료하여 사상적으로 전향케 한다는 반공계몽영화였다.
정부 수립 후의 영화제작
1948년 8월 15일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정부수립을 고비로 해서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서게 되었다.이 무렵 중앙청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육군 502부대는 말하자면 오늘의 국립영화제작소의 전신같은 역할을 하였다. 매달 2편씩 제작하는 전진대한보라던가, "전우" 같은 뉴스와 세미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들었다. 이필우, 이명우, 유장산 등의 촬영기사, 이경선, 최칠복 등의 녹음기사, 김봉수, 김형근 등의 현상기사가 이곳에서 활약하였다. 502부대는 뒤이어 김학성, 양세웅, 임병호, 홍일명 등을 보강하여 뉴스영화제작에 부족함이 없는 충실한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한편 극영화제작회사와 프로덕션도 해방 직후에는 영화제작의 실적이 없이 간판만 걸었던 곳도 많이 있었으나 차츰 영화제작의 실적을 나타낸 곳이 두드러지게 되었다.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50년 6.25동란 직전까지의 해방기에 나타난 영화사,프로덕션 가운데서 1편 이상의 제작실적을 가진 회사를 적어보면 34개의 제작회사와 프로덕션을 볼 수가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질양이 두드러진 곳이 '계몽영화협회'와 '고려영화사'였다.이와 같이 제작계가 활발해 지는 양상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은 영화기재와 35mm필름의 고갈, 영세한 제작비와 전국 흥행 계통의 마비등으로 인해서 반수 이상의 작품이 16mm로 제작되었고 녹음도 동시녹음에서 후시녹음으로 후퇴하거나 아예 무성영화로 제작되어 변사가 다시 등장하는 과도기적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정부수립 후의 작품경향
작품경향에 있어서는 정부수립을 하나의 고비로 해서 차츰 사회적 안정에 상응하는 변모를 보이게 되었다. 멜로드라마와 그 밖의 활극오락 영화 등의 대두가 그것이며 차분한 예술적인 의도를 담고 제작된 작품들이 그러한 것들이었다. 이 무렵의 작품 가운데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새로운 맹세" 신경균감독, "수우" 안종화감독, "갈매기" 이규환감독, "여성일기" 홍성기감독 같은 멜로드라마와 "밤의 태양" 박기채감독 같은 암흑가의 폭력을 묘사한 작품을 볼 수가 있다.그러나, 이 시기의 예술적인 작품의도가 잘 살려진 작품으로서는 "마음의 고향" 윤용기 감독과 "파시" 최인규감독을 꼽을 수가 있다."마음의 고향"은 함세덕의 원작을 곽일병이 각색하였으며 신인 윤용규가 감독했다. 산사에 입산하여 수양하고 있는 한 고아가 절에 불공드리러 오는 어느 아름다운 미망인(최은희)을 그리게 되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하기종,최은희,유민,김선영등이 출연했다. 이 작품은 제1회 서울시문화상(영화부문상)을 받았으며 맑고 깊은 정의 세계를 문예적인 향기짙게 그려냈다."파시"는 전창근의 각본을 최인규가 감독한 작품이다. 출연은 황남,최지애,황종선,최혜성 등이다.흑산도의 생활과 풍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인데 특히 이 작품은 최인규가 직접 16mm촬영기를 들고 생생한 현지촬영을 감행하여 참신한 리얼리즘을 표현하였다. 해방전에 그가 감독한 "국경"(1939년), "수업료"(1940년), "집없는 천사"(1941년)등은 해방 후의 주목할 만한 리얼리즘의 작품이었다.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해방기'의 영화계는 그 벅찬 감격과 혼란과 미비속에서 그런데로 새로운 민족주체의 힘겨운 길을 밟아 나갔다. 영화계의 새로운 편성에 뒤이어 영화제작에 34개 정도의 회사와 프로덕션 시스템으로 나타나면서 "해방기" 5년 동안 110여편(기록영화 포함)에 이르렀다. 이규환,윤봉춘,전창근,최인규 같은 해방 전부터의 주요 영화작가가 '해방기'의 주류를 이끌었다. 그리고 해방세대의 새로운 영화인들의 대거 등장하여 비록 영화자본과 기자재가 빈곤하였지만 영화제작의 정열은 대단하였다.
7. 6.25동란- 전시의 영화활동
한국영화는 이처럼 치루어진 동란기(1950-1954)를 또 하나의 뼈아픈 시련의 역사적 체험으로서 겪게 되었다.
○영화인의 납북
동란이 터진 후 최초의 손실은 영화인의 납북이었다. 이때에 납북된 영화인들을 보면 최인규(감독), 이명우(감독및 촬영기사), 박기채(감독), 김정혁(제작), 최승린(기술자) 등을 꼽을 수가 있다. 이 중에서 이명우, 박기채, 최인규는 우리 영화사에 매우 뚜렷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이러한 납북영화인 못지않게 커다란 또 다른 손실은 특히 해방 이전까지 만들어졌던 우리의 영화사 초창기부터의 많은 고전필름들이었다.
○기록영화, 군제작영화
전시영화활동은 다큐멘타리영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미군 502부대는 서울의 중앙청으로부터 진해로 이동하여 전지 뉴스 영화인 '리버티 뉴스'를 제작하였다. 한편 국방부에서도 뒤이어 부산에 있는 정훈국에 촬영소를 설치하고 시사뉴스인 '국방뉴스'와 '백만인의 별' 제작하게 되었다. '국방뉴스'의 카메라맨들은 전황의 변화에 따라 이동하는 최전방의 생생한 전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공보처도 역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뉴스'를 제작하였다. 대구에 자리 잡고 있던 공군은 정훈감실 소속으로 공군촬영대를 항공전투영화인 "출격명령"을 제작하였다. 진해의 해병학교에서는 이경순 등의 영화인을 포섭하여 기록영화를 제작했다.
2) 전시의 극영화 제작
동란이 일어났던 1950년대는 여러 작품이 기획과 제작도중에 중단되고 4-5편 정도가 제작되는데 그쳤다. 주요작품은 "여인애사"(유호각본, 신경균 감독, 주증녀, 유호, 박경주, 송미남출연), "흥부와 놀부"(이경선각본,감독, 황남, 주증녀, 정득순, 현지섭 출연), (이상 1950년), 1951년도에 제작된 작품은 5편이며 그 중 극영화는 "내가 넘는 38선"(손전 각본, 감독, 노경희, 손전, 송태호, 송미남 출연),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각본,감독, 황여희, 최현, 복혜숙, 양일민 출연) 2편이다. 그러나 1952년도에 들면서부터 영화인들은 비로소 보다 예술성과 오락성을 되살린 작품을 제작하기에 힘썼다.1952년도에 나온 작품을 보면 원로급의 윤봉춘 감독이 "성불사"를 만들었고, 전창근 감독을 "낙동강"을 만들었다.
손전감독의 "공포의 밤"은 도박단의 범죄를 다룬 스릴러영화다. 민경식 각본, 감독의 "태양의 거리"
1953년도에는 극영화 3편이 제작되었다.이만흥 각본, 감독의 "애정산맥"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 이만흥 각본, 감독의 "청춘"
3) 휴전직후의 영화제작
1953년 7월 29일의 휴전성립은 영화계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할 계제를 주었다.
1954년 3월 31일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배려에 따라 입장세법(법률 제329호)을 개정하여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1954년도의 영화제작은 18편으로 증가하였다. 거의 6.25전의 제작수준을 회복한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전시(1953년까지)의 영화가 거의 다 16mm필름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시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35mm촬영기재와 제작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만큼 영화제작이 빈약함과 조잡함을 면할 수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1954년 들어서는 절반정도가 35mm카메라에 의한 제작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휴전직후의 제작경향을 보면 첫째로 직접 6.25동란을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작품들은 또 직접 전시의 싸움터를 그린 작품과 전,후방에 걸친 시국적인 계몽영화들이다. "고향의 등불"(장황연감독), "창수만세"(어여선감독), "고향의 노래"(윤봉춘감독), "혈로"(신경균감독), "아리랑"(이강천감독), "북위 41도"(김성민감독), "출격명령"(홍성기감독), "귀향"(이규동감독) 등이 이러한 작품들이다.
다음 두 번째의 작품경향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혼란한 전시사회를 배경으로 한 범죄 소재의 서스펜스영화다."탁류"(이만흥감독), "유혹의 거리"(정창화감독), "운명의 손"(한형모감독) 등이 이러한 작품이다.
세 번째 작품경향은 역시 적지 않은 편수의 기록영화 세미 다큐멘터리영화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빛나는 건설"(유장산감독), "코리아"신상옥감독, "건국십년"(이창근감독), "백만의 별"(이용민감독), "여군"(조창호감독), "충북만유기"(임운학감독) 등이 이러한 작품이다.
동란기의 한국영화계는 영화인의 납북사건과 고전필름의 소실 그리고 영화기자재의 손실 등 커다란 타격이 많았다. 그러나 민족대수난의 동란기에서 영화인들이 재빨리 전시영화활동에 참여한 것은 다행한 것이었다.
8.한국영화,中興期를 맞이하다.
1)개관-1950년대 후반기
(1)폐허에 꽃핀 영화산업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영화는 비로소 일대 중흥기를 맞이하게되엇따.
여기에서 중흥기라고 함은 휴전직후인 1955으로부터 5.16군사혁명이후 영화법이 새로이제정공포된 1961년까지를 말한다.
그러면 이 시기를 중흥기라고 말하는 이류는 무엇인가?
먼저 들 수가 잇는 것은 영화제작에 있어서 양적인 증가, 즉 영화산업의 놀라운 발전이다. 참고로 이 기간의 제작편수의 영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55-15편, 1956년-42편, 1957년-28편, 1958년-83편, 1959-108편, 1960년-90편, 1961년-69편이다.
1955년에 불과 15편으로 시작한 전후영화는 불과 몇 년 사이에 100편을 제작하는 놀라운 변모를 보인 것이다. 영화산업의 이러한 확장은 바로 영화가 대중적인 오락매체로서의 급속한 성장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영화의 이와같은 산업으로서의 발달은 과거의 영세한 수공업의 시대로부터 어느정도 현대적인 스튜디오와 기재를 마련하도록 촉진하게되었다. 영화제작사는 72개의 영화사와 개인프로덕션으로 팽창하게 되었다.
한국영화계의 이러한 급속한 성장으로 한국영화단체연합회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및 전국극장연합회가 새롭게 편성되었다.
(2)다양한 영화예술의 성장
그러면 이처럼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가지고 오게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1955년에 접어들자 1월16일에 李圭煥이 감독한 「춘향전」이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는데 이 작품의 흥행적 성공은 바로 한국영화중흥기의 봉화가 되었다.
「춘향전」이 보수적 윤리를 다룬 역사극이라면 전후의 혼란속에서 새롭게 맞이한 자유주의적인 시대풍조를 그려낸 현대극인 「자유부인」(1955)의 커다란 히트가 그 뒤를 이었다. 한형모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전후의 빈곤을 헤쳐나가 보려는 한 가정부인이 왈칵 밀려들어오는 밀수품과 사치한 유행의 풍조속에서 도덕적, 가정적 파탄을 경험하게 되는 현대적인 멜로드라마이다.
한국영화는 이 시기에 들면서 비로소 해외영화제에 참여하여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1956년의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시집가는 날」(이병일감독)이 특별희극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베르린영화제, 샌프란시스코영화제등 여러 영화제에 한국영화를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2)1950년대 후반의 작품경향
(1)사극영화
이 시기에 있어 역사극은 계속해서 제작되어 흥행의 주요한 경향의 하나가 되었다.
주요한 작품으로는
김기영감독의 「양산도」(1955년), 김성민감독의 「망나니 비사」(1955년), 김창근감독의 「단종애사」(1956년), 전창감독의 「마의태자」(1956년), 이병일감독의 「시집가는 날」(1956년), 안종화감독의 「사도세자」(1956년), 조근하감독의 「황진이」(1957년), 양주남감독의 「배뱅이굿」(1957년), 신상옥감독의 「무영탑」(1957년)등을 들 수 있다.
(2) 자유풍조의 멜로드라마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의 전반에 걸쳐 멜로드라마는 전체 제작편수의 73.5에 이르는 전성기를 보였다. 멜로드라마의 융성은 곧 영화산업의 융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멜로드라마에 대한 흥미는 그 제재에 포함되는 시대성과 사회성, 그리고 관객심리가 영화에 대해서 나타나는 성향에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전후사회의 빈곤과 부조리, 그리고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학생운동으로 이어져 1960년의 4.19혁명으로 나타나게 된다.
영화로 말하자면 이러한 시대의 풍조는 변해가는 사회상, 옛것과 새것사이의 모든 균열과 갈등을 보이게 된다.
한국최초의 여류감독인 박남옥은 「미망인」(1955년)에서 전쟁미망인에게 닥처오는 재혼문제와 끈질긴 삶의 의지를 그렸다.
1950년대 멜로드라마의 대표적인 두 사람의 감독은 홍성기와 신상옥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사람은 고려영화사의 최인규감독에게 함께 사사했으며 활발한 영화제작활동으로 피할 수 없는 라이벌이 되었다.
(3)문제작, 예술작품의 제작
한편 195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모는 일련의 예술성이 뛰어난 문제작품의 제작과 공개였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바로 이점이 산업적인 발전과 함께 한국영화의 중흥의 참된 의의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사의 흐름으로 보아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일군의 신인들이 각기 새로운 문제의식과 함께 매우 개성적인 영화미학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1950년대의 이 경향의 영화감독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유현목, 김기영, 신상옥 세 사람을 들 수가 있다.
유현목의 1950년대에서 60년대초에 걸친 주요작품은 다음과 같다.
「잃어버린 청춘」(1957년), 「구름은 흘러도」(1959년), 「오발탄」(1961년), 「김약국집 딸들」(1963년), 「잉여인간」(1964년) 등이다.
유현목의 영화적 특징은 「영상파」, 또는 리얼리즘영화라고도 불리어 졌다.
유현목의 모든 영화가운데서 대표작은 「오발탄」이다. 역시 1950년대말의 처참한 현실이 배경이며, 주인공은 어떤 계리사사무소에 근무하는 선량한 계리사 송영철(김진규)이다.
김기영은 그의 작품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성격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개성적인 감독의 한 사람일 것이다. 앞에 본 유현목이 상황과 인간과의 대립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문제를 다루었다면 김기영의 영화는 인간 그 자체의 본성, 본능, 에고이즘을 통해서 인간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이 강렬하게 그려진다.
김기영의 같은 시기의 중요한 작품은 「10대의 반항」(1959년), 「하녀」(1960년),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년), 「고려장」(1963년) 등이다.
이처럼 "하녀"에 있어서의 성은 남자를 사로잡는 생존의 무기이며, 일단 남자를 소유한 뒤에는 가정의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한 쌔디스틱한 공격의 본능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작품의 영화적 표현은 그 효과가 잘 계산된 스튜디오의 세트에서 주로 촬영된다. 이 실내극적인 분위기,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분장이나 연기, 카메라의 다이너믹한 구사는 어떤 의미에서 제1차 대전후의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일면이 있다.
신상옥은 유현목과 김기영과도 또 다른 작품의 스타일을 만들어 주목되었다.
같은 시기의 「신상옥」의 주요작품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41년), 「열녀문」(1962년), 「벙어리 삼룡」(1964년) 등이다.
신상옥도 또한 초기의 작품경향에는 데뷔작인 「악녀」(1952년), 그리고 「지옥화」(1958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실폭로적인 리얼리즘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앞에 든 바와 같은 1960년대초에 만들어진 그의 일련의 대표작은 전통적인 윤리에 대한 비판적인 영화들이다.
이미 신상옥은 여러 평의 역사극속에서 과거의 허무함을 탐미적인 영상속에서 보여준바가 잇따. 이제 신상옥이 제시하게 된 것은 전근대적인 전통적 윤리와 근대적인 그것과의 터닝․포인트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편 1960년대에 들어와서 주목할 말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일군의 신인감독들을 볼 수가 있다.
「젊은 표정」(1960년)을 만든 이성구, 「마부」(1961년)와 「박서방」(1962년)을 만든 강대진, 「혈맥」(1963년)과 「굴비」(1963년)를 만든 김수용, 「또순이」(1963년)와 「비무장지대」(1965년)를 만든 박상호,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과 「흑맥」(1965년)을 만든 이만희 등이 이들이다.
(4)희극영화의 붐
이 기간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작품경향의 하나로서 희극영화의 붐을 들 수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한국영화에는 희극영화가 매우 드물었다. 오랜 일제시대의 영화제작에 있어서나 해방과 6.25동란이라는 민족적인 수난의 고통속에서 희극영화가 명확한 작품경향으로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앞에서 바라본 바와 같이 한국영화의 희극의 붐을 만들게 된 것은 이병일이 감독한 「시집가는 날」(1956년)부터이며 이 작품의 흥행적성공과 국제적인 영화제에 있어서의 수상은 곧 많은 희극영화를 만들게 하였다.
(5)스릴러․액션 영화
스릴러-액션 영화도 오락 영화의 한 경향으로 대중적인 환영을 받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러한 경향의 영화가 제작되어 왔지만 한국영화의 뚜렷한 하나의 경향으로 성장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에 스릴러,액션 영화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개성을 나타낸 감독은 정창화와 김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