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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에서 제작되어 2003년 9/15 ~ 2004년 3/23까지 56회로 방영된 이 대하드라마는 한류의 영역을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에서 터어키, 중동의 이란까지로 넓히면서 한류를 범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영애씨는 이 작품 하나로 단숨에 한류열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겨울연가’가 주부층을 중심으로 모든 연령층의 여성팬들의 한류를 이끌어냈다면,
‘대장금’은 한류에 있어서 소극적이었던 남성팬들을 끌어들이는데 대단한 기여를 하면서 한류의 붐을 더욱 크게 조성해 나가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주몽’ ‘태왕사신기’ 등 한류에 포커스를 맞춘 드라마가 양산되었고, 점차 한류의 영역은 드라마를 벗어나 영화, 그리고 현재 가장 크게 한류를 이끌어 나가는 ‘케이팝(K-POP)’의 태동에 가장 큰 일조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인공 ‘대장금(大長今)은 조선왕조실록 중종조에 10여차례 등장하며 신분은 의녀(醫女)로 왕의 신임을 여러 차례 받아왔고, 언젠가부터 ‘장금’에서 ‘대장금’으로 바뀌어 실록에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서장금(徐長今)이란 이름으로 처음 수랏간 궁녀가 되어 궁중음식을 둘러싼 궁중나인들의 다툼(?), 이후 궁을 나가서 의녀가 되어서는 가난한 서민을 위해 의술을 베풀고, 궁으로 다시 돌아와 왕실의 의녀가 되어 최초로 국왕의 어의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주제로 구성되었지만 실제로 의녀였었던 것만 확인될 뿐 대장금의 본명, 출신 등 어떠한 사실도 기록도 알려지거나 남겨져 있지 않고 드라마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물론 내용까지도 거의 모든 부분이 픽션으로 극작가 김영현씨와 이병훈 감독님의 말 그대로 그 분들의 대단히 우월스러운 작품이다.
☞ 경기 양주에 자리했던 ‘MBC 대장금 테마파크’는 2004년 12월 개장하여 2011년 12월 노후로 폐장할 때 까지 196만명의 국내외 관람객이 찾은 한류 메신저의 관광명소였다. 이곳은 ‘대장금’ 이외 ‘상도’ ‘허준’ 등의 사극촬영장으로도 활용되었다.
2,000평 대지위에 200여 채의 건물을 지은 세트장으로 현재는 용인에 ‘MBC 드라미아’를 신설해 역시 사극촬영장으로 활용하고있다.
※ 운 좋게 한 장 찾아낸 옛 안내서 스캔 받아 올린다. 에휴~~ 우리 또하나님도 여기 무쟈게 많이 갔었구만요 ^L^.
여기에서는 실록에 나타난 ‘장금’ 또는 ‘대장금’이란 기록의 내용을 찾아보면서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상황을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것 같아 살펴보고자 한다.
▶중종10년(1515) 3월21일, 헌부에서 선·교 양종의 위전을 추쇄하도록 아뢰다.
: (국왕이)전교하였다… 또 의녀(醫女)인 장금(長今)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大故)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杖刑)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兩端)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 이 기록의 실제 사건은, 계비 장경왕후가 3월02일 원자(훗날 인종)를 낳고 일주일 만인 이날에 승하하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때 의원 하종해와 의녀 장금 등이 ‘약을 잘못 쓴 죄’로 문책을 받게된다.
본디 어의녀인 장금이 왕후의 병세를 전하면 의원 하종해가 약을 지어 올리기 때문에 장금의 죄가 더 중하다. 그러나 임금은 “어떻게 사람의 삶과 죽음이 약처방에 달렸겠느냐?”며 장금을 두둔하며 오히려 “본래 호산(護産: 왕자 출산의 공)의 공으로 상을 받아야 되는데, 대고(大故: 장경왕후의 죽음)로 상을 받지 못하였다.”며 윤허하지 않았다.
⇨이것이 실록에 등장하는 ‘대장금’의 첫 기록이며 이 때 장금은 어의녀가 된 신분으로 국왕의 신임까지도 이미 매우 돈독하게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10년(1515) 3월 22일, 대간이 의녀 장금을 정율에 적용하지 않았음을 논핵하다.
: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의녀인 장금(長今)의 죄는 하종해보다도 심합니다. 산후에 의대(衣襨)를 개어(改御)하실 때에 계청하여 중지하였으면 어찌 대고에 이르렀겠습니까?
형조가 조율(照律)할 때에 정률(正律)을 적용하지 않고 또 명하여 장형을 속바치게 하니 매우 미편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장금이 죄가 더 큰 것은 산모의 의복을 새로 갈아입힐 때 (위험하니까) 계청(왕에게 아뢰어서)하여 갈아입히지 않았더라면 큰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돌아가시게 만든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조에서도 장형(곤장형) 정도로 처벌하겠다는 것은 너무 약하다. 그러나 왕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 중종의 뜻이 확고하다. 장금은 죄가 없고, 오히려 상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므로 모두 NO~K 이다.
▶중종17년(1522) 9월 5일, 대비의 병세가 나아지자 약방들에게 상을 주다.
: 대비전(大妃殿)의 증세가 나아지자, 상이 약방(藥房)들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주었다.
내의원 제조(提調) 김전, 장순손과 승지 조순에게 말안장 20부(部), 활 1정(丁), 전죽(箭竹) 1부(部),
의원 하종해(河宗海)에게 말 한 필과 쌀, 콩 각 10석, 김순몽(金順蒙)에게는 말 1필,
의녀 신비(信非)와 장금(長今)에게는 각각 쌀, 콩 각 10석씩을 주고, 내관(內官), 반감(飯監), 별감(別監)등에게도 모두 하사가 있었다. 전교하기를… (이하 略)
⇒ 여기서 대비전이란 중종의 모친인 즉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를 말한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모친 폐비윤씨가 폐출된 후 성종의 계비가 되어 어린 연산을 키웠다.
친아들 진성대군(후 중종)이 아닌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자순대비가 되었으나, 그래도 나름 불안한 12년을 보내던 중 1506년 반정이 일어나며 친아들이 즉위한 것이다. 자순대비는 1530년(중종 25) 8월22일 69세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였다. 그러니 승하하시기 8년 전으로 61세 때의 일이다.
⇨동년 8월15일, 대비의 간병을 전교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 병이 쾌차되어 두루 상을 내린 기록이다.
대비전(大妃殿)께서 본래 풍증(風症)이 계신데 요즈음 또 감기를 앓으신다. 증세는 비록 대단치 않지만 이미 의녀(醫女)를 시켜 곁에서 모시고 진찰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진찰이 필시 정하지 못할 것이니 곧 하종해와 김순의를 불러서 항시 전문(殿門) 밖에 있게 하고 의녀의 전달을 들어 약을 지어 올리게 하는 것이 좋다. 또 이런 뜻을 의사(醫司)의 두 제조(提調)에게도 이를 전하거라(유시하라).”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같은 의녀 중에서 의녀 신비의 이름이 먼저 거론 된 것으로 보아 장금은 대내를 드나드는 우수한 어의녀 중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19년(1524) 12월 15일, 의술에 대한 권과·의녀(勸課医女)의 요식 등에 대해 전교하다.
: 전교하였다. “… 그 가운데에서도 의술(醫術)은 더욱 큰일인데 각별히 권과하지 않으니, 지금 그 기술을 조금 아는 자는 다 성종조(成宗朝)에서 가르쳐 기른 자인데, 이제는 그 권과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醫司)에 물어서 아뢰라. 또 의녀(醫女)의 요식(料食)12679) 에는 전체아(全遞兒)가 있고 반체아(半遞兒)가 있는데, 요즈음 전체아에 빈자리가 있어도 그것을 받을 자를 아뢰지 않으니, 아래에서 아뢰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 즉, 모든 기술직들이 실력배양에 힘기울이 않고 있다. 특히 의술의 더욱 그러하니, 현직 의료진 모두 전에 길러진 의사들이니 앞으로 어찌할 것이냐? 의녀들의 급료는 근무할 때만 지급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의녀가 충원이 되질 않고 있다.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조금 뛰어나서 왕족을 돌보고 있으니 대장금을 대내에 상근시키며 전체아로 하여 급료를 주거라! 이렇게 명한 것이다.
⇨ 의녀들은 원래 전체가 돌아가면서 근무하고 일 할 때만 급료를 받는 체아직(遞兒職)이었다. 하지만 중종은 왕과 왕비, 대비전을 드나들며 간병하는 대장금에게 ‘상근하고, 급료의 전부를 지급받는 내의녀’의 직을 하사한 것이다. 이 기록으로 완벽하게 중종의 신임을 받는 지위에 오른 것으로 생각된다.
※‘대장금’에 대한 또 다른 이들의 주장에는 조선여인의 이름에서 ‘장금’이란 이름은 충분히 한 명 이상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을 부를 때 둘을 비교하여 신체의 특징을 지어 부름으로써 구분하기 위해 한 사람은 그대로 ‘장금’ 다른 사람에게는 체격적으로 키가 더 크거나, 몸집이 커서 ‘대장금’ 즉 ‘큰 장금이’란 뜻으로 불러질 수 도 있다고 말한다.
꼭 그들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정확히 가릴 수는 없지만, 실록에서의 기록의 변천으로 보아 처음 등장할 때가 이미 중종 10년에 왕후의 출산을 직접 도울 정도의 내의녀였었고, 이후 다시 10년이 지난 시점에 ‘대장금’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장금’을 더 격상시켜 ‘대장금’으로 불린 것에 타당성을 주고 싶다.
▶중종28년(1533) 2월 11일, 약방 제조와 의원들을 상주다.
: 전교하였다. “내가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좌의정 장순손에게는 숙마(熟馬) 1필(匹)을 내리고,
예조 판서 김안로, 전 도승지 정옥형, 상산 도정 이말손(李末孫)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의원 하종해에게는 준직(準職)을 가자하고, 동지 박세거와 홍침은 가자와 함께 각기 쌀과 콩 6석(石)씩 내리고,
김상곤은 가자와 함께 아마(兒馬) 1필을 내리고, 김수량, 노한명과 장무관원(掌務官員)에게 각기 아마 1필씩을 내리고, 의녀(醫女) 대장금(大長今)과 계금(戒今)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탕약 사령 등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
⇒실록에는 이미 1532년(중종27)에도 중종은 내의녀의 진맥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
당시 중종의 맥을 짚은 의녀가 대장금이었는지 아님 다른 의녀였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요즘 풍한증이 있구나. 맥을 짚은 의녀의 처방에 따라 약을 지어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 이때 치료된 왕의 병은 종기였다.
※가자(加資)하다: 벼슬이나 품계를 높여주다.
▶중종39년(1544) 1월 29일, 내의원 제조에게 감기약을 의논하라고 이르고… 전교하다.
: 정원에 전교하였다. “내가 접때 감기가 들어 해수증(咳嗽症)을 얻어서 오래 시사(視事)하지 못하였다. 조금 나아서 경연(經筵)을 열었더니, 그날 마침 추워서 전의 증세가 다시 일어났다.
의원(醫員) 박세거와 홍침 및 내의녀(內醫女) 대장금(大長今)과 은비(銀非) 등에게 약을 의논하라고 이미 하유(下諭)하였거니와, 이 뜻을 내의원 제조에게 이르라.
⇒ 기침감기가 나았는데, 다시 감기에 걸렸으니 의원들과 내의녀들이 협의해서 약을 지어 오너라!
⇨ 의원직에 항시 등장하던 하종해가 안보이고, 동지 계급이었던 박세거와 홍침이 의원으로 나온다.
▶중종39년(1544) 2월 9일, 내의원 제조와 의원, 의녀들에게 상을 내리다.
: 전교하였다. “내의원 제조 윤은보와 정순붕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하사하고, 도승지 이해, 의원 박세거와 홍침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유지번, 한순경에게는 아마(兒馬) 각 1필씩,
의녀 대장금(大長今)에게는 쌀과 콩을 도합 5석(石), 은비(銀非)에게는 쌀과 콩 3석을 하사하고 탕약 사령(湯藥使令)들에게는 관고(官庫)의 목면 2필씩을 지급하라.”
⇒ 재발되었던 기침감기가 10여일 만에 깨끗이 나으셨나보다. 이번에는 손이 좀 작아지셨네.
▶중종39년(1544) 10월 25일, 의녀와 의원이 왕의 병세에 대하여 말하다.
: 의정부·중추부·육조·한성부의 당상 및 대사헌 정순붕 등이 문안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날 의녀 장금(長今)이 나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상께서 삼경(三更)에 잠이 들었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들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고 했다.
박세거와 홍침이 들어가 진맥하니 왼손의 간신맥(肝腎脈)은 부(浮)하며 긴(緊)하고, 오른손의 맥은 가늘고 느렸다. 다시 약제(藥劑)를 의논하여 오령산(五苓散)에 마황(麻黃)·방기(防己)·원지(遠地)·빈랑(檳榔)·회향(茴香)을 첨가하여 다섯 차례 드렸다.
⇒ 이즈음 대장금은 대전에 머물면서 직접 임금의 증세를 돌봤다는 정황이다. 또한 처음 실록에 이름이 등장한지 이제 20년이 지났다.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내의녀가 되기까지는 처음 기본 초학의 3년, 간병의 3~ 5년을 잡아도 빨라야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내의녀로 선발될 수 있다.
내의녀가 되었어도 임금을 수발하는 어의녀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산정해 보면 최소 20대 중반이후가 되어야만 제대로 된 어의녀가 될 수 있으니, 실록의 기록들을 역으로 유추해 보면 훨 잘보인다.…
①20대 초반에 내의녀로 선발되다. (연산군 말기 또는 중종 초기)
②중종10년 3월, 내의녀 중에서도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아 왕비의 출산을 관장한 어의녀가 되다.
③중종19년 12월15일, “…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도록 하라!!” 이때 완벽한 어의녀가 되었다.
④중종39년 10월, 국왕의 주치의로써 어의녀 신분이 되었다. 대략 의녀생활 40년에 50대 중후반.
▶중종39년(1544) 10월 26일, 정원이 문안하자 병세에 대하여 답을 내리다.
: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정원이 문안하고 이어 아뢰기를…(前略) 전교하기를,
“알았다. 내 증세는 대체로 보아 조금 뜸한 듯하나 대변은 아직도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약을 의논하고 있다.” 하였다. 내의원 제조가 문안하니 전교하기를,
“내 증세는 여의(女醫)가 안다.” [여의 장금의 말이 ‘지난밤에 오령산을 달여 들였더니 두 번 복용하시고 삼경에 잠이 드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깐 통했으나 대변은 전과 같이 통하지 않아 오늘 아침 처음으로 밀정(蜜釘)을 썼습니다.’ 하였다.]…(後略)
▶중종39년(1544) 10월 29일, 상의 병환에 하기가 비로소 통하다.
: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정원이 문안을 드리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前略) 아침에 의녀 장금(長今)이 내전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하기(下氣)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약방에 전교하기를, “내가 지금은 하기가 평소와 같고 다만 기운만 약할 뿐이다. 지금 제조 및 의원과 의녀가 모두 왕래하고 있지만, 의원은 입직할 것이 없으며 제조도 각기 해산하여 돌아가라.” 하니, 제조가 회계하였다…(後略).
⇒ 이렇듯 대전에 계속 머물면서 長今이 임금의 증세를 계속 돌보고 있다. 그런데, 下氣가 통하여(흥분이 많이 가라앉아, 흥분이나 혈압이 정상?) 괜찮으니 이제부터 장금을 비롯한 의녀들만 있고, 나머지 의원들은 궁에서 머무르며 기다릴 필요 없고, 제조들도 다 돌아가거라! 이런 명을 내리신 것이다.
⇨ 이 내용으로 중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장금이나 의녀들의 진맥과 처방을 받아왔던 것이 입증된다. 그런 관계로 당시의 제조 및 의원들은 임금 및 장금에 대해 불만이 매우 많았을 것이다.
중종이 “남자의원들은 의녀(大長今)가 전하는 처방에 따라 약을 의논하라”고 지시하자, 노골적으로 임금에 대해 내의원 제조 홍언필이 불만을 터뜨린다.
“의녀가 들어가서 진맥한다지만 천박한 식견으로 어떻게 알겠습니까. 의원 박세거로 하여금 진맥하게 하소서.” 그러나 중종은 “증세를 봐가면서 의원(박세거) 진맥을 받겠다.”며 일축하고 말았다.
그리고, 11월이 되어서도 차도를 보이지 않으며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이후 ‘장금’, ‘대장금’이란 이름은 실록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면서 11월 7일, 제조가 문안하고 어의 3인(박세거, 홍침, 유지번) 중 박세거를 전담 주치의로 청하자 중종은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 주일이 지난 동짓달 보름날.
▶중종39년(1544) 11월 15일, 유시(酉時: 오후 6시 전후)에 상이 환경전 소침에서 凶하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史臣은 論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진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를 내치고 박빈(朴嬪)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 창경궁 환경전(왕, 왕비의 침전), 경춘전(대비전 또는 왕비처소)
이렇게 실록은 중종을 평하였고, 장금의 소식은 주상의 승하 보름 전을 마지막으로 ‘장금’이란 실명이 거론된 어떠한 흔적도 남긴 것 없이 실록 속에서 사라졌다.
또 하나, 진정 ‘대장금’은 중종만을 위한 전담 어의녀였던 것인가?
실록에 장경왕후의 인종 해산 때 호산하였던 기록은 나와 있지만, 중종이 자식을 얻은 두 분의 왕후와 9명의 후궁에서 모두 적2남 5녀, 서7남 6녀를 두었어도 처음 장경왕후가 경원대군(인종)을 출생하던 1515년 2월25일, “원자가 태어나다.” 단 한 줄 이외에는 실록에 그 어떤 왕자 및 공주, 옹주의 탄생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전무하다. 특히 장경왕후 승하 후 문정왕후가 새로 계비로 들어와 4녀 1남을 두면서 1534년 명종이 태어났을 때조차도 아무런 탄생에 대한 기록도, 분명 왕후를 호산하게한 어의녀들의 기록 역시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창경궁은 언제, 누가, 왜? 건립했을까?
: 창경궁은 조선왕조 10대 성종이 1485(성종10년)에 창덕궁 동편에 제대로 건립하였다.
본래 성종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소혜왕후(後 인수대비)의 차남으로 아비가 20세에 요절하자, 세조 차남이 예종으로 즉위한다. 예종이 즉위 14개월 만에 20세로 급서하니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신 정희왕후는 큰 며느리 한씨(後인수대비)와 협의하여 당시 실세인 한명회의 셋째 딸과 혼인 중이었던 왕위계승 서열 3위의 성종을 세 분이 작당을 하여 국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유인즉, 서열 1위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나이가 너무 어리고, 서열 2위 성종 친형인 월산대군은 몸이 병약하다는 이유였다. 이런 사정으로 즉위한 성종은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은 후 친정에 들어가면서 위로 여인들이 줄줄이다. 할마이 정희대왕대비(완공 전에 서거), 모친 인수대비, 숙모인 안순왕후까지, 세 여인들에게 후달리는 통에 국왕으로서 신하들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옳다!! 아주 예쁜 집을 지어 여인들을 모두 이사시키자~~ 이것이 유레카!! 해법이 나온 것이다.
처음 세종대왕이 부친 태종을 위해 지은 수강궁이 바로 옆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대대적으로 수리와 확장을 명하면서 이름까지 아주 예쁘게 ‘창경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요러한 사정 하에서 창경궁은 조선의 제대로 된 세 번 째 궁전으로 여인들을 위해 리빌딩된 궁궐이다.
주요 건물로는 ⇨ 창덕궁에서 비원으로 넘어가는 길목 우측으로 창경궁으로 연결된 함양문이 나온다.
함양문으로 들어서면서 우측 하단으로 통명전과 양화당이 동서로 나란히 위치하고, 그 앞으로 환경전과 경춘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 외 정전이 명정전과 숭문당, 함인정, 문정전 및 집복헌 등의 건물이 있고, 북쪽 숲에 창경궁을 세우신 성종의 태실이 있다.
①경춘전(景春殿): 인수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즉 대비전이다.
왕비의 처소로도 사용되었으며, 이 건물에서 정조와 헌종이 태어났고, 인현왕후와 혜경궁 홍씨가 이 건물에서 승하하셨다.
②환경전(歡慶殿):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중종, 사도세자가 이 건물에서 서거하였다.
③통명전(通明殿): 함양문으로 들어서면서 하단에 위치한 건물로 왕비의 침전이다.
경복궁, 창덕궁의 왕비 침전인 교태전, 대조전과 마찬가지로 건물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창경궁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숙종 때 인현왕후의 거처였다.
④양화당(養和堂): 왕과 왕비의 침전 또는 편전으로 사용된 건물로 통명전과 나란히하고 있다.
대비전으로 함께 사용되기도 하였던 곳으로 숙종 때 장희빈이 중전이 되었을 때 숙소였던 곳이다.
그러나, 장희빈의 숙소는 ‘취선당(就善堂)’으로 알려져 있고, 그 건물의 위치는 경춘전의 남쪽 잔디밭 부근으로 영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순조 때 복원할 때 취선당은 복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은 처음 성종 때 세 대비님을 위해 건립한 후 임진왜란 때 전소 된 것을 광해군 때 중건하였고,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인조 11년(1633)에 중수하였다.
순조 30년(1830)에 대화재가 일어나 대부분 소실된 것은 순조 34년(1834)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많은 전각이 헐리고 훼손, 변형된 채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을 1983년부터 본래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 了 -
첫댓글 아~정말로 여인의몸으로 어의녀가 되었었군요~~
드라마를 워낙 잼나게 봤었거든요~^^
조선의 왕들께서는
각자 캐릭터가 확연했던거 같아요~~^^
하이고...고생하셨습니다.하나님이시여~!!
오늘 아침 꼭 입어야겠다는 막내 옷 세탁기 돌리고 드라이시키느라 잠 못 자며 기다리는 중...반가운 글이...
근데 긴 글 샅샅이 읽었는데 중간 어디서 키득키득 몇번 웃었는데..딱 하나밖에..아니다 둘 기억난다.
또하나님 무쟈 마이 들러갔단 말이랑
중종 손 작아졌단 말이랑..ㅋㅋ
글구 하나님..저런 장금에 대한 내용은 이조실록에서 일일이 찾아내셨어요?? 헉스~
미달왕 중종도 어떤 면에서는 괜찮은?남자였을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얼핏 드는 이유는 뭐죠?ㅎㅎ
역사공부 참 재밌네유~~~~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