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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풍성한 열매를 구함
(빌립보서 4:15-19)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지난 시간에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능력 주시는 자라는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힌 뛰어내릴 수 없는 예수 안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역을 정해 놓으셨는데 그 영역이 십자가이다. 새는 공중이라는 영역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물고기는 물이라는 영역 안에서 물고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와 멍에를 같이 하고, 그에게 배우고 듣고 받은 바를 실행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운명 안에 내 운명이 있어서 그리스도와 내가 동일시된다는 말이다. 그래야 내가 그 안에 발견되고, 그가 나를 잡으신 그것을 잡으려고 또 쫓아가게 된다. 이런 삶을 살다 보면 주님과 동역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가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게 된다. 그 결과는, 과실이 풍성하게 열려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경작한 소출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광야에서는 은혜를 한없이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경작되어야 하나님께 소출을 드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시작과 끝이 있고, 씨를 뿌리는 때와 추수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목표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하나님을 창조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은 목표를 가지고 계시는 농부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농사를 지어서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해서 동산에 두었다. 당신의 목적을 아담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동산에 두시고 경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동산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인격적 영역을 말한다. 이 동산을 경작하라는 영광스러운 위임을 주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 위임을 소홀히 여김으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열매가 나오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같이 되어야겠다.'는 것은 하나님 목적과 전혀 다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길 원하고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열매가 나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반대로 자기의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작했다.
하나님은 완전한 생명이시지만, 그 생명을 경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경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할 때 능력이신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주 부분적이고 미미하게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경작되니까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셔서 받으실 만한 향기를 내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표현할 때 ‘쏟은 향기름’에 비유한다. 얼마나 하나님의 성품을 아름답게 경작했으면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했겠는가. 향기름 냄새를 맡으면 모든 사람이 그쪽으로 가게 된다. 예수님에게서 모든 사람을 살리는 과실이 열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격을 생산해내도록 우리 인생을 허락하셨다. 인격을 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생을 통하여 인격화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아버지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그런 예수를 본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인격화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는가? 하나님의 인격을 생산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 농장관리자로 위임하신 것이다. “이 땅을 경작하라. 너희의 환경 속에서, 너희의 인성 속에서 나의 인격을 경작하라.” 다시 말하면 "나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되게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만진 바라."고 말씀한 것은 결국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경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은혜는 베푸셨지만, 우리가 이렇게 누릴 수 있게 인격화되신 분은 아니었다. 우리가 가진 땅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각자 성격을 가지고 있고 성격이 다 다르다. 우리의 성격은 사람이 가진 첫 번째 환경이다. 사람의 성격이 다 다르다는 것은 땅의 종류가 다 다르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왜 똑같이 만들지 않으시고 그렇게 많은 종류의 성격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양하게 나타나셔야 되기 때문이다. 꽃밭에 꽃 하나만 피어있으면 단조로운데, 다양한 꽃이 피어있으면 풍성하고 아름답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각자 가지고 있는 성격이라는 토양을 통해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인격을 통하여 소출이 나올 때 맛과 색깔이 다 다르다. 사과도 지역마다 맛이 다르다. 대구사과, 풍기사과, 충주사과가 맛이 다 다르다. 인삼도 그 지역에 따라 성분에 차이가 난다. 우리의 타고난 성격 때문에, 각기 색다른 그리스도가 나온다. ‘나는 성격이 안 좋아, 나는 저런 성격을 가지고 싶다’ 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타고난 성격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경작하면 그 성격을 통하여 자기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열매를 낼 수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땅을 다룰 줄 알아야 농사를 잘 짓는다. 모래밭에는 벼를 심을 수 없다. 벼는 물이 빠지지 않는 진흙밭에 심어야 한다. 진흙밭, 모래밭, 황토밭에 심는 식물이 다르다. 제주처럼 자갈밭에 심는 식물이 있다. 지금 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귤은 육지보다 제주도라는 특이한 땅에서 잘 자란다. 옛날에는 제주도가 아주 가난했다. 그 땅에 심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땅에 합당한 식물을 심으니까, 우리나라에서 1천불 소득이 맨처음 달성된 곳이 되었다. 그 땅에 합당한 식물을 심어 농사짓는 사람이 아주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이다.
밭을 보면 농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 밭은 부지런한 농부가 경작하고 있구나! 잡초가 무성한 걸 보니 게으른 농부가 경작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땅이라도 농부에 따라서 좋은 땅이 될 수도 있고, 거친 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환경을 탓할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성격을 탓할 필요가 없다.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재배되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연을 날릴 때 바람이 필요하다. 바람이 없으면 아무리 연을 띄워도 연이 높이 뜰 수 없다. 돛단배는 바람을 이용해서 간다. 앞바람이든 옆바람이든 뒷바람이든 바람이 있어야 하는데, 바람이 없으면 돛단배가 나가지 못한다.
우리의 환경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너무 귀한 것이 된다. 어떤 환경도 그리스도를 재배하지 못할 환경은 없다. 병으로 죽어가는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생산하는 것을 본다. 최근에 대구에 최*출 형제가 5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 형제는 결혼생활에 실패해 이혼하고 자매는 제주도에 살고 있었는데 사이가 너무 안 좋았다. 그 형제가 췌장암에 걸려 2년을 살았는데 2년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이 깊이 발견되었다. 2년 동안 너무 아름답게 그리스도를 생산하는 삶을 살았다. 최근에 00형제의 이혼한 자매가 그 형제의 마지막 모습과 남겨진 열매를 본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기 안에 00형제가 살고 있다고 간증했다. 00형제는 인간적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열매가 나오니까 모든 사람을 살리게 되었다.
동산은 아담의 첫 번째 환경이었다.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인데, 아담은 이 기쁨의 동산을 잘못 경작하였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생명나무의 씨를 심어야 돠는데, 선악의 양식을 먹고 선악의 씨를 심어서 슬픔의 동산이 되었다. 그래서 아담 앞에는 엉겅퀴와 가시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동산보다 훨씬 못한 환경에 오셨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상황을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 표현할 만큼 빛이 전혀 없었다. 예수님이 와도 그 어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몰라봤다.
예수님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원치 않는 길을 가셨다. '왜 하필이면 당신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다. 초기에는 예수를 환영했지만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돌아섰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마저 돌아서고 말았다. 그런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인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생산했다. 사람의 원래 자리를 밝혀내셨다. 사람의 원래 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위임을 받아서 하나님을 인격화시키는 것이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인격화시키는 것이 사람이다! 이것을 나타내셨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씨가 되어, 그 씨가 30배 60배 100배가 되어 교회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앉아있는 것은, 주님이 이 척박한 땅에 오셔서 그리스도를 생산해내셨기 때문에 그 결과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복음15:1) 이 말은 나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아버지는 농장 주인이고, 아들은 일하는 농부라는 뜻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근원이라는 말이고, 나타나지 않고 감추어 계신다는 의미이다. 아버지인 나무의 뿌리는 감추어져 안 보이는 것과 같다. 아버지는 뿌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농부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복음15:5)라고 표현하셨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데, 뿌리에서 나무가 나온다. 근원은 뿌리인데 뿌리에서부터 진액을 받아서 나무는 가지를 키운다. 그래서 나무는 가지의 농부라고 할 수 있다. 가지는 나무의 공급을 받아서 또 열매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에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공급을 받으면 우리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열매가 맺히게 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이런 열매를 구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나님이 찾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열매를 구하시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열매를 드린 것이 아니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바로 열매가 없다는 이야기다. 인생에게서 하나님에게 드릴 열매가 없는 것이 인생의 저주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실 때에 무화과나무를 찾아갔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것과 똑같다. “이스라엘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에는 열매가 없었다. 그때가 무화과 열매를 맺는 철은 아니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열매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늘 배고프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넉 달만 기다려주십시오. 넉 달이 지나면 그때 제가 열매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우리 자신이 인생의 정확한 위치에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무엇을 만들어드린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항상 ‘좀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할 텐데, 사실 하나님은 무엇을 찾으시는가? 우리에게서 당신 자신의 작품을 보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인생의 정확한 위치에 있으면, 언제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실 때에 ‘하나님, 제가 당신이 지으신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 자리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그 말씀을 들으시고 얼마나 배불러 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지금 열매를 구하고 있다. 그 열매 자체가 세상이 구하는 열매와는 전혀 다르다. 옛날에 우리는 착각을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능력으로 출세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하고 소원을 성취하고, 그것이 열매인 줄 생각했다. 지금도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새벽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만약에 자기 소원과 목적이 없다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할까? 특히 입시철이 되면 제일 많이 기도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열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세상이 필요한 열매를 구하고 있다. 내가 그런 열매를 구하고 있다면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인격을 찾고 계신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열매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갈라지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에 와서도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교회에 잘 사는 분들도 있고 좋은 집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고 건강한 분들이 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그런 것을 부러워한다면 바로 세상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열매를 원하고 있는가? 하나님 자신을 인격화하는 그 사람을 원하고 있고, 그 열매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출세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디에 배고파 하시는지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오직 한 가지 열매만 취하신다.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만을 소망하시는 것이다.
지금 유대인들을 보면 미국의 경제와 정치를 좌우하고 있다. 사실은 세계의 경제와 정치를 좌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머리가 영특할 뿐만 아니라,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인 교육법은 사람들이 다들 배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가진 그들은 세계 인구의 0.1%밖에 안되는데도 노벨 수상자의 15%를 차지할 만큼 놀라운 민족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찾으시겠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오직 한 가지만 구하신다.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에게 구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과 세상이 찾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과 세상이 찾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 확실하게 갈라져야 우리는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맨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를 보면 식물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 동물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고 하셨다. '좋았더라'는 말씀이 계속 나온다. 무엇을 보고 '좋았더라'고 하신 것인가? 바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그 형상이 부분적으로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식물을 보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조금 알 수 있다. 동물을 봐도 알 수 있고 해와 달과 별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난 뒤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이것은 바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 하나님을 인격화시킬 수 있는 그것이 나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는 무엇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리스도 밖에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자신을 인격화하는 그리스도를 거두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면, 이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할 자가 아무도 없다. 동물이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겠는가? 식물이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겠는가? 우리 인생이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가장 존귀한 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생이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시켜드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소원인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우주 가운데 가장 소중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바로 이 열매를 구하고 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연보하는 것으로 굉장히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바울은 그 연보를 보면서 빌립보 교회가 나에게 그리스도를 주는 것이구나! 과실을 주시는 것이구나! 이렇게 알았다는 것이다. 그 연보는 그리스도 교회 형제들이 경작을 해서 과실이 풍성하니까 자기에게 과실을 주는 것으로 바울은 알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심었기 때문에, 자기가 심은 그리스도가 열매가 되어서, 바울을 돕는 연보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었지만 바울에게는 그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 형제들의 열매로 보인 것이다. 이번 여름집회 때 목사님께서 우리 서울교회를 보시고 너무 기뻐하셨다. 그렇게 화답하시고 좋아하시는 모습을 옛날에는 잘 못 본 것 같다.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당신 자신이 그 씨를 심었기 때문에, 그 씨가 서울이라는 토양에서 자라서 열매가 되어 나타나니까 너무나 좋아하신 것이다.
농부는 그 열매 하나를 보고 1년간 땀을 흘린다. 열매가 나오면 1년간 수고한 것이 전부 다 기쁨으로 바꾸어진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자기 자신을 주었기 때문에, 사실은 자기 자신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누구에게 우리 자신을 심는다. 우리 자신을 심으면, 심은 것이 나온다.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있고, 안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 자식농사라는 말이 있다. 자식농사는 아버지가 씨를 심어서 아버지가 길렀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자식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부끄러운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나는 이 시간을 빌어서 어린아이를 기르고 있는 우리 청년부 형제들에게 정말 당부하고 싶다. 아이들이 커서 머리가 굵어지면 하나님 말씀을 심을 수가 없다. 잘 들어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계속 심어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자기에게 너무나 좋은 것이 되어야 되고, 아빠로부터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알아야 된다. 어릴 때부터 맛에 길들여져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간장 맛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어릴 때부터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맛에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야 아이들이 그 안에서 성장하게 된다. 이것이 자식농사다.
아내농사, 아내는 남편의 결과다. 남편이 어떤 농사를 지었는가에 따라서 아내는 그런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지 않은가. 교회농사, 교회는 목회자의 농사 아닌가. 내가 알고 있는 한 목사님은 자기가 개척해서 그 교회를 농사지었는데, 70이 다 되어 은퇴하게 되어 교인들이 자기에게 너무 섭섭하게 대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목회자가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서 성도들이 목사님에 대한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목사님은 농사를 너무 잘 지으셨다.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우리 목사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왜 그런가? 농사를 잘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심어서 하나님 아들을 거두시는 분이다. 그 열매를 보면 자기가 심은 것인지 아닌지 금방 안다. 나는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왔다, 금방 안다. 팥이 나온 것은 농부의 기쁨이 될 수 없다. 자기가 심은 것이 나와야 기쁨이 될 수 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자기가 심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거둬지는 것을 보고 자기가 낳은 아들임을 금방 아신다. 교회를 보시고 이것이 내가 심은 것인지 아닌지를 금방 아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로 오시겠는가? 예수님은 자기 신부에게 오신다. 예수님이 아무 데나 오시지 않는다. 신랑이니까 자기 신부에게 오시지 않겠는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신부로, 주님 자신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기의 신부에게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이 말씀을 하고 싶어 하셨겠는가! 그 생각이 들었다.
이 씨는 언제 뿌렸는가? 아브라함에게 뿌린 씨다. 또 아브라함이 그 씨를 뿌려서 이삭이 나오고, 이삭이 또 그 씨를 뿌려서 야곱이 나오고 그후에도 씨를 계속 뿌리셨다. 하나님은 완전한 열매, 즉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인격화할 수 있는 열매를 기다리신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였지만,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구약에서는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니까, 바로 그 아들을 보고 이것이 내가 그렇게 바라던 열매구나! 보시기에 심히 좋다! 하고 너무너무 기뻐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심히 좋다'라는 이 말을 듣는 것은 인생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도 이제 이 말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씨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씨는 완성되었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수천 년을 통하여 씨가 완성되었다. 그 씨가 땅에 떨어져서 똑같은 열매가 나와야, 그게 진짜 씨다. 예수님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양육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내가 어떤 씨를 뿌렸는데 그 씨로 말미암아 나와 똑같은 생명이 나오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빌립보교회는 이렇게 양육되어서 바울의 괴로움에 참예했다. 이 말은 바울과 한 마음으로 동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바울은 감옥에 있고 빌립보 교회는 밖에 있어 멀리 떨어져있지만, 감옥에 있는 바울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바울이 그렇게 살고 싶어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그것이 빌립보 교회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런 자리에 있으면 주님이 우리를 보시고 얼마나 좋아하시고 안심하시겠는가? ‘네가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그렇게 하신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는가? 빌립보 교회는 이렇게 자기 자신의 열매를 바울에게 드린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것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바울의 쓸 것을 공급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고통은 그리스도로 인한 고통이었다. 바울은 자기 문제로 고통하는 사람이 아니다. 복음을 인하여 바울은 많은 고통을 당했다. 동족으로부터 오는 고통, 이방인으로부터 오는 고통,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당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환난을 당했다. 빌립보 교회는 그런 바울의 고통에 참예하길 원했다. 바울의 고통에 참예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예한 것이다.
우리 목사님의 소원이 무엇인가? 목사님의 생활 반경은 제한되어 있다. 바깥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당신을 대신해서 우리가 살아주길 원하는 것, 그것이 목사님의 소원이다. '네가 내 발이 되어다오. 네가 내 손이 되어다오. 네가 내 마음이 되어다오.' 이것이 목사님의 소원이다. 우리가 이렇게 목사님의 소원에 참예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소원에 참예하는 것이 된다.
이*규 아버님께서 아프리카에 가신 것은 자기 문제로 가신 것이 아니다. 연세도 많으시고 자기 몸을 위하여 살아도 시간이 아까우신 분인데, 자기 몸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복음을 위하여 가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인지 모르겠다. 내 앞에 이런 본이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우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예하는 것은 복음에 참예하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예하는 것과 복음에 참예하는 것이 있다. 복음에 참예하는 일은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복음을 위한 일에 참예한다는 것은 그분이 싸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헌금을 하고 위로를 하고 격려를 하는 그런 것이다. 옛날에 국군 아저씨께 위문편지를 많이 보냈었다. 내가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싸우는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참예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참예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참예한 사람이다. 1990년부터 2012년까지 미주와 일본과 중국에 계속 순회를 다녔는데, 그때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다니지 않았다. 형제들이 다 헌금을 해서 그 돈으로 순회를 다녔다. 김*근 형제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김*근 형제에게 어머님이 모은 돈을 주셨다. 그래서 상* 형제가 그 돈을 어디에 쓸 건지 여쭤 보니까, 꼭 필요한 데 쓰라고 하셨다. 그때 우리가 지방순회를 다니는데 차가 매우 낡았는데, 상*형제가 어머니께서 주신 돈으로 차를 사서 그 차로 지방순회를 다녔고, 24만km를 뛰었다. 지구 몇 바퀴를 돈 것과 같다.
복음에 참예하는 사람과 복음을 위하는 일에 참예하는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돕겠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돕는 것이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다. 목사님은 '나는 돈이 많이 필요해.'라고 하신다. 목사님 자신을 위해 쓰시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복음을, 이 최종적인 복음을, 이 영원한 복음을, 온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목사님은 우리 교회에 방송국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계신다. CBS, CTS 방송국과 같은 방송국을 우리도 세워서 세계 곳곳에 이 복음을 전파하길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둘이 아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못 보면 영원히 아버지를 못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오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들을 따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다. 아들을 돕는 것이 아버지를 돕는 것이다.
아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복음을 위하여 핍박받는 것은 사실은 내가 핍박당하는 것이다. 그 형제가 영광을 받았다면 그것은 곧 내가 영광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몸이다. 손이 하는 것은 곧 발이 하는 것이고, 발이 하는 것은 곧 손이 하는 것이다. 손의 목적과 발의 목적이 다르지 않다. 손의 영광과 발의 영광이 다르지 않다. 손이 핍박받는 것은 발이 핍박받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아! 이것이 하나구나! 이것을 알게 된다. 형제가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핍박을 받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비난받고 있는 것인지, 나의 어떠함 때문에 비난받고 있는 것인지를 우리가 구별한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참예한 사람이다. 참예란 말은 자기의 전 존재를 던졌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이 그러하듯이 우리에게도 전 존재를 그리스도에게 던지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었다. 그리스도가 향기로운 제물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참예한 사람은 모두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 진실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진실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사시는 그 모습이 나에게 좋게 보이면, 나도 사실은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앞장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따라가는 것이다. 승리자를 따라가면 나도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패배자를 따라가면 그 사람도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가다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구나! 처음에 따를 때는 나도 몰랐다. 따르다 보니까 아! 이 길밖에 없구나! 이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 이외에는 인생의 길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구나! 어린양이 어린양을 따르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참예하겠는가? 마음이 하나일 때, 생명이 하나일 때, 운명이 하나일 때 참예하게 된다.
처음에 따를 때는 내 운명을 몰랐다. 그런데 따르다 보니까 내 운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구나! 내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구나! 그것을 알게 되니까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와 내가 한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가 아니면 교회에 참예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그냥 남의 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교회에 와도 손님처럼 오는 분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가 자기 일이고, 자기 자신과 교회가 분리가 안 된다. 교회가 잘 되고 교회가 풍성하게 되길 원하는 것은 교회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교회만이 교회에 참예할 수 있다.
교회에 참예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참예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 참예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참예하는 것이다. 뿌리이신 하나님에게 참예하는 것이 아들이다. 아들에게 참예하는 것이 교회다. 교회에게 참예하는 것이 지체다. 그렇게 되다 보니 지체의 마지막에 무엇이 열리는가?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에 청년부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열려서 온 교회가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뿌리에서 내려온 것이 계속 이어져서, 청년부 형제들이 바로 가지에 참예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선악과을 먹은 아담의 열매를 보면 너무 슬픈 열매였다. 아!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셨을 때 그렇게 심히 좋아하셨는데, 동산을 쫒겨나가는 그 아담의 뒷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셨겠는가! 우리의 본성이 바뀌지 아니하면, 향기로운 것을 내려고 해도 결국 사탄을 돕는 결과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나온 아담은 결국 무엇을 내었는가? 가인, 네피림, 바벨을 생산하고 말았다. 이 얼마나 슬픈 역사인가? 그래서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하다. 이 변화는 끝나는 것이다. 죽고 다시 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마음이 있으면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다 보면 처음에는 변화가 절실하지 않다. 저 멀리 있는 사람은 변화가 절실하지 않다. 그런데 주님을 바짝 따르는 사람은 아! 내가 끝나야 될 사람이구나! 내가 죽고 다시 나야 될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살아야 이런 갈망이 생기지, 밖에 있으면 이런 갈망이 안 생긴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다 보면, 우리는 이런 갈망이 생기고 점점 더 십자가 안으로 가게 된다. 처음부터 십자가 안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가다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저 자리가 하나님이 완전하게 표현되는 자리이고,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자리인 것을 알게 된다.
목사님이 말씀하실 때에 '또 십자가 말씀입니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열매를 생산해내려면, 바로 이 자리가 아니면 열매를 생산이 안 되는 것이다. 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젊었을 때 정말 주님을 위하여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대학교 4학년 때가 제일 비참했다. 4년을 주님만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내 주위에 아무도 없고 바로 내 앞의 인생 문제가 해결이 안되어 너무너무 답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무얼 드렸는가? 하나님이 원하는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고, 돼지머리를 드린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소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소원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돼지머리를 드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르지 않다. 돌감나무는 아무리 주인을 위하여 좋은 열매를 내려고 해도 돌감밖에는 낼 수가 없다. 잘려져서 단감 나무에 접붙여져야 단감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 안에서 만나기를 원하시는가? 그 자리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데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만나기 위해 십자가로 오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는 것이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주님를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실족하고 말았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면서도 십자가 밑으로 데려가신 것이다. 자기가 뛰어 내리지 못하는 인생임을 확실하게 베드로의 두 눈으로 보게 하신 것이다. 거기서 베드로의 모든 인생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해체된 사람을 봐야 내가 해체가 되지, 해체된 사람을 보기 전에는 내 인생이 해체가 안 된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인생이 완전히 해체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게 된 사실이 십자가다. 거기서 하나님이 다시 새창조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데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를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요21:18)라고 했다. 이 말은 죽고 다시 사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아버지에게 참예하려면 온전히 아들이어야만 아버지에게 참예할 수 있고, 주인에게 참예하려면 온전히 종이어야 주인에게 참예할 수 있고, 교회에 참예하려면 온전히 지체라야만 교회에 참예할 수 있다.
아들, 종, 지체는 무엇인가? 죽고 다시 나온 사람을 말한다. 빌립보교회는 바울과 그 사역에 참예했다. 그래서 풍성한 열매을 맺게 되었고, 그 풍성한 열매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관계를 보면, 바울은 나무고 빌립보 교회는 가지다. 나무의 공급을 받아서 빌립보교회는 아름다운 열매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우리가 이제 한 몸의 지체가 되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영광을 받는다. 우리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다. 밖에 독립해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다. 그렇게 될 수 없다.
나도 세상에 나가서 살 수 있을 줄 생각했는데,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사람으로 백기를 들고 돌아온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성장할수록 몸 안에 깊이 참예하게 된다.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의 성장은 홀로서기를 잘 하는 것이 성장이다. '나는 혼자 잘 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혼자 잘 살 수 있다. 혼자 모든 문제를 다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성장이다. 그런데 정말 성숙한 사람은 무엇인가?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부품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완성이 아니다. 그 부품들은 마지막 자동차 조립공장에 와야 된다. 그 부품들이 자동차 안에 들어가야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완성차가 아니다. 우리는 전부 다 부품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체로 어디에 쓰여질지 모른다. 그런데 부품들이 자동차 조립 공장에 들어가면, 삼만 개의 부품들은 각각 자기 자리가 있다. 자동차를 완성하는 데 단 한 개의 부품도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그런 자리가 된다. 이것이 인생의 자리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장할수록 우리는 지체가 되는 것이다. 몸을 떠나면 나는 죽는 것이구나! 몸을 떠나면 나는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구나! 이것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부품은 죽고 자동차가 완성되는 것이다. 부품의 이름은 없어지고, 자동차의 이름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자동차를 보고 부품의 이름을 말하는가? k5, 이것은 부품이 아니고 자동차 이름이다.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목표는 교회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인간으로 참예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풍성한 과일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다. 그래서 우리가 뿌리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공급해서 나무가 되게 하시는데 이것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공급해서 교회가 되게 하는데 이것이 가지다. 그 가지 끝에서 또 수많은 가지가 사방으로 퍼진다. 여기에 열매가 달려서 한 나무가 온 열매로 가득한 나무가 된다면, 뿌리이신 하나님, 나무이신 그리스도가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이런 목표로 부름을 받았다.
나는 우리 서울교회를 보면서 풍성한 열매가 갈수록 더해지는 모습을 본다. 작년보다 올해가 휠씬 낫다. 우리교회가 점점 더 풍성해지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우리가 기쁜 것은 하나님이 기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처럼 "서울 교회야,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우리에게 부르시는 것은 풍성한 열매를 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이 이 시간을 통하여 깊이 알게 되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당신 자신이 인격화되셔서, 보고 듣고 누리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 되시기를 얼마나 갈망하셨습니까! 이 갈망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셨고, 이제 오늘 우리가 이 위임을 받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그 소원이 무엇인지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인격화시키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하여 나오는, 당신의 소원을 우리가 이루어드리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