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시험해도 되는가?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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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험의 의미
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가?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출 17:2, 민 14:22, 시 78:18, 시 106:14, 사 7:12, 행 5:9, 히 3:9 등에서)고 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시험을 당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개역 성경의 말라기 3:10에서만은 유일하게 '하나님을 시험하라'라는 말이 나온다.
특히 이 구절은 성도의 헌금 생활과 십일조 생활을 강조할 때 많이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과연 십일조를 드릴 때만큼은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셨을까?
'나를 시험하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우베하누니( )란 말은 불분리 접속사인 우( )와 '증명하다'라는 뜻의 동사 바한( )과 '나를'이라는 뜻의 목적격 접미 대명사 에니( )가 한데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 여기서 개역 성경이 시험하다라고 번역한 바한이라는 말의 원 뜻은 '증명하다(Prove)'이다.
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할 때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어진 히브리어 나싸( )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나싸는 헬라어 페이라조( )와 같이 글자 그대로 '시험하다(Test, Tempt)'의 뜻이지만 바한은 '마음의 상태를 증명하다(Prove)'라는 뜻으로 헬라어로는 도키마조( )라고 한다. 영어 성경은 두 단어를 정확히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으나 우리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증명한다라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 인간의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그 상태를 증명해 보인다는 뜻이다. 신약에서 헬라어 도키마조는 이에 대한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그 사용된 용례를 보면 고후 13:3의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하는 말씀에서 '확증하라'로 번역된 것과 엡 5:10의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라는 말씀에서 '시험하여 보라'가 그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결국 자신의 상태를 자기 스스로 입증하고 확인하여 보라는 뜻이다. 이상을 토대로 말 3:10의 원문을 다시 해석하면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기를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나의)창고에 가져와서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함으로써 (너희의)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내 앞에서) 너희의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 그리하면 내가 하늘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부어주되 결단코 닳아 없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부어주지 않겠는가?"가 된다.
한편 십일조는 히브리어로는 마아세르( )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아포데카토오( )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는 나의 소득 중에서 정확히 십분의 일을 떼어내어 교회에 바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생명을 비롯하여 자식과 모든 소유)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하되, 단지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친 것으로 간주하여 주신다라는 뜻이다.
나) 시험의 이중적 의미
마 6:13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내용 중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말씀이 있고 마 26:41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는 말씀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볼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 어떤 종류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 하셨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시험에 대하여 다른 태도를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다. 약 1:2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의 말씀과 벧전 1:6-7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의 말씀을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과 상치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말씀들은 시험에 들지 않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시험을 만나는 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으로조차 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시험에 대하여 가르치신 내용과 제자들이 시험에 대하여 생각하고 태도를 과연 서로 다른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시험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알아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시험은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 )인데 위의 두 가지 의미가 다른 경우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어느 나라 말이든지 기본적인 어휘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는 반면 사상과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어휘를 계속 증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성경 원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리인데, 제한된 어휘로 필요한 사상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므로 한 단어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마련이다. 이는 사상의 발전에 비례하여 무한정으로 어휘를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어느 나라 말에서나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시험 즉 페이라스모스 역시 한가지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해 볼수 있다. 페이라스모스는 두 가지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첫 째 의미는 징계 또는 훈련을 뜻하는 파이데이아( )이며, 또 다른 의미는 유혹 또는 미혹을 뜻하는 아파테( )이다. 페이라스모스가 이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그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파이데이아 시험은 영어로 Trial에 해당하는 시험으로서 히 12:11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는 말씀대로 시험을 통해 신자의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시험을 통과했을 때 신자의 진실성이 드러나 결국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게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히 11:17에서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라는 말씀은 시험을 통해 신자의 순종을 확인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상태를 모르고 계시기 때문에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질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행위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순종함을 증명토록 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신앙에 더욱 확신하며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험인 아파테의 시험이 바로 우리가 빠져서는 안되는 미혹의 시험이며 이는 영어로는 Temptation이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아파테의 시험은 계 2:2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라고 하신 것처럼 성도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속에는 미혹한 생각이 늘 자리 잡고 있어서 마귀의 유혹에 이끌려 결국 그 본 바탕인 거짓이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시험인 것이다. 이러한 시험에 빠지면 하나님을 버리고 배도하며 결국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으로 진실된 신자라면 이러한 시험에는 들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마 6:13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말씀에 대하여서는 잠시 헬라어의 특수한 문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마옵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에이세넹케스( )는 가정법, 과거시제, 능동태의 어법이다. 이는 '인도하다'라는 뜻의 에이스페로( )동사에서 변화 되었는데, 이와 같이 동사의 과거 변화시에 어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제2 과거'라고 한다. 한편 헬라어에서 가정법 과거 시제가 부정(否定)의 뜻을 가진 부사(불변사라고도 함)인 메( )와 함께 사용되면 명령법 과거와 동일한 용법으로 해석하여 단회적인 '강한 부정적 소원'을 나타내게 된다.
따라서 마 6:13에서 사용된 가정법 과거는 주기도문에서 계속 나타나는 명령법 과거 용법과 마찬가지로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확신에 찬 고백의 내용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이미 시험에서 건짐 받은 상태로 이루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기도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에 시험을 이기셨으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모두를 여기에 동참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시험에 이긴 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 이미 아파테의 시험에 승리하신 것과 이 승리에 우리가 동참하여 같이 승리함을 확신하며 살아야지 아파테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조바심 내거나 불안에 떨면서 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마귀는 집요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아파테의 시험으로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방심해서는 절대 안되며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아파테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늘 기도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미 시험을 이기게 해주신 것을 확신하며 그런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한편 파이데이아의 시험은 우리에게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파이데이아( )란 말은 '어린 아이'라는 말인 파이디온( )에서 유래하였는데, 아이가 성장하여 장성한 자가 되는데 필요한 과정으로서의 훈련을 일컫는 말이 발전하여 징계라는 말로 된 것이다. 히 12:5-11에서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는 말씀대로 징계는 결국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더욱 자라게 하기 위하여 사랑의 매로 사용하시는 것으로서 이것은 당시에는 괴롭고 힘들게 여겨지나 그 목적과 의도를 아는 자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약 1:12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라는 말씀과 벧전 1:7에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에서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