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이셨던 나의 부모님은 늘 '커서 농사꾼은 되지 마라'라고 가르치셨다. 부모님의 그런 조언이 없다 해도 뜨거운 여름날에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밭에서 웅크리고 일을 해야 하는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대학진학을 앞둔 고등학교 시절, 나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일하는 사람'이 되기만을 원했다. 주변 어른이나 선생님들도 나의 꿈이나 적성을 묻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안정되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군이 언급되고 찬양될 뿐이었다.
대학을 선택할 때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것은 '내 점수로 갈 수 있는 곳인가'였지 '내가 어떤 적성을 가졌고 뭘 좋아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적성 따위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지역대학의 영문과에 '영문'도 모르고 입학을 했다. 내가 20년째 일하는 교사라는 직업도 솔직히 '적성을 고려한 진로 찾기'의 소산이기보다는 '어쩌다보니' 가지게 된 경우에 더 가깝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함이 역력했던 초임교사 시절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의 십계>을 접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누구나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은 가지기 마련이지만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직업 선택의 십계>를 따르도록 훈육되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힘들고 돈 안되는 농사는 절대 짓지 말아라'라는 분위기와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네가 좋아하고 보람 있다면 농사꾼이 되어봐라'라는 가르침은 큰 차이가 있지 않는가?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의 십계명'이 어떻게 현실 세계의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되짚어 보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거창고등학교는 애초에 '겨울철 토끼잡이'로 대표되는 인성교육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인성교육이란 용어만 있을 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학교가 드물었던 당시라 거창고등학교는 전국의 학교관계자가 한번쯤은 순례를 해야 할 성지로 부각되었다.
당시 큰 화제가 되었고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의 주제이기도 한 '직업 선택의 십계'으로 다시 넘어가보자. 좋은 말이고, 존경스러운 태도이긴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제자나 자식들에게 저 길을 걸으라고 권한 교사와 부모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학문의 장인지 취업훈련소인지 분간이 힘든 대학, 오로지 수치적인 성과로만 학교를 평가하는 교육행정기관, 어쩌면 적성을 따지는 것이 사치로 여겨질 수 있는 절박한 취업준비생에게 '직업 선택의 십계'를 권하는 것은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거창고 재학생이나 졸업생 그 누구라도 선뜻 '십계'를 준수하며 살겠다고 맹세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거창고 학생조차도 '십계'가 적힌 액자를 벽에서 바닥으로 내팽개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본능적으로 더 안락한 삶을 지향하기 마련인 사람이 무턱대고 따라갈 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직업 선택 십계명'이 단지 구호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다. 거창고 아이들에게 스며든 '직업 선택 십계명'은 어느새 그들의 자랑이 되어 있었다. 거고인(거창고 졸업생) 건축가가 세운 다리는 무너지지 않고, 거고인 의사는 사람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거고인 판사가 내린 판결은 믿을 수 있고, 거고인 관리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자부심은 역시 '직업십계명'으로 무장된 교육의 힘이라고 거창고 아이들은 믿는다.
거창고 아이들이 원칙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돈을 좀 더 많이 벌고, 출세가 빠른 길을 애써 쫓지 않고 바른 길을 가려는 태도가 몸에 배게 된 비결은 거창고 교사의 솔선수범이 주효했다. '직업 선택의 십계'의 주인공인 전영창 전 거창고등학교 교장이 우선 대학의 부학장 자리를 마다하고 폐교 직전의 시골학교인 거창고등학교 부임한 자체만 봐도 그 자신이 <직업 선택의 십계>에 충실한 삶을 산 분이었다. 그뿐인가? 군사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미운털이 박혀 폐교에 버금가는 제재를 받고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학교를 지켜냈다.
최근 학교교육에서 중요시되는 '진로 및 직업교육'의 밑바탕에는 수십 년 전의 거창고등학교식 직업교육이 자리 잡고 있다. 모두가 '서울대 입학하기'에 골몰할 때 그나마 '직업 선택의 십계'를 액자에 담아 학생들에게 주지를 시키려고 노력했던 거창고등학교의 선견지명이 지금의 진로 및 직업교육에 큰 힘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은 자식을 특목고에 보내기 위해서 고분분투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주부인 저자 강현정이 '직업 십계명'을 정리한 거창고 전성은 교장의 설명과 추천대로 '직업 십계명'을 충실히 따르면서 살아가는 거창고 졸업생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삶을 되짚는 작업이다.
더 나은 대우를 마다하고 시베리아 호랑이 촬영에 빠져서 '월급이 더 적은 쪽'을 택하고, 평생을 시골에서 평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한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를 걷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적 존경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농부가 된 사연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낸다.
이 책에서 소개한 거창고 '동문회' 모임에 참석한 졸업생들의 '증언'들이야말로 '직업 십계명'이 실제로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잘 알 수 있게 한다. 졸업생들조차도 '직업 십계명'은 현실 사회에서 따르기 힘들고 무엇보다도 자식들에게 그 내용을 지키라고 권할 자신이 없다고 토로한다. 거창의 다른 고등학교에 비해 큰 부자가 된 동창생이 턱없이 적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는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출세와 부를 쫓기보다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직업 십계명'이 자신들의 마음속에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출세가 보장된 길을 스스로 버리고 오직 자신의 신념과 흥미에 맞는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거창고 아이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자식이 나은 사람보다는 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도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박균호,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첫댓글 20대의 아들의 직업에 대해 생각이 많았는데 많은 참고가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