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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2권
8.3.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3]
8.3.2. 첫 번째 네 개조를 수행하는 방법(2)
[마음에 잡도리하는 방법 열 가지]
189. 여기서 마음에 잡도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헤아림, 연결, 닿음, 안주함, 주시
환멸, 두루청정함, 그들을 되돌아봄
여기서
① 헤아림(gaṇanā)이란 단지 헤아리는 것이다.
② 연결(anubandhanā)이란 쫓아감이다.
③ 닿음(phusanā)이란 닿는 곳이다.
④ 안주함(ṭhapanā)이란 본삼매이다.
⑤ 주시(sallakkhaṇa)란 위빳사나이다.
⑥ 환멸(vivaṭṭanā)이란 도다.
⑦ 두루 청정함(pāṭipassanā)이란 반조다.
(1) 헤아림
190.
[① 헤아림(gaṇanā)]:
초심자인 선남자는 처음에 헤아림으로 이 명상주제를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헤아릴 때 다섯이 되기 전에 멈추어서는 안된다.
열 번을 넘겨서도 안된다.
중간에 헤아리는 것을 흩뜨려서도 안된다.
다섯이 되기 전에 멈출 때 [다섯도 안되는 그 숫자의] 좁은 범위에서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가 흥분하기 때문이다.
마치 비좁은 우리에 가두어 둔 소 떼처럼.
열 번이 넘을 때 마음과 마음부수는 [호흡 대신] 헤아리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
중간에 헤아리는 것을 흩뜨릴 때 명상주제가 정점에 달했는지 아닌지 마음이 어수선하다.
그러므로 이 결점들을 피하고 헤아려야 한다.
191. 헤아릴 때 처음에는 천천히 헤아려야 한다.
마치 곡식을 되는 사람이 헤아리는 것처럼. 곡식을 되는 사람은 되를 채우고는 ‘하나’라고 말하면서 붓는다.
다시 채우면서 작은 티끌이라도 보면 그것을 가려내면서 ‘하~나라고 말한다.
이 방법은 ‘두~울’ 등에도 적용된다.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서 드러나는 것을 잡고서 ‘하~나’라고 시작하여 열 번에 이를 때까지 일어나는 대로 [계속해서] 그것을 주시하면서 헤아려야 한다.
192. 그가 이와 같이 헤아릴 때 들어오고 나가는 들숨날숨이 분명해진다.
이처럼 [분명해지면] 그는 곡식을 되는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은 천천히 헤아림을 버리고, 목동이 하는 것처럼 빨리 헤아려야 한다.
영리한 목동은 작은 돌을 그의 호주머니에 넣고 채찍을 손에 들고 아침에 소우리로 가서 소의 등을 때려 문간의 기둥에 앉아 문으로 나오는 소마다 하나 둘 하면서 작은 돌을 던지면서 헤아린다.
밤의 삼경을 비좁은 공간에서 불편하게 지냈던 소 떼들은 나오면서 서로서로 밀어 제치면서 급히 무더기로 나온다.
그는 급히 셋, 넷, 다섯, 열 까지 헤아린다.
이와 같이 그가 앞서 설한[빨리 헤아리는] 방법으로 헤아릴 때 들숨과 날숨이 분명해져서 빨리빨리 반복해서 움직인다.
193. 그때 그들이 반복해서 움직인다고 알고서는 안과 밖을 취하지 말고,
오직 그들이 도달하는 [콧구멍의] 문에 닿은 것만을 취하여,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 여덟, … 아홉, … 열’하면서 빨리빨리 헤아려야 한다.
명상주제가 헤아림과 연결되어있을 때 헤아리는 힘으로 마음이 하나가 된다. 마치 키의 도움으로 격류에서 배가 머무는 것처럼.
194. 그가 이와 같이 빨리빨리 반복해서 헤아릴 때 명상주제가 끊임없는 진행(pavatta)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끊임없는 진행이라 알고서 [몸의] 안과 밖의 바람을 파악하지 말고 앞서 설한 방법대로 빨리 헤아려야 한다.
들어가는 바람과 함께 마음을 안으로 가져갈 때 [그 부분이] 안의 바람에 의해 타격을 받고 굳기름이 가득 차는 것처럼 느껴진다.
밖으로 나가는 바람과 함께 마음을 밖으로 가져갈 때 갖가지 대상에 마음이 흩어진다.
숨이 닿는 부분에 마음챙김을 두고 닦을 때 그의 수행은 성취된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의] 안과 밖의 바람을 파악하지 말고 오직 앞서 설한 방법대로 빨리 헤아려야 한다’라고 했다.
195. 그러면 얼마동안 이것을 헤아려야 하는가?
헤아림이 없이도 들숨날숨이라는 그 대상에 마음챙김이 확립될 때까지이다. 왜냐하면 밖으로 흩어진 생각을 끊고 오직 들숨날숨이라는 그 대상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기 위해 헤아림을 하기 때문이다.
(2) 연결
196.
[② 연결(anubandhana)]:
이와 같이 헤아림으로 마음에 잡도리한 뒤 연결로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연결이란 헤아림을 내려놓은 뒤, 마음챙김으로 끊임없이 들숨날숨을 쫓아감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따라감이 아니다.
197. 배꼽은 나가는 바람의 시작이고 심장은 중간이고 코끝은 마지막이다.
코 끝은 들어오는 바람의 시작이고 심장은 중간이고 배꼽은 마지막이다.
그가 그 [호흡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따라갈 때 그의 마음은 흩어지고 불편하고 동요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들숨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마음챙김과 함께 따라갈 때 안으로 그의 마음이 흩어져 몸과 마음이 모두 불편하고 동요하고 떨린다.
날숨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마음챙김과 함께 따라갈 때 밖으로 그의 마음이 흩어져 몸과 마음이 모두 불편하고 동요하고 떨린다.(Ps.i. 165)”
(3) 닿음, (4) 안주함
[③ 닿음(plusanā), ④ 안주함(ṭhapanā)]:
그러므로 연결로마음에 잡도리할 때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으로 마음에 잡도리해서는 안된다. 대신에 닿음과 안주함으로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198. 연결과 다른 별개의 헤아림으로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이 아니듯이, 안주함과 다른 별개의 닿음으로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숨이 닿는 곳에서(phuṭṭha-phuṭṭha-ṭṭhāne) 그들을 헤아리면서 헤아림과 닿음으로 그들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곳에 헤아림을 내려놓은 뒤 마음챙김으로 그들을 연결하고, 또 본삼매로 마음을 안주하면서 연결과 닿음과 안주함으로 그들을 마음에 잡도리한다고 말한다. 이 뜻은 주석서들에서 절뚝발이와 문지기의 비유로 설했고, 『무애해도』에서는 톱의 비유로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절뚝발이의 비유 ]
199. 여기서 절뚝발이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마치 절뚝발이가 그네를 타고 노는 어머니와 아들의 그네를 밀어 움직이게 한 뒤 그네의 기둥 아래 앉아서 연속적으로 앞으로 왔다 뒤로 갔다하는 그네 밑싣개의 양끝과 중간을 본다. 그는 결코 양끝과 중간을 보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가 마음챙김과 함께 [들숨날숨과] 연결된 기둥 아래 [즉, 코끝에] 앉아서 들숨날숨의 그네를 밀어 움직이게 하고는 바로 그 [코끝등의] 표상에 마음챙김과 함께 앉아서 연속적으로 들숨날숨이 오고가면서 닿는 곳에 그들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마음챙김과 함께 쫓아가면서 [닿는] 그곳에다 마음을 두면서 쳐다 본다. 그들을 보기 위해 결코 [안팎으로] 움직이지않는다. 이것이 절뚝발이의 비유이다.
[문지기의 비유]
200. 이제 문지기의 비유는 이와 같다.
문지기가 도시의 안과 밖에 사는 사람들을 상대로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 갑니까? 당신의 손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조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도시 안팎에 사는 사람들은 그 문지기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낱낱이 조사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들어간 들숨과 밖으로 나간 날숨은 이 비구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몸에 도착하는 것은 모두 관여한다.
이것이 문지기의 비유이다.
[톱의 비유]
201. 톱의 비유는 마땅히 처음부터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표상과 들숨과 날숨은 한마음의 대상이 아니다.
이 세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수행을 얻지 못한다.
표상과 들숨과 날숨은 한마음의 대상이 아니다.
이 세법을 아는 자는 수행을 얻는다.
202. 어떻게 이 세 법들은 한 마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가?
어떻게 이 세 법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왜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노력이 있고, 일을 성취하고, 또한 수승함을 얻는가?
예를들어 편편한 땅위에 나무가 놓여 있다 치자.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를 것이다. 나무에 닿는 톱니들을 마음에 잡도리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오고간 톱니들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노력을 알고 일을 성취하고 또한 수승함을 얻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코끝이나 윗 입술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앉는다.
그는 들어왔거나 나간 들숨날숨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들어왔거나 나간 들숨날숨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노력이 있고 일을 성취하고 또한 수승함을 얻는다.
203.
무엇이 노력인가?
부지런히 정진하는 자의 몸과 마음이 [수행하는] 일에 대해 적합함이 노력이다.
무엇이 일인가?
부지런히 정진하는 자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가 억압으로써] 없어지고 [감각적 욕망에 대해 일으킨 생각 등의] 생각(尋, vitakka)이 가라앉는 것이 일이다.
무엇이 수승함인가?
부지런히 정진하는 자에게 [열 가지] 족쇄가 [도닦음을 통해 근절로써] 끊어지고 [일곱 가지] 잠재 성향이 멸하는 것이 수승함이다.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가득 채우고 잘 닦고 순서대로 증장시키면
그는 구름에서 나온 달처럼 이 세상을 비추리.
이것이 톱의 비유이다.
그러나 여기 [톱의 비유에서] 이미 들어왔거나 나가버린숨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 이 그수행자의 목적이라고 알아야 한다.
204. 이 명상주제를 마음에 잡도리할 때 어떤 자에게 머지않아 [닮은] 표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일으킨 생각 등] 나머지 禪의 구성요소로 장식된 본삼매라고 불리는 안주함(ṭhapanā)도 성취한다.
205. 어떤 자는 헤아림을 통해 마음에 잡도리할 때부터 서서히 거친 들숨날숨이 멸하여 몸의 어지러움이 가라앉을 때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서 마치 몸이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이 된다.
예를 들면, 몸이 불편한 사람이 의자나 침대에 앉을 때에는 의자나 침대가 휘고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고 침대보에 구김살도 가지만,
편안한 자가 앉을 때는 의자나 침대가 휘지도 않고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고 침대보에 구김살도 지지 않아서 저울에 솜을 채운 것처럼 되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편안한 몸은 가볍기 때문이다.
206. 그의 거친 들숨날숨이 멸할 때 미세한 들숨날숨의 표상을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난다.
그것마저 멸할 때 차례대로 그보다 더 미세한 표상을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난다.
207. 어떻게?
예를 들면 사람이 큰 쇠막대기로 청동으로 된 징을 친다면 즉시에 큰 소리가 날 것이고, 그 거친 소리를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 거친 소리가 멸할 때 그 다음에 희미한 소리와 표상을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마저 멸할 때 차례대로 그보다 더 희미한 소리의 표상을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금속으로 만든 징을 두드렸을 때(Psi.185)”로 시작하는 문단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했다.(§184)
208. 다른 명상주제들은 높은 단계에 이를수록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들숨날숨은 그와 같지 않다.
이것은 수행이 깊어질수록 미세함에 이른다. 때로는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이와 같이 들숨날숨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죽으로 된 돗자리를 털고 나가버리면 안된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스승님께 여쭈어 보리라’라든지,
‘지금 나의 명상주제가 도망가 버렸다.’라고 생각하면서 일어서서는 안된다.
자세를 어지럽히면서 떠나갈때 명상주제가 낯설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앉아 있는 그 상태에서 [평소에 숨이 닿는곳, 즉 코끝]의 장소로 [마음을] 가져가야 한다.
[마음을 가져가는 방법]
209. [마음을] 가져가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그 비구가 명상주제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알게 되면 이와 같이 깊이 숙고해야 한다.
‘이 들숨날숨은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는가?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가?’
이와 같이 깊이 숙고할 때 ‘이들은 모태 안에 있는 자에게 없고 물에 빠진 자들에게도 없다.
마찬가지로 인식이 없는 중생들과 죽은 자들과 제4선에 든 자들과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태어난 자들과 멸진정에 든 자들에게도 없다고 안다.
그후 다음과 같이 스스로 경책 해야 한다.
‘지자여, 그대는 모태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물에 빠진 것도 아니다.
그대는 인식이 없는 자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요, 또한 제4선에든 것도 아니고,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멸진정에든 것도 아니다.
그대에게는 반드시 들숨날숨이 있다. 그대의 통찰지가 둔하기 때문에 파악을 못할 뿐이다.’
그때 그는 평소에 숨이 닿는 곳으로 마음을 안주하여 마음에 잡도리함을 일으켜야 한다.
210. 이 들숨과 날숨은 코가 큰 사람에게는 코끝을 치면서 생기고 코가 적은 사람에게는 윗입술을 치면서 생긴다.
그러므로 그는
‘이곳에 이들이 닿는구나’라고 표상을 고정시켜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마음챙김을 잊어버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에게 이 들숨날숨에 마음챙김는 수행을 설하지 않는다.(S.v.337)”라고.
211. 명상주제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는 자에게만 성취된다.
이 들숨날숨의 명상주제 이외의 다른 것은 그것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그에게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들숨날숨의 명상주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중대하고 수행하기 어렵다.
이것은 부처님과 벽지불과 부처님의 직계제자들과 대장부(mahāpurisa)들이 마음에 잡도리할 영역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중생은 이것을 닦을 수 없다.
마음에 잡도리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더 고요해진다. 그러므로 여기선 강한 마음챙김과 통찰지가 요구된다.
212. 마치 얇은 헝겊 조각을 기울 때 바늘도 가는 것이 필요하고 바늘귀를 뚫는 기구는 더 가늘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얇은 헝겊 조간과 같은 이 명상주제를 닦을 때에 바늘과 같은 마음챙김과 바늘귀를 뚫는 기구와 같은 마음챙김과 함께한 통찰지도 강한 것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챙김과 통찰지를 구족한 비구는 그 들숨날숨을 평소에 닿는 부분(pakati-phuṭṭha-okāsa)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농부와 소의 비유]
213. 예를 들면, 농부가 밭을 갈고 난 뒤 황소들을 풀어주어 풀을 뜯어먹게 하고 그늘에 앉아서 쉴 것이다. 그때 그의 황소들은 재빠르게 숲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다시 그들을 몰고 와서 멍에를 메우고자할 때 그 영리한 농부는 그들의 발자취를 쫒아 숲 속을 헤매지 않는다. 그는 밧줄과 막대기를 들고서 그들이 모이는 물 마시는 곳으로 곧장 가서 앉아있거나 누워있으 것이다.
그때 그 소들이 낮의 얼마동안 풀을 먹은 뒤 그들이 모이는 개울가로 내려와서 목욕하고 마시고 다시 올라와서 서있을 때, 그들을 보고 줄로 묶어 막대기로 찌르면서 몰고 와서 멍에를 메어 다시 일을 할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는 이들숨날숨을 평소에 닿는 부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마음챙김의 밧줄과 통찰지의 막대기를 가지고 평소에 닿는 곳에 마음을 안주하여 마음에 잡도리 함을 일으켜야 한다.
이와 같이 그가 마음에 잡도리할때 머지 않아 그들이 다시 나타난다.
마치 그들이 모이는 물 마시는 곳에 황소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그 다음에 마음챙김의 밧줄로 묶어바로 그장소에 그들을 매어 통찰지의 막대기로 찌르면서 거듭거듭 명상주제에 전념해야한다.
[표상이 나타남]
214. 그가 이와 같이 전념할 때 머지않아 표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진 않다.
어떤 자에게는 가벼운 감촉을 일으키면서 솜처럼 비단처럼 산들바람처럼 나타난다고 어떤 자들은 말한다.
215.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판별한다.
이것은 어떤 자에게는 별빛처럼 마니주처럼 진주처럼 나타나고,
어떤 자에게는 거친 촉감을 가진 목화씨와 거친 촉감을 가진 심재로 만든 못처럼 나타나고,
어떤 자에게는 펴진 거미줄처럼 구름의 장막처럼 연꽃처럼 수레바퀴처럼 월륜처럼 일륜처럼 나타난다.
216. 예를 들면, 많은 비구들이 경전을 외우면서 앉아있을 때,
한 비구가
‘그대에게 아 경전이 마치 무엇처럼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산에서 내려오는 큰 급류처럼 나타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일련의 숲처럼 나타난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시원한 그늘을 주는 가지들이 무성하고 과일이 열린 나무처럼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들의 인식(saññā)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경전이지만 각자 다르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명상주제이지만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인식에서 생겼고 인식이 그 근원이고 인식이그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고 알아야 한다.
217.
여기서 들숨날숨을 대상으로 한 마음이 다르고,
날숨을 대상으로 한 마음도 다르고,
표상을 대상으로 한 마음도 다르다.
이 세 가지 법이 없는 자는 그의 명상주제가 본삼매는커녕 근접삼매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 세 가지 법이 있는 자는 그의 명상주제가 근접삼매에도 이르고 본삼매에도 이른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표상과 들숨과 날숨은 한마음의 대상이 아니다.
이 세법을 알지 못하는 자 수행을 얻지 못한다.
표상과 들숨과 날숨은 한마음의 대상이 아니다.
이 세법을 아는 자 수행을 얻는다.
218. 이와 같이 [닮은] 표상이 나타나면,
비구는 다가가서 말씀드려야 한다.
‘존경하는 스승님, 제게 이런 형태의 [표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것은 표상이다’라거나
‘그것은 표상이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여보게, 그와 같이 일어나는 것이네’라고 말하고는,
‘반복해서 마음에 잡도리하게’라고 말해야 한다.
‘표상이다’라고 말할 때 [만족하여] 중지해버릴지도 모른다.
‘표상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낙담하여 포기해버릴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 어는 것도 이야기하지 말고 마음에 잡도리함을 유지하도록 격려를 해줘야 한다.
이와 같이 『장부』를 외우는 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중부』를 외우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그것은 표상이라네.
선남자여, 명상주제를 반복해서 마음에 잡도리하게.’
219. 그때 그는 오직 표상에 마음을 안주해야 한다.
이와 같이 [닮은 표상이 나타난] 이후부터 그는 안주함을 통해 닦는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옛 스승들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닮은] 표상에 마음을 안주하고
갖가지 형태를 여의면서
지자는 들숨날숨에 자기 마음을 묶는다.
[근본 삼매에 들다]
220. 이와 같이 그에게 표상이 나타나자마자,
장애들이 억압되고 오염원들은 가라앉고 마음챙김은 확립되고 마음은 근접삼매에 든다.
221. 그때 [나타난] 색깔로 그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해서는 안된다.
특징으로 반조해서도 안된다.
부적합한 거처 등 일곱 가지 부적함을 피하고 일곱 가지 적합한 것을 수용하면서,
끄샤뜨리야의 황후가 전륜왕이 될 태아를 보호하듯, 농부가 익은 농작물을 보호하듯, 그것을 잘 보호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것을 보호하고 거듭거듭 마음에 잡도리함을 통해 증장과 향상에 이르게 하여 열 가지 본삼매에 드는 능숙함을 성취해야 하고(Ⅳ.§66)
222. 이와 같이 노력할 때 땅의 까시나에서 설한 방법대로 바로 그 표상에서 사종선(四種禪)과 오정선(五種禪)을 얻는다.
(5) 주시,
(6) 환멸,
(7) 두루 청정함,
(8) 그들을 되돌아봄
[⑤ 주시(sallakkhaṇā) ⑥ 환멸(vivaṭṭanā) ⑦ 두루 청정함(pārisud-dhi) ⑧ 그들을 되돌아봄(paṭipassanā)]:
그러나 여기 [몸을 관찰함에서] 이와 같이 4종선과 5종선을 얻은 비구가 주시와 환멸로 명상주제를 증장하여 청정에 이르기를 원하면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음으로써 바로 그 禪을(Ⅳ.§131)능숙하게 한 다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면서 위빳사나를 시작해야 한다.
223. 어떻게?
증득(等至=본삼매)으로부터 출정하여 들숨과 날숨은 물질로 된(karaja) 몸과 마음이 그 원인이라고 본다. 풀무를 볼 때 풀무와 사람의 적절한 노력으로 인해 바람이 움직인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을 조건으로 들숨날숨이 있다고 본다.
그 다음에 들숨날숨과 몸은 물질(色)이고 마음과 또 마음과 함께한 법들은 정신(名)이라고 구분한다. 이것은 여기서는 간략히 설한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에 대한 구분은 뒤에서 상세하게 설명될 것이다.(ⅩⅤⅢ.§3이하)
224. 이와 같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고 그 정신과 물질의 조건을 찾는다.
찾은 결과 그 조건을 보고 삼세에서 정신과 물질의 일어남에 대한 의심을 극복한다.(ⅩⅨ)
의심을 극복한 그는 깔라빠로 그들을 명상함을 통해(ⅩⅩ.§2 이하) 세 가지 특상을 제기하고,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관찰의 예비 단계에서 일어난 광명 등 열 가지 위빳사나의 경계(upakilesa, 오염)를 버린 뒤(ⅩⅩ.§105 이하),
이런 경계에서 벗어난 도닦음의 지혜가 도라고 구분한다.(ⅩⅩ.§이하)
그후 일어남을 버리고 무너짐(bhaṅga)을 관찰하는 것에 이른다.
계속해서 무너짐을 관찰함으로써 상카라(行)들이 공포로 나타날 때 그 상카라들을 역겨워하고(ⅩⅩⅡ)
서서히 네 가지 성스러운도에 이르러 아라한과에 서서,
열 아홉가지 반조하는 지혜를 마지막으로 얻어(ⅩⅩⅡ.§§18-21),
신들을 포함한 세상으로부터 최상의 보시를 받을만한 자가 된다.
225. 이렇게 하여 헤아림이 그 시작이고 되돌아봄이 마지막인 들숨날숨에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수행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의 네 개조를 모든 측면에서 주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