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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10권
11. 택품(擇品)①[4], 정법(正法)ㆍ금강삼매ㆍ신통ㆍ근ㆍ평등한 것과 제일의ㆍ중음(中陰)
[정법(正法)]
【문】어떤 것이 정법(正法)인가?
【답】
경과 율과 아비담(阿毘曇)
이것을 세속의 정법이라 하고
37각품(覺品)
이것을 제일의(第一義)라 한다.
‘경과 율과 아비담 이것을 세속의 정법이라 한다’고 했는데 수다라와 율과 아비담은 언설(言說)의 정법이다. 명처(名處)에 의지해 일어나는 까닭이다.
앞에서 이미 불어(佛語)는 곧 말의 자성(自性)이라고 설하였다. 말은 곧 명칭에 의지해 전개되는 까닭이다.
다른 곳[他處]으로 전개되는 까닭에 속수(俗數)34)라고 한다.
최고의 진리를 드러내는 까닭에 정법이라 부르니, 표현으로 내용을 밝히기 때문이다.
‘37각품, 이것을 제일의라고 말한다’라고 한 것은 37각품이 최고의 정법(正法)임을 말한 것이다. 명칭을 떠나서 일어나는 까닭이다.
유루의 닦는 지혜는 비록 말의 표현을 떠나서 일어나기는 해도 때가 있는 까닭에 최고의 정법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정법에 두 종류가 있는 것과 같이 행법에도 역시 두 종류가 있게 된다. 즉 법을 닦는 일[修法]과 닦는 일[修]이 그것이다.
법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경을 외우고 익히는 일을 말한다.
닦는다고 하는 것은 선(禪)을 닦는 것을 말하니, 그것은 세속에 속한다.
정법이라 하는 것은 곧 닦음을 말하며 법은 곧 간직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최고의 정법은 닦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법을 수행하는 사람이 머문다면 곧 정법도 머물며, 수행자가 멸한다면 곧 정법도 멸한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수행자를 권발시키고자 하신 까닭에 그 한계[分齊]]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
앞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관해서는 「택품(擇品)」에서 곧 자세히 설명할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부터 이것을 설명하겠다.
쉰두 가지 및 나머지이다.
또한 팔십이라고 말하고
혹은 십삼이라고 말하는 자 있으니
이것이 금강삼매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쉰두 가지 금강삼매가 있으니, 미래선에 속한다.
만약에 선미래의 고비지(苦比智)에 의지하여 아라한과를 얻는 자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사음(四陰)의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를 사유하는 데서 얻게 된다.
또 만약 집비지(集比智)로 얻는 자는 집제의 네 가지 행을 하나하나 사유함으로써 얻게 된다.
만약 멸법지(滅法智)라면 욕계에 연계된 행이 소멸하고 멸제에서의 네 가지 행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얻게 된다.
만약 도법지(道法智)라면 욕계에 연계된 행도를 끊는 도제(道諦)의 네 가지 행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얻게 된다.
만약 멸비지(滅比智)라면 혹은 초선의 경지에 연계된 행의 소멸을 사유함으로써 혹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에 연계된 행멸을 사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도비지라면 그 아홉 경지의 비지(比智)의 품계와 도의 네 가지 행을 사유함으로써 아라한과를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지(智)와 행과 연을 나누어 구별하면 쉰두 가지로 구별된다고가 다르기 때문에 멸도 달라지고 심정이 서로 떨어져 있기에 비추어 보는 것도 다르다. 그런 까닭에 여덟 경지의 멸에 서른두 가지 행이 있다. 그러나 도는 비슷하게 공통된다. 경지는 달라도 본질은 같으며 감정에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통된 것을 관해 공통적으로 아홉 경지에 오직 네 가지 행만 존재함을 관한다. 여기에 앞의 4제(諦) 십육행상을 합하면 모두 52행이 되는 것이다.
선미래와 같이 제4선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공처(空處)에는 스물 여덟 가지의 행이 있다자기 경지의 고제ㆍ집제의 8행(行)과 4공멸제(空滅諦)의 16행(行)과 아홉 경지의 도(道)의 4행(行) 이니, 위에서부터 멸이 감소하는 까닭에 처(處)를 따라 네 가지를 줄인다,
식처(識處)에는 스물네 가지 행이 있고 무소유처(無所有處)에는 스무 가지 행이 있다. 무색계에는 법지(法智)가 없기 때문인데, 법지는 욕계를 연하기 때문에 무색계는 아니다. 아랫경지의 행의 소멸은 아랫경지의 고를 연하는데, 윗경지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며 아랫경지의 대치연(對治緣)이 전전하여 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미래에 여든 가지 금강삼매가 있다. 이 가운데 차별은 도비지에도 역시 그 하나하나의 경지에 대치연이 있어 아라한과를 얻는다고 말한다.
일곱 경지의 도비지의 경지에서 각각의 네 가지 행을 관한다면 모두 스물여덟 가지 행이 되며, 앞의 쉰두 가지와 합해 여든 가지 행이 된다.
선미래의 경우와 같이 제4선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공처에는 마흔 가지의 행이 있고 식처에는 서른두 가지 행이 있으며 무소유처에는 스물네 가지 행이 있는 것이다.”
구사(瞿沙)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미래에 속하는 금강삼매는 열세 가지다.
견도(見道)에 속하는 네 가지 비인상응(比忍相應)의 네 가지 삼매와 수도(修道)의 단계에서 비상비비상의 욕망에서 벗어난 아홉 무애도와 상응하는 아홉 가지 삼매가 그것이다.
그 일체는 제일유대치(第一有對治)의 금강삼매이다. 세속도는 그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4선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공처(空處)에는 아홉 가지이니,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은 총체적인 설명이다.
만약 인(忍)과 지(智)와 행과 종류와 연(緣) 등으로 나누어 구별한다면, 미래선에 속하는 금강삼매는 1천 492가지가 있게 되며,
나아가 제4선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또한 공처에는 468가지, 식처에는 324가지, 무소유처에는 216가지가 되는 것이다.
[신통은 선한 것인가]
【문】지품(智品)에서 설한 신통, 그 신통력은 모두가 선(善)한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답】
세 가지 신통은 선이라 말하고
나머지 두 가지는 무기이다.
알아야 하니, 욕계와 색계에 근거함을
세존은 혜(慧)의 성품이라 하셨다.
‘세 가지 신통은 선이라 말한다’라고 했는데, 신족지(神足智)와 타심지(他心智)와 숙명지(宿命智)의 이 세 신통은 선하다고 말한다. 왜냐 하면 사랑할 만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지극한 방편으로 일어나는 바이고 다른 사람을 조복(調伏)시키며 믿고 원하지 않는 사람을 믿고 원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신통력은 다른 사람을 지극히 조복시키는 까닭에 환희로운 것이다. 이 환희심과 상응하는 지혜가 곧 선(善)이니, 믿음의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둘은 곧 무기이다’라고 한 것은 천안통(天眼洞)과 천이통(天耳洞)의 이 두 가지 신통이 곧 무기임을 말한 것이다. 사랑할 만한 과보나 지극한 방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색과 소리를 받아들여 일어나는데, 그런 까닭에 무기이다.
【문】어느 곳에서 눈앞에 나타나며 어떤 특성이 있는가?
【답】알아야 하니, 욕계와 색계에 근거함을 세존께서는 혜(慧)의 성품이라 하셨다.
즉 이 신통은 욕계와 색계에서 눈앞에 나타나지 다른 세계는 이에 해당되지 아니한다. 색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또한 그것은 먼저 욕계에서 일어나는 까닭이니,
그 뒤에 색계에서도 눈앞에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처음 짓는 업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혜의 특성이니, 분별을 좇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의(依)는 의자(衣者)35)를 이루는 까닭이다해석하자면, 신통에 눈의 명칭이 있는 것은 눈에서 말미암아 일어나는 까닭인 것이다. 시설경(施設經)36)에서 설하는 바와 같으니, 곧 “그때는 색계의 4대(大)로 만들어진 안처가 두루 원만하니 이것이 천안(天眼)의 청정함이다.”
[여러 근(根)의 일]
「수다라품(修多羅品)」에서 여러 근(根)의 일은 「택품(擇品)」에서 곧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하였으니, 이제 곧 그것을 설명하겠다.
알아야 하니, 저 모든 근(根)을
지혜 있는 사람은 잘 분별하니
그 이름 스물두 가지 있고
그에 얽힌 일 열일곱 가지라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제근은 그 이름이 스물두 가지 있어도 그 일은 열일곱 가지이다. 남녀의 근(根) 및 세 가지 무루근은 별도의 일[事]이 없는 까닭에 실체를 세우지 않는다. 이는 다른 근에 포함되는 까닭이다.
남녀의 근은 몸의 근을 떠나서 다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어떤 것이 남근이냐 하면 신근(身根)의 일부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근도 역시 이와 같다.
또한 같은 인식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니, 만약 인식이 몸의 근에 의지하여 일어날 경우 그것은 남녀의 근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모습의 근과 함께 하나의 인식이 생하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세 가지 무루근은 아홉 개의 근이 합쳐져 이루어지는 까닭이니,
아홉 가지의 근이란 의근(意根)ㆍ낙근(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과 신근(信根) 등 다섯 가지 근을 말한다.
이 아홉 가지 근은 도와 사람으로 나누어 구별하기 때문에 세 가지 근을 세우게 된다.
그 가운데 도(道)로 분별하는 경우에는 견도(見道)를 미지근(未知根)이라 하고
수도(修道)를 이지근(已知根)이라 하며
무학의 도를 무지근(無知根)이라 한다.
사람으로 분별할 경우에는 수신행과 수법행을 미지근이라 하고,
신해탈과 견도(見到)와 신증(身證)을 이지근이라 하고,
혜해탈과 구해탈을 무지근(無知根)이라 한다.
[평등한 것과 제일의(第一義)에]
【문】평등한 것과 제일의(第一義)에는 어떤 모습이 있는가?
【답】
만약 일을 분별할 때
명칭을 버리면 곧 등(等)이라 하고
분별해서 버리는 바 없으면
이것이 제일의(第一義)이다.
‘만약 일을 분별할 때 명칭을 버리면 곧 등이라고 한다’라고 했는데
만약 어떤 일을 분별할 때 호칭을 버리게 되면 이것은 등사(等事)로서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등사(等事)란 범어로 삼비율제(三比栗提)37)라 하며,
번역해서 등집(等集)이라 하고 등적취(等積聚)라고도 한다.
범회(凡會)에는 삼(三)38)이 있는데, 이 말이 없는 것도 등집(等集)이라 부른다.
결정된 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마치 병을 색ㆍ향기ㆍ맛ㆍ촉감으로 분별할 때 병의 이름은 버리며 또한 색ㆍ향기ㆍ맛ㆍ촉감을 버리면 달리 병이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런 까닭에 등사라고 부르니, 이와 같이 일체도 그러하다.
‘분별해서 버리는 바 없으면 이것이 제일의(第一義)이다’라고 했는데,
만약 어떤 일을 나누어 구별할 때 명칭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것이 제일의이다. 가령 다섯 가지로 분별할 때도 역시 고란 이름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색은 곧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내지 식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그 색에는 다시 열한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하나의 입(入)은 모두 고가 된다. 나아가 찰나 및 극미를 분별할 때도 역시 고라는 이름은 버리지 못한다. 그 상(相)을 얻는 까닭이니, 일체 역시 이와 같다.
[중음(中陰:中有身)]
잡품(雜品)에서 중음(中陰:中有身)에 관한 내용을 택품에서 곧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하였는데,
지금 곧 이것을 설명하겠다.
【문】정(定)하고 정하지 않음이 있는가?
【답】
계와 취와 경지[地]란 필정(必定)이며
중음(中陰)은 다섯 가지이다.
이름하여 향식(香食)ㆍ구유(求有)
승의행(乘意行)이라 한다.
‘계와 취와 경지[地]란 필정(必定)이다’라고 했는데, 중음의 계와 취와 경지는 뒤바뀌지 않는다. 욕계의 중음은 반드시 욕계에 태어나고, 색계의 중음은 반드시 색계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지옥으로 갈 자는 지옥에 태어나고 나아가 인간으로 갈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나며 사천왕(四天王)으로 갈 사람은 사천왕에 태어난다.
내지는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39)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다.
‘중음은 다섯 가지이다’라 한 것은 중음은 5음의 성품임을 말한 것이다. 가고 오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색을 벗어나서 가고 오는 일은 없다. 그런 까닭에 욕계와 색계에는 중음이 있는 것이다.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색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힘이 없다’고 했는데, 극미인 까닭에 모든 형태의 장애물이 가로막을 수 없다. 업의 힘으로 모태에 머무니, 만약 이와 다르다면 응당히 태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름하여 향식(香食)ㆍ구유(求有)ㆍ승의행(乘意行)이라 한다’라고 한 것은 냄새를 먹을 것으로 삼기 때문에 향식(香食)이라 말한 것이다.
만약 박복한 자라면 여러 가지 더러운 냄새를 먹게 되며 큰 힘을 지닌 자라면 여러 가지 맑은 냄새를 먹게 된다.
생유(生有)를 구하는 까닭에 구유(求有)라 하고 뜻을 좇아 태어나기 때문에 승의행(乘意行)이라 말한다.
이 여러 중생은 혹은 업으로 태어난다. 이른바 지옥의 경우이니, ‘그 여러 중생들은 업에 묶여 있다’고 설한 바와 같다.
혹은 번뇌로 태어나는 경우이니, 이른바 인간 및 욕계천이 그것이다. 혹은 과보로 태어나는 경우이니, 날아다니는 새가 그것이다.
혹은 뜻을 좇아 태어나는 경우이니, 이른바 색계와 무색계의 하늘 및 겁(劫)이 시작할 때의 인간과 변화신 및 중음신이 그것이다.
두 유(有)40)의 중간에 일어나 취(趣)를 떠나는 까닭에 중음(中陰)이라 하는 것이다.
【문】중음은 얼마 동안 머물게 되는가?
【답】
7일이나 혹은 49일이니
그 화합(和合)에 이르러
혹 벌거벗은 형상이고 냄새를 먹고
모든 근을 구족한다.
‘7일’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음은 7일 동안 머문다. 몸이 약하고 뒤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만약 화합된다면 마땅히 그럴 수도 있으나, 만약 부모가 각기 다른 곳에 있을 경우 이 사람의 목숨이 끝남은 어떻게 되는가?
【답】마땅히 그 중생의 업이 바뀌어졌는지 바뀌어지지 아니하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어미에게서는 업이 바뀌어질 수 있는데 아비에게서는 바뀌어질 수 없을 경우 그 아비는 다른 여인을 좇아 중음을 만나게 한다.
반대로 아비에게서 바뀌어질 수 있는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두 사람에게서 모두 바뀌어질 수 없는 경우 이 사람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는데 그들이 먼저 화합한 것이니, 이것을 늘 욕망을 행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만약 시절 따라 욕망을 행사하는 자라면 그 중생업의 인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때가 아닐 때 욕망을 행사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슷한 곳에 태어난다. 즉 만약 마땅히 태어날 때 행처자(行處者)가 그 시기에 행사하지 않는 까닭에 비슷한 상행처에서 태어나게 되며, 그 무리를 따르게 된다”고 한다.
‘49일’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9일 동안 머문다”고 한다.
‘그 화합에 이른다’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해지지 아니하였거나 아직 화합하지 아니한 동안은 늘 중음으로 머문다”라고 하였다.
【문】중음에도 입는 옷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답】혹은 벌거벗은 형상도 있으나 색계의 중음은 옷이 있다. 색계에서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법신(法身)이 벌거벗은 모습이 아니듯이 생신(生身)의 경우에도 역시 그렇다.
또한 욕계의 보살 및 백정(白淨) 비구니41)의 중음은 옷이 있다. 그러나 그밖의 중생은 옷이 없나니,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없음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문】중음은 무엇을 먹는가?
【답】냄새를 먹는다. 욕계의 중음은 냄새를 먹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색계에서는 박식(搏食)을 떠나지만, 몸의 극미를 탐하는 까닭에 오직 세 가지 음식만 먹는다.
【문】그래도 모든 근을 구족하게 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답】여러 근을 모두 구족한다. 중음은 여러 근을 갖추니, 그것은 왜냐 하면 중음의 보(報)는 순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중생은 존재를 구하는 까닭에 6입(入)의 문에서 항상 어떤 유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문】그 형체는 어떠한가?
【답】
행(行)에 따르고 양은 일정하지 않나니
혹은 보기도 하고 혹은 보지 못하기도 한다.
들어갈 때는 생문(生門) 따라 들어가지만
혹은 전도된 상을 낳기도 한다.
‘행에 따른다’라고 한 것은 각기 그 태어날 곳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즉 지옥의 중음은 지옥의 형태와 같으며, 내지 인(人)ㆍ천(天)은 인ㆍ천의 형태와 같다.
【문】중음은 어떻게 행동하며 몸의 양은 얼마나 되는가?
【답】행과 양은 일정하지 않다. 중음의 행동 및 몸의 양은 일정하지 않으니, 지옥에서의 중음은 발이 위에 달리고 머리가 아래에 있으면서 행동한다.
또 하늘 세계의 중음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 마치 화살을 허공에 쏜 것과 같다.
나머지 다른 세계의 중음은 몸을 옆으로 눕혀 옆으로 걸어감이 마치 그림 속의 사람이 날아가는 것과 같다.
몸의 경우 색계의 중음의 양은 현재 살아 있는 몸[本有]과 같다.
욕계 보살의 중음도 역시 살아 있을 때의 몸과 같다.
그러나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그 몸을 장엄하기 때문에 보살의 중음의 광명은 백억의 천하를 환히 비춘다. 그러나 흰 코끼리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감을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미 축생들의 세계를 떠난 까닭이다.
보살은 91겁(劫) 이전부터 항상 축생들의 세계에서는 벗어나 있다. 상서(相書)를 따르는 까닭에 보살의 어머니로 하여금 이와 같은 모습을 꿈 속에서 보게 한 것이다.
욕계의 나머지 중생들의 중음신의 양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게 되는데, 모든 근이 몹시 예리하기 때문에 전도된 생각으로 태 안에 들어가게 된다.
【문】중음과 중음은 서로 보는가?
【답】혹은 보기도 하고 혹은 보지 못하기도 한다. 혹은 중음이 중음으로 경계를 삼는 경우가 있으나, 모든 중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옥의 중음은 다른 지옥의 중음을 본다. 일체가 이와 같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옥의 중음은 지옥의 중음을 본다. 축생은 두 세계를 보고, 아귀는 세 세계를 보고 인간은 네 세계를 보고 하늘은 다섯 세계를 본다”고 한다.
생음(生陰)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령 천안(天眼)이 지극히 청정하다면 능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어느 곳으로부터 입태하는가?
【답】들어갈 때는 생문을 따라 들어간다. 그는 태어날 문을 따라 들어가는데 그런 까닭에 쌍둥이는 뒤에 난 아이가 어른이다.
【문】어떤 생각으로 입태하는가?
【답】혹은 전도 망상을 일으킨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이 모두 전도 망상으로 태 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경지에 가까운 보살은 여기서 제외되는데, 그 부처님 경지에 가까운 보살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머니라 생각하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버지라 생각하지만 그 밖의 모든 중생들은 모두 전도된 생각으로 태 안으로 들어간다.
가령 남자의 중음일 경우 어미에게 물든 생각[染想]을 하고 아비에게는 노여운 생각을 하게 된다. 즉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이 남자가 없다면 이 여자와 만나야지.’ 그 남자가 떠나고 나면 그 여자와 만나는 경우를 상상해 보게 되고 그 정(精)을 보았을 때는 자기는 생명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환희심이 생긴다. 환희심이 생긴 까닭에 음(陰)이 점점 두터워지고 음이 두터워지게 되면 어미의 오른편 옆구리에 의지해 등을 향한 채 웅크리고 앉게 된다. 여자의 경우는 이것과 반대로 설명된다.
중음(中有身)의 인연에 대해서는 뒤에 곧 설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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