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달마장현종론 제18권
5. 변업품(辯業品)①
5.1. 업(業)[2]
5) 표ㆍ무표업의 제문(諸門)분별
① 표ㆍ무표업과 그 소의(대종)의 존재유형
이 같은 표업과 무표업은 어떠한 유형[類]의 존재이며, 또한 어떠한 유형의 대종소조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표업은 무집수(無執受)이며
또한 역시 등류성이고 유정수이다.
산위(散位)에서의 무표의 소의는 등류성이고
유집수이며, [각기]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나지만
선정에서 생겨난 무표의 소의는 소장양(所長養)이고
무집수이며,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나는 일이 없다.
그리고 표업은 오로지 등류성이며
소의신에 소속되는 것은 유집수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지금 이 게송 중에서는 먼저 무표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무표업의 두 가지 종류]
모든 무표업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선정의 경지[定地]에서 생겨난 것과,
선정이 아닌 경지[不定地, 즉 散地]에서 생겨난 것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무표업의 보편적 특상[總相]은 무집수이니, 유집수와는 그 상(相)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47)
또한 오로지 선이나 불선이기 때문에 이숙생(異熟生)도 아니며,
극미의 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장양(所長養)도 아니며,
동류인을 갖기 때문에 바로 등류성의 존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본송)서 ‘역시’라고 말한 것은 찰나성의 존재[有刹那性]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를테면 첫 번째 무루법과 구생하는 무표업이 그러하다.48)
또한 식(識)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유정수(有情數)에 포섭된다.
그런데 만약 [앞서 언급한] 차별에 근거하여 소의(무표업의 근거가 된 대종)를 분별해 보면,
선정이 아닌 경지(즉 욕계 散心)에 존재하는 무표의 그것은 등류성이며, 유집수이며, [각기]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여기서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는 말은 신(身)ㆍ어(語)의 일곱 가지 무표는 각기 다른 대종소조임을 나타낸다.49)
[선정에서 생겨난 무표업의 두 가지]
그리고 선정에서 생겨난 무표업은 다시 두 가지로 차별되는데,
이를테면 온갖 정려율의(즉 定俱戒를 말함)와
무루율의(즉 道俱戒를 말함)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그것은 다 같이 선정에 의해 장양(長養)되는 것으로서, 무집수이며, 다른 대종에 의해 생겨나는 일이 없다.
즉 여기서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나는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은 이러한 무표업의 일곱 가지는 다 같이 일구(一具)의 4대종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50)
나아가 유표업(有表業)은 오로지 등류성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유표업으로서 소의신에 소속되는 것(즉 신표업)이라면 유집수이며, 그 밖의 뜻은 모두 산심에서의 무표업의 경우와 동일하다.
즉 그것은 유정수이며, 아울러 소의가 되는 대종은 등류성이고 유집수로서, 각기 다른 4대종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산심(散心)의 경지에 존재하는 무표업을 능히 조작하는 대종은 오로지 등류성인데 반해 선정의 경지에 존재하는 무표업[의 소의]는 장양되어 생겨나는 것인가?
수승한 마음이 현재전하는 상태에서는 필시 대종과 온갖 근을 능히 장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선정의 마음은 필시 대종을 장양시키는 수승함을 갖추고 있을뿐더러 능히 생인(生因)이 되어 선정의 마음과 함께 존재하는 무표업을 조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심의 경지에 존재하는 무표업은 그것의 원인이 된 인등기(因等起)의 마음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51) 무심(無心)의 상태에서도 역시 일어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의] 소의가 되는 대종은 오로지 등류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등기의 마음은 무표업은 낳은 온갖 대종을 능히 장양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산심의 경지에 존재하는 무표업의 소의는 무엇의 등류과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것은 바로 전전(前前) 찰나[次前]에 소멸한 대종의 등류과이다”라고 하였다.
즉 무대(無對)로 존재하는 능조(能造)의 대종은 유대(有對)인 대종의 등류과가 되지 않으니, 미세하고 거친 종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52)
그러나 참다운 설[如是說]은, 무시(無始) 이래 결정코 [무표업을] 능히 조작하는 무대의 조색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은 이미 소멸한 대종을 동류인으로 삼았으며, 능히 등류과로서 지금의 대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유표업을 조작하는 대종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무시이래로 동류(同類)인 대종의 등류과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무표업은 결정코 이류(異類)의 대종으로부터 낳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정의 경지에서 생겨난 무표업의] 소의가 되는 대종은 무집수이다’라고 함은,
그것이 선정심의 결과이기 때문으로, 필시 애탐의 마음[愛心]이 이러한 대종을 집착하여 현재의 내적 [소의신] 자체로 여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대종은 그 밖의 다른 집수(執受)의 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무집수’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산심의 경지에서 생겨난 무표업의 소의가 되는 대종은 유집수이다’라고 함은,
그것이 산심의 결과이기 때문으로, 애탐의 마음이 이를 집착하여 현재의 내적 [소의신] 자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현색 등의 소의가 되는 대종의 경우도 소의신에 계속(繫屬)되어 생겨났기 때문에 [소의신과 더불어] 역시 훼손되고 허물어질 수 있으며, 외적 대상[外物]과 접촉할 때 고락(苦樂)[의 ‘수’]를 낳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떠한 이유에서 선정심에서 생겨난 무표업은 각기 다른 대종에 의해 생겨나는 일이 없는데 반해, 산심에서 생겨난 무표업은 각기 다른 대종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
선정에서 생겨난 무표업은, 7지(支, 身3 語4의 일곱 무표)를 서로 견주어 보건대, 그것은 전전력(展轉力)에 의해 낳아진 동일한 결과[同一果]이기 때문에 오로지 1구(具)의 4대종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지만,
산심에서 생겨난 무표업은 이와는 상위하기 때문에(다시 말해 동일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각기 다른 대종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산지(散地)에서의 무표가 동일한 생인에 의한 것이라면, 그 중의 한 가지를 어길 때 마땅히 일체의 무표를 버려야 할 것이니, 선정에서 생겨난 무표업의 경우도 7지를 서로 견주어 보면 생인이 이미 동일하여 [버릴 때에도] 필시 단박에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찌 일체 유정의 상속에 생겨난 ‘살생을 멀리 떠나는 계[遠離殺戒]’의 경우와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비록 동일한 1구(具)의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할지라도 한 가지를 어길 때 일체의 무표를 단박에 버리는 것은 아니며, 7지가 서로 대향(對向,관계)하는 이치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예증은 옳지 않으니,
그것(산지에서의 무표)이 비록 1구의 대종소조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향하는 유정의 상속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7지(支)의 계(戒)는 각기 다른 대종에 의해 생겨나는 일이 없을뿐더러 그것에 대향하는 유정의 상속도 동일하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한 가지 계를 어길 때 일체의 계를 버리지 않는 것인가?
그러므로 이것(定地에서의 무표)과 그것(散地에서의 무표)은 그 예(例)가 한결같지 않은 것이다.5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명근(命根)의 이치와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명근의 자체는 온전한 신체[具身]의 의지처(依止處)가 될뿐더러 신체가 불구일 때에도 역시 의지처가 되기 때문에 비록 신체[의 어느 한 부위]가 결여되었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근(根)이 존재함에 따라 명근은 능히 [그것을] 유지시켜 끊어지거나 허물어지지 않게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1구의 대종을 원인으로 하여 7지 모두를 갖추었든 갖추지 않았든 능히 [율의(律儀)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비록 [그 중의 어느 한] 지(支)가 결여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지가 존재함에 따라 대종은 능히 [그것을] 유지시켜 끊어지거나 허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54)
이 역시 올바른 예증이 아니니,
그러한 명근은 먼저 결여된 신체와 동시에 생기하지만(이를테면 입태 초기), 중간에 온전한 신체와 함께 생겨나기도 하며, 그 후 신체가 다시 결여되어 감소할 때(노년기)에도 역시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명근은] 온전한 신체와 결여된 신체를 각기 별도로 임지(任持)하지만, 대종은 그렇지 않다. 1구의 대종은 동일한 상속의 무표에 대해서만 생인이 된다.
만약 [1구의 대종이] 7지에 대해 생인이 된다면, 일찍이 지(支)가 결여된 무표와 구생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한 가지가 결여될 때 그 밖의 다른 지를 임지하여 버리지 않게 한다는 것인가?55)
바로 이러한 이치(산심에서 생겨난 무표는 각기 다른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이치)에 따라 무탐 등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이살생(離殺生) 등의 계(戒)가 비록 동일한 유정의 상속에 대향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한 가지를 어길 때 일체를 버리는 것은 아니니, [7지는] 각기 다른 대종의 결과이기 때문으로, 대종이 다르면 결과(즉 무표)도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유정의 각기 다른 상속에 대향하여 무탐에 의해 생겨난 다수의 무표(戒)를 일으켰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1구의 대종을 원인으로 삼았을 뿐이니, 생겨난 결과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56)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앞에서 설한
“만약 동일한 유정신에 대향하는 7지의 생인이 1구의 대종으로 동일하다면, 그 중의 한 가지를 어길 때 마땅히 일체를 어기는 것이 된다”고 한 힐난은
그 이치가 잘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산지(散地)에서의 7지의 무표는 각기 다른 대종에 근거하는 것이다.57)
그리고 천안(天眼)이 일어나더라도 본래의 형색[本形]이 허물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표색이 생겨날 때에도 이치상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58) 비록 신표업이 소의신 중에서 생겨나더라도 이숙색이 끊어지고 나서 다시 상속한다는 허물이 없다.
[그렇더라도] 1구의 대종취(聚) 중에 두 가지 형색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는 허물도 역시 없으니, 모든 신표업은 별도로 존재하는 등류의 대종으로서 새로이 생겨난 것을 소의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체의 어떤 부분에 근거하여 표색이 생겨났다고 할 때, 이러한 일부분의 신체는 마땅히 본래의 대종[大]이나 형색보다 커야 할 것이니, 극미가 증가하였기 때문이다.59)
그렇지만 그렇게 관찰되지 않으니, 그 이치는 어떠한가?
어떤 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새로이 생겨난] 표색이나 대종의 상이 지체(支體)의 염오함처럼 미박(微薄)하기 때문이니, 그러하기에 대종의 상이 획득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신체 중에 틈 구멍이 있기 때문에 비록 [새로이 생겨난 표색과 대종을] 서로 용납할지라도 본래의 몸보다 크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60)
② 표ㆍ무표업의 3성(性)과 계지(界地) 분별
업의 갈래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다고 이미 분별하였으니,
이를테면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세 종류가 있으니,
신업(身業)과 어업(語業)과 의업(意業)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다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신(身)ㆍ어(語)의 두 업에 각기 표업과 무표업이 있고, 사업은 오로지 한 가지 업으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업의 성(性)과 계(界)와 지(地)는 어떻게 건립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표는 유기(有記)이나 그 밖의 업은 3성과 통한다.
불선업은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하고
무표업은 욕계와 색계에 두루 존재한다.
[선ㆍ무부의] 표업은 오로지 유사(有伺)의 두 지에만 있다.
욕계에는 유부(有覆)의 표업이 없으니
등기심(等起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②-1 선 등의 3성 분별
논하여 말하겠다.
무표업은 오로지 선ㆍ불선의 성질과 통할 뿐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무기의 무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무표업은 바로 강력한 마음에 의해 등기(等起)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무기의 마음은 미열(微劣)하여 인등기(因等起)가 되어 강력한 업(즉 무표업을 말함)을 이끌어 낼 만한 공능도, 그 후[後後,즉 표업이 일어나 소멸한 후] [행위할 때와는] 다른 마음의 상태에 있거나 무심의 상태일 때도 역시 항상 상속시켜 일어나게 할 만한 공능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말한 ‘그 밖의 업[餘]’이란 두 가지 표업(신ㆍ어표업)과 사업의 세 가지를 말하니, 이것들은 다 선ㆍ불선ㆍ무기와 통한다.
②-2 계지(界地) 분별
이러한 [신ㆍ어의 표ㆍ무표업과 사업] 중에서 불선업은 욕계에만 존재하고,
그 밖의 다른 처소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욕계에는] 불선근과 무참(無慚)ㆍ무괴(無愧)가 존재하기 때문이다.61)
그리고 선과 무기의 업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3계 모두에 존재하기 때문에 [본송 중에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욕계와 색계의 두 계에는 모두 무표업이 존재하지만, 무색계 중에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무색계 중에서는 색상(色想)을 조복하였기 때문이다.
즉 모든 색을 싫어하고 배반[厭背]하여 무색정에 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정 중에서는 능히 색[상]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혹은 어떠한 처소에서 신ㆍ어의 표업이 일어나는 일이 있으면, 오로지 이러한 처소에만 신ㆍ어의 율의(律儀)가 존재하는 것이다.62)
[혹은 어떤 이는 이같이 말하였다.]
“무색계에는 대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표색도 존재하지 않는다.”63)
그런데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악계(惡戒, 살생 등의 불율의)를 대치하기 위해 시라(尸羅, śila,戒)를 일으키는 것으로, 오로지 욕계 중에서만 온갖 악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색계는 욕계에 대한 네 종류의 원격함[遠]을 갖추었으니,
첫째는 소의원(所依遠)이며, 둘째는 행상원(行相遠)이며, 셋째는 소연원(所緣遠)이며, 넷째는 대치원(對治遠)이다.
여기서 소의원이라 한 것은,
말하자면 [무색의] 등지(等至)에 들어가고 나오는 상태 중에서는 등무간연(즉 욕계계의 마음)을 소의로 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행상원이라 한 것은,
말하자면 무색계의 마음은 필경 욕계 법에 대해 능히 고(苦)ㆍ추(麤) 등의 온갖 행상을 짓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64)
소연원의 뜻도 이에 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니,
무색계의 마음은 다만 바로 아래 경지인 제4정려의 유루제법에 대해 지은 고ㆍ추 등의 행상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대치원이라 한 것은,
말하자면 아직 욕계의 탐을 떠나지 않았을 때에는 무색정에 들더라도 욕계의 악계(惡戒) 등의 법에 대해 염괴(厭壞)와 단(斷)의 두 대치를 결정코 일으킬 수 없기 때문으로, 능히 반연하지 않은 것을 염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색계에는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표색은 오로지 두 유사지(有伺地,즉 有尋有伺와 無尋唯伺地)에만 존재한다.
이를테면 이것은 욕계와 초정려에만 통하는 것으로, 그 이상의 지에는 표업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아울러 [본송에서] ‘유사(有伺)’라고 설한 것은 일체의 초정려 중에도 표업이 두루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만약 상지(上地,제2정려 이상)에 표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미 어표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어찌 성처(聲處)가 존재한다는 것인가?
외적인 대종(이를테면 바람)을 원인으로 하여 소리가 발생되기도 하는데, 외적인 소리를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의 세 정려에도 역시 무부무기의 표업이 존재하니,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즉 위의 세 정려지 중에서 세 가지 식신(識身)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이미 어떠한 허물도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표업을 발하는 마음[發表心]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선심과 염심의 경우, 상지에서는 하지의 그것을 일으키지 못하니, 하지의 선심은 저열하기 때문이며, 하지의 염심은 끊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지에 태어나면 선심과 염심의 표업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양설 중] 앞의 설이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비록 거기(상지)에 [무부무기의 표업이] 현전할지라도 거기에 계속(繫屬)되지 않기 때문이다.65)
나아가 유부무기의 표업은 결정코 욕계에 존재하지 않으며,66) 오로지 초정려 중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대범천이 속임수와 아첨[誑諂]의 말을 하였다고 일찍이 들은 적이 있으니, 이를테면 자신의 대중들 가운데에서 마승(馬勝)이 따져 묻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스스로를 찬탄하였다는 것이다.67)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제2정려 이상에는 표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욕계 중에는 유부무기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표업을 발동시키는 등기심(等起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심(尋)ㆍ사(伺)의 마음이 있어야 능히 표업을 발동시킬 것인데, 제2정려 이상에는 도무지 이 같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비록 하지의 마음을 일으켜 신ㆍ어의 표업을 발동시킬지라도 식신(識身) 등의 경우처럼 그것이 상지에 계속(繫屬)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표업을 발동시키는 마음은 오로지 수소단으로서, 견소단의 번뇌[惑]는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이른바 내문전(內門轉)이기 때문에 욕계 중에는 결정코 유부무기인 수소단의 번뇌는 존재하지 않는다.68) 그렇기 때문에 표업은 위의 세 정려지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욕계 중에는 유부무기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③ 3성의 근거가 되는 4종의 선ㆍ불선과 2종의 무기
제법은 단지 등기[심](等起心)에 의해서만 선ㆍ불선의 성질 등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가?
네 종류의 원인에 의해 선한 성질 등을 성취하는 것이니,
첫째는 승의(勝義)에 의한 것이며,
둘째는 자성(自性)에 의한 것이며,
셋째는 상응(相應)에 의한 것이며,
넷째는 등기(等起)에 의한 것이다.
어떤 법의 어떤 성질은 어떤 원인에 의해 성취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승의선은 해탈(즉 열반)이며
자성선은 참(慚)ㆍ괴(愧)와 선근이며
상응선은 그것(자성선법)과 상응하는 법이며
등기선은 [신ㆍ어의] 색업 등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을 ‘불선’이라 이름하며
승의무기는 두 가지 영원한 것[常,즉 무위]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승의선(勝義善)이란 진실의 해탈을 말한다.
즉 안온(安隱)한 것을 설하여 ‘선’이라 이름하는데, 이를테면 열반 중에서는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적멸하여 최고로 안온하니, 이는 마치 어떠한 병도 없는 상태[無病]와 같다.
이는 곧 ‘승의(paramārtha,궁극적인 것)’에 따라 선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그래서 열반을 승의선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혹은 진실의 해탈은 바로 ‘승(勝,parama)’이고, 바로 ‘의(義,artha)’이기 때문에 ‘승의’라고 이름하였으니, 여기서 ‘승’이란 가장 존귀하여 이와 등등한 것이 더 이상 없는 것을 말하며, ‘의’란 별도로 존재하는 진실의 체성(體性)을 의미한다. 이는 곧 열반과 동등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진실의 존재[實有]이기 때문에 ‘승의’라고 이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은] 안온한 것을 일컬어 선이라 하였기 때문에 [열반은 승의선이니], 이러한 선은 영원한 것[常]이기 때문이다.
자성선(自性善)이란 참(慚)ㆍ괴(愧)와 [선]근을 말한다.
즉 유위법 중에 오로지 참ㆍ괴와 무탐(無貪) 등의 세 종류의 선근은 [다른 선법과] 상응하거나 다른 어떤 법에 의해 등기될 필요 없이 그 자체의 성질이 선이기 때문으로, 마치 좋은 약[良藥]과도 같다.
상응선(相應善)이란 그러한 [‘참’ 등의 자성선]법과 상응하는 법을 말한다.
즉 심ㆍ심소법은 요컨대 참ㆍ괴와 [세 가지] 선근과 상응할 때 비로소 선한 성질을 성취하며, 만약 그러한 참 등의 법과 상응하지 않을 경우 선한 성질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것은 마치 좋은 약이 섞인 물과도 같다.
등기선(等起善)이란 신ㆍ어업과 생(生) 등의 [유위4상]과 득(得)과 두 가지 무심정(무상정과 멸진정)을 말한다.
즉 이것은 바로 자성선이나 상응선에 수반되어 함께 일어나기[等起] 때문에 ‘등기’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으로, 이는 마치 좋은 약이 섞인 물[良藥汁]을 먹고서 낳아진 우유와도 같다.69)
그리고 성질이 다른 종류[異類]의 마음에 의해서도 역시 온갖 [성질의] 득(得)을 일으키니,70) 예컨대 정려에 의해 통과심(通果心)을 획득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즉 뛰어난 무기심이 현재전(現在前)하였기 때문에 온갖 염법을 획득하기도 하고, 뛰어난 염오심이 현재전하였기 때문에 온갖 선법을 획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기나 염오] 등의 법이 어떻게 선 등의 성질을 성취한다는 것인가?
그러한 법과 함께 생겨나는 득[俱生得], 즉 법구득(法俱得)에 근거하여 은밀히 이같이 말하게 된 것으로, 성질이 다른 종류의 마음에서도 연기(緣起)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그러나 비록 성질이 다른 종류의 마음에서도 역시 연기한다고 할지라도 선 등이 바로 그러한 마음에 근거[待]하여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혹은 다시 그러한 온갖 ‘득’이 등기(等起)함에 따라, 바로 그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선 등의 성질을 성취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질이 다른 종류의 마음에 의해 온갖 성질의] ‘득’이 등기함으로 말미암아 선 등의 다른 성질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선성(善性)에 네 종류의 차별이 있다고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선에도 이와 서로 반대되는 네 종류가 있다.
어떻게 서로 반대된다는 것인가?
승의불선(勝義不善)이란 생사(生死)의 법을 말한다.
즉 생사 중에 존재하는 온갖 법은 모두 괴로움을 자성으로 삼아 지극히 안온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고질병과도 같다.
자성불선(自性不善)이란 무참(無慚)ㆍ무괴(無愧)와 세 가지 불선근를 말한다.
즉 유루법 중에서 오로지 무참ㆍ무괴와 아울러 탐ㆍ진 등의 세 가지 불선근은 [다른 불선법과] 상응하거나 다른 어떠한 법에 의해 등기될 필요 없이 그 자체가 바로 불선이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독약과도 같다.
상응불선(相應不善)이란 그러한 [무참 등의 자성불선]법과 상응하는 법을 말한다.
즉 심ㆍ심소법은 요컨대 무참ㆍ무괴와 불선근과 상응할 때 비로소 불선성을 성취하며, 만약 상응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독약에 섞인 물과도 같다.
등기불선(等起不善)이란 [불선심에 의해 등기된] 신ㆍ어업과 생(生)등의 [유위4상]과 득(得)을 말한다. 즉 이것은 바로 자성불선이나 상응불선에 의해 등기된 것이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독약이 섞인 물을 먹고 낳은 우유와도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생사를 승의불선이라고 한다면), 유루법으로서 무기이거나 혹은 선한 성질인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니, 그것들은 모두 생사에 포섭되기 때문으로, 일체의 [유루]법은 모두 다 불선에 포섭되어야 할 것이다.
승의에 근거하여 말할 경우, 이치상으로는 실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겠지만,71) 여기에서는 이숙(異熟)에 근거하여 설하였다.
즉 온갖 유루법으로서 능히 그 성질을 기표(記表)할 수 없는 이숙과라면 ‘무기’라는 명칭을 설정하고, 능히 애호할 만한 것이라고 기표할 수 있는 이숙을 일컬어 ‘선’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유위의 무기도 유루의 선법도 마치 가벼운 병처럼 적은 괴로움을 일으키기 때문에 역시 승의불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72)
선과 불선에 승의가 존재하듯이(다시 말해 승의선과 승의불선이 존재하듯이), 무기법에도 역시 승의가 존재하는 것인가?
역시 존재한다.
그것은 어떠한 존재인가?
이를테면 두 가지 영원한 법[常法]을 말하니, 비택멸(非擇滅)과 커다란 허공(虛空)은 더 이상 다른 갈래[異門]를 갖지 않을 뿐더러 오로지 무기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만을 별도로 승의무기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성ㆍ상응ㆍ등기의 무기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니, 어떠한 경우에도 오로지 무기성이거나 무기심과 두루 상응하는 심소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혹 자성 등의 세 가지 무기를 방편으로 설정하더라도 모든 무기를 다 포섭할 수는 없으니, 무기는 다수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기에는 오로지 두 종류만이 있을 뿐으로,
첫째는 승의이며, 둘째는 자성이다.
즉 유위법으로서 무기는 바로 자성무기에 포섭되니, 별도의 다른 원인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무기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위법으로서 무기는 바로 승의무기에 포섭되니, 영원한 것일뿐더러 더 이상 다른 갈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등기[심](等起心)의 힘이 신ㆍ어업으로 하여금 선ㆍ불선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신ㆍ어업의 소의가 되는 대종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으로, 그것들은 다 같이 한 찰나의 마음에 의해 등기한 것이기 때문이다.73)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행위]작자의 마음은 애당초 업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지 대종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떠한 [행위]작자도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은 종류의 대종을 인기 발동하여 현전하게 하리라’고 하여 대종에 대해 욕락(欲樂)을 일으키고, 이를 방편[門]으로 삼아 선ㆍ악의 마음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또한 세간을 현견하건대, 신ㆍ어의 두 업은 마음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일찍이 신ㆍ어의 두 업이 마음을 떠나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4대종은 마음을 떠나서도 역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법은 마음을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안근(眼根) 등과 같은 것은 마음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생겨날뿐더러 그 성질에도 선 등의 차별이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대종도 마음에 근거하지 않고 생겨나기 때문에 이치상으로도 역시 선 등의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온갖 득(得)이나 생(生) 등의 [4]상(相)에도 마땅히 등기선 등의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니,
애당초 그것을 일으키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무심(無心, 무상ㆍ멸진정)의 상태에서도 역시 현기(現起)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힐난도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이것들은] [본]법(本法)의 세력에 따라 안치 건립되어 선 등의 차별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득’과 4상은 [본]법(즉 所生의 본법)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대종처럼 근거하는 바가 없이(다시 말해 마음에 근거하지 않고서) 스스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위법 가운데 마음의 힘에 근거하지 않고 선ㆍ불선을 성취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온갖 ‘득’과 ‘생’ 등의 상은, 그것이 소속되는 [본]법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마음의 힘에 의해 선 등의 성질을 성취하는 것이니, 그러한 이치는 참으로 잘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생겨난 이후라면 비록 마음을 떠나(마음과는 관계없이) 상속 전전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으니, 그것은 바로 전 [찰나]의 마음의 세력에 의해 인기된 것으로, [전 찰나의 마음이] 그것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정에 수반되는 무표는 선정[심] 등의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이치상 역시 마땅히 등기선의 성질을 성취한다고 해야 한다.74)
[만약 선정에 수반되는 무표가 등기선이라고 한다면,]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도 마땅히 [무기가 아니라] 선에 포섭되어야 할 것이니, 이는 바로 [색계] 선심에 의해 등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러한 두 가지 법은 해탈도의 마음과 통하는 것으로 바로 무기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두 가지 법은 도(道)와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아비달마장현종론 제19권
④ 표업을 일으키는 두 가지 등기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身)ㆍ어(語)의 두 업은 등기[심](等起心)의 힘으로 말미암아 선ㆍ불선을 성취한다.
그렇다면 등기[심]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어떠한 등기[심]의 힘이 신ㆍ어업으로 하여금 선ㆍ불선을 성취하게 하는 것인가?
등기[심]을 서로 비교하여 볼 때, 그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등기[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원인이 되고 그것(업)의 찰나에 존재하는 것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차례대로
전인(轉因)이라 이름하고, 수전인(隨轉因)이라 이름함을.
견소단의 식(識)은 오로지 전인이고
오로지 수전인인 것은 5식이며
수소단의 의식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하고
두 가지 모두가 아닌 것은 수소성의 식이다.1)
전인이 선 등의 성질일 경우
수전인은 각기 3성 모두 허용될 수 있지만
모니(牟尼)의 경우 선이면 반드시 선이고
무기이면 무기이거나 혹은 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ㆍ어의 두 업을 등기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인등기(因等起)와 찰나등기(刹那等起)가 바로 그것이다.
[업에] 선행하여 그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것(업)과 [동일]찰나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차례대로
처음의 것을 전인(轉因)이라 이름하고,
두 번째 것을 수전인(隨轉因)이라고 이름한다.2)
즉 인등기는 장차 업을 짓고자 할 때,
‘나는 지금 응당 마땅히 지어야 할 여차 여차한 업을 조작하리라’고 사유하고 나서 능히 업을 인발(引發)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전인’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찰나등기는 바로 업을 지을 때 선행한 전인의 마음에 의해 인발된 업과 동시에 [현]행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수전인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약 수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록 선행하는 원인(즉 전인)이 있어 능히 업을 인발하더라도 무심의 상태나 혹은 죽은 자[死屍]의 경우처럼 표업은 마땅히 일어나지 않게 되니,3) 수전인에도 표업을 일으키는 공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표업은 수전인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무심의 상태에서도 역시 무표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견소단의 혹(惑)은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이른바 내문전(內門轉)의 번뇌이기 때문에 능히 표업을 일으킬 수 없다.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박가범께서는
“사견(邪見)으로 말미암아 사사유(邪思惟)ㆍ사어(邪語)ㆍ사업(邪業)과 사명(邪命) 등을 일으키게 된다”고 설한 것인가?5)
이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견소단의 식은 표업을 일으키는데 다만 능히 전인이 될 뿐이다. 즉 [그것은] 능히 표업을 일으키는 심(尋)ㆍ사(伺)가 생겨나는데 자량이 될 뿐이기 때문에 수전인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외면적으로 일어나는 이른바 외문전(外門轉)의 마음[外門心, 즉 심ㆍ사와 상응하는 마음]이 바로 업을 일으킬 때, 이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견소단의 마음은 인등기(즉 전인)가 되어 신ㆍ어업을 일으킬 뿐 결정코 찰나등기(수전인)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견소단의 식(識)이 비록 능히 사량(思量)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신체를 움직이거나[動] 말을 발(發)하는 공능은 없다.
즉 어떤 하나의 표업을 동발(動發)시키는 경우, 다 찰나에 걸친 마음[多心]의 사량이 그것을 동발시킨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표업과 함께 작용[俱行]하는 것은 오로지 최후 일 찰나의 마음뿐이니,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표업은 마땅히 찰나성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견소단의 식이 비록 능히 전인이 되어 어떤 표업을 일으킬지라도 표업은 이러한 식과 무간에 바로 낳아지지 않으니, 내문전(內門轉)의 마음은 신ㆍ어표업와 함께 작용[俱行]하는 식을 능히 인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견소단의 마음 역시 마땅히 표업에 대해 찰나등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소단인 가행의 의식(意識)은 능히 무간에 표업과 함께 작용하는 마음을 인기할뿐더러 역시 또한 표업과 더불어 작용하여 찰나등기가 된다.
따라서 견소단의 [식이] 비록 능히 원인(즉 轉因)이 되어 온갖 표업을 인기한다고 할지라도 수소단인 인등기의 마음을 떠나 표업과 함께 작용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는 욕계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유부무기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계경에서는 다만 ‘[견소단의 식은] 전전(展轉)하며 인등기가 된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여
“사견으로 말미암아 사어 등을 일으키게 된다”고 은밀히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는 ‘그것(즉 견소단의 사견)은 무간에 표업과 함께 작용하는 식을 능히 인기하여 낳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밀의(密義)로서
“견소단의 마음은 내문전이기 때문에 능히 표업을 일으킬 수 없다”고 설하였으니,
그렇기 때문에 경(經)과 논(論)은 이치상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견소단[의 식]이 만약 표색(表色)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이러한 색은 마땅히 견소단이 되어야 하지만, 색이 견소단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성립시켰다.6)
그러나 만약 5식신(識身)의 경우라면 오로지 수전인이 될 뿐이니, 무분별이기 때문이며, 외문(外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7) 수소단의 의식(意識)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하니, 유분별이기 때문이며, 외문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인과 수전인의 관계를]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인이면서 수전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견소단의 마음이 그러하다.
수전인이면서 전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眼) 등의 5식이 그러하다.
전인이면서 역시 수전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수소단의 일부인 의식이 그러하다. 전인도 아니고 수전인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그 밖의 일체의 수소성(修所成)의 식(識)이 그러한데,8) 수소성은 무분별이기 때문이다.9)
그리고 이숙생(異熟生)의 식은 역시 수전인이 될 수 있으니, 이 같은 뜻에 대해서는 『순정리론』 제36권에서 성립시킨 바와 같다.10)
전인(轉因)과 수전인(隨轉因)의 마음은 반드시 동일한 성질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이를테면 앞의 전인의 식(識)이 만약 선한 성질이라면, 뒤의 수전인의 식은 선 등의 세 가지 모두와 통하며, 전인의 성질이 불선ㆍ무기일 때도 역시 그러하다.
오로지 모니(牟尼)이신 세존의 전인과 수전인의 식만은 대부분 그 성질이 동일한데, 일부 동일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즉 전인이 만약 선심이라면 수전인도 역시 선심이며, 전인의 마음이 만약 무기라면 수전인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니, 상속하는 찰나에 결정코 미혹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어떤 경우 무기심에 따라 선심이 일어나는 일은 있어도 선심에 따라 무기심이 일어나는 일은 일찍이 없었으니, 불세존께서 혹 설법 등을 행함에 있어 마음이 증장하는 경우는 있어도 쇠퇴하여 없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전인과 수전인의 선 등 각기 세 가지 성질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에 준하여 나타내고 해석[標釋]하는 중에 [다음의 사실이] 충분히 밝혀지고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발동된 온갖 업이 선ㆍ악 등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인등기(因等起)에 따른 것으로, 찰나등기에 따른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선심에 의해 인발(引發)된 업이라 할지라도 이미 [찰나등기심으로서] 불선이나 무기의 마음과 함께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어떠한 이치에서 악이나 무기를 성취한다는 사실을 능히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럴 경우 마땅히 [성질이] 다른 사유(思惟)를 원인으로 하여 그것과는 다른 성질의 업을 인기하여 낳는다고 해야 하며,
이와 같다고 한다면 부지런히 노력하여 선을 행하려고 하는 자도 도리어 불선이나 무기의 업을 낳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하거나, 혹은 이와는 반대되는 경우가 있어 정리(正理)에 어긋나게 된다.
따라서 업이 선 등을 성취하는 것은 결정코 전인의 힘에 의한 것이지 수전인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니, 그 이치는 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선정심에 수반되는 온갖 무표업은 이와 동시에 일어나는 마음과 동일한 결과[一果]이기 때문에 그것의 선한 성질은 수전인의 힘에 의해서도 성취될 수 있다. 즉 [그러한 선한 성질은] 결정코 이러한 마음(즉 선정심)에 소속되어야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