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무리의 구성우너들은 서로를 매우 잘 알았으며,
평생을 친구와 친척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갔다.
고독과 프라이버시는 없었다. 이웃 무리들은 자원을 놓고 경쟁했을 테고 싸우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호적인 접촉도 잇었다.
서로 구성우너을 교호나하고, 함께 사냥하며, 희귀한 사치품을 매매하고, 종교적 축제를 벌였으며,
외부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힘으 합치기도 했다.
이런 협력은 호모사피엔스의 중요한 트레이드 마크였고,
다른 인간 종들에 비해서 결정적 우위를 누리게 해주었다.
어떤 때는 이웃 무리와의 관계가 워낙 가까워서
이들이 하나의 부족을 구성하고 동일한 언어와 신화와 규범과 가치를 공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외부 관계의 긴밀성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위기가 닥쳐 부족들이 공동으로 행동하고,
심지어 사냥이나 싸움, 축제를 함께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였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소규모 집단에서 보냈다.
교역은 대체로 조가비나 호박, 염료 같은 귀중품만으로 한정되었다.
과일이나 고기 같은 주식을 교역했다든지,
다른 무리에게서 사들이는 것에 의존해서 살아간 무리가 있었다든지 하는 증거는 없다.
사회정치적 관계도 드문드문 일어났다.
부족은 영속적인 정치적 틀로 기능하지 못했다.
또한 계절마다 회합하는 장소를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영구적인 도시나 시설은 없었다.
평균적인 개인은 몇 달 동안 자기 집단 외의 사람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며 살았을 것이고,
평생 만나는 사람도 불과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사피엔스 집단은 넓은지역에 희박하게 퍼져 있었다.
농업혁명 이전 지구 전체의 인구수는 오늘날 카이로보다 적었다.
대부분의 사피엔스 무리는 먹을 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며 길위의 삶을 살았다.
이들의 이동에 영향을주는 것은 계절의 변화, 동물들의 연례 이동, 식물의 성장주기였다.
이들은 같은 터전 내에서 왔다 갔다 이동하면서 살았는데,
그 전체 영역은 수십 ~ 수백 제곱킬로미터였다.
가끔은 자기 세력권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헤매는 무리들이 있었다.
원인은 자연재해, 폭력적 분쟁, 인구 증가에 의한 압박, 칼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결단 등이었다.
이런 방랑은 인간이 외부 세계로 팽창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렵채집인 한 무리가 40년마다 한 번씩 둘로 나뉘며,
갈라져 나온 집단이 원래 있던 곳보다 1백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새로운 영토로 이주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동부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1만 년이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식량이 특별히 풍부한 예외적인 경우,
무리들은 한 철을 같은 지역에 서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한 지역에 영구적인 캠프를 차리기도 했다.
식량을 말리고 훈제하고 냉동하는 기술 덕분에 좀 더 오래 한 곳에 머무는 것이 가능해졌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해산물과 물새가 풍부한 바닷가와 강변을 따라 영구적으로 어촌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농업혁명보다 훨씬 앞선 역사상 최초의 영구 정착지였다.
이르면 45,000년 부터 어촌은 인도네시아 제도의 연안에 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마을은 호모 사피엔스가 최초의 대양 횡단사업 ㅡ 호주 침략 ㅡ 을 시작하는 기지였을지 모른다.
9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