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념처의 몸 관찰 가운데 '들숨과 날숨 관찰'을 따로 설한 것이다.
1. 들숨ㆍ날숨의 관찰에 관한 경의 내용
중아함경_098. 염처경(念處經), 4념처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들숨을 생각하되 들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고,
날숨을 생각하되 날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며,
[念入息卽知念入息, 念出息卽知念出息]
들숨이 길면 들숨이 긴 줄을 알고,
날숨이 길면 날숨이 긴 줄을 알며,
들숨이 짧으면 들숨이 짧은 줄을 알고,
날숨이 짧으면 날숨이 짧은 줄을 알며,
온몸으로 숨을 들이쉬는 것을 배우고,
온몸으로 숨을 내쉬는 것을 배우며,
몸의 행을 그치고 숨 들이쉬는 법을 배우고,
입의 행을 그치고 숨 내쉬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비구는 안의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의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서, 생각을 몸에 두어, 아는 것이 있고 보는 것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염(念)]
여기서는 ‘생각하다’로 번역되어 있으나,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고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다[기억하다]‘는 뜻이다.
https://cafe.daum.net/sutta-nipata/ROKO/70
[절뚝발이, 문지기, 톱, 농부와 소의 비유]
https://cafe.daum.net/sutta-nipata/RTFO/9
[몸ㆍ입ㆍ뜻의 행]
잡아함경_568. 가마경(伽摩經)
“장자여, 날숨ㆍ들숨은 곧 몸의 법으로서 몸을 의지고 몸에 속해 있고 몸을 의지해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날숨ㆍ들숨을 몸의 행이라 합니다.
거친 생각[각]이 있고 미세한 생각[관]이 있기 때문에 곧 입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거친 생각이 있고 미세한 생각이 있는 것을 곧 입의 행이라 합니다.
생각과 의도는 곧 마음[뜻]의 행으로서 마음을 의지하고 마음에 속해 있고 마음을 의지해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의도는 곧 뜻의 행이라 합니다.”
증일아함경_17. 안반품(安般品)[1]
어떤 비구가 아무도 없는 한가하고 고요한 곳을 좋아하여,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가부좌하고 앉아, 다른 생각 없이 뜻을 코끝에 매어두고,
내쉬는 숨이 길면 긴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길어도 긴 줄을 알며,
내쉬는 숨이 짧으면 짧은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짧아도 짧은 줄을 안다.
내쉬는 숨이 차가우면 차가운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차가와도 차가운 줄을 알며,
내쉬는 숨이 따뜻하면 따뜻한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따뜻해도 따뜻한 줄을 알아서,
온 몸의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관찰하여 모두 다 안다.
어떤 때에는 숨이 있으면 있는 줄을 알고, 어떤 때에는 숨이 없으면 없는 줄도 안다.
만일 그 숨이 심장(心臟)에서 나오면 심장에서 나오는 줄을 알고,
혹은 그 숨이 심장으로 들어가면 심장으로 들어가는 줄을 안다.
라운아, 이와 같이 안반을 닦아 행하면, 곧 근심ㆍ걱정ㆍ번민ㆍ어지러운 생각 따위가 다 없어지고, 큰 과보를 성취하여 감로의 맛을 얻게 될 것이다.
[참고] 뗏목의 비유, 잡아함경_1172. 독사경
상자라고 한 것은, 추한 4대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를 비유한 것이다.
독사라고 한 것은, 땅ㆍ물ㆍ불ㆍ바람의 경계에 비유한 것이다.
다섯 원수라고 한 것은, 빛깔ㆍ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을 비유한 것이다.
몸 안의 여섯 도적이라고 한 것은.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 사랑과 기쁨을 비유한 것이다.
빈 마을이라고 한 것은,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빈 마을의 떼도적이라고 한 것은,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을 비유한 것이다.
사나운 흐름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 흐름인 애욕ㆍ존재ㆍ 소견ㆍ무명의 흐름을 비유한 것이다.
강이라고 한 것은 세 가지 욕망인 욕애ㆍ색애ㆍ무색애를 비유한 것이다.
이쪽 언덕이라고 한 것은, 존재하는 몸을 비유한 것이다.
저쪽 언덕이라고 한 것은, 무여열반을 비유한 것이다.
뗏목이라고 한 것은 8정도를 비유한 것이다.
손발을 방편 삼아 흐름을 끊고 건넌다고 한 것은, 열심히 노력하여 용맹하게 저쪽 언덕에 이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2. 들숨날숨의 여섯 가지 단계
수행본기경_5. 출가품(出家品)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qM/5
이에 보살은 사라수(娑羅樹) 아래 앉아서 일체를 위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고 있었는데, 여러 하늘들이 감로(甘露)를 바쳤지마는 보살은 하나도 받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맹세하고서 하루에 한 톨의 유마[麻]와 한 톨의 쌀만 먹으면서 정신과 기운을 잇고 있었느니라.
단정하게 6년 동안 앉아 몸은 파리해지고 살갗과 뼈는 서로가 맞붙었는데, 맑고 고요히 하고 잠잠하게 하여 한마음으로 안에서는 안반(安般)을 생각하였나니,
첫 번째는 (들숨 날숨을) 헤아리며[數],
두 번째는 (뜻이 안정되도록) 따르며[隨],
세 번째는 (산란한 생각을) 멈추며[止],
네 번째는 (도의 뜻을) 자세히 살피며[觀],
다섯 번째는 (열반으로) 돌아오며[還],
여섯 번째는 (있는 바가 없이) 깨끗이[淨] 하여 뜻을 4의지(意止)와 4의단(意斷)과 4신족(神足)의 세 가지에 노닐면서 열두 가지 문[十二門]을 벗어나 마음이 갈라지거나 흐트러지지 않게 하였으므로,
신통이 미묘하게 통달하고 욕심과 악한 법을 버리며,
다시는 5개(蓋)가 없어지고 5욕(欲)을 느끼지 아니하며 여러 나쁜 것이 저절로 스러지고 생각과 헤아림이 분명해지며,
생각과 봄이 함이 없어서[無爲] 마치 건장한 사람이 원수를 이기게 된 것과 같아지며,
뜻이 깨끗해져 3선행을 이루게 되었느니라.
아비달마장현종론_7.3. 가행위(加行位)[2], 부정관ㆍ수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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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식념은 여섯 가지의 원인을 갖춤으로 말미암아 그 상이 원만하게 된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수(數)이며,
둘째는 수(隨)이며,
셋째는 지(止)이며,
넷째는 관(觀)이며,
다섯째는 전(轉)이며,
여섯째는 정(淨)이다.
‘수(數, ganaṇā)’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집중[繫]하여 들숨과 날숨을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헤아리는 것[數]을 말하는데,
마음이 경계(즉 입ㆍ출식)에 너무 메이거나[聚] 흩어지는 것[散]을 염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과실에 대해서는 생략함)
‘수(隨, anugam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에 따라[隨]가면서 들숨과 날숨이 짧은지, 긴지, 어느 정도 멀리 이르는지, 또한 다시 되돌아와 [어느 정도까지 이르는지] 생각[念]하는 것을 말한다.
먼저 들숨의 경우, 온몸에 두루 미치는지, 일부분에 미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즉 그 숨을 따라 들어가 목구멍ㆍ심장ㆍ배꼽ㆍ엉덩이ㆍ넓적다리ㆍ무릎ㆍ 종아리ㆍ복숭아 뼈ㆍ발가락에 이르기까지 항상 따라 쫓으며[隨逐]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이러한 들숨은 발바닥으로부터 나와 금륜(金輪) 아래로 뚫고 나가 풍륜(風輪)에 이르렀다가 다시 되돌아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날숨의 경우에도 그것이 몸을 떠나 1책(磔)에 이르는지, 1심(尋)에 이르는지 생각해야 한다.81) 즉 그것이 이르는 곳까지 항상 따라 쫓으며 생각[念]해야 하는 것이다.
‘지(止, sthān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생각[念]을 집중하여 오로지 코끝에 두고, 혹은 미간에 두고, 나아가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곳에 두고, 그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한[安止] 채로,
마치 구슬을 꿴 실을 관찰하듯이, 숨이 몸에 머물러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숨이 몸을] 차갑게 하는지, 따뜻하게 하는지, 손해가 되는 것인지, 이익이 되는 것인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관(觀, upalakṣaṇā)’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숨의 바람[息風]을 관찰하고 나서,
다시 숨과 함께 존재하는 대종과 조색(造色),
그리고 이러한 색에 근거하여 머무는 심과 심소를 관찰하는 것이니,
다 같이 5온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전(轉, vivartanā)’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숨의 바람을 반연하는 지각[覺]을 이후에 생겨나는 뛰어난 선근(善根) 중으로 이전(移轉)하여 안치하는 것을 말하니,
[여기서 뛰어난 선근이란] 말하자면 염주(念住)를 시작으로 하여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는 [수행도를] 말한다.
‘정(淨, pariśuddhi)’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세제일법)로부터 승진하여 견도(見道) 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82)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숨을 반연하는 지각을] 염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로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 [이전 안치하는 것을] 일컬어 ‘전’이라 하고,
진지(盡智, 3계 9지의 번뇌를 모두 끊었음을 아는 智) 등에 [드는 것을] 바야흐로 ‘정’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좌선삼매경_2.4. 정신작용을 다스리는 법문, 아나반나 삼매, 수식관
https://cafe.daum.net/sutta-nipata/RRt3/6
2014. 02. 07.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