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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11권
21. 각분품 ②[2]
[안의 법이 찰나임을 성립시킴]
다음에는 따로 안의 법이 찰나임을 성립시키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처음 일어남과 이어서 일어남과
길게 일어남과 의지하여 일어남과
변하여 일어남과 더불어 성숙하여 일어남과
하열하게 일어남과 또한 뛰어나게 일어남이요.
명(明)으로 일어남과 무명으로 일어남과
다른 곳에서 일어남과
종자로 일어남과 종이 없이 일어남과
상(像)으로 일어남의 열네 가지가 일어난다.
[釋] 이 두 게송은 열네 가지가 일어나서 안의 법인 모든 행이 찰나의 뜻임을 성립시킨 것이다.
첫째는 처음 일어남이니, 이른바 가장 처음의 자기의 체에서 생겨난 것이다.
둘째는 계속하여 일어남이니, 이른바 처음의 찰나를 제하고는 나머지의 찰나에서 생겨난 것이다.
셋째는 길게 일어나는 것이니, 이른바 잠자코 먹으며 범행과 정수(正受)로 길게 기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의지하여 일어남이니, 이른바 눈 등의 모든 식이 눈 등의 근(根)을 의지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변하여 일어남이니, 이른바 탐심 등의 염오가 물질 등으로 하여금 변하여 생기게 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성숙하여 일어남이니, 이른바 태를 이룸과 어린애 시절과 동자의 시절과 소년과 장년의 시절과 중년의 시절과 노인의 위치가 생기는 것이다.
일곱째는 하열하게 일어나는 것이니, 이른바 여러 악한 갈래에 태어나는 것이다.
여덟째는 뛰어나게 일어남이니, 이른바 여러 좋은 곳[善道]에 태어나는 것이다.
아홉째는 명(明)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欲界)의 뒤의 두 하늘과 색계(色界)의 여러 하늘과 무색계(無色界)의 여러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다.
열째는 무명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이른바 앞의 명의 처소를 제외하고 나머지의 곳에 태어나는 것이다.
열한째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이른바 이곳에서 죽어 저 곳에 태어나는 것이다.
열두째는 종자로 일어나는 것이니, 이른바 아라한(阿羅漢)을 제외하고 최후의 다섯 가지 음(陰)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열셋째는 종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른바 앞을 제외한 최후의 다섯 가지요, 음을 제외하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뒤에 생을 받을 종자가 없기 때문이다.
열넷째 상(像)으로 일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여덟 가지의 해탈을 닦는 선정의 사람은 선정의 자재한 힘 때문에 여러 행의 상이 일어난다.
[문] 다시 무슨 인연으로 이 열네 가지 종자가 일어남을 성립시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속이(續異)와 단이(斷異)와
수장(隨長)과 또한 수의(隨依)와
주과(住過)와 거과(去過)와
무주(無住)와 무무사(無無死)이며,
또한 심상(心相)을 따름이 있으니
수행하는 자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아홉 가지 인(因)에 따라
앞의 열네 가지의 일어남을 이룬다.
[釋] 이 두 게송은 아홉 가지의 인(因)으로써 앞의 열네 가지의 일어남을 성립시켰다.
아홉 가지의 인이라 함은,
첫째는 속이요, 둘째는 단이요, 셋째는 수장이요, 넷째는 수의요, 다섯째는 주과요, 여섯째는 거과요, 일곱째는 무주요, 여덟째는 유사(有死)요, 아홉째는 수심(隨心)이다.
첫째 속이(續異)의 인은 첫 번째 일어남을 성립시킨다.
그것은 만일 최초로 일어날 때에 인의 체가 차별이 없는 것이라면 곧 뒤의 때에 모든 행이 서로 계속하면서도 일어남이 또한 차별이 없을 것이니 인의 체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이 차별이 있음으로 말미암기에 뒤에 나머지의 여러 행이 찰나에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 단이(斷異)의 인은 두 번째 계속해서 일어남을 성립시킨다.
만일 하나하나에 차별의 인이 없다면 곧 뒤의 때에 차별을 끊는 것을 또한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끊음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기 때문에 여러 행이 찰나에 일어나는 뜻을 이루게 된다.
셋째 수장(隨長)의 인은 세 번째의 길게 일어남을 성립시켜서 능히 여러 행을 원만하게 하기에 장(長)이라고 이른다.
만일 찰나에 없는데도 여러 행에 장양(長養)이 있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자신이 머묾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만일 여러 행이 머묾을 얻게 되면 점점 커서 원만함을 얻지 못하여 장양(長養)한다고 이를 수가 없다.
넷째 수의(隨依)의 인은 네 번째의 의지하여 일어남을 성립시킨다.
만일 고집하기를 능의(能依)는 머물지 아니하고 소의(所依)가 머물게 된다고 하면 이는 그렇지 않다.
마치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아서 사람은 가고 말은 가지 않는다고 하면 이러한 이치는 있지 않다.
이와 같아서 식(識)이 근(根)을 의지하는데 식은 찰나가 있고 의(依)는 찰나가 없다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도 또한 그렇다.
다섯째 주과(住過)의 인은 여섯 가지의 일어남을 성립시켰으니, 이른바 변해 일어나고 성숙하여 일어나고 하열하게 일어나고 뛰어나게 일어나고 밝음[明]에서 일어나고 무명(無明)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변해서 일어나고 성숙에서 일어남을 성립시킨다고 함은,
만일 여러 행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곧 머물러서 멸하지 않는다고 집착한다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변하여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니, 이른바 탐욕 등이 색(色)으로 변하는 것을 길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처음에 변함이 없었으면 뒤에도 또한 그러하다. 만일 처음에 변함이 없고 뒤에 성숙된 위치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먼저 변함이 있었고 뒤에 바야흐로 성숙하기 때문에 하열한 것이 일어나고 뛰어난 것도 일어나며 찰나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만일 여러 행이 머묾을 얻어서 착함과 악함의 훈습(熏習)이 있어서 순서대로 과를 준다고 고집하면 그렇지 않다.
여러 행이 머물지 않아 순서대로 서로 계속하면서 각기 과를 주게 된다고 함은,
이 뜻이 그러하여서 밝음이 일어나고 무명이 일어나며 찰나도 또한 그러함을 성립시킨다.
만일 여러 행이 머묾을 얻게 되면 명이 일어남도 또한 없을 것이요, 머물지 않으면 곧 마음으로 말미암아 전한다. 그러기에 없다.
무명이 일어남도 또한 그러하여서 뒤의 때에 변하여 달라짐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거과(去過)의 인은 열한 번째의 다른 곳에 일어남을 성립시킨다.
만일 여러 행이 다른 곳에 간다고 고집한다면 그렇지 않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묻는다. 여러 행이 가는 것을 일어난다고 하여 이미 여러 행을 가져다가 다른 곳에 갖다 놓았으면 일어나지 아니함이 된다.
여러 행을 가져다가 다른 곳에 갖다 놓고도 만일 일으키거나 이미 데리고 갔으면서 이곳에서 일어났으면 다른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곧 머물면서 갔다고 하면 이는 뜻이 서로 어긋난다.
만일 일어나지 아니하고 데리고 갔다면 일어나지 않아서 본래 갈 것이 없는데 간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 말의 뜻은 맞지 않다.
또는 만일 여러 행이 가고도 이곳에 머묾을 지어서 곧 짓는 것을 짓는다고 하면서 여러 행으로 하여금 갔다고 하면 이 또한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곳에 머물면 다른 곳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 행이 다른 곳에 이르러서 바야흐로 짓는 것을 짓는다고 하면 이도 또한 그렇지 않다.
그것은 떠나감이 있지 않으면서 여러 행이 다른 곳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곳에 머물면서 만일 다른 것에 머문다고 하면 여러 행을 떠난 밖이어서 필경에는 짓기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그러기에 다르지 않다.
여러 행이 서로 계속되면서 가서 지음이 있으나 가는 것은 이미 체가 없다. 따라서 찰나의 뜻이 이루어진다.
만일 네가 말하기를
“실제로 가는 것이 없다”고 하면
어찌해서 세상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겠는가?
마땅히 말하기를
“간격이 없이 서로 계속하기에 거짓으로 간다”고 이르나
실제로 가는 체가 없는 것이다.
만일 네가 말하기를
“다시 어떠한 인이 있어서 여러 행이 서로 계속하여 감을 얻느냐?”고 하나,
마땅히 말하기를
“인연이 한량없이 있고 마음의 힘이 자재하다. 그러기에 위의(威儀) 등을 감이 있다고 하고 먼저 세상의 업이 자재하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기에 중음(中陰) 가운데는 가는 것이 있으며 손의 힘이 자재하다.
그러기에 화살을 놓고 돌을 던져 감이 있으며 의지함이 자재하다.
그러기에 수레를 타고 배를 타면 가는 것이 있고 부리는 힘이 자재하다.
그러기에 바람이 물건에 불면 가는 것이 있으며 자기의 체가 자재하다.
그러기에 바람 성품의 곁에 가면 불의 성품은 위로 가고 물의 성품은 아래로 감이 있으며 술력(術力)이 자재하다.
그러기에 주문을 의지하고 약을 의지하여 허공에 있으면서 가는 것이 있다. 그리고 자석(磁石)이 자재하다.
그러기에 능히 쇠로 하여금 가는 것이 있게 하며 신통의 힘이 자재하다. 그러기에 신통을 타고 간다.
이와 같은 것들의 한량없는 인연이 있어서 능히 여러 행으로 하여금 서로 계속하는 것을 거짓으로 간다고 이르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곱째 무주(無住)의 인이 열두 번째의 일어남을 성립시킨다.
만일 여러 행이 머묾을 얻고 다른 때에 다시 종자가 있어서 일어난다고 함은 그렇지 않다. 찰나찰나에 다른 인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 행이 머물지 아니하고 뒤에 종자가 일어난다고 하면 이 뜻은 그러하다.
여덟째 죽음이 있다[有死:無無死]고 함의 인은 열세 번째의 종자가 없이 일어남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만일 찰나가 없으면서 죽을 때에 종자가 없이 일어난다고 함은 그렇지 않다.
먼저 종자의 일어남이 있고 뒤에 목숨을 마칠 때에 바야흐로 종자가 없이 일어난다고 함도 또한 그렇지 않다. 하나하나 찰나의 인은 체가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죽는 마음의 찰나는 이룸을 얻을 수 없다.
아홉째 마음을 따른다고 함의 인은 열네 번째 상(像)이 일어남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마음이 자재함으로 말미암아 찰나찰나에 상이 일어남을 얻는다. 그러므로 만일 찰나가 없이 상이 일어남을 얻는다고 함은 이러한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안의 유위의 법의 찰나를 별도로 성립시켰습니다.
다시 어떠한 인연으로 능히 밖의 법인 4대(大)와 여섯 가지의 지어지는 색상이 찰나임을 성립시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많아져서 커짐으로 말미암고 말라서 굳어짐으로 말미암으며
성품이 움직이고 증성(增盛)하며 감식(減息)하고
두 가지 일어남과 네 가지 변함과
땔나무의 힘과 점점 미약(微弱)함이네.
또한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고 말하며
더불어 어려운 물음이 이루어진다.
일체의 모든 밖의 법이
찰나의 체 아님이 없다.
[釋] 이 두 게송은 열네 가지의 인으로써 밖의 법이 찰나인 것을 성립시켰다.
물[水]에는 두 가지의 인이 있으니,
첫째는 많아져 커지는 것[滋養]이요,
둘째는 말라서 굳어짐[涸]이다.
그런데 만일 찰나가 없으면, 물이 어느 때는 불어나서 많아지고 어느 때는 말라서 굳어짐을 가히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만일 사람이 묻기를
“이미 찰나가 없는데 물이 어떤 인연으로 하여 불어나서 많아지며 또는 어떤 인연으로 하여 말라서 굳어집니까?”라고 하면 능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물에 불어나서 많아짐이 있고 말라서 굳어짐이 있음을 본다. 그러기에 찰나가 있어서 물이 불어나서 많아지고 말라서 굳어지는 인임을 안다.
바람[風]에는 세 가지의 인이 있으니,
첫째는 성품이 움직임이요, 둘째는 더하여 성함이요, 셋째는 감(減)하여 쉬는 것이다.
만일 바람의 성품이 머물러 있으면 움직임이 없을 때에도 행하여야 할 것이니 행에 체가 없기 때문이며,
또는 더하여 성함도 없고 또한 감하여 쉬어짐도 없어야 할 것이니 그것은 머물러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땅[地]에는 여섯 가지의 인이 있으니,
이른바 두 가지의 일어남과 네 가지의 변함이다.
두 가지의 일어남이라 함은 물로 말미암고 바람으로 말미암아 땅이 일어남을 얻는 것이다.
이른바 겁(劫)이 생길 때에는 땅이 물과 바람의 결과이니 그러므로 땅도 또한 찰나인 것이다.
네 가지의 변함이라 함은 네 가지의 지음으로써 땅이 변함을 가히 얻는 것이다.
첫째는 업의 힘으로 지어진 것이니 중생의 업의 힘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람의 공능으로 지어진 것이니 파고[掘] 뚫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셋째는 모든 대(大)로 지어진 것이니 불과 물과 바람들의 대(大)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넷째는 시절(時節)로 지어진 것이니 때가 고쳐지고 바꾸어짐을 따라 다른 모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일 찰나가 없으면 네 가지의 변함을 얻을 수 없으니 인은 체가 없기 때문이다.
땅[地]에 여섯 가지 인이 있는 것이 이 찰나로 된 것임을 알면 빛과 냄새와 맛과 촉감 등의 여섯 가지 인이 또한 그러한 줄 안다. 그러기에 또한 찰나인 것이다.
불[火]에 한 가지의 인이 있으니, 이른바 땔나무의 힘이다. 땔나무의 힘에 불이 더하기 때문이다.
불이 일어남을 얻으면 땔나무는 불과 함께 일어나지만 땔나무는 머물러 있지 못한다.
불이 땔나무를 다 태우면 불도 또한 머물지 못한다.
만일 불이 땔나무로 말미암지 않으면 뒤의 때에 땔나무가 없어도 불은 마땅히 오래 머물러야 할 것인데 같은 뜻을 따름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불의 소리는 뒤의 말에 있다.
소리[聲]에는 한 가지의 인이 있으니, 이른바 점차 미약해지는 것이다.
비유하면 종소리와 같아서 뒤에는 점차 미약해짐을 얻는다.
그것은 만일 찰나가 없으면 뒤의 때에 소리가 작아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색(色)에는 한 가지의 인이 있으니, 이른바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
계를 받을 때에 마음을 따라 하품과 중품과 상품이 일어나니, 그것은 마음이 찰나로 인하기 때문에 과도 또한 찰나이다. 그러기에 밖의 법이 찰나임을 또한 이룬다.
또는 종합하여 어려운 물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내가 이제 너에게 묻겠다.
어찌해서 여러 행이 무상함은 얻고자 하면서 여러 행이 찰나에 멸함은 얻고자 아니하느냐?
만일 네가 말하기를
“하나하나에 찰나의 멸함을 알 수 없다”고 함은 그렇지 않다.
비유하면 등의 심지와 같아서 움직이지 않는 위치에서는 찰나를 또한 알 수 없거늘 네가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찰나가 없는 것을 체증(體證)하지 않느냐?”라고 하는가?
만일 네가 말한 등잔의 심지의 체에는 찰나가 있으나 그것이 미세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고 말해서 여러 행이 또한 그러하다면 어찌된 까닭에 찰나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만일 네가 말하기를
“등잔의 심지와 여러 행이 서로 같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서로 같지 않다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기의 성품이 서로 같지 아니함이요,
또 하나는 시분(時分)이 서로 같지 아니함이다.
만일 자기의 성품이 서로 같지 않다면 이 비유는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은 자기의 체로 비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지 않다.
등(燈)으로써 등을 비유하고 소[牛]로써 소를 비유하는 것이라면 비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시분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을 취한다면 이 비유는 또한 이루어진다.
그것은 등의 심지와 여러 행은 다 찰나인 것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찰나가 아닌 것으로는 비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다시 너에게 묻기를
“사람이 탈 것[乘]을 타는 것과 같아서 그 탈 것이 머물러 있을 때에 그 사람은 가는 것이냐, 아니냐?”라고 할 때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소의(所依)의 뿌리가 머물고 능의(能依)의 식이 간다고 함은 또한 그러한 이치가 아니다.
만일 네가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현재 등(燈)의 심지가 생각생각이 멸하는 것을 보면서 등주(燈炷)는 이와 같이 머무는가?”라고
하면 마땅히 말하기를
“네가 보는 것은 봄이 아니다. 그것은 등주가 서로 계속하여서 찰나찰나에 파괴됨이 있고 일어남이 있지만 네가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겠다.
만일 네 말과 같이 여러 행이 찰나찰나에 등의 심지와 같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어찌해서 알지 못하겠는가.
마땅히 말하기를
“여러 행이 전도된 물건이기에 서로 계속해서 찰나에 따라 전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이는 알 수 없는 것으로서 실은 따로따로 일어나니, 세상 사람들이 이를 일러 앞의 물건이라 하여 전도된 앎을 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상과 항상함이 항상 전도됨이 없을 것이니, 만일 전도된 체가 없으면 염오도 또한 없으니 다시 어느 곳으로부터 해탈이 있겠는가?
이러한 어려운 물음으로 인하여 여러 행이 찰나에 이루어져서 항상함이 없다는 뜻이 성립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무아의 뜻이 성립된다.
인(人)은 유(有)라고 말해야 합니까, 무(無)라고 말해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인(人)은 거짓이어서 실제로 있음이 아니고
실제라고 말해도 얻을 수 없다.
전도와 염오됨이니
염오의 인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釋] ‘인(人)은 거짓이어서 실제로 있음이 아니다’라고 함은,
인은 거짓 이름이어서 실체(實體)가 있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하면 한결같다는 집착에 떨어지지 않아 유와 무를 여의기 때문이다.
[문] 인은 실제로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없다고 알겠습니까?
[답] 실제라고 말하나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인이라고 하는 것이 색들의 있음과 같지 않아 실제로 얻을 수 없으며, 깨닫는 지혜로 증득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인은 깨닫는 지혜가 아니면 증득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나라고 함은 현재에 가히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말하기를
“얻을 수 없다고 하였음”은 그러함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답] 여기서 가히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 얻을 수 있음이 아니라 전도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없는데 나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전도를 이른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이 전도됨을 안다고 합니까?
[답] 염오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신견(身見), 이것이 염오이다.
이른바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되지 않으면 곧 염오됨이 아니다.
[문] 어찌해서 나에 집착함이 염오인 줄 압니까?
[답] 염오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나의 집착이 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탐심 등의 염오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기에 이것이 염오인 줄 아는 것이다.
[문] 그대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색 등의 다섯 가지의 음(陰)을 인의 거짓 유(有)라고 말하니, 이 인과 음은 하나입니까, 다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거짓[假]의 인(人)과 실제의 음(陰)은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가 없다.
만일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말하면
곧 둘이 되는 허물이 있게 된다.
[釋] 거짓[假]의 인은 음과 하나라고 말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말하게 되면 둘로 보는 허물이 생긴다.
둘로 보는 허물이라 함은 만일 인과 음이 하나라 하면 음이 곧 인이어서 인까지가 실제로 있음이 되고,
만일 인과 음이 다르다면 음은 비록 인이 아니더라도 인 또한 실제로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이라고 함은 시설(施設)이어서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 여래께서 기론(記論)이 이루어짐을 그치게 하셨다.
게송으로 말한다.
만일 인을 집착하여 실제로 있다고 하면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마땅히 말하겠지만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도리가 없다.
[釋] 만일 사람이 대사(大師)의 가르침을 어겨서 인이 사실이라고 집착하면 인과 음이 하나임과 다름과는 마땅히 말하여 집착할 수 있지만 음과 더불어 하나임과 다름과는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만일 네가 말하기를
“인은 가히 말할 수 없다. 마치 불과 땔나무는 다르지도 아니하고 다르지 않음도 아닌 것과 같다”고 함은 그렇지 않다.
게송으로 말한다.
다른 모양과 세상의 견해와
성인의 말씀은 또한 그러하지 않아서
불과 땔나무는 말할 수 없음이 아니며
두 가지를 가히 얻기 때문이다.
[釋] ‘다른 모양’이라 함은, 불은 불의 대(大)를 말하고 땔나무는 다른 대(大)를 가리키는 것이니, 각기 다른 모양이 있다. 그러기에 불과 땔나무는 다른 것이다.
‘세상의 견해’라 함은, 세상 사람들이 불을 떠나서 땔나무를 보니 이른바 가히 태울 수 있는 나무 등이다.
또한 땔나무를 떠나서 불을 보니 바람이 불꽃을 불어 가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불과 땔나무는 다르다는 것이다.
‘성인의 말씀은 또한 그렇지 않다’고 함은 부처님 세존께서는 어느 곳에서나 불과 땔나무의 하나임과 다름을 말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네가 불과 땔나무는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고 집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만일 네가 말하기를
“땔나무를 떠나지 않고 불을 보았으므로 바람이 곧 땔나무다”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니, 불과 바람의 두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게송으로 말한다.
둘이 있기에 식(識)이 일어나니
인(人)을 연(緣)한다는 것은 뜻이 아니다.
멸(滅)을 좋아하고 생을 싫어하면서
생을 말하는 것은 다시 이치가 아니다.
[釋] 만일 사람이 인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여 이른바 보는 것이고 듣는 것이며, 깨닫는 것[覺者]이고 인식하는 것[識者]이며, 먹은 것이고 아는 것이며,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저 눈 등의 식(識)이 일어남에 인으로써 연을 삼아서 인이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을 주체로 하여서 인이 짓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인으로써 연을 삼는 것은 두 가지가 있게 되니, 식이 일어나고 인이 연이 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인은 식이 일어나는 가운데 조그마한 힘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인으로써 주체를 삼는다고 함은, 멸함을 좋아하고 태어남을 싫어하면서 생을 말하는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다.
만일 인이 주체가 되어 이미 사랑하는 식을 내었으면 마땅히 필경에 멸하지 않게 할 것이니, 마땅히 멸하여 나지 않게 할 것이요,
사랑하지 않는 식은 마땅히 필경에 나지 않게 할 것이니, 마땅히 나게 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네가 마땅히 집착해서 인이 보는 것이요, 아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시 게송으로 말한다.
네가 실제의 인(人)이라고 집착하는 가운데는
어느 업인들 가히 성립하리오.
사실이 아닌데 억지로 사실이라 하면
부처님의 삼보리에 어긋난다.
[釋] 만일 인(人)을 실제로 있다고 여기면 네가 무슨 사업[業]을 가히 성립시키겠는가?
무릇 실제로 있으면 반드시 사업이 있게 된다. 눈 등은 깨끗한 물질[色]을 보는 것 등의 사업을 성립시킬 수 있는데 인은 이러한 것들의 사업을 성립시킬 수가 없다. 그러기에 인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는 네가 실체가 없는 인을 억지로 실체가 있는 인으로 여기면 곧 여래의 세 가지의 보리에 어긋난다.
첫째는 심심 보리(甚深菩提)요, 둘째는 불공 보리(不共菩提)요, 셋째는 출세 보리(出世菩提)이다.
만일 실제로서의 인으로 보면 이는 곧 심심 보리가 아니요, 곧 불공 보리가 아니요, 곧 세간에서 익히지 않는 보리가 아니다.
그러기에 이 집착은 세간에서 취하는 것이요, 외도들이 집착하는 것이요, 생사에서 항상 익히는 것이다.
또는 만일 인을 보는 자요, 또한 아는 자라고 하면 눈 등의 여러 근은 공용이 있음이 되는가, 공용이 없음이 되는가?
만일 공용이 있다면 이는 저절로 일어남이 되는가, 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남이 되는가?
[釋] 그들은 무엇을 의심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만일 공용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하면
곧 세 가지의 허물이 나게 되고
만일 인으로써 연을 삼으면
눈 등은 곧 쓸데없게 된다.
[釋] 만일 눈 등의 공용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말하면 인은 눈 등에 있어서 사업을 짓지 아니하게 되니 곧 세 가지의 허물이 생겨나게 되고,
만일 인으로써 연을 삼아서 공용이 일어나게 되면 눈 등의 여러 근(根)은 한결같이 공용이 없을 것이다.
[문] 무엇을 일러 공용이 저절로 일어나는 세 가지의 허물이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인(人)은 짓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요
용(用)은 항상 일어남이 아니기 때문이요,
일어남은 한 때가 아니기 때문인데
스스로 일어남은 곧 그러하지 않다.
[釋] 만일 눈의 공용이 인의 지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일어난다면 곧 인은 짓는 자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보는 자라 이르고 또한 아는 자라 하겠는가?
이는 첫 번째의 허물과 실수이다.
그리고 만일 눈의 공용이 저절로 일어나면 마땅히 항상 일어나야 할 것인데 마땅히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항상함이 아니다.
이는 두 번째의 허물과 실수이다.
만일 눈의 공용이 항상 일어난다면 곧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한꺼번에 일어나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나란히 일어나지 않는가?
이것이 세 번째의 허물과 실수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만일 저절로 일어난다고 말함은 맞지 않다.
[문] 인으로써 연을 삼으면 다시 어떠한 허물이 있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인(人)이 머물 때에 공용이 먼저 없었고
인이 무너질 때에 인이 끊기며
다시 제3의 체가 있어서
연이 된다고 함은 이런 뜻이 없다.
[釋] 만일 인(人)이 머물면서 공용과 더불어 연이 된다고 한다면 인이 이미 항상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공용은 먼저 없던 것이 뒤에 있게 되는가?
이 뜻은 그렇지 않다.
만일 인이 무너짐으로 연을 삼는다면 인이 무너지면 항상함이 없는 데 떨어지니, 이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만일 세 번째 머물지도 아니하고 무너지지도 않는 인이 연이 된다고 한다면 이러한 뜻이 있지 않다. 이러한 도리를 의지하기에 실제의 인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법은 무아(無我)인 인(印)이요,
진실 공(空)을 말하였으니
내가 있으면 다섯 가지의 허물이 있다.
그러기에 무아인 줄 알아라.
[釋] 법인경(法印經)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법은 무아이다”라고 하셨다.
진실공경(眞實空經) 가운데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업(業)이 있고 보(報)도 있으나 짓는 자를 가히 얻을 수 없다”고 하셨으며,
앞의 음(陰)을 버리고 뒤의 음을 일으켜서 일어나고 멸함이 오직 법이라고 하였다.
『증오경(增五經)』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내가 있다고 집착하면 다섯 가지의 허물과 실수가 있다.
첫째는 견처(見處)에 떨어져서 아견(我見)과 명자견(命者見)을 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외도와 한 가지이고,
셋째는 궁벽한 행과 삿된 행을 하는 것이고,
넷째는 공에 있어서 하고 싶어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고 머물지 않는 것이고,
다섯째는 성스러운 법이 청정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것은 아함(阿含)을 의지하여 실제의 인(人)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문] 만일 실제의 인이 없으면 어찌해서 세존께서 곳곳의 경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인이 있으니 이른바 아는 자이고 부담(負擔)하는 자로서 믿어 행하는 등의 사람을 따라 건립한다”고 하셨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염오된 법과 청정한 법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위(位)와 단(斷)을 다르게 말하였으며
행이 다르고 서로 계속됨이 다르지만
실제가 없어 거짓으로 설한 인이다.
[釋] 염오된 법과 청정한 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위차별(位差別)과 단차별(斷差別)이 있기 때문이요, 거짓의 인(人)에게 차별이 있음을 건립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짓의 인의 차별이 없으면 곧 행의 차별이 있음과 서로 계속되는 차별이 있음을 설할 수가 없다.
지경(知經)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것들의 여러 법을 염오된 법이라 이르고, 어떠한 것들을 안다고 이르는가? 이른바 청정한 법이다”라 하였으니,
부담경(負擔經)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무엇을 일러 부담(負擔)이라 이르는가?
이른바 염오된 법이다.
무엇을 일러 부담을 버린다고 하는가?
이른바 청정한 법이라 하였다.
행의 차별과 서로 계속되는 차별이 없으면 이 두 가지의 법을 설하여 아는 자와 부담하는 자를 위하지 아니할 것이다.
보리분의 법은 여러 위치에서 차별되니, 이른바 방편도(方便道)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구경도(究竟道)이다.
만일 행과 서로 계속되는 차별이 없으면 저 보리분의 법이 믿고 행하는 등의 사람의 차별을 따라 있음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의 인이 없음으로 말미암기에 법의 차별을 들어서 거짓[假]으로 설할 수 있다.
이러한 도리를 쓰기에 말한 것이 다만 거짓의 인임을 알겠다.
만일 부처님의 본뜻에는 이 거짓의 인을 말하여 실제의 인으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공용이 중생의 아견(我見)을 일으킴이 없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아견 일으킴을 위하지 않으셨으니
아견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시로 이미 익혔으니
쓰지 않으면 마땅히 해탈하리라.
[釋]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중생이 아견을 일으킴을 위하여 실제의 인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것은 중생들의 아견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는 중생들로 하여금 아견을 익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주 실제의 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중생들이 아견을 이미 익혔기 때문이요,
또는 아견을 지닌 중생은 해탈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의 인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일체의 공용이 없는 자는 다 마땅히 저절로 해탈을 얻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체의 제(諦)를 보지 못한 자는 아견이 있고 해탈은 없으니, 그것은 괴로움의 체(體)가 앞의 때에는 보지 못하다가 뒤의 때에 바야흐로 보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인(人)은 이와 같지 않아서 먼저 보지 못하던 것이 뒤의 때에 바야흐로 보는 것이 아니다.
또는 괴로움의 체가 앞의 때에도 보지 못하고 뒤에도 또한 보지 못하면 곧 해탈이 없는 것과 같아서
인의 체도 또한 그러하여 앞의 때에도 보고 뒤의 때에도 또한 보니 곧 해탈이 있다.
만일 실제로 아가 있으면 곧 결정코 아소(我所)가 있어서 이 두 가지의 집착으로부터 곧 아애(我愛)와 나머지의 번뇌를 일으키리니, 이와 같이 하면 곧 해탈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마땅히 실제의 인이 있음을 얻고자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견 등의 허물이 다 일어나기 때문이다.
[앞의 뜻을 종합함]
이와 같이 따로 보리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하여 맺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부끄러움 등의 공덕으로
보살은 항상 구족하여서
자기의 이익을 이미 버리지 아니하고
또한 남을 이롭게 함을 성취한다.
[釋] 이 뜻은 앞에서 나타낸 것과 같다.
「각분품」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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