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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4권
12. 정론[6]
12.22. 식염상품(食厭想品)
온갖 고통이 생기는 것은 모두가 음식을 탐내는 데로부터요, 또는 먹기 때문에 음욕의 발동에 도움을 준다. 욕심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고통은 다 음식과 음욕으로부터 생긴다.
음식의 탐욕을 끊기 위해서는 응당 음식을 싫어하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또 겁(劫)이 시작될 때의 중생은 천상으로부터 내려와서 인간에 화생했다. 몸에는 광채가 있고 자유로 날아다녔는데 지미(地味)를 맛보면서부터 많이 먹은 자는 곧 거룩한 광채를 잃었다.
이와 같이 하여 점차로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생겼으며 지금의 수명이 백 세 되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고통이 더욱 많아졌다. 모두가 음식을 탐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익을 잃게 되었다.
그러므로 먹는 일에 대하여 바르게 관찰하여야 한다.
또 음식을 탐착하기 때문에 음욕이 생기고 음욕으로부터 그 밖의 번뇌가 생기면 그 밖의 번뇌로부터 불선한 업을 짓고 불선한 업으로부터 세 가지 나쁜 갈래[惡趣]는 불어나며, 천상과 인간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온갖 쇠약과 고뇌는 다 음식을 탐냄에서부터 생겼다.
또 늙고 병들고 죽음의 현상도 다 음식 때문이다.
또 음식은 몹시 탐착하게 되는 것인지라 음욕은 비록 중하다 할지라도 그다지 사람을 괴롭히지 아니하나 음식이라는 것은 어린이거나 장년이거나 늙은이거나 속인이거나 출가한 이거나를 막론하고 먹을 것에 괴로움을 받지 아니함이 없다.
또 이 음식을 먹되 마음에 탐착하지 아니하기란 욕심을 여의지 못한 사람으로는 바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마치 칼을 받는 법과 같고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고 독사를 기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을 닦으면서 그것으로 밥을 삼고 밥을 탐내는 고통 때문에 시달리지 말라”고 하셨다.
여러 외도는 단식하는 법을 행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음식을 끊음으로써 고통을 여의지는 못하는 것이니, 생각해가면서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만일 먹는 것을 끊는 것만으로 번뇌를 끊지 못한다면 헛되이 죽을 뿐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먹는 것을 싫어하고 여의는 생각을 내면 위와 같은 허물이 없으리라.
[문] 어떻게 먹는 것에 싫어하는 생각을 내어야 하는가?
[답] 이 먹는 것은 원래 자체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어서 아무리 맛좋은 과일과 음식일지라도 다 깨끗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싫어해야 한다.
또 정결하고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깨끗하지 못할 때에 몸을 이롭게 할 수 있다.
곧 이로는 씹어야 하고 침으로 버무려서 모양이 구토할 것처럼 만들어진 다음에야 위장 안에 들어가서 몸을 이롭게 한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한 것인 줄 알 것이다.
또 이 음식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즐겨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비록 맛난 음식을 얻었을지라도 도로 토해 낸 뒷면 다시는 먹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알아라. 알지 못하는 소치로 그것을 맛있다고 여긴다.
또 음식의 인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역사를 하고 모으고 지키는 등의 이런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한량없는 죄업을 일으킨다.
또 모든 깨끗하지 못한 일은 다 음식 때문이다. 만일 음식이 없다면 무엇으로 인하여 가죽과 뼈와 피와 살과 그리고 똥과 오줌 등의 불결한 물질이 있겠는가?
또 모든 나쁜 갈래거나 뒷간 벌레 따위는 다 향기로운 맛을 탐내기 때문에 그 가운데 가서 나는 것이니, 먼저 업에 대한 부문 중에서 설명함과 같다. 목이 말라 죽은 중생은 물벌레로 되어나고 시끄러운 곳에서 죽으면 적 떼 안에 가서 나고 음착을 탐내다 죽으면 태중에서 태어난다 하는 따위이다.
또 이 음식을 여의면 큰 안락을 얻는다. 마치 형상 세계거나 열반 중에 가서 남과 같다.
또 음식 때문에 농사를 짓는 등의 고통이 있다. 이와 같이 음식의 깨끗하지 못한 괴로움을 관찰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12.23. 일체세간불가락상품(一切世間不可樂想品)
수행하는 이는 모든 세간의 온갖 것이 다 고통뿐이어서 마음에 즐거워 할 것이 없다고 본다.
또 이 수행하는 이가 기쁨을 여의는 선정을 닦을 때에는 무상하다는 생각 괴롭다는 생각 나가 없다는 생각ㆍ음식을 싫어하는 생각ㆍ죽는다는 생각 등과 같이 되어 마음은 온갖 세간을 즐겨하지 아니한다.
또 이 사람은 사랑하는 바를 보면 더욱 탐심을 돋우고 미워하는 바를 보면 진심을 더한다고 보기 때문에 다 같이 즐겨하지 않는다.
또 부귀한 사람은 수호하는 따위의 고통이 있는 줄 보고 빈궁한 사람은 모자라는 고통이 있는 것을 보며,
또 좋은 곳에 사는 사람은 장차 나쁜 곳에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나쁜 곳에 사는 사람은 현재에 모든 고통을 받고 있다고 본다.
또 현재의 부귀가 반드시 장차 떨어지게 되면 역시 이는 탐욕 등의 번뇌가 머무르는 곳임을 알며, 현재의 빈궁함도 벗어날 인연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온갖 세간을 탐내거나 즐겨하지 않는다.
또 중생이 좋은 곳에 나는 이는 적고, 나쁜 곳에 나는 이는 많다.
경전 중의 말씀에서
“좋은 곳에 나는 이는 적고, 나쁜 곳에 나는 이는 많으니라”고 함과 같다.
이러한 허물을 보기 때문에 열반만을 구한다.
또 이 사람은 탐욕 등의 허물을 본다. 번뇌가 항상 중생을 따르는 것이 마치 원수가 사람을 엿보다가 편의를 얻으면 갑자기 살해함과 같거니 이러한 원수와 도둑 안에서 어떻게 즐겨할 수 있겠는가?
또 번뇌로부터 착하지 못한 업을 지으며 항상 붙는 나쁜 과보는 마침내 벗어날 수 없음을 본다.
경전 중에서
“만일 너희가 나쁜 업을 지으면 현재에 지었거나 전생에 지었거나 내생에 지을 것이거나 간에 공중에 날아간다 해도 끝내 벗어날 수는 없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즐겨하지 않는다.
또 태어나는 등의 여덟 가지 고통은 오히려 복이 많은 사람에게조차 따라다니거든 더군다나 복이 없는 이에게이겠는가? 이렇게 되거니 어떻게 세간을 즐겨할 것인가?
또 독사를 담은 광주리와 다섯 가지 칼을 뽑는 도둑과 마을을 비우게 하는 도둑과도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항상 중생에게 따르거니, 어떻게 즐겨할 것인가?
또 짜고 매운 애욕의 바다에 표류하고 5욕의 독한 가시에 찔리며 무명의 어둠 속과 불구덩 속과 같은 괴로움이 항상 중생에게 따르거니, 어떻게 즐겨할 것인가?
괴로움이 많음을 안다. 왜냐하면 모든 세간을 관찰하건대 좋은 날의 경사스러운 모임이거나 꽃다운 숲의 무성함이거나 과일 나무의 번성함이거나 국토의 안락함이거나간에 영구히 존속되는 것은 없으며, 환락을 누리는 자는 적고 고통을 느끼는 자는 많다. 그러므로 온 세간을 즐겨하지 않는다.
[문] 이 생각을 닦아 익히면 어떠한 이익을 얻는가?
[답] 세간의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탐착하는 마음이 없다.
또 이 생각을 닦기 때문에 빨리 해탈을 얻고 생사하는 중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는다.
또 이러한 행은 이로운 지혜를 얻는 것이니, 늘 온갖 잘못된 행상을 익혔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사람은 마음에 번뇌를 가지지 않으며 혹시 번뇌가 일다가도 빨리 사라진다.
마치 한 방울의 물을 뜨거운 철판 위에 떨어뜨림과 같다.
수행하는 이는 세간을 즐겨하지 아니하므로 깊이 고요히 사라짐을 즐겨한다.
만일 세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고요히 사라짐을 깊이 즐길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세간의 것을 즐길 수 없다는 생각을 익혀야 한다.
12.24. 부정상품(不淨想品)
[문] 어떻게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닦는 것인가?
[답] 수행하는 이는 몸의 요소가 깨끗하지 못함을 본다. 이른바 부모의 깨끗하지 못한 길로부터 생긴 붉고 흰 것의 화합인 것이다.
또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한 물질로 성장한 것이니, 문들어진 음식의 액체가 적셔져 있다.
또 생겨난 처소도 깨끗하지 못하였으니, 어머니의 태중에는 불결한 것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또 똥오줌 등의 모든 더러운 물질이 모여서 몸이 되엇고 아홉 구멍 안에서는 항상 깨끗하지 못한 것이 흐른다.
또 몸이 있는 그곳은 곧 불길하고 불결하다.
또 음식과 의복이 사람의 몸에 닿았으나 모두가 불결하여서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
또 이 몸을 위하는 물품도 그것이 다 불결한 것이니, 목욕하는 물이나 혹은 세수대야[澡槃] 들이다.
또 몸으로부터 나오는 손발톱과 머리칼과 때며 눈물과 침 따위는 모두 불결한 것뿐이다.
또 죽은 시체를 보건대 불결하거든 이 몸이 죽을 때에도 그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본래부터 항상 불결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살았을 때에는 오직 나라는 마음으로 덮어가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여기게 되며, 또 죽은 사람에게 몸이 닿으면 깨끗하지 못하다고 말을 하나 머리카락이나 손발톱들은 바로 언제나 죽은 물건이다. 또는 한량없는 죽은 벌레도 항상 몸에 붙어 있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몸은 본래부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또 깨끗하지 못한 이[虱]와 파리와 등에 들의 모든 깨끗하지 못한 벌레가 언제나 몸에 달려든다. 그러므로 알아라. 깨끗하지 못하다.
또 이 몸은 마치 뒷간에 부정한 것이 항상 차서 그 뒷간 속으로부터 천 가지 벌레가 생기듯이 이 몸도 역시 그러하다.
또 이 몸은 무덤과 같다. 왜냐하면 송장이 묻혀 있는 곳을 무덤이라 하는데 이 몸에도 역시 많은 죽은 벌레가 그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한 것을 만드는 것이다. 깨끗한 처소이거나 호화로운 의복과 목걸이 들이거나 간에 이 몸으로 인하여 다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
또 모든 바라문들은 초상집과 산고 든 집에서는 음식을 받지 않는데,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몸 안에는 천만 가지의 벌레가 항상 나고 항상 죽는지라 그로부터 음식을 받아먹을 만한 사람조차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깨끗하지 못하다.
또 세간에서는 감옥(監獄)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기는데 이 몸은 바로 천 가지 벌레의 감옥이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하다고 한다.
또 이 몸은 항상 씻어야 한다. 만일 본시 깨끗하다면 어째서 씻을 필요가 있겠는가?
또 좋고 아름다운 꽃과 향과 목걸이를 가지고 이 몸을 장식한다. 그러므로 이 몸의 체성이 불결한지라 밖에 있는 깨끗한 물질을 빌어다가 장식하게 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사람의 몸은 가장 불결한 것이다. 다른 중생의 가죽과 털과 발톱과 이와 힘줄과 뼈와 살은 혹 쓸데가 있으나 사람의 몸에서는 단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으니 가장 불결하기 때문이다.
또 우발라(優鉢羅)와 발두마(鉢頭摩)의 여러 가지 연꽃들은 깨끗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불결하다고 말을 하지만 이 몸은 그렇지 않아서 다른 물질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성품 자체가 깨끗하지 못하다.
또 이 몸이 만일 깨끗하다면 의상(衣裳)으로써 덮거나 가리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옷으로써 똥오줌의 덩이를 덮어 놓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처럼 여자는 이와 같아서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 남자를 속여 호린다. 남자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몸은 두루 다 항상 불결한 것을 내놓는다. 이른바 아홉 구멍의 불결한 문과 모든 털구멍은 하나라도 깨끗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한 줄 알아야 한다.
[문]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닦으면 어떠한 이익을 얻게 되는가?
[답] 남녀 간에 깨끗하다는 생각을 취하기 때문에 탐욕을 일으킨다.
이 탐욕으로부터 모든 죄악의 문을 열게 되므로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닦으면 바로 탐욕을 억제한다.
왜냐하면 이 몸은 전부가 냄새나고 더럽고 불결한 것이지만 다만 엷은 가죽이 덮였기 때문에 알지 못할 뿐이다. 옷으로 불결한 뭉치를 덮었을 뿐이니 정결을 좋아하는 이라면 멀리 여이어야 한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푸른 어혈 등의 생각으로써 온 몸을 무너뜨리며 몸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탐욕을 내지 않는다.
또 현재에 푸른 어혈 따위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문] 실지로는 아직 푸르지 아니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푸르다고 보는가?
[답] 수행하는 이는 신해(信解)하는 힘으로 이 푸른 모습을 취하면서 온갖 빛깔을 보되 모두 푸른 어혈이라 여긴다.
[문] 이런 관법(觀法)은 아니 뒤바뀐 것이 아닌가?
[답] 이 몸에는 푸른 어혈의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나무 가운데도 정결한 성품이 있다”고 함과 같다.
또 항상 푸른 어혈의 모습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다른 빛을 이긴다.
마치 푸른 구슬의 빛깔이 흰빛에 비춤과 같다.
그와 같아서 오랫동안 푸른 어혈 등의 모습을 익히면 깨끗하지 못하다 함이 두루 갖추어 진다.
깨끗하지 못하다 함이 두루 갖추어지면 곧 음욕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음욕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모든 죄악의 문은 닫혀지고 열반에 수순한다.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닦으면 이와 같은 이익을 얻는다.
12.25. 사상품(死想品)
수행하는 이는 죽는다는 생각으로 목숨에 대하여 마음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닦고 익혀야 한다.
또 이 사람은 항상 깊이 착한 법을 즐기면서 착하지 못한 법을 끊는다. 왜냐하면 중생은 흔히 죽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착하지 못한 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일 죽음을 생각한다면 끊어 없앨 수 있다.
또 항상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친척이며 아는 분들에 대한 애착도 엷어진다.
또 죽는다는 생각을 닦아 익히면 자기에게 이로운 것이다. 한 마음으로 모든 착한 법을 쌓기 때문이다. 세간 중생은 흔히 남의 이익을 즐겨하다가 자기 이익을 버린다.
또 이 사람은 빨리 해탈을 얻는다. 왜냐하면 세간에 왕래하는지라 항상 이 죽음이 있거니와 이 사람은 죽음을 싫어하므로 해탈을 구하게 된다.
[문] 어떻게 죽는다는 생각을 닦을 것인가?
[답] 먼저는 개괄적으로 온갖 것이 무상함을 설명하였으나 지금부터는 다만 몸의 무상한 것만을 관찰한다.
쌓임(陰)의 상속이 끊어짐을 죽음이라 한다. 이 몸이 무상하기가 다른 물질보다 심하여 마치 날기와거나 병이 견고한 모습이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수행하는 이가 몸을 관찰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한다. 왜냐하면 이 날기와거나 병은 간수만 잘하면 혹 오랫동안 보존될 수가 있으나 이 몸은 기껏 오래간다 하여도 백 년을 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또 이 몸은 침해를 당하는 법이 많다. 이른바 칼과 몽둥이와 창과 원수와 도둑과 구덩이와 언덕이며 음식이 소화되지 않는 것과 차고 더운 풍병들이니 요약하여 이를 보건대 온갖 중생과 중생이 아닌 것을 막론하고 모두 다 이것은 몸을 해치는 법뿐이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이 몸이 생각 생각에 항상 무너지는 모습인지라, 한 생각 동안도 보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생각을 닦는다.
또 수행하는 이는 현재에 젊은이거나 늙은이거나 병이 있거나 병이 없거나 간에 죽음을 물리치는 이는 없으며, 자기 자신을 생각할 적에는 또한 이렇게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을 닦는다.
또 수행하는 이는 정해지지 않은 업보가 있는지라 온갖 업이 금생동안에 다 받게 되는 것이 아니며 업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 또한 정해있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또 끝없이 생사하는 동안에 한량없는 업이 있고 업은 그와 다른 업을 방해하였으며, 나 자신에게도 불시에 죽을 업이 있겠거늘 어떻게 이 목숨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또 수행하는 이는 죽음에는 큰 세력이 있어서 아무리 부드러운 말로 달래고 재물로 쫓고 송사로 싸워도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마치 큰 돌산[石山]이 사방에서 무너져 내려오면 또 피할 곳이 없는 것 같이 본다.
[문] 만일 사람이 염라왕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면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가?
[답] 그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염라왕에게는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자유로운 힘이 없다. 다만 착한 일을 행하였는지 악한 일을 행하였는지를 검문할 뿐이다. 그도 만일 과보를 다 받은 다음에는 도리어 몸을 해치는 인연을 얻어서 죽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는 몸이 의지할 곳도 업고 구원할 이도 없어서 죽음의 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생각을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언제나 이 몸은 늙고 병드는 일에 시달려서 견고한 성질이 없고 생각 생각에 생멸하므로 상속하는 식이 얽히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닦는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죽음을 닦는다.
또 이 수행하는 죽음은 결정되어 있되 목숨은 정해 있지 않는 것이어서 결정된 것은 결정되지 않은 것보다 뛰어나다고 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닦는다.
[문] 어째서 늙고 병드는 따위의 생각은 말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생각만을 말하는가?
[답] 늙고 병드는 일로는 사람을 전체적으로 탈취할 수가 없다. 병은 건강을 빼앗고 늙음은 젊음을 빼앗되 친척과 재물은 남고 또 몸도 남는다. 그러나 죽음은 모조리 빼앗아 간다.
또 늙고 병드는 일들은 바로 죽음의 인연이다. 그러므로 따로 말하지 아니한다.
또 경전 중에서
“죽음은 크게 어둡고 캄캄하다고 한다. 광명이 있지도 않고 구호할 사람도 없으며
또 친구도 없고 믿을 곳도 없어서 이는 가장 무서운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 중생은 죽는 인연 때문에 내생을 두려워한다.
또 세 가지 세계 안의 온갖 것에는 죽음은 있으나 늙고 병드는 것만은 그렇지 않다.
[문] 만일 중생을 여의고, 죽는 모습이 있지 않다면 중생은 그것이 곧 붙인 이름이거늘 행자가 무엇 때문에 이 생각을 닦아 익히는가?
[답] 중생이라는 모습을 무너뜨리지 아니하면 죽음을 두려워한다. 만일 죽음의 생각을 닦으면 두려운 생각을 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닦아 익혀야 한다.
또 무상하다는 생각 따위를 도에 가까움[近道]이라 하고
깨끗하지 못함과 음식의 싫어함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도에 멀음[遠道]이라 한다.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는 이 생각으로써 마음을 억제하고 굴복시킬 수 있다.
12.26. 후삼상품(後三想品)
끊는다는 생각[斷想]이라 함은 네 가지 정근(正勤) 중에서 설명함과 같이 이미 생긴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끊기 위하여 힘껏 정진한다.
이 모든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은 바로 지옥 등의 고통을 받을 인연이며, 역시 모든 나쁜 소문과 후회할 일인 뭇 괴로움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끊어야 한다.
[문]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답] 하지 않아야 할 법을 만나면 그 때에 곧 끊는다.
또 삿된 생각은 그것이 탐욕 등의 모든 번뇌의 원인인지라 이 생각을 끊으면 그 법도 끊어진다.
[문] 이 끊는다는 생각을 닦으면 어떠한 이익을 얻게 되는가?
[답] 이 생각을 닦는 사람은 항상 나쁜 법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해야 할 일을 한다.
또 이것은 8난(難)을 여읜다. 사람의 몸에 이롭다 함은 번뇌가 끊어지는 것이다.
또 번뇌 끊기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은 출가한 사람의 이익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헛되이 자기의 몸을 욕되게 할 뿐이다.
또 수행하는 이가 즐거이 끊는다는 생각을 닦으면 법답게 부처님께 공양하고 욕심나는 생각을 떠나서 생각을 끊는 사람이 된다.
만일 욕심이 다하여 다시 나지 아니하면 그것을 이욕(離欲)이라 한다.
이 이욕을 생각하기 때문에 여의는 생각[離想]이라 한다.
[문] 만일 끊는다는 생각이 곧 여의는 생각이라면 무엇 때문에 겹쳐서 말하는가?
[답] 끊는 데로부터 여의게 되기 때문이다. 끊는다 함은 탐욕을 제거한다는 말이다.
경전 중에서
“탐욕을 끊기 때문에 다섯 가지 쌓임이 끊어진다”고 말함과 같다.
또 끊는다는 생각은 바로 욕심을 여의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 법에 욕심이 없으면 이 법을 끊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욕심을 여의게 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
경전 중에서
“탐욕을 여의면 해탈을 얻고 해탈을 얻으면 곧 끊었다”고 한다고 함과 같다.
만일 남음 없는 곳[無餘]에 들면 그것을 적멸이라 한다.
또 경전 중에서
“세 가지 성품이 있으니 끊음의 성품[斷性]과 탐욕을 여읨의 성품[離欲性]과 사라짐의 성품[滅性]이니라”고 하였다.
만일 끊음의 성품과 탐욕을 여읨의 성품을 말하면 바로 아라한인 것이니, 온갖 번뇌를 끊고 세 가지 세계의 욕심을 여의고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라짐의 성품을 말하면 바로 이것은 목숨을 마치고 수명을 버려서 쌓임의 상속을 끊고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드는 것이다.
또 두 가지의 해탈이 있으니, 지혜의 해탈과 마음의 해탈이다.
만일 끊는 것으로 말하면 이는 곧 무명을 여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의 해탈을 얻으며,
만일 욕심을 여의는 것으로 말하면 이는 곧 애착을 여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
두 가지 해탈의 결과를 바로 사라짐이라 한다.
또 만일 끊는다는 생각으로 말하자면 곧 무명의 번뇌[漏]를 끊는 다는 것이요,
만일 탐욕을 여의는 생각으로 말하자면 곧 욕심 세계의 번뇌[欲漏]와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번뇌[有漏]를 끊는다는 것이며
만일 사라짐의 생각으로 말하자면 이 두 가지의 결과이다.
또 경전에서
“온갖 모든 행을 끊기 때문에 끊는다 하고 온갖 모든 행을 여의기 때문에 여읜다 하며 온갖 모든 행을 없애기 때문에 사라짐이라 한다”고 함과 같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는 뜻은 하나이면서 이름만 다를 뿐이다.
만일 무상하다는 생각으로부터 사라진다는 생각까지를 닦으면 온갖 일은 다 마치는 것이니, 모든 번뇌를 끊고 쌓임의 상속을 끊어서 무여열반에 들게 되기 때문이다.
12.27. 정구품(定具品) 중 오정구품(五定具品) ①
[문] 그대는 먼저 도의 진리를 말하였으니, 이른바 선정의 밑받침[定具]과 선정[定]이다.
선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선정에 대한 밑받침을 말해야 하리다. 왜냐하면 만일 선정의 밑받침이 있으면 선정은 성취할 것이요, 없으면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답] 선정의 밑받침이란 열한 가지 법을 말한다.
첫째는 청정한 계행을 가짐이요,
둘째는 선지식을 만남이요,
셋째는 감관들을 단속함이요,
넷째는 음식의 분량을 앎이요,
다섯째는 초저녁과 새벽에 잠을 덜 잠이요,
여섯째는 잘 깨달음을 구족함이요,
일곱째는 좋은 신해(信解)를 갖춤이요,
여덟째는 수행하는 이의 분수를 갖춤이요,
아홉째는 해탈하는 곳을 갖춤이요,
열째는 장애가 없음이요,
열한째는 집착하지 않는 일이다.
청정한 계행을 가진다 함은 착하지 못한 업을 여의는 것을 지계(持戒)라 한다.
착하지 못한 업이라 함은 이른바 살생과 투도와 사음인 몸의 세 가지 업과 방어와 양설과 악구와 기어인 입의 네 가지 업이다.
이러한 죄업을 멀리 여의는 것을 지계라 한다.
또 예배 공경하고 영접 송별하며 공양하는 일 등으로 착한 법을 수행함 또한 계행이라 한다.
계행은 선정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받아지닌다. 왜냐하면 마치 금을 다룬 데는 먼저 거친 때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먼저 지계하는 것으로 파계의 거친 허물을 제거하고 다음에 선정 등으로 남은 세밀한 허물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만일 지계라는 것이 없으면 선정이 없으며 지계하는 인연으로 선정을 얻기가 쉽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계는 도의 뿌리가 되고, 또한 좋은 사닥다리가 된다”고 함과 같다.
또 말하기를
“계는 첫째번의 수레가 된다”고 하였다.
만일 첫 수레에 오르지 아니하면 어떻게 둘째 번의 수레에 오를 수 있겠는가?
또 말하였다.
“계는 평지(平地)와 같다”고 하였다.
이 평지에 서면 네 가지 진리를 본다.
또 두 가지 힘을 말하였으니, 생각하는 힘[思力]과 닦는 힘[修力]이다.
생각하는 힘은 이것이 곧 지계이고 닦는 힘은 바로 도(道)이다.
먼저 파계의 죄과와 지계의 이익을 생각하고 헤아려 보기 때문에 계를 가지며, 뒤에 도를 얻은 뒤에는 저절로 악을 여의게 된다.
또 말하였다.
“계는 보리나무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도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계행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또 으레 그렇게 된다.
만일 계행을 지님이 없으면 선정도 없다.
마치 병을 다스리는 데 약이 필요함과 같이 번뇌의 병을 다스리는 데에 만일 계행을 지님이 없으면 법의 약은 갖추어지지 못한다.
또 말하였다.
“깨끗한 계행을 지니면 뉘우치는 마음이 없고 내지 욕심을 여의고 해탈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 모든 공덕은 다 계행을 가지는데서 생기는 일이므로 선정의 밑받침이라 한다.
또 업장(業障)과 번뇌장(煩惱障)이 있다. 이 두 가지 장애의 과보를 보장(報障)이라 한다.
만일 깨끗하게 계행을 지니면 이 세 가지 장애가 없어진다. 만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선정을 성취한다.
또 깨끗이 계행을 지니면 낭패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니, 마치 항하 물 위의 재목과 같다.
또 깨끗한 계를 가지기 때문에 편안하게 선다.
지계는 착하지 못한 몸과 입의 업을 막으며 선정은 착하지 못한 뜻의 업을 막는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를 막고 진실한 지혜를 얻으면 필경에는 끊어진다.
또 도품(道品)으로 세워진 누각은 계행으로 기둥을 삼고
선정의 마음 성(城)은 계행으로 곽(郭)을 삼으며,
생사의 냇물을 건너는 데는 계행이 다리가 되고
착한 대중에 참예하는 데는 계행이 도장[印]이 되며
8정도의 논에는 계행이 논두렁이 된다.
논에 두렁이 없으면 물이 담기지 않음과 같이
만일 깨끗한 계행이 없으면 선정의 물은 머무르지 않는다.
[문] 무엇을 깨끗하게 계행을 가진다 하는가?
[답] 만일 수행하는 이가 철저한 마음으로 나쁜 짓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서 내생이거나 나쁜 이름들을 두려워함이 아니면 청정하게 계행을 가짐이라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계행을 가지는 것도 청정하다. 7음욕경(婬欲經) 중에서 몸으로는 범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행도 깨끗하지 못하다고 함과 같다.
또 파계하는 인연은 모두가 번뇌인지라 만일 번뇌를 억제하였다면 깨끗한 계행이 된다.
또 성문의 지계는 열반만을 위주한 것이거니와 부처의 도를 사하는 사람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써 온갖 중생을 위하여 계행의 형식만을 취하지 않고 이 계행을 보리의 성품에 맞게 한다. 이와 같이 가지는 계행을 청정하다고 한다.
선지식(善知識)이라 함은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두 가지 인연으로 바른 소견을 낸다.
첫째는 남에게서 법을 듣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을 들려주는 그이를 선지식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선지식만을 말하는가?
[답] 경전 중에서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다.
‘제가 어느 곳에 조용히 앉아서 생각하기를 선지식을 만나게 되면 도를 얻는 절반 인연은 되겠다고 하였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선지식이라 하면 도를 얻는 데의 완전한 인연이 된다. 왜냐하면 생로병사 하는 중생이 나를 만나서 선지식을 삼으면 생로병사에서 모두 해탈되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또 중생은 선지식을 의지하면 계율 등의 다섯 가지 법을 더욱 자라게 함이 사라수(裟羅樹)가 설산(雪山)을 의지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일이 더욱 늘어감과 같다.
또 부처님조차도 오히려 선지식을 좋아하셨다.
처음 도를 얻을 때에는 생각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스승이 없으면 두려워한 바도 없고 공경하는 마음도 없어서 항상 나쁜 법에 가리어져 안온한 행동이 없다. 나는 장차 누구를 스승으로 삼고 누구를 의지하여 살아갈 것인고”라고 하셨다.
이러한 생각을 하신 다음에 두루 모두를 살펴보며 자신보다 나은 이가 없는지라 이내 생각하시되
“내가 얻은 바 법은 이것으로 인하여 성불하는 것이니 도로 그 법을 의지하여야겠다”고 하셨다.
그 때에 범천 등의 모든 하늘도 역시 찬탄하기를
“그렇습니다. 부처님보다 나은 이가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도 다 그 법으로 스승을 삼았습니다”고 하였다.
또 선지식은 마치 밝은 등불과 같다. 눈이 있어도 등불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그와 같아서 수행하는 이가 복덕과 영리한 근기의 인연이 있다손 치더라도 선지식이 없으면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한다.
[문] 어떠한 사람이 선지식인가?
[답]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착한 법을 더 성장하게 하는 이를 선지식이라 한다.
또는 모든 착한 사람이 바른 법에 머무르면 모두 이는 천상과 인간의 선지식인 것이다.
감관을 단속한다 함은 바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보지 아니할 수 없다. 다만 전일한 마음으로 바르게 생각이 앞에 나타나게 해야한다.
또는 바른 지혜라고도 하는데 이 바른 지혜로 앞에 나타나는 반연을 파괴한다.
앞의 반연을 파괴하기 때문에 모양을 취하지 아니하며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붙인 이름에 따르지 아니한다.
만일 모든 감관을 단속하지 아니하면 모양을 취하게 되므로 모든 번뇌가 생겨나 다섯 가지 감관에 번져가면서 계행 등의 착한 법을 파괴하거니와
만일 감관을 단속하면 계행 등이 견고하여진다.
음식에 분량을 맞추라 함은 살찜과 음행과 맛을 탐내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요, 몸을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문] 수행하는 이는 무엇 때문에 몸을 구제하게 되는가?
[답] 착한 법을 닦기 위해서다. 만일 착한 법을 여의면 도가 없고, 도가 없으면 고통을 여읠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착한 법을 닦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면 헛되이 원수와 도둑을 기르는 것이며 또한 시주의 복을 무너뜨리면서 남의 공양만 손해한다. 그와 같이 한다면 남의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한다.
[문] 음식은 무엇으로 분량을 삼을 것인가?
[답] 몸을 구제할 만한 정도라면 이것을 적당한 분량이라고 한다.
[문] 어떠한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인가?
[답] 만일 먹어서 차거나 더운 따위의 몸에 대한 병과 탐냄과 성냄 등의 마음을 더하지 않는 것이면 먹어야 한다. 그 음식조차도 역시 때를 맞추어서 먹어야 한다.
만일 이 음식을 그때에 먹으면 차고 덥고 탐내고 성내는 따위의 병을 더할 것임을 알거든 먹지 않아야 한다.
[문] 모든 외도는 말한다.
“만일 깨끗한 음식을 먹으면 깨끗한 복을 얻는 것이니, 마음으로 즐기는 바의 빛깔ㆍ내음ㆍ맛ㆍ닿임에 따라 물을 뿌리고 주원한 연후에 먹으면 이것을 깨끗하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 일은 어떠한가?
[답] 음식에는 결정코 깨끗하다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먹다 남긴 음식이 깨끗하지 못하다 하면 온갖 음식은 먹다 남기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젖은 송아지가 남겼고 꿀은 벌이 남겼고 물은 벌레가 남겼고 꽃은 나비가 남겼고 과일은 새가 남긴 것과 같다.
또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한 곳으로부터 생긴지라 자체가 깨끗하지 못하여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음식도 원래 깨끗하지 못하게 된 다음에야 몸 가운데 들어가므로 한 가지도 깨끗한 것이란 없건만 다만 뒤바뀐 생각에서 망녕되어 깨끗하다고 할 뿐이다.
[문] 만일 도무지 깨끗한 것이 없다면 전타라(旃陀羅) 등과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답] 역시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삿된 생활을 하지 않는 등으로 법답게 음식을 얻어서, 음식의 허물되는 점을 관찰하고 지혜의 물로 뿌린 연후에야 먹는다. 물을 뿌리는 것만으로 깨끗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
초저녁과 새벽에 잠을 덜 잔다 함은 수행하는 이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는다.
또 잠을 자면 허망한 것이어서 얻어지는 바가 없음을 본다. 만일 그대가 잠으로 낙을 삼는다면 그 즐거움은 적으면서 그 폐단은 족히 말할 수조차 없다.
또 수행하는 이는 번뇌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지 않음은 마치 사람이 원수와 같이 세상에서 살기를 좋아하지 아니함과 같다. 어찌 사람으로서 적진(賊陣) 중에서 잠자는 이가 잇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잠을 자지 않는다.
[문] 잠이 퍼부으면 어떻게 쫓아 버리는가?
[답] 이 사람은 불법의 맛을 얻어서 마음 깊이 기뻐함으로써 쫓아버린다.
또 생사하는 가운데 늙고 병들고 죽는 허물을 생각하면 마음이 두려워지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
또 수행하는 이는 사람의 몸을 얻고 모든 감관이 구족하며 불법을 만났거니와 좋고 나쁜 것을 잘 분별함이 바로 매우 어려운 것인줄 여기면서
“금생에 제도되지 못하면 어느 때에 해탈하겠는가 하며, 부지런히 정진함으로써 잠을 제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