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 세르게이 예세닌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마음은 생기 넘치는 은방울꽃들로 가득 차 있다.
저녁이 나의 길 위에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무성한 숲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바람인지 수탉인지?
어쩌면 들판 위에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이리라.
아름답다 너, 오 흰 설원이여!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오, 숲의 울창한 아련함이여!
오, 눈 덮인 밭의 활기참이여!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다.
버드나무의 허벅지 위에서
(김성일 옮김)
[斷想] 첫눈: 빛과 어둠, 바람과 수탉 사이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се́нин, 1895~1925)은 러시아 서부 랴잔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러시아의 자연과 조국, 시골과 영혼을 사랑한 마지막 농촌 시인이다. 농민의 관점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혁명을 받아들이며, 사라져가는 고향과 혁명의 시대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시인의 운명을 노래한다. 말년에는 권태와 우울증에 빠져 알코올 중독과 환각으로 고통을 받아오다 만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애당초 시를 위해 창조된 유기체”(막심 고리키)로서, 천상 시인이다. 주요 시집으로는, 농민시의 정수를 보여준『라두니차』를 비롯해『소비에트 루시』,『요르단의 비둘기』,『동지』, 그리고 혁명을 통해 낡은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농민들이 중심이 되는 영적이고 목가적인 신세계가 도래할 것이라 믿는 장시「이노니야」등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1930년대 오장환 시인이 예세닌의 작품을 깊이 흠모하여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을 내고, 한국 시단에 소개하며 백석과도 정서적 맥락을 공유한다.
예세닌의 이 시에는 겨울 저녁, 차가운 눈 속을 걸으면서도 내면의 온기와 생명력, 순수한 설원의 아름다움이 있다. 자작나무와 단풍나무. 그 숲 사이로 비치는 금빛 노을. 첫눈과 푸른 밤. 시인의 눈과 마음은 처음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 예세닌에게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존재 자체이다. 자연과 자아를 기반으로 이미지와 색채감이 돋보이는 이 시는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해에 쓰여진다. 러시아의 애가(哀歌), 그것은 과거 아름다웠던 농촌 풍경과 급변하는 소비에트 현실 사이에서 겪게 되는 정체성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하나의 심연이다. 변혁의 바람 속에서도 원초적 자연과 고향을 사랑하는 한 청년의 고뇌와 순수한 열정을 떠올려 본다. 빛과 어둠 사이엔 무엇이 있는가?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오시프 만델스탐, 안나 아흐마토바, 알렉산드르 블록, 그리고 세르게이 예세닌은 이에 응답해야 한다.
겨울의 길목에서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처음이란 말, 눈의 고요와 순수한 마음은 생기로 차고 넘친다. 그 마음의 은방울꽃은 빛과 색의 모든 것이다. 흰색,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 파란색의 은방울꽃은 소년의 꿈과 얼굴을 하고 있다. 검은빛의 저녁, 나는 길 위에 서 있다. 촛불의 한 중심에 푸른 별이 빛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알 수는 없다. 말할 수도 없다. 어두운 숲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람의 노래인가, 수탉의 울음인가. 겨울 풀밭에 소리없이 내려앉은 백조, 아니 흰눈들. 가없이 펼쳐진 설원이 아름다운 것은 추위에도 나의 피가 식지 않은 생명에 있다. 나는 온몸으로 눈 내린 대지를 자작나무를 끌어 안는다. 자작나무의 신체와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아득하고 울울창창한 숲의 정령이여, 활력에 차고 넘친 겨울밭이여! 나는 버드나무 허벅지 위에서 위를 향해 두손을 모은다. 겨울과 봄 사이, 청춘의 아픔과 방황, 쓸쓸함은 이제 순백의 눈밭에선 모두 사라지고 만다.
이 한 편의 시에는 눈(雪)과 눈(眼), 겨울과 봄, 빛과 어둠의 경계가 있다. 감탄과 질문이 있다. 인간의 감정을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게 나누고 잇는 사이존재로서 시. [나는-첫눈-속을-거닌다] 라는 시제와 도입부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금-여기’의 나는 처음의 눈과 마음으로 서설과 설원을 본다. 깊은 아름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겨울의 마음을 가진 자, "눈 속에서 귀 기울여 들으며/ 스스로 무(無)가 된 자는,/ 그곳에 있지 않은 무(無)와/ 그곳에 있는 무(無)를 본다." (월러스 스티븐스,「눈사람」) 이런 무(無)의 감수성과 부재의 현존, 상상적 현실의 세계는 겨울의 고요 속에서 주어진다. 고요의 속을 홀로 거니는 이에게 찾아드는 응관(應觀). 이 고독한-거룩한 산책자의 길 위에 자작나무가 있다. 그 나무 뒤로 띠까마귀가 날아왔다. 봄이다. 피로 쓴 예세닌의 절명시가 여기에 있다.
"안녕, 내 친구여, 잘 있게나/ 사랑스러운 벗이여, 너는 내 가슴속에 있네./ 예정된 이별은/ 먼 훗날 만남을 약속한다네.// 안녕, 내 친구여, 악수도 당부의 말도 접고,/ 슬퍼도 말고, 애달픈 표정도 짓지 말게나./ 이승에서 죽는 건 새삼스러울 거 없는 일,/ 그러나 물론, 사는 것 또한 새로울 거 없지."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즐감하며 또 거듭
공부도 잘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