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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로서 또한 수필가로서 물리적인 나이를 잊은 채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분을 만났다.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에 끊임없는 배움의 길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강중구 선생님을 통하여 영원한 청년의 표상을 보았다.
- 오랜 세월 동안 교직에 계셨는데 간략하게 봉직하셨던 학교 소개 부탁드립니다.
1957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합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10년간 근무하다가 중등학교 교사자격고시검정시험[지리과]에 합격하여 거제고현중학교와 합천농업고등학교로 전보되어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고 교사채용고시를 거쳐서 부산으로 왔습니다.
부산에서는 경남고, 경남여고, 부산진고, 부산상고 등에서 지리교사로 근무하다가 부산시교육청 기획감사담당관실과 중등교육과 장학사를 거쳐서 부산남고, 부산동여고 교감과 해운대 부흥중학교 초대교장으로 근무 중 정년단축으로 퇴임하였습니다.
- 어떠한 계기로 여행을 많이 하시게 되었습니까? 지리학을 공부하다보니 현지답사 차 여행을 많이 하게 되고, 여행을 하다 보니 배울 점이 많고 더욱 흥미가 나서 계속해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43회에 걸쳐서 65나라를 여행했습니다만 일본은 11번 중국은 10번 인도와 태국은 4번씩 다녀왔으니 이를 누적한다면 100나라쯤 될 것입니다.
-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여행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생의 배움 길이지요. 서양격언에 ‘귀여운 자식은 여행을 시켜라’라는 말이 있듯이 여행길을 나서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고생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석학인 린위탕(林語堂)도 ‘10년 동안 책을 읽고 10년 동안 여행을 한 후에 글을 쓰라’고 했습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세대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 구체적으로 어디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에는 여행사를 통해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중국, 서유럽을 다녀오고, 교원현직연수 인솔단장으로 멕시코와 미국, 캐나다를 다녀왔으며 1997년에 처음으로 사범학교 동기생 4명이랑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000년 퇴직을 한 후 여행사를 통해서 호주와 뉴질랜드, 동, 서, 남, 북유럽과 발칸반도, 이베리아반도, 미국, 티베트 등을 다녀오고, 2000년 9월 사범학교 동기생들과 배낭을 짊어지고 일본 2차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남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를 다녀왔으며 실크로드[중국서안-파키스탄 라호로 21일] 지중해 3국[이집트, 그리이스, 터키 17일], 인도네시아, 미얀마, 타이-라오스 등지를 다녀왔으며, 중국여행은 2007년에는 사범학교 동기생이랑 둘이서 화중, 화남, 사천 지방을, 2009년에는 화북과 내몽고를 각개월간 다녀왔으며, 2010년에는 동북 3성과 백두산을 20일간 다녀왔습니다. 백두산은 3번 올랐는데 한 번은 여행사로 갔지만 한번은 8시간에 걸쳐서 종주를 했고, 중국 태산은 2번 모두 걸어서 올랐습니다.
- 여행을 하시면서 경험하셨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두셨습니까? 예, 국내여행은 지리학을 공부하는 1960년대부터 시작했으니 1981년 경남고등학교 재직 때 노산 이은상 선생의 추천을 받아서 <산이 있기에 물이 있기에>를 서울 교음사에서 출판했고, 세계여행기는 퇴직을 하던 2000년에 부산 육일문화사에서 <몽블랑을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출판했습니다.
요즘은 그간에 한 여행기를 정리하여 지난해에는 인도여행기 <그 찬란했던 배낭여행 인도>를 서울 좋은땅 출판사에서 출판했고 올 4월에는 <내 생애 가장 황홀했던 남아메리카 배낭여행>을 서울 신아출판사에서 출판했으며 지금은 일본여행기 <맨발로 돌아본 일본>의 원고 작성을 끝내고 마지막 검토를 하고 있으며, 중국여행기 <벙어리 중국배낭여행기>의 원고도 마무리단계에 있습니다. 내가 다녀온 곳은 모두 여행기로 정리할 계획입니다.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세계를 많이 쏘다녔습니다. 동기생들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모두 기권을 해버려서 요즘은 이런저런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그러나 재작년 12월에 배낭을 짊어지고 남인도와 스리랑카를 다녀오고 지난해 4월에도 타이-라오스를 다녀오고 나니 피로가 잘 풀리지 않더군요. 그리고 금년 3월에도 일본을 다녀오고 나니 이제는 해외여행을 다니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그래도 일본여행기를 보완하려고 6월 하순에는 오끼나와를 다녀올 예정입니다만 이제는 함께 갈 친구도 없거니와 나도 한계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수필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1978년 우연히 쓴 ‘機械 새끼들’이 <신동아>에 발표되고 그것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アシア公論>에 전재되면서 잡지사에서 원고청탁이 오는 바람에 억지 춘향격으로 수필을 쓰게 되었습니다.
1990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기관지인 <수필공원:현 에세이문학>에 ‘아들의 선물’로 등단을 한 후 <가을에 그린 초상화>서울 느티나무기획, 1997년, <징검다리가 있는 마을>부산 육일문화사, 2006년, <고희의 꿈>부산육일문화사, 2012년, 등 수필집 3권을 출판하고, 한국에서 가장 역사 깊은 수필부산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99년 에세이부산문학회를 창립을 하여 지난해 <에세이부산> 12호를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부산문인협회 이사와 부산수필문인협회 이사직을 역임했습니다.
- 일반여행과 배낭여행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에 대하여 설명 부탁드립니다.
일반여행은 여행사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니 여행자는 가이드를 따라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배낭여행은 자신이 여행지와 여정을 계획하고 스스로 차 시간과 행선지를 알아서 차표를 사고 차를 타고가야하며 식사 때가 되면 식당을 찾아가서 식사를 하고 저녁이면 숙소를 찾아가서 흥정을 하여 체크인을 해야 하니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많습니다. 더구나 친구들 몇 사람이 동행을 할 때에는 엄청난 체력소모가 뒤따릅니다.
하지만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자기 뜻대로 여행을 할 수가 있고 경비가 많이 들 때도 있지만 계획만 잘한다면 훨씬 싼값에 경제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 여행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고생 끝에 느끼는 희열이지요. 우리나라 속담에도 ‘고난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지금 월드컵이 열리는 브라질까지는 비행기 탑승시간만 무려 30시간이나 됩니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계제일인 이과수폭포까지는 버스를 24시간이나 타고가야 합니다.
또 고도가 4,000m도 넘는데다가 2,000만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아타카마 사막을 종주하려면 지프차를 타고 3일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을 달려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우주인들이 마지막 훈련을 하는 달의 계곡이 있고, 희고 푸르고 붉은 호수가 있는가 하면 어느 별나라 같은 우유니소금사막이 있습니다. 그곳을 보는 기쁨은 말 할수가 없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참으로 길고 어려운 여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내 생애 가장 황홀했던 남아메리카 배낭여행>을 출판했습니다.
- 국내여행은 얼마나 하셨습니까? 1960년 지리학을 공부하기시작하면서부터 몇 년 전까지 실시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배낭과 텐트가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주문제작하여 야영을 하면서 전국을 쏘다녔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나라 여행객이 없었던 1964년에 한 제주도 1주 여행과 1978년 부산에서 휴전선까지 국토를 종주하여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명파리를 담사한 것입니다. 그때는 본적지에서 신원증명서까지 발부받아 군부대에 제출하여 허가를 받아야 명파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희 때인 2006년에 부산 태종대에서 통일전망대까지 500km도 넘는 거리를 25일간에 걸쳐서 종주를 한 것입니다.
- 여행 중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004년 아프리카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킬리만자로 등산게이트가 있는 1,970m지점까지 올라갔을 때 셀퍼들이 1인당 72달러만 내면 숙식문제 등 모든 것을 책임지고 킬리만자로산을 등산시켜주겠다는데도 여정이 맞지 않아 그대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에는 다음에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3년 일찍 명예퇴직을 할 때 우리나라를 걸어서 일주를 하고 택리지에 버금가는 신택리지를 저술하려고 했는데 함께 갈 길동무를 찾다가 몇 년을 허송하고 친구랑 두 사람이 길을 나섰지만 도중에 기권을 해버려서 결국은 혼자서 국토 종주를 했지요. 그런데 종주를 마치고 나니 다리에 이상이 와서 전국일주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을 그때에는 몰랐지요. 그 바람에 허송세월만 하고, 처음부터 혼자 길을 나섰더라면 전국일주를 몇 번이나 했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인간은 결국 혼자입니다.
그래도 신택리지는 평생동안 쌓아둔 자료가 있으니 세계여행기 출간이 마무리되고 나면 추진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