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경제사 ·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1 - 15 回 |
| 그림 1 렘브란트, ‘니콜라스 루츠의 초상’, 1631년. 러시아에서 모피사업을 하는 상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 화려한 모피 의상을 한 중년 남자가 서 있다. 값비싼 담비 털을 댄 타바드라는 망토를 차려입고 역시 고급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다. 렘브란트가 그린 이 인물은 당당하면서도 주의력 깊은 표정과 시선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보통 초상화를 많이 그리는 귀족이나 학자라고 보기에는 덜 세련된 인상에다 얼굴엔 주름이 깊고 손이 두텁다. 이 인물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15.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모피 교역 |
세계 최대의 국가를 탄생시킨 건 바로 이것 … 모피 |
⑮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모피 교역
그림 1 의 주인공은 러시아에서 모피 사업을 하던 상인 니콜라스 루츠였다. 루츠는 러시아 북부지역으로부터 모피를 들여와 판매를 했는데 그다지 부유한 상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렘브란트는 1631년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는데, 이주 후 받은 첫 의뢰였다.
새로 정착한 대도시에서 화가로서 명성을 쌓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던 렘브란트는 의뢰인이 내심 원했을 이미지대로 초상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의뢰인의 옷이 아니라 고객을 위한 최고급 모피 의상을 의뢰인에게 입혔고, 주로 고관들을 그릴 때 쓰던 4분의 3 전신상 구도를 써서 이 작품을 탄생시켰다. 과연 렘브란트는 부르주아 초상화의 세계를 열었다는 평가에 어울릴 만한 화가였다.
모피는 왕족이 선호한 최고급 명품
주목할 부분은 중상주의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많은 수의 모피 수입상이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당시에는 네덜란드뿐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 수많은 모피 상인이 이익을 보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층이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위상을 높여가던 시기였다. 중세 내내 모피 옷은 왕족과 귀족이 사랑하던 최고급 명품이었다.
특정한 모피, 예를 들어 어민(북방 족제비의 흰색 겨울털로 판사의 법복 장식에 사용)이나 배어(회색·흰색 무늬가 있는 다람쥐 털로 귀족의 외투 깃 장식에 사용)는 최상 신분층만 사용할 수 있다는 명령이 공포되기도 했고, 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모피 종류를 지정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부유한 신흥 부르주아들이 신분을 사들이고 고위직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모피는 중산층에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모피에 대한 인기는 모피의 최대 공급지인 러시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세계 각지가 새 교역로를 통해 단일한 네트워크로 통합 돼가던 16세기에, 유라시아 면적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시베리아에서는 여러 부족들이 세계화의 흐름과 단절된 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 수렵과 채집, 순록 사육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1547년 자신을 차르라 칭하고 즉위한 이반 뇌제가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제국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1580년대 초 대부호인 스트로가노프가(家)는 이반 뇌제에게 시베리아에서 민 · 관 합동으로 모피 무역을 하자고 제안했다. 차르가 이를 받아들이자 스트로가노프가는 러시아 남방지역으로부터 싸움에 능한 카자크(코사크)를 대규모로 고용해 시베리아 정복 작전을 시작했다.
| 그림 2 바실리 수리코프,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 1895년. |
그림 2는 카자크 부대가 시베리아 시비르칸국의 부대와 전투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가 이끄는 카자크 부대가 총포로 무장하고서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장면이다. 화가 바실리 수리코프는 러시아 정교의 이콘을 휘날리면서 용맹스러운 부대원들이 이단 세력을 제압하는 모습을 장엄하게 묘사했다.
이후 카자크 부대는 시베리아 전역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들에게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병력과 무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인과 달리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있었다. 약 1세기 전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스페인 정복자들을 통해 들어온 천연두와 홍역 때문에 엄청난 사망률을 기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시베리아인들도 이 질병에 노출돼 목숨을 잃었다. 이렇듯 학살과 질병으로 인구가 격감하거나 아예 절멸한 부족이 줄을 이었다. 또한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동진(東進)은 계속됐다. 1640년대에 아무르 강에 도달했고, 1650년대에는 만주 헤이룽 강 지역에까지 진출해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청나라와 마찰을 빚었다. 조선에서 청의 요청에 따라 총수(銃手)들을 뽑아 나선(羅禪 · Russia) 원정대를 파견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유럽~아시아~아메리카 잇는 제국
이미 1639년 태평양 연안에까지 도달했던 러시아의 정복부대는 동진을 계속해서 1740년대 알래스카에 정착지를 마련했고, 이어서 1810년에는 캘리포니아 북부에까지 도달했다. 그리하여 역사상 최초로 유럽~아시아~아메리카를 잇는 초대형 제국이 탄생했다.
광대한 시베리아를 손에 넣은 러시아는 무엇보다도 모피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방안을 찾았다. 우선 모든 건강한 성인 남성에게 모피의 공납을 의무화했다. 과거에도 시베리아인들은 야사크(Yasak)라고 불리는 이 공납제도에 익숙해 있었다. 유력한 집단에 공물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는 형태였다. 러시아의 통치하에 이제 시베리아인들은 모피를 러시아 왕실에 바치고 담배 · 도끼 · 칼 등을 받았다.
17세기에 매년 20만 장 이상의 모피가 공납됐다. 러시아 세수의 10%에 육박하는 가치였다. 술과 담배처럼 중독성이 강한 물품을 시베리아 사람들에게 판매하고 대신 모피를 얻는 방법도 널리 쓰였다. 이 역시 러시아 정복자들이 모피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려고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이런 공납과 교역을 통해 시베리아는 세계적 네트워크의 일부가 됐다. 강압적이고 잔인한 세계화 과정이었다.
알래스카의 사정도 시베리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740년대부터 알래스카로 진출한 러시아 상인들은 원주민인 알류트족을 예속화하거나 교역체제에 편입시킴으로써 이들이 모피를 계속 공급하도록 만들었다. 학살과 예속화, 질병의 창궐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러시아 상인들은 서로 간에 경쟁이 치열해지자 무역회사를 합병해 규모를 키웠고, 그럴수록 알류트족은 더 험한 지역에까지 들어가 모피 사냥을 해야만 했다.
| 그림 3 엠마누엘 노이체, ‘알래스카 매입 서명’, 1867년. 커다란 지구본을 사이에 두고 왼편의 미국 대표(4명)와 오른편 러시아 대표(3명)가 협상을 벌이고 있다. |
알래스카, 유럽까지 모피 운송비 많이 들어
그러나 모피 공급처로서 알래스카는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유럽까지 운송비가 많이 든다는 점이었다.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의 모피 자원을 공략하는 데에는 대서양을 건너 대륙의 동북쪽으로 가는 것이 더 유리했다. 영국의 허드슨만회사(Hudson’s Bay Company)와 같은 경쟁자와 비교해 러시아의 회사들은 밀리기 시작했다. 알래스카를 둘러싼 러시아의 고민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러시아는 1854~1856년 크림전쟁에서 영국 · 프랑스 · 터키와 싸웠으나 패배했다. 재정이 악화하고 군사력이 불충분한 상황에서 차르와 관리들은 드넓은 제국의 영토 중에서 경제적 가치가 작은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됐다. 알래스카에 유용한 자원이 얼마나 많은지 조사를 해보니 석탄 매장량은 적고, 고래잡이는 어렵고, 금 채굴도 신통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륙 탐사를 통해 앞으로 기대할 수 있는 모피의 양이 많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자원개발 전망이 나은 시베리아의 아무르 강 유역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867년 러시아와 미국 간에 역사적 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가 광대한 알래스카 땅을 720만 달러에 미국에 매각하는 내용이었다. 이 땅이 훗날 금 · 석유 · 천연가스가 가득한 자원의 보고로 드러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차르는 1에이커 (약 4000㎡)당 불과 2센트라는 헐값에 이 땅을 넘겼다. 모피에서 시작된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여기서 마무리됐다. 결정적 오판으로 인해 러시아는 지금보다 더 큰 영토대국, 세 대륙을 잇는 유일한 영토대국이 될 기회를 잃고 말았다.
- 중앙선데이 | 제397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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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14. 산업재해의 탄생 |
| 그림 1 19세기 초 영국에서 삽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토머스 롤런드슨이 그린 그림. 굴뚝 청소부들이 거리를 돌며 “굴뚝 뚫어”를 외치고 있는 모습이다.
런던의 한 주택가를 한 어른과 두 아이가 줄을 지어 가고 있다. 세 사람 모두 등에 부대자루를 메고 있으며 손에 솔이나 부삽을 들고 있는 허름한 행색이다. 특히 잿빛의 칙칙한 옷차림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얼굴과 다리조차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
석탄과 기계가 낳은 산업재해 … 선진국이 고안한 해결책은? |
⑭ 산업재해의 탄생
이 그림은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삽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토머스 롤런드슨 (Thomas Rowlandson)의 작품이다. 그는 하층민의 생활상을 해학과 풍자를 곁들여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등장인물들의 정체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힌트는 그림의 왼편 윗부분에 있다. 솔과 부삽을 든 채 굴뚝 위로 상체를 내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림 속의 주인공들은 바로 굴뚝청소부이다. 이들은 지금 거리를 돌아다니며 목소리를 맞추어 “뚫어!”를 외치는 중이다.
굴뚝을 정기적으로 청소해야 하는 이유는 연료로 석탄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런던의 경우 1666년 대화재로 1만3000여 채의 가옥이 잿더미가 된 후 벽돌을 주재료로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땔나무 대신에 석탄을 쓰는 가구가 크게 늘어났다. 속도가 더뎠을 뿐 다른 도시들에서도 석탄을 쓰는 가구가 점차 많아졌다. 석탄 연기가 잘 빠져나가게 하려면 굴뚝 내부를 좁게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몸집이 작은 아이에게 일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각 마을(교구)이 가난한 아이들에게 기술을 익힐 자리를 알선해주는 ‘교구도제’ 제도가 널리 퍼져 있었다. 돈 없고 기댈 곳 없는 빈민 아동은 굴뚝청소 도제로 받기에 딱 좋았다.
| 그림 2 어린이들이 굴뚝을 청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좁은 굴뚝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묘사했다. |
굴뚝청소는 사고 위험이 큰 작업이었다. 아이들은 좁디좁은 굴뚝을 오르내리며 검댕을 떼어내고 가루를 쓸어담아 밖으로 끄집어냈는데, 공기가 통하지 않아 질식하기도 하고, 옷가지가 엉켜 목이 조이기도 했다. 굴뚝이 뜨거운 상태에서 작업하다 화상을 입기도 했고, 굴뚝이 약해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림 2에서 아이들의 노동여건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굴뚝청소 아이들은 사고뿐만이 아니라 직업병의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팔꿈치와 무릎에 난 상처가 감염되어 악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검댕과 늘 접촉하였던 탓에 각종 암의 발병도 많았다. 아이들은 더러운 주거환경, 휴식할 시간의 부족, 불량한 영양 상태 탓에 건강 악화를 피하기 어려웠다.
더욱 본격적으로 사고와 직업병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였다. 노동자들은 공장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장시간에 걸쳐 고된 일을 했다. 환기시설이 형편없고 조명이 불량한 공장 안에서 수많은 동력 기계와 공작 기계가 아무런 안전설비 없이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돌아갔다. 순간의 실수로 손발이나 머리카락이 기계에 빨려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히려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면 공장의 경우 기계화가 진전되면서 남성의 근육보다 섬세한 여성의 손놀림, 기계 사이로 오가면서 끊어진 실을 잇는 아동의 민첩함이 필요했다. 여성과 아이들은 성인 남성에 비해 임금이 낮고 규율을 강제하기도 쉬웠다. 이들은 폐질환, 근골격계 질환, 감염성 질환에 시달렸는데, 모두 열악한 노동조건과 관계가 깊은 질병들이었다.
| 그림 3 광산사고로 혼란스런 현장을 묘사한 그림. |
광산도 마찬가지였다. 석탄과 각종 광물을 캐기 위해 수많은 광부들이 칠흑같이 어둡고 비좁고 무덥고 습한 갱도 안에서 분진이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일했다. 채굴량이 증가하면서 갱도가 점점 깊고 복잡해지자,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더 많이 고용되었다. 당시 여성과 아동 광부들의 노동 실태를 조사한 의회보고서에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가득하다. 광부들은 석탄덩이 운반차량에 치이고, 무너지는 갱도 천정에 깔리고, 수직갱도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다. 시력을 손상하기도 하고, 폭발사고로 인해 수백 명의 광부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림 3>석탄 분진을 호흡해 생긴 진폐증은 일을 그만둔 이후까지도 이들을 괴롭혔다.
석탄과 기계를 사용하기 이전에도 재해는 존재했다. 농장, 가내 수공업장, 마차와 배에서 재해는 끊임없이 발생해 왔다. 그러나 공업화는 재해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작업이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작업의 성격과 잠재적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고가 발생하면 개인의 잘못 혹은 운명의 소관이라고 여기곤 했다. 그런데 공장과 광산의 규모가 커지고 철도와 같은 운송수단이 도입되면서, 많은 사람의 작업이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고 작업 공간이 중첩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자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타인의 잘못이나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재해를 입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것이 본격적인 ‘산업재해’가 탄생한 계기였다.
이제 업무상 발생한 사고와 직업병에 대해 과거처럼 노동자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워졌다. 대규모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과 사고방지에 대한 요구로 여론이 들끓었다. 예전에는 재해를 당한 노동자가 고용주의 개인적 선의와 자선단체의 빈민구호에 의지하거나 심지어 운이 없으면 아무런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하곤 했지만, 이제 고용주에게 정식으로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관념이 확산하였다. 법정에서의 판결도 점차 고용주의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19세기를 거치면서 결집력이 커진 노동조합에서는 돈 없는 피해자에게 소송에 필요한 비용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여러 정치가, 사회운동가, 종교 지도자들이 산업재해의 실상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고, 안전장치의 의무화와 보상의 강화를 입법화하기에 힘썼다. 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와 같은 이는 대중 강연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탰다.
산업재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노력은 공업화된 국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출발이 늦었지만 철강·기계·화학·전기 등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공업화에 성공한 독일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노동자 수가 급증하면서 노동조합의 규모와 활동력이 증가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대두하자, 비스마르크 총리는 1871년 고용주 보상책임법을 제정하고 이어서 1884년에 산재보험 제도를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산재정책을 폈다. 재해를 줄이고 피해구제를 보장하는 제도는 이렇듯 노동자의 과실 여부와 상관없이 재해의 책임을 개인으로부터 고용주 및 사회로 전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한편 영국은 자유방임주의와 개인적 자선의 전통이 강했던 탓에 공적 제도의 마련이 독일보다 늦었다. 영국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고율이 가장 낮은 산재선진국이 된 것은 느리지만 지속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산업재해에 대한 독일식 대응체제는 곧 다른 국가들에게 전파되었다. 1910년까지 서구 20개국이 산재보험 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일본·태국·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도 1940년 이전에 이 제도를 도입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쟁취하고 공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도 순차적으로 산업재해 관련 입법들을 정비하였다.
안전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특히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의 안전이 행복의 필수조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구 산업사회는 공업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산업재해를 입었던 경험을 교훈 삼아 내실 있는 대응책을 마련해 왔다.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안전하게 일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 중앙선데이 | 제394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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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13. 아메리카 버펄로 대재앙 |
| 그림 1 앨프레드 밀러, 『버펄로 사냥』, 1858-1860년. 인디언들이 엄청난 버펄로 떼를 절벽으로 몰아 떨어뜨리는 장면을 묘사했다. 대자연의 장관을 상상력으로 그렸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아메리카 대륙은 혁명적 수준의 생태적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대평원하면 카우보이들이 말을 타고 소떼를 모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말과 소는 모두 콜럼버스 이후 구세계로부터 전해진 동물이다. 그 전에 대평원을 누비던 버펄로 무리는 과연 어떻게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었을까? |
버펄로의 비극적 최후는 세계화가 낳은 과오의 역사 |
⑬ 아메리카 버펄로 대재앙
아메리카에 엄청난 수의 버펄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역사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콜럼버스 이전에는 5000만 마리 이상이 평원을 누볐고, 19세기 중반까지도 그 수가 2000만 마리쯤 되었다. 시기적으로 변동하기는 했지만 버펄로 수는 대체로 생태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버펄로를 위협하는 대표적 야생동물은 늑대였는데, 이들이 버펄로의 개체 수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버펄로의 숫자에 더 큰 영향을 주는 존재는 인간이었다. 전통적으로 인디언은 고기 · 가죽 · 뼈를 얻기 위해 버펄로를 사냥해 왔다. 그러나 유럽인과의 접촉이 있기 전에 인디언은 버펄로와 장구한 기간을 함께 지내왔다. 이들 사이에는 일정한 생태적 균형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디언의 버펄로 사냥능력은 말을 도입하여 기동력을 높임으로써 크게 변화하였다. 이후에 총이 들어와 널리 사용되면서 버펄로를 사냥하는 능력은 다시 한 번 도약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규모로 유목생활을 하는 인디언에게 버펄로를 필요 이상으로 사냥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교환을 통해 새로운 물품을 얻을 필요성이 있기는 했지만, 생태계를 교란시킬만한 규모의 유인은 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버펄로 사냥을 묘사한 밀러의 그림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광활한 대지에서 많은 수의 인디언이 엄청난 수의 버펄로 떼를 몰아 큰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작전은 구사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렇게 해서 죽은 버펄로들은 손상이 많아 값어치가 크게 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꺼번에 많은 버펄로를 잡을 경우 유목생활을 하는 인디언들이 감당하기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작은 규모의 낭떠러지로 버펄로를 유인하는 방식은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그림에서처럼 대규모로 사냥을 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그림 1은 대자연의 장관을 그려보고자 한 화가의 상상력의 결과물이었으리라.
가죽 수요 늘자 버펄로 사냥 급증
버펄로의 수가 본격적으로 줄어든 것은 백인에 의해서였다. 남북전쟁 이후 가죽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전문적인 백인 사냥꾼들이 대규모로 버펄로 사냥에 나섰다. 일부 인디언들도 점차 판매를 위해 버펄로 사냥의 빈도를 높였다. 그런데 인디언의 생활에 요긴한 고기와 생활재료를 공급하는 버펄로의 수가 줄어들면 인디언의 생존 기반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부 백인들은 버펄로 사냥이 인디언을 축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인식하고서 의도적으로 버펄로 사냥을 장려하였다. 예를 들어 인디언과 많은 전투를 벌였던 셰리단(Philip Sheridan) 장군은 버펄로 사냥이 인디언의 물적 기반을 파괴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버펄로 사냥꾼에게 탄약을 공급하고 포상 제도를 마련하자고 의회에 제안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1865년에만 약 100만 마리의 버펄로가 목숨을 잃었으며, 1872~1874년에는 400만 마리 이상이 사냥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버펄로 사냥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사람은 윌리엄 프레더릭 코디, 일명 버펄로 빌(Buffalo Bill)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버펄로를 사냥하여 미국의 육군과 캔자스퍼시픽 철도회사에 공급하는 일을 했는데 불과 7개월 만에 4280마리나 잡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나중에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Buffalo Bill’s Wild West)’라는 공연단을 조직해 미국 각지는 물론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버펄로 사냥은 쇼 비지니스의 형태로 세계화되었다.
| 그림 2 『버펄로를 향해 총을 쏘는 캔자스퍼시픽 열차의 승객들』, 1871년 작품 |
버펄로 사냥이 늘어난 데에는 철도 부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철도회사들은 버펄로 사냥을 위한 특별열차를 편성하였다. 그림 2는 캔자스퍼시픽 철도회사가 편성한 특별열차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는 열차 위에서, 그리고 일부는 열차에서 내려 사방으로 버펄로를 향해 총을 쏘고 있다. 이제 버펄로는 백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진 ‘스포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잡은 버펄로를 백인들은 주로 가죽을 얻는데 사용하였다. 백인 사냥꾼은 가죽만을 벗겨 모으고, 사체는 대부분 그대로 들판에 방치하였다.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들판에 버려진 사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들짐승과 날짐승에 의해 뜯기고 햇볕에 말라붙어 하얗게 뼈를 드러냈다.
| 그림 3 디트로이트의 미시간 카본공장의 야적장에 쌓아놓은 버펄로의 머리뼈. 1880년대 촬영. |
시간이 흐르자 이 뼈는 수집상에 의해 모아져 산업용으로 사용되었다. 뼈를 태운 재는 고급자기인 본차이나의 원료로 사용되었고, 설탕과 와인의 품질을 높이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버펄로 뼈의 가장 큰 수요자는 비료공장이었다. 그림 3은 산업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더미처럼 많은 버펄로의 머리뼈를 쌓아놓은 디트로이트의 한 공장 야적장 모습을 보여준다. 이 머리뼈 더미는 높이가 9m에 이르렀고 길이가 수십m에 달했다고 한다. 이미 사냥감으로 쫓기고 있던 버펄로 떼에게 가해진 결정적인 한 방은 바로 ‘산업용 수요’였다.
이런 요인들이 작용하면서 버펄로의 수는 1880년대에 급속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1892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살아남은 버펄로는 1091마리에 불과하였다. 오늘날 북아메리카에 남아있는 버펄로는 보호정책의 결과로 약 50만 마리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부분 다른 들소와 교잡하여 태어난 것들이며, 야생의 상태에 있지도 않다. 진짜 버펄로는 실질적으로 멸종했다고 볼 수 있다.
생태계 보존과 생물의 종 다양성 유지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버펄로의 멸종은 자연의 정복을 진보라고 여겨온 구시대의 잘못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항해 시대 이래 구세계와 신세계의 접촉은 양 세계 모두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콜럼버스의 교환’이라고 불리는 교류를 통해 사람은 물론 식물, 동물, 미생물과 바이러스가 \ 양방향으로 이동하여 지구 각지의 생태계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구세계인들에게 강제적 세계화를 강요당한 신세계는 가히 혁명적인 생태계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쫓겨나고 유럽인들이 자리를 잡았고, 다시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이 유입되었다.
버펄로 희생 후 소떼 유입
그리고 수많은 동식물이 들어와 기존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파괴했다. 경제적 유인의 힘은 대단했다. 때로는 털가죽과 같은 재료를 얻기 위해, 때로는 원주민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리고 때로는 산업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때 대평원의 주인공이었던 버펄로는 속절없이 희생을 당해야했다. 그 자리에 소떼가 유입되면서 북아메리카의 생태계는 유럽형으로 개조가 이루어졌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는 과거의 지구가 아니다. 지구 생태계에는 인간의 무지, 편견, 탐욕과 그에 따른 수많은 실책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19세기 후반 버펄로가 처했던 운명은 세계화 시대가 남긴 과오의 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이 돌이킬 수 없는 ‘시행착오’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었을까?
- 중앙선데이 | 제391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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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12. 대항해시대 아메리카 은(銀)의 세계 일주 |
| 그림1 화가 미상, 『세로 리코의 성모』, 1720년 이전. 포토시 은광이 있는 삼각형 붉은산의 윗부분에 성모 마리아가 위치하고 있다.
기독교적 내용을 담은 성화(聖畵)가 있다. 중앙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보이고, 그 위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있고 좌우로 성자와 성부가 위치하여 삼위일체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의 아래쪽으로는 교황과 군주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까지는 유럽적 색채가 강하다. 그런데 그림의 중앙 부분이 이채롭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삼각형의 붉은 산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방으로 길이 나 있고 나무와 동물들이 보인다. 산 아래쪽에 유럽적이지 않은 모습의 인물이 황금색 복장을 한 채 서 있다. 산의 양 옆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다. 그림 1은 과연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
임진왜란으로 전세계 노예무역 확대 … 근거는? |
⑫ 대항해시대 아메리카 은(銀)의 세계 일주
이 그림의 소재는 오늘날의 볼리비아에 위치한 세로 리코(Cerro Rico)라는 곳이다. 세로 리코는 ‘부유한 산’이라는 뜻이다. 이 산은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포토시(Potosi)라는 엄청난 규모의 은광이 이 산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지는 새 항로를 개척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금과 은을 확보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초기에 이들은 인디오 원주민들이 보유한 금은공예품을 탈취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원주민으로부터 빼앗을 귀금속이 더 이상 없다고 판단되자 정복자들의 관심은 금은 광맥을 직접 찾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마침내 1545년 그들은 포토시에서 초대형 은광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인디오 원주민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여 전통적인 용해방식으로 은을 채굴 · 제련하였다.
| 그림2 화가 미상, 『포토시의 세로 리코』, 1584년. |
그런데 은의 함유량이 높은 광맥이 점차 고갈되자 은광의 경제성이 위협받게 되었다. 그런데 1570년쯤 스페인에서 수은을 이용하여 저급 광맥에서도 값싸게 은을 추출하는 기술인 수은아말감법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페루에서 대규모 수은광산이 개발되면서 포토시의 은 생산은 다시 증가하게 되었다. 그림 2는 1584년에 제작된 포토시 광산의 그림이다. 은광 아래쪽으로 광산촌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아래로 노동자들이 제련작업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은 생산이 절정에 이르렀던 1600년쯤에 이 도시의 인구는 1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해발 4000m에 육박하는 장소에 서반구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도시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포토시광산의 채굴 장면은 드 브리(Theodorus de Bry)가 남긴 작품에 가장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다. 드 브리는 16세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동판화가이자 출판가였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탐험가들이 남긴 기록에 의거하여 제작하였다.
따라서 탐험의 모습과 신세계의 풍습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1590년에 제작한 포토시광산의 모습은 매우 독특하다(그림 3). 세로 리코의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묘사한 점이 눈길을 끈다. 산꼭대기의 구멍을 통해 인디오 원주민들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채굴작업을 진행한다. 이들은 벌거벗은 채 횃불을 밝히고 힘들게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채굴한 은덩이를 부대에 담아 어깨에 짊어지고 사다리를 통해 광산 밖으로 나온다. 이 은덩이는 다시 그림의 왼편과 오른편 위쪽에 보이는 것처럼 라마와 같은 가축을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수송된다.
그림에서 느낄 수 있듯이, 원주민 광부들의 노동조건은 지극히 열악했다. 고된 노역이 장시간 이어졌고 사고의 위험도 컸다. 또 이들은 대부분 낮은 지대에서 살다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로서 낯선 기후와 음식, 가혹한 채찍질로 인해 죽거나 노동 능력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시에 세로 리코는 ‘사람을 잡아먹는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산’이 엄청난 인명 희생을 가차없이 요구하는 상황, 그리고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사들여 오게 되는 상황이 바로 대항해시대가 드러내기 꺼리는 속살이었다.
이렇게 생산된 아메리카의 은은 어디로 갔을까? 스페인인들은 채굴한 은의 대부분을 자국으로 보냈다. 이 은은 스페인이 왕위계승전쟁을 치르고, 종교개혁의 와중에 신교도를 압박하고, 서유럽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수입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은이 서유럽 전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는 다시 서유럽이 발트 해 연안에서 곡물과 목재를 수입하고, 레반트에서 동방의 생산품을 구매하고, 무엇보다도 남아프리카를 도는 인도항로를 통해 인도와 중국의 인기상품을 수입하는 데에 사용됐다. 한편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은의 일부는 태평양을 횡단하는 세계 최장항로를 통해 마닐라에 있는 상관에 보내져 아시아 물품을 구입하는 데에 소요되었다. 이렇듯 세계무역망을 통해 아메리카에서 채굴된 은은 지구를 돌고 돌아 중국과 인도로 모아졌다. 당시 아메리카를 제외하고 은을 가장 많이 생산한 국가는 일본이었는데, 일본의 은도 수출항 나가사키, 그리고 쓰시마와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를 거쳐 중국으로 향했다.
은이 풍부해진 중국은 조세를 은화로 납부하도록 제도를 개편하였다. 명대 후기와 청대에 실시된 일조편법(一條鞭法)과 지정은제(地丁銀制)가 바로 이런 제도였다. 새 조세제도는 은에 대한 수요를 늘려 세계적으로 은을 중국으로 더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마치 전 세계를 연결한 순환펌프가 작동하듯이 은이 지구를 일주하여 중국으로 빨려들었다. 대항해시대에 세계는 은을 매개로 하여 단일한 경제권으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정세도 세계적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되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오자 명은 군대를 파병하는데, 이에 따라 막대한 양의 은의 필요해졌다. 임진왜란 시기와 전쟁 후에도 명은 부족한 은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에 은을 요구했다. 세계적으로는 명이 은의 순환펌프에 압력을 높였을 것이고 그에 따라 아메리카에서는 은 채굴의 필요성이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부족한 광산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노예수입을 더 늘렸을 것이다. 은을 매개로 지구 전체가 연결된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세계적 노예무역의 증가로 이어졌으리라는 추정은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
이렇게 대항해시대에 은은 식민지 체제와 국제 무역망을 통해 세계를 일주하였다. 당시에 은의 종착지가 중국과 인도였다는 사실은 아시아의 경제가 국제적 경쟁력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런 세계적 네트워크의 형성이 대항해시대를 연 유럽인들에 의해 주도됐다는 사실은 향후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점차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가리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 1로 돌아가 보자. 그림의 아래 왼편에는 교황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오른편에는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있다. 이들 위로 보이는 황금색 복장의 작은 인물은 잉카제국의 황제로, 유럽인이 옮겨온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이다. 왜소하게 표현된 카팍 뒤로 붉은 산이 성모를 덮고 있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안데스 산맥의 토지의 여신인 파차마마(Pachamama)를 성모상과 결합시킨 것이라고 해석한다. 산의 양옆으로 떠 있는 해와 달도 잉카제국에서 사용되던 형상이다. 유럽의 기독교와 잉카의 전통신앙을 혼합한 형태의 작품이다.
이른바 ‘신크레티즘(Syncretism: 혼합주의)’의 색채가 다분한 이런 작품들은 18세기에 많이 제작되었다. 이들은 공통으로 신세계 믿음 체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것이 구세계 믿음 체계에 흡수되고 복속된 것으로 묘사한다. 유럽의 아메리카 진출은 물리적 정복만이 아니라 정신적 정복이기도 했다는 점을 『세로 리코의 성모』는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채굴된 은이 우리나라의 역사에 영향을 끼치게 된 점이야말로 4세기 전 대항해시대가 초래한 세계 경제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중앙선데이 | 제389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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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11. 유럽 · 아프리카 · 아시아의 대통합 |
| 그림 1 『샤나메(Shahnameh)』의 삽화, 1480-1490년. 갑옷을 입은 승자 알렉산드로스가 패자인 다리우스 3세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의 ‘사후의 안식’을 기원하는 모습이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군인들이 몰려있다. 이들의 시선이 모인 지점에 푸른색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그의 머리맡에는 검은 바탕에 금색 줄무늬 갑옷을 입은 사람이 쓰러진 이의 머리를 받친 채 앉아 있다. 죽음을 앞둔 부상자에게 마지막 위로와 함께 사후의 안식을 기원해 주는 듯하다. 이 그림은 어떤 역사적 장면을 묘사하고 있을까? |
알렉산드로스, 코스모폴리탄 문화 창조한 세계화 선구자 |
⑪ 유럽·아프리카·아시아의 대통합
그림 1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중국풍(몽골풍)의 얼굴과 복장을 하고 있다. 인물들의 생김새는 물론이고 화법에서도 중국적인 느낌이 풍긴다. 들판을 메운 풀과 꽃은 서아시아 내지 중앙아시아풍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의 위쪽과 아래 왼쪽에는 페르시아어로 쓰인 문장이 보인다. 이 그림이 제작된 1480년대는 페르시아에서 티무르왕조가 쇠퇴기를 맞이하기 시작하던 때다. 티무르는 수도를 사마르칸트에 둔 튀르크-몽골계 제국으로, 종교적으로는 수니파 이슬람이 지배한 왕조였다. 이상의 정보를 종합해 보자면, 이 그림은 몽골과 페르시아의 문화를 융합하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그림이 제작되기 약 1800년 전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이 묘사돼 있다. 기원전 333년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 군대와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제국의 군대가 격돌한 이수스 전투가 그것이다. 이 전투는 그리스 세력과 페르시아 세력 전체의 흥망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전이었다. 이 역사적 전투에서 승자는 알렉산드로스였고 패자는 다리우스 3세였다. 이 그림의 제목은 ‘죽어가는 다리우스를 위로하는 알렉산드로스’이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다리우스의 임종을 알렉산드로스가 지켜보는 상황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로스는 죽음을 앞둔 적장의 명예를 지켜주는 포용력 있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480년대에 발간된 페르시아의 장편 서사시 『샤나메(Shahnameh)』에 수록된 삽화다. 샤나메는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시인 페르도브시(Ferdowsi)가 페르시아제국의 역사와 전설을 주제로 쓴 서사시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전역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었다. 샤나메는 15세기부터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후원을 받아 삽화를 동반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출판됐다. 태초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7세기까지를 다루는 이 서사시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영웅시대를 매듭짓는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페르시아 왕위 계보의 정통성을 보유한 인물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다리우스는 전장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그는 왕비와 가족들을 그리스 군의 포로로 남겨둔 채 박트리아로 피신하여 재기를 꿈꿨다가 측근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화가는 알렉산드로스의 영웅적 면모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리우스가 포용력 넘치는 알렉산드로스 앞에서 임종을 맞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 그림 2 『Talbot Shrewsbury Book』, 1444-1445년. |
다른 문화권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 알렉산드로스만큼 생애와 모험담이 다양한 문화권으로 전해진 인물도 드물다. ‘알렉산더 로망스(Alexander Romance)'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의 이야기는 그리스어로 처음 쓰인 후에 4세기~16세기 사이에 라틴어 · 아르메니아어 · 히브루어, 그리고 중세 유럽의 각종 지역어로 번역돼 전파됐다. 특히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모험을 즐기는 알렉산드로스의 활약상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전설의 아마조네스 부족 여왕과 만나는 이야기, 아프리카 남쪽에 사는 머리가 없고 몸통에 눈이 달린 블레미아라는 괴물부족과 대적하는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그의 모험담은 땅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림 2를 보자. 1440년대에 프랑스에서 제작된 이 그림은 유리로 만든 통 속에 들어가 해저를 탐사하는 대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히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웅 중의 영웅의 풍모라 하겠다.
| 그림 3 소도마(Il Sodoma),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선 다리우스 가족의 여인들』(부분), 1517년경 |
또 다른 그림을 보자. 그림 3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소도마(Il Sodoma)의 작품이다. 다리우스가 도주하면서 남겨둔 가족들을 맞이하는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림 1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알렉산드로스는 적장의 가족들을 예를 갖추고 맞이하는 인자하고 포용력 넘치는 인물로 묘사돼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유난히 포용력이 강조됐을까? 아마도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때가 20대 초반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웅으로 추앙을 받게 된 데에는 약관의 나이에 그리스의 변경인 마케도니아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인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사적 승리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특히 젊은 지도자로서는 물리적 성취만이 아니라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혜’와 ‘포용력’이 영웅으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조건이었을 것이다. 지혜에 관해서는 어려서부터 받은 특별한 교육이 해답을 제시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대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여 당시 13세였던 알렉산드로스에게 3년에 걸쳐 철학·윤리학·문학·자연과학 등을 가르치게 했다. 이런 교육이 알렉산드로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넓은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로스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 원정에 여러 유능한 학자들을 대동하였다고 전해진다. 젊은 정복자로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면,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던 면은 포용력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를 영웅으로 숭상하는 맥락의 그림들이 그의 넓은 아량을 강조한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포용력은 ‘영웅 만들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점령지역을 실제로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도 포용력이 강조될 필요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와 오리엔트를 잇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 문화로 대제국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나오듯이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정의와 평화라는 축복을 모든 국가에 뿌려서 적셔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세계화는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그리스化 (Hellenization)가 아니었다. 그가 꿈꾼 세상은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문화와 잘 융합된 개방된 그리스제국이었다. 포용력은 정복을 당한 페르시아 사회에 대한 대왕의 호의적 제스처였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알렉산드로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인 에피푸스(Ephippus)는 대왕에 대해 흥미로운 비판을 남겼다. 대왕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처녀사냥꾼 아르테미스를 흉내 내 여자 옷을 입고서 사냥을 즐기곤 했다는 내용이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에피푸스의 비판이 터무니없는 중상이라고 본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실의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로 페르시아 복장 -그리스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여성스러워 보이는-을 하고 사냥에 나서곤 했던 사실을 에피푸스가 악의적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대왕의 의도는 자신의 대제국이 정치적 · 경제적 · 문화적으로 융화되는 것, 즉 코스모폴리탄한 가치와 제도가 통용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제국 곳곳에 20여 개의 도시를 지어 알렉산드리아로 명명하고 문화와 예술을 장려한 사실도 이에 잘 들어맞는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헬레니즘이라고 불리는 범(汎)그리스적 사조가 번영했다. 동시에 광대한 지역이 단일한 경제권으로 통합됐다. 무역이 활성화돼 세 대륙을 잇는 상인의 행렬이 이어졌고, 대왕의 얼굴을 새긴 주화가 제국 전역에서 사용됐다. 이렇듯 알렉산드로스는 세계화의 선구자로서 인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불과 33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했지만, 그는 세계적 영웅으로 인정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 중앙선데이 | 제387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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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10. 1차 세계대전 이후 뒷걸음질친 이유 |
| 그림 1 ‘Kladderadatsch’ 에 수록된 삽화(1919년 7월).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가 여성(독일)의 피를 빨아먹는 상황을 묘사했다.
침대에 기력이 없어 보이는 젊은 여인이 누워 있다. 그 곁에는 머리가 벗겨지고 콧수염이 난 빼빼 마른 늙은 남자가 여인의 손목에서 피를 빨고 있다. 창밖으로 두 마리의 박쥐가 날아다니는 걸로 보아 이 노인은 흡혈귀일 것이다. 1919년 독일의 한 신문에 수록된 이 삽화는 어떤 상황을 묘사할까? |
쓰러진 독일의 피 빨아먹는 프랑스 … 지켜보는 두 박쥐 |
⑩ 1차 세계대전 이후 뒷걸음질친 이유는 …
그림 1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여인의 침대 아래쪽으로 독일군 철모와 칼과 방패가 놓여 있다. 방패에 그려진 독수리 형상은 두껍게 쳐진 커튼에서도 희미하게 보인다. 누워 있는 여인이 독일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무장해제를 당한 채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흡혈귀 노인은 누구일까?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이다. 이미 기력을 상실한 독일로부터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빨아먹으려 하는 표독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올해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유례가 없는 규모의 인력과 자원이 동원된 총력전이자 엄청난 인적 · 물적 피해를 낳은 대재앙이었다. 4년간의 전쟁 끝에 영국-프랑스-러시아가 주축이 되고 뒤에 미국이 가입한 연합국 측이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제국의 동맹국 측을 누르고 승리했다.
| 그림 2 윌리엄 오펜(William Orpen), ‘1919년 6월 28일 거울의 방에서 거행된 강화협정 서명식’(부분) |
승패가 확정되면 승자가 패배자에게 굴욕을 안기는 의식이 거행되기 마련이다. 그림 2는 바로 이 의식인 1919년 6월 강화조약의 체결장면을 보여준다. 그림의 중앙 앞쪽에 독일 측 대표 요하네스 벨이 등을 보이고 고개를 숙인 채 서명하고 있다. 이 모습을 연합국 측 대표들이 반대편에서 주시하고 있다. 가운데에 콧수염을 기른 클레망소 총리가 보이고, 그림의 왼편으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가 앉아 있다.
인물들 뒤편으로 대형 거울들이 늘어선 것이 인상적이다. 이 장소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Hall of Mirrors)’이다. 오늘날 베르사유 궁전을 찾는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이 방은 과거 여러 차례 역사의 주무대가 됐던 곳이다. 중상주의 시절에는 루이 14세가 유럽의 예술과 문화를 이끌었던 자부심 가득한 공간이었다. 1871년에는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꺾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독일 통일을 선포한 굴욕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제 역사가 다시 뒤집혀 1919년에 이곳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처절한 보복을 한 것이다.
독일에 330억 달러 전쟁배상금 물려
연합국 측이 마련한 ‘베르사유 강화조약’은 독일에 가혹한 내용들을 담았다. 독일은 전쟁 이전 영토의 13%, 인구의 10%를 빼앗겼는데, 특히 알자스-로렌과 자르와 같은 알짜배기 공업중심지가 포함됐다. 해외 식민지도 모두 잃었고, 군대도 무력화됐다. 더욱 치명적인 조항은 독일이 전쟁배상금으로 연합국에 330억 달러나 되는 거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복적 조치로 인해 독일인들은 절망했고, 현실적으로 패전국 독일이 이를 갚을 능력은 전혀 없었다.
이런 비현실적 내용이 조약에 포함된 데에는 연합국 내부의 사정이 있었다.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연합국은 막대한 전비가 필요했으므로,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 이전에 순 채무국이었던 미국은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최대의 순 채권국으로 변모했다. 과거에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었던 영국은 미국에 큰 채무를 지게 되었고, 특히 국토 전역이 전쟁으로 파괴된 프랑스는 거액의 빚을 갚을 길이 막막했다. 전쟁이 끝나자 유럽의 연합국들은 미국에 채무 탕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유럽의 기대를 저버리고 냉담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유럽 연합국들은 프랑스의 주도로 대응책을 모색했는데, 이게 바로 독일에 전쟁배상금을 받아 미국에 대한 채무를 변제하겠다는 방안이었다.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낼 능력이 없었고, 유럽 연합국은 미국에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었다.
영국 대표로 베르사유 협상에 참가했던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조약이 독일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조치가 유럽 전체의 경제 회복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이 비판이 담긴 저서 『평화의 경제적 귀결』은 1919~1920년 출간되자마자 유럽과 미국에서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됐고, 케인스는 경제 부문의 최고 논객으로 떠올랐다.
케인스 “독일에 과도한 부담” 비판
케인스의 예상대로 유럽은 곧 본격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여러 나라에서 생산과 무역이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졌다. 가장 심각한 상황을 맞은 것은 독일이었다. 재정 적자가 증가하자 정부가 곧 세율을 인상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자산을 해외로 유출할 유인이 커진 것이다. 정치적 상황의 불안도 독일 자산의 해외 유출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따라 자본수지가 나빠지고 수입 상품의 가격은 더 올랐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겹침으로써 독일에서는 엄청난 수준의 초(超)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 발생했다. 1918년에서 1923년 사이에 물가가 무려 1조2600억 배나 상승했다. 상황이 가장 나빴던 1922~1923년에는 한때 물가가 한 달에 3만 배 가까이 오르기도 했다.
| 그림 3 1923년 발행된 100만 마르크 지폐 |
화폐의 가치가 이렇게 속락하자 대중은 화폐를 믿지 않았다. 기존의 돈다발은 교환의 매개가 아니라 불쏘시개나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정부도 정교한 디자인을 넣고 비싼 제작비를 들여 화폐를 찍어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림 3은 초인플레이션이 한창이던 1923년에 제작된 지폐다. 애초에 1000마르크짜리였던 지폐 위에 붉은색 잉크로 100만 마르크라고 인쇄를 했다. 어차피 머지않아 쓰이지 못하게 될 돈이지 않은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루르 지방을 강제로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사태는 헤어나기 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독일경제는 추락했고 중산층이 얇아지면서 정치적으로도 극단적 주장이 널리 퍼져 민주주의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렸다.
전시 채무와 전쟁배상금을 둘러싼 갈등을 풀 실마리가 마련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1924년 미국이 제안한 도즈 플랜에 의해 독일이 배상금을 매년 소액씩 나누어 갚기로 했고, 미국의 차관이 독일로 들어가 경제에 다소나마 숨통을 열어주었다. 1929년 영 플랜으로 미국이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줄여주고 지급 기한을 연장한 이후에야 독일 화폐는 안정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세계질서 이끌 리더십 없어 혼란
유럽이 보여준 모습은 국제적 정책 공조와 리더십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세계질서를 이끌 리더십이 없었다. ‘런던은 그만, 워싱턴은 아직(No more London, not yet Washington)’인 환경이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이 자국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조그만 양보도 하지 않은 결과는 경제회복의 지연, 정치적 극단화, 그리고 재앙이 재발할 위험성의 증대뿐이었다. 이후 역사는 실제로 대공황, 블록경제, 나치와 군국주의의 득세, 재무장을 거쳐 2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되는 암흑기를 맞지 않았던가.
클레망소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림 1에서 독일의 피를 빠는 흡혈귀로 클레망소가 그려진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흡혈귀의 편에 있음이 분명한 창 밖을 맴도는 두 마리의 박쥐는 영국과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국가들 간의 협의와 공조라는 긍정적 의미의 세계화가 실종됐던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 중앙선데이 | 제385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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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9. 영국 산업혁명의 결정판 만국박람회 |
| 그림 1 빈터할터(F. X. Winterhalter, 1851년 5월 1일), 1851년.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왕실을 묘사하고 있다.
제복을 갖춰 입은 두 남자, 머리에 티아라를 얹고 화려한 복장을 한 여인, 그리고 꽃다발을 든 어린 아기가 묘사되어 있다. 벨벳으로 싸인 가구도 대리석 기둥도 모두 고급스럽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에게 흰머리의 남자가 귀한 장식함을 바치고 있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심지어 아기의 표정도 비현실적으로 어른스럽다. 마치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 그림이 주는 느낌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이 점잖고 고급스런 분위기의 그림에 표현된 인물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이 그림은 어떤 장면을 묘사하고 있을까? |
전 유럽 산업혁명 확산 촉매 된 만국박람회 |
⑨ 영국 산업혁명의 결정판 만국박람회
이 기품 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는 독일 출신인 빈터할터(F. X. Winterhalter)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그림 공부를 한 후 프랑스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하였다. 유럽 각국의 왕족들로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범 유럽적 인기를 누린 화가였다. 그림 1은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왕실을 묘사한다. 아기를 안고 있는 이는 대영제국의 수장인 빅토리아 여왕이고, 그 왼편에 서 있는 남자는 남편인 앨버트 공이다. 금슬이 좋았던 두 사람은 많은 자식을 두었는데, 그림 속의 아기는 일곱째인 아서 왕자다. 흰머리의 남자는 과거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파한 맹장 웰링턴 공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빈터할터의 솜씨를 높이 평가하여, 1842년부터 20년에 걸쳐 자주 그에게 왕족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림의 제목은 『1851년 5월 1일』이다. 이 날짜가 그림의 주제를 말해준다. 이날은 아서 왕자의 첫돌이자 웰링턴 공의 82번째 생일이었다. 웰링턴 공은 아서 왕자의 대부(代父)이기도 했다. 그림에서 고령의 웰링턴 공은 아서 왕자에게 장식함을 선물하는 것으로, 그리고 아서 왕자는 웰링턴 공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1851년 5월 1일은 영국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념일이었다. 경제사적으로 본다면 왕자와 고관의 생일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는 날짜였다. 과연 무엇을 기념하는 날이었을까? 그림의 배경을 자세히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앨버트 공의 눈길이 향하는 왼편을 보면 둥근 지붕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구름을 뚫고 건물을 향해 비치는 햇살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로 이 건물이 우리가 주목할 대상이다. 이 건물은 1851년에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인 대박람회(Great Exhibition)의 전시장이었다. 5월 1일은 바로 이 대박람회가 개최된 날이었다. 앨버트 공은 박람회 개최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후원한 인물이었다. 그의 시선이 이 건물을 향하도록 화가가 그린 것은 이를 반영한 것이리라.
| 그림 2 조셉 내쉬, 『디킨슨의 1851년 대박람회총람집』, 1854년 |
수정궁 구조, 남미 식물 잎에서 착안
대박람회의 개관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여왕을 위시한 주요 왕족들과 고관대작들이 참석했고 수많은 외교사절들이 자리를 빛냈다. 오늘날의 국제박람회와 마찬가지로 개별 국가들은 자국의 부스에 진귀한 물품들을 전시하였다. 자국의 문화적 취향과 기술 수준을 과시하는 현장으로 여기고,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 예술품과 해외에서 들여온 이국적인 물품들을 펼쳐 보였다. 영국은 이런 전시품 이외에 동력기계, 공작기계, 운송기계 등 다양한 기계들을 선보였다.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룬 국가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전시품보다 관람객의 시선을 더 강하게 끈 것은 전시장 건물 자체였다. 이 건물은 당시의 다른 건물들과는 사뭇 달랐다. 철골 구조에 유리판을 끼워서 만든,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런 건물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였다.
언론에서는 이 건물에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의 설계에 따라 건설된 건물은 좌우가 564m, 앞뒤가 139m였고, 높이가 41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더 놀라운 점은 건물의 혁신적 구조에 있었다. 1,000개가 넘은 주철 기둥 위로 2,000개 이상이 격자 대들보가 놓이고 총 45km에 이르는 철골에 의해 건물의 세부적 틀이 갖추어졌다. 여기에 18,000장의 유리판이 설치됨으로써 건물이 완성되었다. 그림 2에서 관람객이 느꼈을 시각적 전율을 공감할 수 있다.
| 그림 3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린 초대형 수련. 1849 |
팩스턴은 어떻게 이런 구조물을 구상하게 되었을까? 흥미롭게도 그의 아이디어는 멀리 남아메리카에서 자라는 한 식물로부터 출발하였다. 서구 열강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지구 곳곳의 자연에 대한 지식도 축적되어 가던 시절이었다. 1830년대에 유럽에 처음 알려진 남아메리카의 수련 한 종류가 곧 정원사들에게 각별한 인기를 끌었다. ‘빅토리아 아마조니카(Victoria Amazonica)’라고 명명된 이 수련은 다 자라면 잎이 지름 3m나 되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물에 떠 있는 잎의 부양력이 대단히 커서 그 위에 어린 아이가 올라설 수 있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팩스턴은 데본셔 공작의 대저택인 채츠워스 하우스의 정원책임자였는데, 그는 이 수입식물을 위한 온실을 짓고 잘 보살펴 꽃을 피움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림 3은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삽화로, 딸을 연 잎 위에 올려놓고 자랑스러워하는 팩스턴이 등장한다.
유럽이 축적한 세계화 성과. 박람회에 집약
이 식물에 대한 팩스턴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수련 잎이 무거운 아이를 지탱할 수 있는지에 호기심을 느꼈는데, 곧 해답의 열쇠가 잎 뒷면의 구조에 있음을 알아냈다. 핵심 뼈대들과 그들을 잇는 가로 뼈대들로 이루어진 구조가 강한 지지력의 비밀이었다. 팩스턴은 당시 진행 중이었던 만국박람회 전시장 공모전에 이런 구조를 담은 설계안을 제출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룬 영국의 기술적 성취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혁신적 디자인이라고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와 공사기간 면에서도 전통적 건축물을 압도하는 경제성을 보였으므로 당연히 그의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수정궁은 단지 영국의 공업생산력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아니었다. 세계 각지의 자연에 대한 지식의 축적과 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창의적 사고를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했다. 지식과 기술의 세계화가 낳은 긍정적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팩스턴의 실험적 건물은 대성공이었고, 박람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6개월의 개관 기간에 하루 평균 4만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여 총 600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하였다. 당시 영국 총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관람객 대다수는 영국인이었겠지만, 다른 국가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박람회를 직접 방문할 만큼 관심이 크고, 여행을 할 경제력과 여가가 있는 사람은 해당 국가의 상류층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람회는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공업화 없이는 미래에 강국으로 남을 수 없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등 많은 국가들이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성장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국가 간의 경쟁을 부채질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유행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만국박람회는 이런 경쟁의 소산이었다.
그림 1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를 거치면서 영국이 누리게 된 전성시대를 3중으로 표현한다. 웰링턴 공은 강력한 경쟁국 프랑스를 누르고 군사강국을 이룬 영국의 성취를 상징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다산은 대영제국의 번영이 계속되리라는 기대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앨버트 공이 마음을 쏟았던 수정궁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룬 국가, 멀리 남아메리카의 야생 식물에서 얻은 힌트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지식기반경제의 탄생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 중앙선데이 | 제382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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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8. 실크로드를 통한 유라시아 동서교류 |
| 그림 1. 『장건출사서역도』, 둔황 막고굴 323굴 북벽. 한(漢) 무제(武帝)의 명에 따라 서역으로 떠나는 장건(張騫) 사절단의 모습을 그렸다.
중국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도시 둔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323호에는 한(漢)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 장건(張騫)이 사절단을 이끌고 서역으로 떠나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장건출사서역도(張騫出使西域圖)』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한 무제 앞에서 장건이 홀(笏)을 들고 출발을 고하는 장면(아래쪽)이 있고, 이와 더불어 무제가 예배 의식을 거행하는 장면(위 오른쪽)이 등장한다. 자세히 보면 제당 안으로 크기가 비슷한 두 형상 -불상(佛像)으로 보이는- 이 모셔져 있다. 무제는 불상 앞에서 원정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었던 것일까? |
서역과 손잡고 흉노 협공 漢 무제 구상, 실크로드 낳아 |
⑧ 실크로드를 통한 유라시아 동서교류
장건이 서역으로 떠난 것은 기원전 139년이었고 2차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기원전 115년이었다. 이 시기에 장건은 불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석가모니는 기원전 563년에 탄생해 기원전 483년께에 입적했다. 불교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인도에서 발흥한 불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그중 하나가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방을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서 동진해 중국에 이르고, 이어서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진 경로다. 이를 따라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정확한 시점은 서력기원 직후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따라서 적어도 한 무제가 불교를 신봉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위의 벽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장건의 원정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이었던 진나라는 시황제가 사망한 뒤에 곧 분열되었는데, 이를 다시 유방(劉邦)이 한나라를 세워 통일했다. 북방에 흉노라는 막강한 세력이 한나라에 지속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가했으므로 초기의 황제들은 흉노에게 비단, 곡물, 화폐 등을 내주고 공주를 흉노에게 출가시키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그런데 7대 황제인 무제는 이런 화친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흉노를 좌우에서 협공하겠다는 계획을 마음에 품고서 과거 흉노에게 쫓겨 서역으로 밀려났던 대월지(大月氏)와 동맹을 맺고자 장건 일행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계획은 무제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장건은 중간에 흉노에게 붙잡혀 10여 년 동안 억류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아내와 자식을 얻었지만 애초의 임무를 망각하지는 않았다. 장건은 우여곡절 끝에 흉노의 땅을 탈출해 마침내 대월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고, 귀국길에 다시 흉노에게 잡혔다가 재탈출에 성공해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기원전 119년에는 다시 흉노를 협공할 세력으로 오손(烏孫)과 연합하고자 장건을 파견했으나 이번에도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장건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장건의 보고를 통해 한나라는 서역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 지역 간에 외교적·경제적·문화적 교류가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한에서 서역으로 비단과 같은 재화가 수출되었고, 서역으로 부터 유입된 재화로는 석류, 포도, 상아, 금, 향료, 보석, 그리고 중국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한 말인 ‘한혈마(汗血馬)’가 있었다. 한의 교역망은 중앙아시아를 지나 로마제국에까지 이르렀다. 로마에서는 한때 비단 수입이 너무 많아 제국의 재정이 압박을 받을 정도였다.
한 무제 시대 이후에도 서역과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후한(後漢)의 무장 반초(班超)는 73년 흉노 토벌에 참가해 공을 세운 후 30년 넘게 서역에 머물면서 정복지를 확대했다. 그는 부하 감영(甘英)을 서쪽으로 파견해 대진(大秦:로마)과 외교관계를 맺고자 했다.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감영이 조지국(條支國:시리아)에 이르러 앞에 놓인 큰 바다(지중해)를 건너려 하자 안식(安息:파르티아)의 뱃사공이 만류했다고 한다. 바다가 워낙 험해서 항해하는 데 순풍에도 3개월, 역풍이면 2년이나 걸리며, 재난 위험이 아주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나라와 로마가 직접 교역하게 될 것을 염려해 안식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당시 유라시아의 교역로를 누가 통제하느냐가 큰 관심사였으리 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세기 중반에는 대진의 황제 안돈(安敦: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신이 바닷길을 통해 중국으로 왔다는 기록도 있다.
| 그림2. 인도에서 돌아오는 현장을 묘사한 둔황 103굴의 벽화. |
| 그림3. 둔황석굴에 그려진 예불 드리는 상인 가족 |
다시 둔황으로 돌아가 보자. 둔황은 중국 간쑤(甘肅)성의 실크로드 요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였다. 둔황은 이미 기원전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전진기지로서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당 왕조까지 유라시아를 잇는 교역과 문화 교류의 관문으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명사산(鳴砂山) 기슭에 위치한 막고굴은 산비탈에 1000개가 넘는 석굴을 뚫어 조성한 위대한 불교유산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약 500개의 석굴에서 많은 벽화와 경전 등의 불교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라의 혜초(慧超)가 8세기에 인도를 답사하고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막고굴 벽화에서 한 무제는 어떻게 예불을 드리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게 되었을까? 이 벽화가 그려진 시기가 당나라 때인 7~8세기라는 점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융성하던 당나라에서 불심이 깊은 화가가 장건의 이야기를 불교적으로 각색해 벽화를 제작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즉 한 무제의 모습에 경건한 예불 이미지를 결합함으로써 새롭게 불교사적화를 탄생시킨 것이었으리라. 시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것이 실크로드를 통해서였으므로 역사적 맥락이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다. 서유기에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등장하는 당나라의 고승 현장(玄?)이 7세기에 인도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교 경전을 가져온 것도 바로 이 실크로드를 통해서였지 않은가. 8세기에 제작된 둔황의 벽화(그림 2)에 현장 일행이 이 길을 걸어 중국으로 향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당대에 실크로드는 상인이 무역을 위해 오가는 교역로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인, 사절단, 학생 등이 문화를 교류하면서 세계화를 이루어 가는 통로였던 것이다. 특히 상업과 불교는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면서 실크로드 위에서 번영의 꽃을 피웠다. 상인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주자 거류지를 건설하고 숙소·시장·창고와 더불어 불교 승려가 지낼 승원(僧院)을 세웠다.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는 장거리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은 불교에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안식을 찾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예불 의식을 치르는 상인 가족을 묘사한 그림 3에서 상업과 불교의 결합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에서 제당에 모셔져 있는 것이 불상이 아니었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예배를 드리는 무제 아래편에 적혀 있는 설명문이 해답의 실마리를 준다. 무제가 기원전 120년에 흉노의 군대를 토벌하고 두 개의 금인(金人)을 얻고서는 이를 감천궁(甘泉宮)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곤 했다고 한다. 예배를 드리는 대상은 불상이 아니라 흉노가 제사를 지낼 때 모시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인이 과연 그림에 묘사된 모습이었는지는 역사가들이 확신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화가가 제천금인에 후대의 종교적 색채를 가미해 불상의 모습으로 재창조했을 수도 있다.
장건의 원정대를 묘사한 둔황의 벽화가 한 무제 당시의 모습을 온전히 반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요충지 둔황에서 장건으로 상징되는 ‘외교적’ 요소와 불교라는 ‘종교적’ 요소가 결합되어 벽화의 형태로 표현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동아시아에서 로마까지 이르는 유라시아 연결로의 발달 과정을 이 벽화는 후대인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380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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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7. 대양을 가로지른 노예무역의 참상 |
| 1 고드프리 메이넬(Godfrey Meynell), 『알바네스(Albanez) 호의 노예선실』, 1846년. 좁은 공간에, 짧은 머리에 옷도 별로 걸치지 않은 흑인들이 가득하다. 나무로 된 바닥과 기둥, 그리고 천장 (갑판)에서 내려오는 빛줄기로 볼 때 선박의 갑판 아래 풍경으로 보인다. 나무통과 다른 화물들 사이사이로 흑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가득 싣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전형적인 운반선의 모습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 설명을 붙여놓은 역사책도 여럿이다. 이것은 올바른 추측일까? 이 배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
18~19세기 1600만 노예 … 세계화의 부끄러운 단면 |
⑦ 대양을 가로지른 노예무역의 참상
그림 1을 보자. 의자나 침대와 같은 물품이 보이지 않고 높이가 낮은 공간에 흑인들이 촘촘하게 차 있는 것을 보면 노예를 운반하는 배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들은 대부분 누워 있거나 앉아서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뒤쪽으로는 두 손을 쳐들고 있는 이의 모습도 보인다. 아무도 손발과 목이 족쇄로 묶여 있지 않은 채 모두가 대체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 참혹한 환경으로 악명 높은 전형적인 노예무역선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이 그림은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까?
노예무역선을 묘사한 다른 그림을 보자. 그림 2는 영국의 유명화가 윌리엄 터너(J. M. W. Turner)가 1840년에 그린 『노예선』이다. 이 그림에는 ‘다가오는 폭풍 앞에서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배에서 던지는 노예상인들’ 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멀리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그 앞쪽으로 바다에 빠져 물고기의 먹이가 되고 있는 검은 피부의 팔다리와 이들을 묶었던 족쇄가 보인다.
| 2 윌리엄 터너(J. M. W. Turner), 『노예선』, 1840년 |
이 그림은 1783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1781년 흑인노예 400명을 싣고 아프리카를 떠나 멀고 먼 중간항로(Middle Passage)를 따라 서인도로 가던 종(Zong) 호에서 항해 도중에 질병이 돌았다. 질병과 영양 부족으로 60명 이상이 이미 죽었고 많은 수가 병에 걸린 상황에서 선장과 선원들은 지극히 잔인한 결정을 내렸다.
사망자와 질병에 걸린 132명을 모두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육지에 상륙한 후 사망하거나 항해 중에 질병으로 사망한 노예에 대해서는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지만, 항해 중에 다른 ‘화물’(즉 노예)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던져진 노예에 대해선 보험금이 지급되기 때문이었다. 선박 소유주와 보험회사 간의 법적 분쟁 과정에서 이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경제적 이익을 생명보다 앞세운 인간의 잔혹함에 분노하면서 노예무역 금지에 동정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림의 제작연도가 1840년인 점이 눈에 띈다. 여기서 노예제 금지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국은 대항해시대 이래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가장 많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송출한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이 여론을 자극하면서 노예무역 폐지운동이 일어났고,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같은 열정적인 운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1807년에 노예무역 폐지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노예제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노예무역을 실질적으로 금지시키기는 어려웠다. 이에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1838년에 영국은 서인도제도의 노예를 풀어주는 노예해방령을 제정했다.
그렇다면 터너는 왜 1840년에 노예선 그림을 발표했을까? 1838년 이후에도 노예무역이 세계적으로 근절된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국 해군은 노예를 싣고 운항 중인 다른 국가의 선박을 단속하고 노예를 풀어주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노예선이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에는 단속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선이 출항하기를 기다렸다가 단속에 나섰다. 한편 노예상인은 단속을 피하고 노예 손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예들을 바다로 밀어넣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결국 영국 해군의 무리한 선택과 노예상인의 탐욕이 여전히 노예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을 터너는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 3 아이작 크뤽섕크(Issac Cruikshank), 『노예무역의 금지』, 1792년 |
1791년 영국의 노예무역선 리커버리(Recovery) 호의 선장 존 킴버(John Kimber)는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가득 싣고 카리브해로 항해를 떠났다. 그 역시 악명 높은 중간항로를 따랐는데, 비좁고 비위생적인 노예 ‘선적’으로 인한 질병과 사망을 막기 위해 노예들에게 옷을 벗은 채로 강제로 춤을 추게 했다. 두 명의 어린 여자노예가 부끄러워 춤추기를 거부하자 킴버 선장은 무자비한 채찍질로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이작 크뤽섕크(Issac Cruikshank)의 그림 3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면서 채찍을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킴버 선장을 묘사한다. 그는 살인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불과 10년 전에 발생한 종 호 사건에서는 노예들을 수장시킨 이들이 살인죄로 기소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적어도 노예를 죽인 행위가 살인죄의 대상이 된다는 점만은 명확해졌다. 그만큼 노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미 변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노예가 되어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야만 했던 흑인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대항해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는 적어도 1600만 명을 넘었다. 험난한 항해 도중 사망에 이른 노예가 전체 승선노예의 10~20%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를 떠난 인구가 아메리카 도착 인구보다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또한 그 이전에 포로가 되거나 유괴되는 과정, 그리고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목숨을 잃은 이도 많다. 이들의 가족이 겪은 고통도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컸다. 실로 엄청난 인구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지옥 같은 경험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는 백인들의 플랜테이션에서 사탕수수 · 담배 · 면화 등을 재배하거나 금광과 은광에서 채굴을 하는 노동력으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물자는 유럽으로 운송되어 소비자에게 판매되거나 정부의 국고를 살찌우는 수단이 되었다. 노예무역의 이익은 직접적으로는 노예상인에게 돌아갔지만, 유럽 국가들의 소비자와 정부도 큰 이득을 얻었던 것이다. 한 추계에 따르면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 전체 국민소득의 약 5%가 노예무역과 서인도 제도의 플랜테이션으로부터 얻은 이익이었다.
그림 1로 돌아가 보자. 그림의 제목은 『알바네스(Albanez) 호의 노예선실』이고, 화가는 영국의 해군 장교인 고드프리 메이넬(Godfrey Meynell)이다. 알바네스 호는 아메리카로 노예를 운반하는 브라질 무역선이었다. 그림이 제작된 1846년은 아메리카 곳곳에서 여전히 노예제가 뿌리 깊게 유지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화가가 소속된 영국 해군선 알바트로스(Albatross) 호가 노예선 알바네스 호를 나포한 뒤 승선하고 있던 300여 명의 노예를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으로 돌려보내는 모습을 그림은 묘사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왜 배에 탄 이들이 대체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 알 만하다.
노예무역은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를 잇는 삼각무역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 이었다.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상품인 노예의 교역이 대항해시대와 중상주의시대, 그리고 산업화시대 초기를 잇는 긴 기간에 경제적 세계화를 이끈 중요한 축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부끄러운 과거다. 그림 1이 제작된 19세기 중반까지도 노예제는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서 완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20세기까지도 노예제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한 지역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돌부리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노예제의 완전한 폐지를 향해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비록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중앙선데이 | 제378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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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6. 거대기업의 등장, 번영과 쇠퇴 |
| 그림1 우도 케플러(Udo J. Keppler),『세월이 참 많이 변했네!』,『퍽(Puck)』, 1914년 3월 7일자. 단상에 빨간색 줄무늬 바지를 입고 가운을 걸친 인물이 앉아 있다. 그 앞으로 중년 신사들이 모자를 벗은 정중한 모습으로 이 인물을 바라보고 있다. 중앙의 인물이 위엄 있는 태도를 취하며 읽고 있는 종이에는 ‘철도요금 인상 허용 청원서’ 라고 쓰여 있다. 이 인물 뒤로 흰색 윤곽의 유령이 보이는데, 그 유령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손에서 종이를 떨어뜨리고 있다. 그 종이에는 ‘망할 놈의 대중들, 밴더빌트’ 라고 적혀 있다. 이 그림은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것일까? |
철도왕 · 석유왕 · 금융왕의 전횡, 반독점법 자초 |
⑥ 거대기업의 등장, 번영과 쇠퇴
우선 유령으로 등장하는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에 대해 알아보자. 밴더빌트는 뉴욕의 갑부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는 주로 수상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중년의 나이에 철도 사업에 뛰어들었다. 1860년대에 뉴욕 중심부를 관통하는 뉴욕중앙철로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그는 ‘철도왕’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영향력 있는 사업가로 부상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 신문기자가 밴더빌트에게 우편열차의 영업 중단이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묻자, 밴더빌트는 “‘망할 놈의 대중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퍼지면서 밴더빌트의 이 말은 대기업가가 대중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인용되게 되었다. 1914년 『퍽(Puck)』이라는 미국의 대중잡지에 실린 우도 케플러(Udo J. Keppler)의 <그림 1>은 이 일화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독점기업가, 부 앞세워 의회권력도 장악
1870년대부터 기업들이 합병을 통해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재탄생하는 움직임이 전(全) 세계적으로 일어났다. 미국이 움직임을 선도했는데, 밴더빌트는 바로 이런 변화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초대형 독점기업의 형성은 철도부문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더욱 대대적인 독점화는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활동한 석유 부문에서 나타났다. 그는 1860년대에 석유산업에 뛰어들어 성장을 거듭했고 1879년에는 석유업계의 기업들을 대거 통합해 스탠더드 오일트러스트(Standard Oil Trust)를 조직했다. 이 독점조직을 통해 ‘석유왕’ 록펠러는 미국 정유시설의 약 90%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석유를 극히 낮은 가격에 판매해 경쟁자들을 도산시키고 그 후에는 독점력을 이용해 가격을 크게 높여 폭리를 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록펠러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축적한 인물이었다. 자산규모를 실질가치로 계산하면 그는 미국 역대 최고의 부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밴더빌트는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와 더불어 2, 3위를 다투었다. 금융부문에서는 모건(J. P. Morgan)의 지배력이 가장 컸다. 1901년 ‘금융왕’ 모건은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포함한 7개의 대형 철강회사를 석탄회사들과 통합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그 결과로 초거대기업 유에스스틸(U. S. Steel)이 탄생되었다.
| 그림2 조셉 케플러(Joseph F. Keppler), 『상원의 보스들』, 『퍽(Puck)』, 1889년 1월 23일자. |
거대기업의 수장들은 엄청난 시장지배력을 휘둘렀다. 철도왕, 석유왕, 강철왕, 금융왕이 군림하는 경제에서 소비자들과 소규모 생산자들은 독점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개미’들은 정치와 입법이라는 채널을 통해 상황을 바꾸고자 애를 썼지만, 그곳에서도 거대기업의 막강한 영향력에 부딪혀 절망하기 일쑤였다. 우도 케플러의 아버지 조셉 케플러(Joseph F. Keppler)가 1889년에 발표한 <그림 2>는 일찍부터 미국 정치가 초대형 기업집단에 의해 휘둘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원의 보스들』이라는 제목의 이 만평을 보면 상원의원들 뒤로 엄청나게 큰 덩치의 기업집단(트러스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독점가용 입구’를 통해 의사당 안으로 들어선다. 반면에 왼편 멀리 ‘일반인 입구’는 빗장이 잠겨 있다. 상원의원들은 수시로 고개를 뒤로 돌려 거대 기업집단들의 눈치를 살핀다. 벽에 걸린 현판에는 ‘독점가의, 독점가에 의한, 독점가를 위한 상원’이라고 적혀 있다. 대자본의 영향력에 예속된 정치판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반독점 투사
특정 기업의 시장지배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다른 기업들이 진입해 경쟁을 펼칠 기회가 애초부터 차단되기 쉽다. 그리고 독점적 지위에 오른 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생산량을 조정하고 가격을 높게 유지한다. 이는 결국 소비자의 피해로 귀결된다. 독점의 폐해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정부는 개선책을 내놓아야만 했다. 마침내 1890년에 셔먼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이 제정되어 트러스트 조직을 불법화했다. 거대기업의 확장 가도에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법률의 제정이 곧 현실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까지 반독점법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 그림3 프랭크 낸키벨(Frank. A. Nankivell), 『어린 헤라클레스와 스탠더드오일 뱀들』, 『퍽(Puck)』, 1906년 5월 23일자 |
루스벨트의 개혁정책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프랭크 낸키벨(Frank. A. Nankivell)의 <그림 3>에서 루스벨트가 어린 헤라클레스로 등장한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기억해 보자.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신과 인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제우스가 헤라클레스를 편애하자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여신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8개월 된 헤라클레스의 요람에 두 마리의 독사를 풀어놓는다. 그런데 아기는 괴력으로 두 뱀의 목을 졸라 죽인다. 이 만평(漫評)에서 루스벨트는 정치가 앨드리치(Nelson W. Aldrich)의 머리와 기업가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의 몸통을 쥐고 있다. 앨드리치는 전차·설탕·고무·은행 등에서 내부거래로 큰돈을 번 인물이었다. 그와 석유재벌 록펠러는 자식들의 혼인으로 1901년 사돈지간이 되었다. 1906년에 발표된 이 그림에서 두 인물은 충혈된 눈을 가진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루스벨트는 이를 악물고 이들을 제압하려 애쓰는 모습이다.
현실에서 루스벨트와 그의 뒤를 이은 대통령들은 점차 거대기업의 경제적 · 정치적 영향력을 제압해 가는 데 성공했다. 1903년에 법무부 내에 독점금지국이 설립되었고 1906년에는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었다. 재판의 결과로 막강한 시장지배력을 과시하던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는 1911년에 30개의 회사로 강제 분할되는 운명을 맞았다. 1914년에 제정된 클레이턴법(Clayton Act)은 반독점 규제를 더욱 강화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미국은 거대기업의 독점력을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게 되었다.
<그림 1>로 돌아가 보자. 단상의 인물은 미국을 의인화한 엉클 샘(Uncle Sam)이다. 철도사업가들이 클레이턴법이 제정된 해인 1914년에 함께 모여 정부에 청원을 하고 있다. 철도요금을 인상해 달라는 것이다. 과거에 독점적 지배력을 한껏 누렸던 밴더빌트는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다.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철도요금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인상할 수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이제는 기업가들이 정부에 청원을 올리고 정부가 우호적으로 결정을 내려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국에서 본격화된 기업합병과 독점화의 움직임은 곧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처럼 초대형기업이 상대적으로 덜 형성된 나라도 있지만, 독일과 일본에서는 합병 붐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국적을 특정하기 어려운 초국적 성격의 기업집단들도 생겨났다. 또한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면서 독점기업을 통제하는 제도도 각국의 상황에 맞추어 발전해 갔다. 미국에서 시작된 거대기업 체제와 공정거래 제도는 이렇게 진화를 거듭하면서 세계경제의 모습을 바꿔 놓았다.
- 중앙선데이 | 제376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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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5.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과 지식 전쟁 |
| 1 장레옹 제롬(Jean-Leon Gerome),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 1867~68년. 이집트의 거대 조형물인 스핑크스 석상을 군복 차림의 사내가 말을 탄 채 응시하고 있다. 무척이나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사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자세히 보면 멀리 뒤편으로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보이고 왼편에는 보좌진의 그림자가 보인다. 1798년 혈기 넘치는 29세의 프랑스군 총사령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기를 묘사한 이 그림에서 스핑크스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코 부분이 허물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스핑크스가 무너진 코를 갖게 된 것은 포병 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이 스핑크스의 코를 표적 삼아 대포를 발사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세간의 믿음은 과연 역사적인 진실일까? |
스핑크스 코 뭉갠 건 나폴레옹 아닌 이슬람 과격파 |
⑤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과 지식 전쟁
그림1에서 나폴레옹은 거대한 괴물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풍긴다. 마치 야만스러운 초대형 괴물 스핑크스의 코를 인간 영웅이 납작하게 만든 것을 기념하는 듯하다. 유럽의 백인 지도자가 아프리카 고대왕국의 신화적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겨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가가 의도했음 직한 이런 인상은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원래 스핑크스는 고대 이집트의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로,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지녔다. 스핑크스는 이집트뿐 아니라 바빌로니아·페니키아·페르시아 등에서도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친숙한 스핑크스는 사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테베의 바위산 부근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침에는 네 다리, 낮에는 두 다리,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를 던져 이를 풀지 못하면 잡아먹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의 정답이 ‘사람’이라고 맞히자 스핑크스는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신화는 전한다.
지리학 · 수학학자 등 167명 원정대 동행
정말로 나폴레옹이 스핑크스 석상의 코를 훼손시켰을까? 나폴레옹이 왜 이집트로 향했나를 생각해보자.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유럽의 군주들은 긴장했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 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이들은 연합세력을 구축해 프랑스를 제압하고자 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사력을 장악한 나폴레옹과 군주국 연합군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연합군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중상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확보한 해외 교역로를 통해 국제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산업혁명을 거치고 있었던 영국은 면직물을 포함한 각종 공산품을 해외 시장에 판매했고, 아시아로부터 값비싼 직물 · 향신료 · 도자기 · 차 등을 수입해 유럽에서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특히 막대한 이익의 원천인 인도는 영국이 전면적 식민지화를 노리는 대상이었다. 나폴레옹 원정대의 일차적 목표는 국제통상의 요충지인 나일강 하구를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무역과 대인도 전략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
| 2 레옹 코니에 (Leon Cogniet), ‘보나파르트 지휘하의 1798년 이집트 탐험대’, 1835년 |
그런데 특이한 점은 나폴레옹이 4만 명의 군대와 더불어 많은 수의 학자를 대동했다는 사실이다. 지리학자 · 식물학자 · 엔지니어·수학자 등을 포함해 탐험대에 합류한 학자는 무려 167명에 이르렀다. 군대를 도와 원정이 수월하도록 하려는 것이 직접적 목적이었다. 지형과 기후를 기록하고, 도로와 수로를 파악하고, 병참에 도움을 주는 것이 이들의 핵심 임무였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이와 동시에 프랑스의 ‘문명’을 이집트에 전파하고 이집트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라고 여겼다. 학자들은 이집트협회(Institut d’Egypte)를 설립하고 다양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했다. 레옹 코니에(Leon Cogniet)의 그림2를 통해 탐험대의 활동 모습을 살펴보자. 텐트 안쪽 깊이 나폴레옹의 모습이 보인다. 학자들은 텐트 안팎에서 문서를 조사 하거나 종이에 뭔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미라와 같은 유물을 운반하거나 물을 길어 나르는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이렇듯 이집트 원정은 지식의 확장을 위한 사업이기도 했다. 3년에 걸친 탐사와 연구의 결과물은 방대한 자료집으로 완성되었다. 지식이 국가경쟁력의 원천이라고 나폴레옹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 지식탐험대가 이룬 성과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로제타석(Rosetta Stone)이라는 비석 조각을 발견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동일한 내용이 세 문자, 즉 상형문자와 밀접하게 관련된 성각문자, 이집트의 민중문자, 그리고 그리스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로제타석은 그간 풀지 못했던 상형문자를 해독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20여 년간 유럽 각국의 학자들이 치열한 두뇌 경쟁을 벌였고, 마침내 1822년 프랑스의 샹폴리옹(Jean-Francois Champollion)이 성각문자를 해독함으로써 경쟁을 승리로 마감했다.
나폴레옹 발견 로제타석 패전으로 영국行
그러나 로제타석은 현재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 아니라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나일강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가 허레이쇼 넬슨 제독이 지휘한 영국군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전투의 결과로 영국의 통상로를 봉쇄하겠다는 나폴레옹의 전략은 물거품이 되었고, 프랑스 원정대가 모은 약 5000점의 유물 가운데 현재 1%만이 루브르박물관에 놓이게 됐다. 로제타석도 이런 과정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선박에 실렸다.
나폴레옹 전쟁은 ‘세계적’인 성격의 전쟁이었다. 영국 · 프로이센 · 러시아 등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스페인 · 이탈리아 등 많은 지역이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에 놓였다는 점에서 범유럽 전쟁이었다. 또한 이집트처럼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까지 전투가 벌어졌으며 전쟁의 여파로 중남미의 대다수 국가가 독립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전쟁이었다. 이와 더불어 전쟁이 영토 정복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지리 · 역사 · 문화에 대한 지식 정복을 의도했다는 점도 특징적이었던 것이다.
| 3 노르덴(Norden), ‘스핑크스 거대 두상 옆 모습’, 1755년 / The Great Sphinx of Giza in Frederic Louis Norden's, Voyage d'Egypte et de Nubie (1755) |
나폴레옹이 많은 학자를 대동해 이집트학(Egyptology)을 개척했다는 사실과 스핑크스의 코를 파괴했다는 주장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고대 유물에 관심이 지대했던 나폴레옹이 왜 스핑크스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했겠는가?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스핑크스의 코를 훼손하지 않았다는 더 명백한 증거는 없을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나폴레옹의 원정 이전에 이미 스핑크스의 코가 파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755년 이집트를 방문한 덴마크의 탐험가 노르덴(Frederic Louis Norden)이 그린 그림 3을 보자. 나폴레옹보다 40여 년 앞선 시기에 제작된 이 그림에서 이미 스핑크스의 코는 무너져 있다.
여전히 남는 의문은 과연 누가 언제 스핑크스의 코를 파손시켰을까 하는 점이다. 15세기에 이집트의 역사가 알마크리지(Al-Maqrizi)가 기록한 내용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1378년 이슬람의 수피 열혈신도인 알다르(Muhammad Sa’im al-Dahr)의 명령에 의해 스핑크스 코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성상(聖像)을 부정하는 수피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얼굴을 지닌 괴물 스핑크스의 모습이 탐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강경한 입장의 알다르로서는 지역민들이 스핑크스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게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스핑크스의 얼굴을 훼손하는 작업은 이런 이유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너진 코 주위에서 끌 자국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이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나폴레옹은 군사적 전쟁과 지식 전쟁을 동시에 이끈 지도자였다. 그의 영향은 프랑스 주변에 머물지 않고 세계로 파급됐다. 서구 문명세계의 영웅 나폴레옹이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상징하는 괴물을 제압하는 모습은 후대의 서구인들이 갈망했던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신화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은 전혀 극적이지 않았고 그저 단순할 뿐이었다.
- 중앙선데이 | 제374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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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4. 장거리 무역의 귀재, 이슬람 상인 |
| 1. 알와시티 (al-Wasiti), 『마카마트』, 1237년. 벽돌로 지은 이슬람식 건물 안에 많은 사람이 뒤엉킨 채 누워 있다. 얼마나 깊이 잠에 빠졌는지 불편한 자세에도 깨어날 기색이 없다. 대부분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있으며, 팔에 금색 완장이 있는 긴 옷을 입고 있다. 자세히 보면 잠이 들지 않은 사람도 두 명 있다. 가운데에 서 있는 푸른 옷의 인물과 왼편에 있는 흰옷을 입은 사람이다. 이 그림은 어떤 장면을 묘사하고 있을까? |
상업에 호의적인 이슬람, 무역으로 지구 절반 묶어 |
④ 장거리 무역의 귀재, 이슬람 상인
이 그림은 이라크의 유서 깊은 오아시스 도시 와싯(Wasit)에 있는 건물을 묘사하고 있다.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슬람 상인들이며 이들이 누워 있는 건물은 사막을 건너 교역을 하는 대상(隊商·caravan)이 머무는 숙소인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다. 팔에 두르고 있는 띠는 티라즈(Tiraz)라는 장식으로, 처음에는 통치자가 국영 공방에서 제작해 귀족과 관료들에게 하사했다가 점차 민간으로 이용이 확산되었다. 자세히 보면 눈을 뜨고 있는 두 사람은 잠에 빠진 상인들로부터 물건을 빼내고 있다. 일부러 약을 탄 음식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하고는 소지품을 훔치는 현장이다.
이 그림은 알와시티(al-Wasiti)가 그린 13세기 작품으로, 알하리리(al-Hariri)가 저술한 고전 문학작품 『마카마트(Maqamat)』에 삽입된 것이다. 원작 자체의 스토리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이 그림에서 우리는 중세 이슬람 무역상들이 겪었음직한 위험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험난한 사막을 고생스럽게 통과해 오아시스 마을에 무사히 도착한 뒤 상인들은 안도하면서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이들이 마음을 놓는 바로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닥쳤다.
| 2. 알와시티 『마카마트』, 1237년 D'apres une enluminure de Mahmud Al Wasiti, Bagdad 13 eme siecle |
2세기부터 낙타를 운송에 본격 활용
사람들이 낙타를 운송에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2세기경이었다. 낙타는 말이나 노새보다 많은 짐을 나를 수 있었고, 특히 사막을 건너는 데에 탁월했다. 황량하고 드넓은 사막을 관통하는 일은 상인들에게 고통스러웠지만, 대신에 사막에는 강이나 밀림이 없어서 이동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았고 맹수의 위험도 없었다. 또한 기후가 건조해 병원균이 서식하기 어려웠으므로 질병에 걸리거나 물건이 변질될 위험도 적었다. 이런 이점들이 상인의 육체적 고단함을 상쇄하고도 남았기 때문에 대상무역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슬람 상인들이 육로만을 이용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중해에서 유럽인과 교역을 하고,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항해한 후,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가로질러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그림 2는 페르시아만을 항해하는 선박을 묘사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선실에 탄 승객들은 모두 흰 피부에 색색의 터번을 두른 모습인 반면 선상에서 일하는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검은 피부를 지녔다. 이렇게 두 집단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배를 모는 선장과 선원은 인도인이고 승객은 이슬람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장거리 무역의 실세는 이슬람 상인이었던 것이다.
이슬람 상인들의 해상 활약상은 대단했다. 지중해에서 유럽인과 거래한 이들은 페르시아만이나 홍해를 거쳐 인도양에 이르렀다. 이들은 인도양을 가로질러 동남아시아에 도달했고, 심지어 동아시아까지도 건너가서 무역을 했다. 압바스 왕조(750~1258)를 배경으로 하는 신밧드(Sindbad)의 모험 이야기는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슬람인들의 관심과 동경을 잘 보여준다. 이슬람 상인들이 무역업에서 눈부신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가들은 이슬람 사회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볼 때 상업에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한다. 여기에는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가 상인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이슬람 통치자들의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도 국가에 인두세만 납부하면 경제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했다. 카라반세라이를 지어 국가에 기부하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또한 술탄이 지켜보는 앞에서 상인과 제조업자 동업조합원들이 자신들의 대표 상품을 들고 행진하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거행했다. 동업조합은 기술을 표준화하고 공급량을 조절하는 역할도 했지만, 장거리 무역업에 따르는 위험을 구성원들에게 고루 분산하는 보험 역할도 담당했다.
| 3. 『축제의 책 (Surname-i Vehbi)』, 1582년 |
알칼리 · 알코올 등도 이슬람이 남긴 유산
그림 3은 이런 행사의 한 예를 보여준다. 이스탄불에 있는 대형 경기장을 보여주는 이 그림의 왼편 위쪽에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앉아 있고, 오른편으론 많은 관객이 3층 공간을 채우고 있다. 행진을 하는 사람들은 방직업자 동업조합의 일원들이다. 이들은 화려한 문양의 상징물과 아름다운 직물을 높이 들고 행진하면서 술탄과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명품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 국가정책에 힘입어 이슬람 상인들은 국제적 경쟁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경제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324년에 있었다. 사하라 이북의 아프리카는 10~12세기에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 종교적 통일은 이슬람 경제권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했다. 13세기에 북아프리카의 중심국으로 등장한 말리제국은 14세기에 이슬람권 전역에 금을 공급하는 생산지로도 명성을 떨쳤다. 1324년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만사(황제) 무사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순례행렬에는 1만2000명에 이르는 노예가 포함되어 20t 이상의 금덩이를 수송했으며, 80마리의 낙타가 따로 수t에 이르는 사금을 날랐다고 한다. 당시에 세계 최고의 부자였을 만사 무사는 순례 길에 거친 카이로와 메디나에서 빈민들에게 금을 나눠주었고, 그곳 상인들로 부터 각종 물품을 비싼 값에 구입했다. 그 결과로 이 도시들은 물가가 갑자기 크게 오르는 현상을 경험했다. 개인적 행위가 대도시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었다.
이슬람 세계의 힘이 무슬림의 상업적 수완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학 · 의학 · 과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도 이슬람 세계는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다. 11세기에 이븐 시나(Ibn Sina)가 저술한 의학서는 중세 유럽대학에서 기본 의학서로 채택되었으며, 1206년에 알자자리(al-Jazari)가 저술한 『천재적 기계장치 지식에 관한 책』에는 100개가 넘는 기발한 기계장치들이 소개되어 있다. 1574년에 타키 알딘(Taki al-Din)이 건설한 이스탄불의 천문대에서는 학자들이 모여 첨단의 측량 기구를 개발하고 역법을 발달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알칼리, 알코올, 알케미, 알고리즘과 같은 용어는 화학 분야에서 이슬람 학자들이 이룬 뛰어난 업적을 짐작하게 한다.
이슬람 세계가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널리 수용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은 세계사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9세기에 수도 바그다드에 세워진 ‘지혜의 집(Bayt-al-Hikam)’에서는 이슬람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저작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이렇게 번역된 저작들은 이슬람 세계 곳곳에 위치한 도서관들로 보내졌는데, 이것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기독교 재정복운동 과정에서 서유럽 기독교 세계로 전해졌다.
또한 15세기에 비잔틴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그곳의 학자들이 이슬람 세계로 이주해 와서 학문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유럽의 부흥을 낳은 르네상스의 학문적 초석은 이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과정을 통해 마련되었다. 기독교 유럽인들이 중세 내내 주적으로 간주했던 이슬람 세계가 훗날 유럽이 번영할 토대를 닦아주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100퍼센트 악(惡)이나 100퍼센트 선(善)이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문화권, 어떤 경제권이든 간에 나름의 장단점을 지녔기 마련이다. 이슬람에 의한 서유럽으로의 지식 전파는 오늘날 바람직한 세계화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 중앙선데이 | 제372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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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3. 비자발적인 세계화, 인도 철도 |
| 루돌프 스보보다(Rudolf Swoboda), ‘기차를 힐끗 보며’, 1892년. 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낮의 햇살을 받고 있다. 남자 아이가 나무 지지대에 걸터앉아 있고, 붉은 옷을 입은 여자 아이는 지지대에 기댄 채 맨발로 서서 왼편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 뒤로 다른 가족들이 서 있다. 이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옷차림으로 보아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평범한 인도인 가족으로 보인다. 뒤로는 흙으로 지은 나지막한 건물들이 보이고 직물을 짜거나 곡식을 말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인도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다. 그렇다면 그림의 주인공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인도 근대화의 상징 … 실제론 영국 자본가 배만 불려 |
③ 비자발적인 세계화, 인도 철도
의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는 그림의 왼쪽 하단에 나와 있다. 각이 진 기다란 물체는 다름 아닌 철로의 일부다. 주인공들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듯 화가인 루돌프 스보보다(Rudolf Swoboda)는 철로를 그림의 한 귀퉁이에 살짝 그려 넣었다. 제목은 ‘기차를 힐끗 보며’라고 붙였다. 화가는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을까? 자세히 보면 인물들의 표정이 차분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져 있다.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도 이들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밝은 긴장감이 엿보인다. 마치 배경을 이루는 시골 풍경으로부터 근대적 공간을 향해 나오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가는 새로 철도가 부설된 19세기 말 인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추측이 얼마나 맞을지는 화가의 개인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스보보다는 1880년에 이집트로 건너가 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로 인해 ‘동방전문가(Orientalist)’라는 명성을 얻었다. 스보보다는 1886년에 인도로 그림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여행 경비 300 파운드를 제공했다. 화가는 그 대가로 여왕에게 스케치 작품들을 헌상하기로 했다. ‘기차를 힐끗 보며’ 는 이 스케치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독립적인 유화였다. 화가가 대영제국의 궁극적 상징인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그림을 요청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식민지 인도를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을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다. 그는 기차를 기다리는 인도인 가족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인도에 근대화라는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것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실제 역사에서 철도는 인도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세계경제사에서 철도의 등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산업혁명은 인력, 축력, 풍력을 이용하던 기존의 에너지 사용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에너지원인 석탄의 사용은 생태계를 직접 압박하지 않으면서도 생산력을 급증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철도는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새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경제를 대대적으로 변화시킨 신기술의 총아였다. 철도는 먼 지역들을 연결시켜 사람과 상품과 원료가 쉽게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지식, 기술, 제도도 철도를 통해 빨리 확산될 수 있었다. 즉 철도는 근대적 기술 진보의 소산이자 사회 구성원들이 근대화의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만든 핵심 수단이었다.
| 액슬 헤이그 (Axel Haig), ‘봄베이의 대인도반도 철도 터미널과 행정관청’, 1878년 |
놀랍게도 20세기 초 아시아 전체에 건설된 철도의 80%가 인도에 놓였다. 액슬 헤이그(Axel Haig)가 묘사한 봄베이(뭄바이) 철도 터미널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철도는 문명, 미래, 진보, 선진화와 동일시되곤 했다.
그러나 스보보다와 헤이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이미지처럼 인도의 역사에서 철도가 꼭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인도의 근대화는 부진했고, 인도인이 누린 경제적 이득은 미미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근본적인 이유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철도 투자에 대해 인도 식민지정부가 일정한 수익률을 보장하도록 강요했다. 각 노선이 연 5% 미만의 수익률을 기록할 경우 차액을 보전해 주도록 제도를 짰던 것이다. 이 제도는 영국 투자가들이 수익성이 낮은 외딴 지역에도 철도를 부설하도록 하는 인센티브로 작용했다. 게다가 철로 건설, 철도 차량 제작, 연료 공급, 철도 운영의 핵심 부분을 영국 기업들이 독차지했으므로 인도인들에게 많은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비현실적이었다. 1900년에 수익률이 5% 미만이어서 인도로부터 보전금을 받은 노선이 무려 전체 철도의 70%에 이르렀다.
사실 인도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영국과의 악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까지 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인들이 소비하는 물건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였다. 인도의 최대 수출품은 면직물이었다. 유럽 귀족들이 사들인 최고급 직물부터 카리브해에서 노역하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거친 작업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수준의 면직물들이 인도인의 손에 의해 생산되고 수출되어 국고를 살찌 웠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중상주의 국가들은 면공업을 발전시켜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대체하려고 노력했지만, 경쟁력에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굴제국이 영국의 침탈을 받아 몰락하면서, 그리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인도 면공업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영국은 17세기에 동인도회사를 내세워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경쟁국인 프랑스를 물리치고 벵골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인도 식민지화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영국은 본국의 면공업 육성을 위해 인도의 면공업을 압박하여 쇠락의 길로 몰았다. 18세기 말부터 영국 북부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공업이 급성장하면서 영국은 마침내 세계시장에서 인도를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19세기에 영국은 인도 각지의 토후세력들을 분열시켰고, 마침내 1857년 세포이의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인도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인도는 더 이상 면직물 수출대국이 아니라,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영국을 위해 원료인 면화를 공급하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 작자 미상, 인도 파트나 시의 아편창고, 1882년. 수확된 아편은 무게 900g의 둥근 덩이로 만들어졌는데, 이 창고에만 30만 개의 아편이 저장되었다. |
영국은 19세기 들어 인도로부터 또 다른 도움을 얻었다. 이번에는 아편을 통해서였다.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편 수출의 확대를 기획했는데, 중국에 팔 아편을 생산하기에 인도는 최적의 생산지였다. 이후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아편전쟁을 통한 영국의 중국 침탈과 개방으로 이어졌다. 서구 열강에 의해 이루어진 강제적 세계화의 또 다른 사례였다.
영국에 있어서 인도는 얼마나 큰 경제적 가치를 지녔던 것일까?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은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에 대해 심각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1910년 대미 적자는 5000만 파운드, 대유럽 적자는 4500만 파운드나 되었다. 이를 해결해 준 것이 아시아로부터 유입된 자금이었다.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1300만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는 무려 6000만 파운드의 흑자를 보였다. 그런데 인도가 영국산 제품을 계속 소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으로부터 얻은 아편 판매대금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영국은 아편을 통해 중국과 인도에서 동시에 막대한 이익을 취했던 것이다.
보통 서구의 역사책에서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무역과 자본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호시절’로 묘사된다. 그리고 여기에 영국의 역할이 컸다고 설명된다. 최대 경제국이었던 영국이 일부 국가들에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다른 국가들에는 유사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세계 경제가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의 문제를 피해 원활하게 작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균형의 이면에는 오늘날엔 정당화할 수 없는 인도 식민통치와 아편 수출이라는 정책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세계화와는 달리 강제적인 세계화는 손해를 가져오기 십상임을 인도의 사례는 여실히 보여준다.
- 중앙선데이 | 제370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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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2. 유라시아 초토화한 흑사병 |
| 화가 미상, 『죽음의 승리』, 1446년께 마치 엑스선으로 투시한 것 같은 형상의 말이 질주하고 있다. 말 등에는 큰 낫을 옆에 찬 해골이 올라탔다. 말발굽 아래엔 많은 사람이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다. 어떤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희생자 중에 기독교 성직자가 많은 것을 보면 이교도의 공격을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귀부인이 많은 것을 보면 하층민의 반란을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과연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 것일까? |
중세 동서 교역 튼 팍스 몽골리카의 역설 |
② 유라시아 초토화한 흑사병
이 그림은 이교도의 공격이나 하층민의 반란과는 거리가 멀다. 해답의 단서는 다음 그림에 있다. 흰 천에 싸인 시신들이 묘지로 옮겨지고 장례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역병의 희생자들이다. 시신을 운반하던 인부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진다. 희생자가 한 명 더 늘어나는 현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늘에서 펼쳐지는 종교적 이야기다. 온 몸에 화살이 꽂힌 사내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망자들을 위해 탄원을 올리고 있다. 이 사내는 누구일까?
화살을 온 몸에 꽂고 있는 이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다. 그는 로마시대의 장교였는데, 몰래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화살을 맞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런데 그는 많은 화살에 맞고도 죽지 않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역병을 오늘날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했다. 행성들이 특별한 구도로 배열되었다거나, 지진으로 인해 지하의 사악한 기운이 지상으로 펴졌다거나, 신앙심을 잃은 인간에 대해 신이 노여움을 보인 탓이라는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
흑사병 원인 놓고 미신 무성
| | | 1 조스 리페랭스 (Josse Lieferinxe), 『역병 희생자를 위해 탄원하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1497~1499년. 2 화가 미상, 『플랑드르의 채찍질 고행 행렬』, 1500년께 | 기독교인들은 역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성인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역병은 마치 쏟아지는 화살과 같아서 어떤 이는 치명상을 입고, 어떤 이는 운 좋게 피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화살에 맞고도 죽지 않고 회복하기도 한다. 이런 유사성에 착안해 여러 발의 화살을 맞고도 살아남았다는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역병의 수호성인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죽음의 승리』에 묘사된 희생자들은 화살이 아니라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역병은 오랜 기간 인류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재난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역병이 1340년대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었다. 이 무자비한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이 병마에 희생되었다. 흑사병은 1347년 흑해의 무역항 카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카파는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던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제노바의 무역기지였다. 제노바는 동양에서 수입하는 향신료와 직물 등을 유럽 전역에 판매해 큰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베네치아와 더불어 제노바는 이탈리아 전성시대를 이끄는 양대 축이었다.
1347년 킵차크한국의 자니베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제노바인들이 방어하던 카파를 포위하고 공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몽골군 진영에서 역병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자니베크 칸은 시신을 투석기에 얹어 성내로 던져 넣고는 철군하였다. 투석기로 날아온 시신으로부터 감염된 제노바인들이 감염 사실을 모른 채 배를 타고 시칠리아 및 지중해 연안으로 상륙하면서 흑사병의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역병은 매우 빠르게 확산되었다. 불과 5년 만에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병마가 맹위를 떨쳤다.
흑사병은 19세기 말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박테리아에 의해 감염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검은 쥐와 같은 설치류에 서식하는 벼룩으로부터 인간에게 감염된다. 이런 ‘선페스트’와 달리 사람의 호흡을 통해 전염되는 변종인 ‘폐페스트’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흑사병의 전파 속도가 무척 빠르고 쥐가 거의 서식하지 않는 지역에서도 발병이 있었다는 점이 이런 주장의 근거를 이룬다.
흑사병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가족과 이웃이 순식간에 질병에 희생되는 참혹한 광경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천태만상이었다. 어떤 이는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돌본 반면 어떤 이는 겁에 질려 부모 자식까지 버리고 도망갔다. 어떤 이는 신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으며, 어떤 이는 순간적 쾌락에 탐닉하였다. 흑사병이 신이 분노한 결과라고 여기고는 예수를 못 박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대문과 창문을 꽁꽁 틀어막고 들어앉아 있으면 나쁜 기운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향내가 강한 허브를 태우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은 사람도 있었다.
전례 없는 대재앙 속에서 종교도 극단화된 모습을 띠었다. 특히 ‘채찍질 고행(Flagellation)’이 크게 유행하였다. 원래 채찍은 오래전부터 일부 금욕적 교단에서 참회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채찍질 고행은 이를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행하는 공공집회의 형태로 만든 것이었다.
| | | 화가 미상, 역병에 대비한 의사의 복장, 1720년 | 흑사병 이전에도 채찍질 고행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존재했지만 흑사병을 계기로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더욱이 이번에는 남유럽뿐 아니라 북유럽과 중부유럽에서도 폭발적인 전파력을 보였다. 채찍질 고행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교황은 금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채찍질 고행이 이단과 연계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당시에 의학은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오늘날 기대할 수 있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럽 최고 권위의 의학기관이었던 파리의과대학에서는 물병자리에서 토성·목성·화성이 교차한 게 흑사병의 근본적 원인이고, 행성 교차 시 오염된 증기가 바람에 실려 퍼진 것이 흑사병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발표하였다. 의사들은 환자로부터의 감염을 막기 위해 독특한 복장을 고안하였다. (아래 그림)
새 모양의 마스크와 긴 가운, 그리고 모자와 장갑으로 온 몸을 감싸는 형태의 의복이었다. 마스크의 부리 부분에는 향료나 식초 묻힌 헝겊을 넣어 사악한 기운이 전파되는 것을 막고자 했고, 눈 부분에는 유리알을 박아 혹시 모를 시각적 접촉에 대비하였다. 훗날 파티복의 형태로 남게 되는 이 괴상한 복장은 바로 흑사병에 대한 당시의 의학 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세계화가 낳은 흑사병이 세계화 제동
현대의 의사학(醫史學) 연구자들은 원래 흑사병이 중앙아시아의 토착 질병이었다고 파악한다. 그런데 중세에 유라시아 동서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사람·가축·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짐에 따라 설치류의 서식 범위도 확산되었다. 이것이 흑사병이 범유행성 질병으로 재탄생한 배경이었다. 달리 말하면 흑사병은 세계화가 낳은 예기치 못한 부산물이었다.
당시 세계화가 진전된 데에는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의 기여가 컸다. 한반도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은 개방적 대외정책을 실시하였고, 역참제도 등 무역진흥에 유리한 인프라를 구축하였다.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 마르코 폴로와 모로코 출신의 무슬림 여행자 이븐 바투타가 공통적으로 증언하였듯이 몽골제국은 사람과 상품이 이동하기에 최적의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몽골제국이 정한 질서와 관행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시대의 진면목은 바로 이런 세계화의 진전에 있었다.
동서교역의 확대가 토착 질병을 세계적 질병으로 변모시켰다면 흑사병이 유럽에서만 창궐했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최근의 연구는 흑사병이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1330년대에서 1350년대 사이에 중국에서 흑사병이 대규모로 창궐했으며, 인도의 무역항들과 이슬람 성지인 메카에서도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목숨을 잃었다.
흑사병 이후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서유럽에서는 봉건 영주와 교회의 지배력에 큰 균열이 발생했다. 아시아에서는 세계화의 중심축이었던 원 제국이 쇠퇴를 맞게 되었다. 세계화가 초래한 흑사병이 세계화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중앙선데이 | 제366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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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1 경제사와 세계화 |
| 장-레옹 제롬, 『튤립 바보』, 1882년. 네덜란드 하를럼의 성 바보 교회 앞 튤립 꽃밭. 이곳은 1637년 튤립 거품이 처음 꺼진 곳이다. 튤립이 가득한 아름다운 꽃밭에 병사들이 가득하다. 멀리 보이는 풍차는 이곳이 네델란드임을 말해준다. 말를 탄 지휘관의 통제하에 병사들이 꽃을 짓발고 있다. 두 명의 병사는 오른편에 서있는 사람을 향해 오고 있다. 칼을 빼들고 있는 이 사람은 병사들과는 달리 값비싼 귀족 복장을 하고 있다. 이 사람 앞에는 화분이 놓여 있고 거기에 빨갛고 흰 튤립이 피어 있다. 이 꽃을 건드리려 한다면 내 칼이 용서치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그림은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것일까? |
금융 공황의 원조, 17세기 튤립 투기 광풍 |
① 경제사와 세계화
경제사와 세계화. 둘 다 쉬 접근하기 어려운 용어죠. 그런데 이 딱딱한 역사가 때론 거장이 남긴 명화나 필부들의 사진·삽화·만화 속에 흥미로운 이야기로 투영돼 있기도 합니다. 이번 주부터 성균관대 경제학과 송병건 교수가 우리 생활 주변의 다양한 비주얼 자료를 통해 세계화의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갑니다. 세계적 명화나 사진 · 삽화 속에 숨겨져 있는 세계화의 진화 과정을 수수께끼를 풀어가듯 더듬어갑니다.
튤립은 독특한 역사를 가진 꽃이다. 유럽에 튤립이 도입된 것은 16세기 오스만제국 때부터다. 신성로마제국의 외교관 뷔스베크(Ogier Ghislain de Busbecq)가 1554년에 비엔나로 튤립을 보낸 게 효시였다. 네덜란드에는 1593년께 레이던대 교수인 식물학자 클루시우스(Carolus Clusius)에 의해서 튤립이 소개되었다. 158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이후 100년 이상 중상주의의 선도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연합동인도회사가 세계의 대양을 누비면서 국제무역을 주도하였고 암스테르담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서 이름을 떨쳤다. 튤립은 신흥 부국 네덜란드와 그 중심축인 상인 계층의 찬란한 번영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떠올랐다.
품종이 개량되면서 단색보다는 둘 이상의 색깔이 줄무늬나 불꽃무늬를 이룬 품종이 특히 인기를 끌게 되었다. 사실 이런 무늬는 튤립 브레이크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바이러스에 알뿌리가 감염되어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 바이러스에 걸린 튤립은 쉽게 번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공급을 늘릴 수 없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품종에는 대개 ‘부왕(viceroy)’ ‘제독(admiral)’ ‘장군(general)’과 같은 호칭이 붙어 있었다. 역사상 가장 비싼 튤립으로 기록된 것은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영원한 황제’라는 뜻-라는 품종이었다. 흰 바탕에 진한 빨강의 무늬가 화려했던 이 품종은 1630년대 ‘튤립광(Tulip mania)’ 시대를 이끈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튤립의 인기가 한창일 때에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했다. 내로라하는 가문의 인물들이 유명 화가에게 의뢰하여 초상화를 그릴 때 튤립만큼 좋은 소품은 없었다. 바로크 미술의 대가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의 그림을 보자(그림1). 영국 찰스 1세의 총애를 받아 궁정화가로 활약한 반 다이크는 1630년대에 고급스러운 초상화 제작으로 국제적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그림에서 구드윈(Jane Goodwin) 부인은 보석이 달린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있다.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바로 오른손에 우아하게 쥐어진 한 송이의 튤립이다. 튤립의 인기는 국경도 막지 못했다.
명품 튤립은 1637년 상반기 네덜란드에서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였다. 알뿌리 하나에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소득의 10배나 되는 가격표가 붙었다. 가격 폭등은 바이러스 탓에 인기 품종의 공급이 제한되었다는 사실도 작용했지만, 더 중요한 점은 금융시장에서 선물계약이라는 새로운 기법이 확산된 것이었다. 1636년에 세계 최초의 공식 선물시장이 개장되어 선물 계약의 거래가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옵션 계약이 더해졌다. 계약자는 튤립 가격이 떨어지면 구입을 포기하고 소액의 벌금만 내면 되도록 1637년에 새 법령이 제정됐다. 유례가 없는 투기 광풍의 배경에는 선물과 옵션이라는 새로운 파생금융상품의 등장이 있었다. 이런 거래를 사람들은 ‘바람거래(windhandel)’라고 불렀다. 튤립 자체의 이동 없이 금융거래에 의해 손만 바뀐다는 의미에서였다. 투기 열풍이 불면서 단타매매가 급증하고 가격이 폭등했다. 이렇게 형성된 거품은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다. 투매가 이어지고 파산자가 속출하자 결국 정부가 개입해 계약을 일괄 무효화하는 것으로 사태를 정리하였다.
| 얀 브뤼헬 2세, 『튤립광기에 대한 풍자』, 1640년께 |
당시에 투기 열풍을 꼬집는 그림이 많이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얀 브뤼헬 2세(Jan Brueghel the Younger)의 원숭이 무리 그림이다(그림2). 왼편 아래의 원숭이는 손에 든 목록과 튤립 꽃들을 꼼꼼히 비교하고 있다. 그 오른편에서는 원숭이 무리가 거래를 하고 있다. 튤립을 가리키고, 악수를 하고, 돈주머니를 흔들고, 장부에 기록을 한다. 계단 위에서는 원숭이들이 성찬을 즐긴다. 그림의 중앙 오른편으로는 알뿌리의 무게를 재고 탁자 위에서 돈을 세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오른쪽은 거품 붕괴의 결과를 보여준다. 맨 앞의 원숭이는 값이 폭락한 튤립에 오줌을 누고, 뒤로는 법정에 끌려오는 원숭이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원숭이가 보인다. 멀리 뒤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은 부채에 눌려 목숨을 끊은 원숭이를 위한 것이리라. 투기 광풍에 휩쓸린 몽매함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교훈이 그림에서 넘쳐흐른다.
첫 그림으로 되돌아가 보자. 배경을 이루는 교회는 하를럼(Haarelem)에 있는 성 바보(St Bavo)다. 하를럼은 1637년 튤립 거품이 처음 꺼진 곳이었다. 군인들이 튤립 꽃밭을 짓밟는 이유는 튤립의 공급을 제한하여 가격이 더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 상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른편의 귀족은 자신이 소유한 튤립 화분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꽃의 색깔로 볼 때 아마도 값비싼 품종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화가 장-레옹 제롬(Jean-Leon Gerome)이 1882년에 ‘튤립 바보’라는 제목으로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882년은 파리 주식시장에서 대폭락이 발생한 해였다. 19세기에 프랑스가 겪은 최대의 폭락으로 기록될 수준의 금융공황이었다. 역사화에 정통했던 화가 제롬은 250년 전 이웃 나라에서 발생했던 사태를 상기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교훈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이다.
| | | 반 다이크, 『제인 구드윈 부인의 초상』, 1639년. | 튤립 공황의 사례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인간의 우매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인용되어 왔다. 1720년에 발생한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Mississippi Bubble), 영국의 남해회사 버블(South Sea Bubble)과 더불어 금융공황의 초기 사례로 지목된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국제적 금융위기의 발생빈도가 높아지는 환경에서 이 사례들은 학계와 언론계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들에 대한 학문적 재평가 움직임도 활발하다. 새로운 연구들에 따르면 당시의 투자행위를 전적으로 비이성적 충동으로 매도할 수 없다고 한다. 거품의 존재를 알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적절한 시점에 합류했다가 발 빼기를 하여 이익을 얻은 ‘합리적’ 투자자도 많았다는 것이다. 주요 투자자가 소수의 부유층이었기 때문에 거품 붕괴의 영향도 자산의 재분배에 머물렀을 뿐 국가경제에 대한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이 거품들은 어떻게 최악의 거품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을까? 19세기 철도와 주식시장의 과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일부 저술가들이 이 거품들을 과장되게 서술하여 널리 전파하였던 탓이 크다. 매케이(Charles Mackay)가 1841년에 펴낸 『특이한 대중적 착각과 군중의 광기 (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 and the Madness of Crowds)』라는 책은 과장된 내용을 대중화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튤립의 알뿌리를 양파로 착각하여 먹었다가 투옥되었다거나 굴뚝 청소부와 같은 저소득층까지도 투기 열풍에 빠졌다는 일화가 많이 실려 있는데, 이들은 1630년대 당시의 기록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다. 오늘날에도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튤립 거품은 과대 포장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과거 거품에 새 거품이 끼고 있는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361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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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 · 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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