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경에 나타난 마귀론
성경의 마귀와 그 존재의 실체가 성경에서 어떻게 기원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밝혀보고자 했다. 마귀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조명하고 또한 성경에 나오는 악한 영의 여러 가지 명칭에 대해서도 정리를 하였다. 세상 문화와 역사 속에 내재된 악과 악마의 개념은 무서운 힘을 가진 신적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어떠한 현상이 아니라 인격화된 존재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악마가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하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성경에서의 사탄, 마귀의 개념이 유사하게 세상의 역사 속에서 어느 정도는 비슷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악에 대한 개념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성경적 마귀론을 통해서 교회와 세상의 막연한 추측과 그 영적 존재에 대한 애매 모호함을 명확하게 해석하고 풀어보고자 한다. 성경을 근간으로 개혁주의 신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마귀론 조차 지금의 세대에서는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권세가 주어졌다. 그러나 악한 영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되고 또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논하고 있는 마귀의 존재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귀의 전략을 볼 수 있어야만 우리가 처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마귀의 기원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는 우리는 타락의 교리 없이는 오늘날의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타락의 이야기만이 왜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죄악에 머무는 상태가 되었으며,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마귀는 이 세상의 신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성적으로 그 존재가 지배하는 어두움의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는 마귀와 그의 권세들은 우리에게 최초로 자신들의 힘을 사용하였으며, 그 힘을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는 데 주도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들은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인 본성과 우리의 육체까지도 공격한다. 마귀는 자신의 공격을 개인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마귀는 자신의 큰 권세로 주(州), 나라, 대륙과 같은 광범위한 규모로도 공격한다는 것이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로이드 존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기록, 겔 28:1-26의 내용은 마치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을 세상 왕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께 수종했던 타락한 천사의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사 14;12과 단 10:13 내용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천사와 세상의 권력을 잡고 있는 악한 권세와의 싸움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티모시 워너(Timothy M. Warner)는 이 싸움은 하나님과 가장 높은 천사가 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한다. 성경에는 사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천사의 신분과 역할을 버리고 타락하여 우리가 오늘날 인식하는 악한 존재로 떨어지게 되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워너는 사탄이 천사들의 서열 중에서 가장 높은 찬사였으리라는 생각은 복음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워너는 그 근거로 겔 28:16, 출 25:19, 시 18:10, 히 9:5을 제시한다. 워너는 또한 사탄이 어떻게 천사의 지위를 포기했는지 우리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고 천사나 사탄과 같은 영적 존재들이 언제 창조되었는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세상의 창조보다는 앞선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는 그 증거로 욥 38:7,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기” 하나님의 세상 창조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목도하고 기뻐했다는 이 구절을 제시하고 있다. 워너는 창조과정의 어떤 시점에서 사탄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대한 질투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질투심이 사탄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욕망이며,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고,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날 사탄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 속성이라고 워너는 말한다.
워너는 이사야 14장을 사탄에게 적용할 때 제기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나라들에 대한 예언들을 다루는 데 비유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성경의 주된 관점으로 본다면, 바벨론은 세상이나 세상 체계를 나타내는 전형이거나 상징이며 그 세상 체계의 “왕”이나 “왕자”는 사탄이라는 것이 워너의 주장이다.
B. 성경에 나타난 영적 존재들의 언어적 의미
1. 천사
마귀론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원래의 상태는 천사였고, 타락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능력은 천사의 그것과 동일하게 보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능력으로 지금도 하나님과 믿는 성도들을 대적한다. 그들은 때로는 변장을 할 수도 있고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환경이나 자연을 조작하기도 한다. 마귀의 능력이나 속성은 천사와 같다. 단지 그들은 타락한 것이다. 천사를 이해하는 것이 마귀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먼저 천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성경적 마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천사장 미가엘
피터 호로빈(Peter I. Horrobin)은 미가엘 천사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세 번 등장한다고 한다. 이 구절들을 통해 볼 때 미가엘은 전투 천사임이 분명하다고 한다. 칼빈은 천사들의 체제와 숫자와 형체에 관해서 ‘천사 장’이라는 호칭에 대해서 단 12:1에서 “큰 군주”로 유다서 9절에서는 “천사 장”으로 살전 4:16과 겔 10:5에서도 “천사 장”의 호칭이 사용되지만, 누가 감히 이를 근거로 천사들 사이의 존귀와 차등을 결정하고, 각 천사에게 칭호를 부여하고 위치와 지위로 구별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미가엘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다니엘 10장 21절에 등장하며, 여기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수호천사”로 묘사된다. 미가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의 유익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자라고 호로빈은 말한다. 호로빈은 다니엘 10장 21절 이전의 구절들에 보면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보내진 천사(아마도 이전에 다니엘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가브리엘일 것이다)가 ‘바사국의 천사 왕자’에 의해 강력한 저항을 받아 어떻게 그와 싸워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천사 왕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한 사탄에게 속한 사탄에 의해 그 나라를 주관하는 영으로 배치받은 타락한 천사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견해로 사 14:12를 본다면 ‘루시퍼’란 ‘사탄’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는 옳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나라들과 지역들을 다스리는 영들에 관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으며, 이러한 학습은 영적인 전투를 이해하는 데서 매우 전략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호로빈은 말한다.
호로빈은 미가엘에 대해서 또 다른 중요한 구절들이 요한 계시록 12장에 나와 있다고 한다. 이 구절들은 미가엘이 하늘에서 루시퍼와 싸워서 어떻게 그를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에 동조한 모든 천사와 더불어 하늘에서 추방시켰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미가엘(문자적으로, ‘하나님은 누구와 같으냐?’)이라는 명칭은 삼위일체의 제2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가브리엘을 성령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과 같이 견지될 수 없다. 미가엘은 단 10:13, 21; 유 9; 계 12:7에서 언급된다. 그가 유 9에서 ‘천사 장’이라 불리며, 또한 계 12:7에 그러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천사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서의 구절들은 미가엘이 그들 중에 우두머리인 사실을 지시한다. 우리는 그를 이스라엘의 적들과 영계의 악령들에 대하여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용감한 전사로 알고 있다. ‘천사 장’이라는 칭호가 경우에 따라서는 가브리엘과 소수의 다른 천사들에게도 적용된다. 따라서 이미 사탄의 모든 졸개를 대파한 전투 천사 미가엘이 바사국 위에 등장했을 때, 결과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 가브리엘은 자유롭게 그의 임무를 끝마치고 다니엘을 만날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늦게 온 것에 대해 사과함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이 시간은 가브리엘이 그에게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지연되고 있을 때 영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호로빈은 또 미가엘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 유다서 9절에 등장한다고 한다. 이 구절은 약간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미가엘은 사탄과 논쟁을 벌이면서 그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당한 경의를 표하는 자로 묘사된다. 미가엘이 사탄과의 논쟁에서 호로빈이 말하는 것처럼 적당한 경의를 표명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 사탄에 대한 처분, 즉 심판이 하나님께 있는 것임을 말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가엘은 하나님을 수종하는 천사임으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탄에 대한 책망을 하나님께 맡긴다. 사탄의 능력이나 힘을 경멸하거나 우습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에 관해 이야기할 때 너무 순진하고 건방지고 교만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스스로 사탄의 꾀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사탄은 사람들을 기만해 그들의 믿음을 종교적 유물들에 두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이 귀신들을 경배하고, 결국에는 사탄 자신을 경배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종교적 유물들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자가 바로 사탄이라고 호로빈은 주장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부활 시에 나타났던 천사는 미가엘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계급이 높은 전투 천사였을 것이라고 호로빈은 말한다. 먼저, 그는 무덤 문으로 사용되었던 돌을 굴려내었고, 로마 군인들은 그를 보았을 때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마 28:3-4)
2) 천사장 가브리엘
천사장 가브리엘에 대해서 호로빈은 예외적인 경우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 최고의 메신저 천사라고 한다. 때로 가브리엘은 그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사람 앞에 자신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한다. 성경에서 그는 보통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한다. 이것은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비로운 표현으로서 이러한 말이 없으면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은 사람들은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그를 천사가 아닌 하나님의 현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호로빈에 의하면 다니엘 8장에서 가브리엘은 다니엘을 위한 한 환상을 풀이해 주며, 9장에서는 난해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천사로 묘사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10장에 보면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해서 오는 천사가 등장하는데, 아마도 가브리엘일 것으로 호로빈은 말한다. 신약에서, 가브리엘은 스가랴에게 나타나서 그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것과(눅1: 11-20) 마리아에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것(눅 1:26-38)을 전해주는 임무를 맡았다.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조금의 실수도 없는 방문을 통해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신뢰하게 하는 임무가 가브리엘에게 있었다고 호르빈은 말한다.
호르빈에 의하면 성경에는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신저 천사들에 관한 또 다른 실례들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두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소돔과 고모라에 임박한 심판과 그의 조카 롯에 대한 경고를 준다. 사사기 6장에서는 한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그를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군사로 지명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환상 속에 등장하는 천사는 고넬료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확실한 것은 메신저 천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게 하는 데 있어서 전략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호르빈의 견해이다.
3) 섬기는 천사들
(1)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천사의 명칭
칼빈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천사는 하늘의 영적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봉사와 임무를 통하여 자신이 작정하신 바를 모두 수행케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 (시 103:20-21) 천사들이 “천군”이라고 불리는 것은(눅 2;13) 근위병처럼 왕을 보호하여 왕의 위엄을 나타내며 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때문이며, 사병들처럼 지휘관의 신호에 항상 집중하여 언제라도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
칼빈은 주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권능과 능력을 발휘하시며 선언하시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저들은 권세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엡 1:21, 고전 15:24) 하나님은 세계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에, 저들은 때로는 정사(政事), 때로는 권세, 때로는 주관하는 자로 불린다. (골 1:16, 엡 1:21, 고전 15:24) 마지막으로, 저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고 있다는 의미에서 저들은 또한 보좌라고 불리기도 한다. (골 1:16) 마지막 명칭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해석이 있다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
(2) 신자의 보호자이며 조력자인 천사
칼빈에 따르면 성경은 위로와 신앙을 강화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교훈에 강조점을 둔다고 한다. 즉, 천사는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분배자요 관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천사들은 우리의 안위를 위해 밤낮없이 우리를 지켜할 책임을 지고 있으며 우리의 길을 알려주고 따라서 어떠한 재앙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하고 돌보아 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고 칼빈은 말한다.
(3) 수호천사
칼빈은 수호천사에 대해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각개의 천사가 신자 각자에게 배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고 한다. 확실하게 주장해야 할 것은 한 천사만이 우리 각자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천사가 한뜻으로 우리의 구원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일반 대중들은 두 천사, 곧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있다고 상상하고 그것이 마치 별개의 특성인 것처럼 각자에게 예속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알아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열심히 연구한다는 것은 정말 가치 없는 일이다. 모든 천군 천사가 우리 자신의 안전을 계속해서 지켜준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한 천사가 자신의 특별한 수호자로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수호천사는 한 천사의 임무가 아니라 대다수 천사가 하나님의 한 사람을 보호하며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수호천사와 관련해서 이 영적 존재에 대해서 숭배하는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다. 요한계시록 22:8-9은 요한이 천사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들은 후, 천사에게 경배하려 하자 천사는 요한에게 믿는 자들과 함께 종 된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요한의 경배를 거절한다.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대상이 사람이든 천사든 자신의 종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4) 천사의 계급과 수, 모양
칼빈은 천사의 계급에 있어서 계급을 감히 결정짓는 자들은 무슨 근거로 그런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천사의 계급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는 칼빈의 주장은 맞다. 그렇지만 또한 성경은 또한 천사의 지위를 구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계 21:7~9까지 미가엘과 큰 용과의 전쟁에서 두 존재를 따르는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 “용과 그의 사자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영적 존재들이 어떤 존재에 귀속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사탄, 마귀의 명칭이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악한 영들’ 또는 ‘귀신들’로 표현하는 것은 옳다. 성경에서 사탄, 한 존재의 영향력은 크다. 그래서 사탄을 천사장 미가엘이나 가브리엘과 견주는 대상으로 표현한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완성하며 당시 가톨릭의 천사숭배 사상을 거부하고 영적 존재들에 대한 허탄한 생각과 지나친 추측에 관한 주장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주장은 옳다. 다니엘은 미가엘을 가리켜 “대군"이라고 부르고(단 12:1), 유다가 그를 “천사 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 9) 그리고 바울도 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심판 자리에 모으는 자가 바로 천사장이라고 말하였다. (살전 4:16, 겔 10:5) 그러나 누가 이상의 몇 구절을 자료로 해서 천사들의 존귀 정도를 결정하고 각 천사를 그 칭호로 구별 지으며 그 위치와 지위를 각자에게 배정할 수는 없다고 칼빈은 말한다.
또한 칼빈은 천사의 수에 대하여,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직접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53)라는 말씀을 들었고, 다니엘로부터는 그 천사의 수가 “천천이요 만만이며"(단 7:10)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엘리사의 사환은 “불병거가 산에 가득함”(왕하 6:17)을 보았으며, 천사들이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시 34:7) 있다고 기록된 것은 그 수의 막대함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영들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의 이해력의 정도에 맞추어서 그룹이나 스랍이라는 이름으로 천사들이 날개를 가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천사의 수와 계급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그 완전한 계시를 알게 될 신비에 속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천사와 마귀에 관하여 너무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탐구한다든가 너무 자신 있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사나 마귀의 범위 내에서 그들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존재의 실체를 이용해서 그들을 우상화하거나 아니면 이단들이 그들을 이용해서 미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사탄
앞서 천사를 언급한 것은 천사의 기본적인 속성을 알아봄으로 사탄의 속성을 알기 위함이다. 천사와 사탄은 하나님께서 함께 지으셨고 사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한 존재이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했지만, 그 영적 권세는 어떤 이유인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이 단락에서는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타락한 천사, 즉 사탄에 대해서 성경을 근거해서 여러 학자의 주장과 개혁주의 신학의 이해를 알아보고자 한다.
1) 타락한 천사로서의 사탄
구자원에 따르면 사탄은 날개로 ‘덮는 그룹’ 천사이다. (겔 28;14, 16) 그룹 천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기 위해 에덴동산의 입구를 지키며(창 3:24), 그 날개로 하나님의 보좌를 보살피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출 25:28) 그는 하나님의 친위대 천사이다. 그룹 천사 중에서도 사탄은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 천사이다. 구약에서는 왕, 선지자 또는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대표자로 삼아서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케 하거나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 삼았다고 구자원은 말한다. 하나님의 친위대장인 그룹 천사장은 부귀와 영광을 타고났으며 피조물 중에서는 가장 완전하게 지음을 받아 지혜가 충만하며 완전히 아름다웠다. (겔 28:12-13) 아름다운 그룹 천사장은 ‘계명성’이란 별칭까지 얻는다. (사 14:12) 천사이면서 피조물 중에서 가장 완전하게 지음을 받아 지혜가 충족한 사탄의 세력을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대항할 수 없다. 이들의 세력은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무기로 대항해야 한다. 비록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 방식으로 싸우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싸우는 것은 이 세상의 무기가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사탄의 요새라도 파괴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한 무기, 말씀과 기도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고 구자원은 말한다. (고후10:3-4)
2) 사탄의 타락을 허용하신 하나님
구자원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사탄은 존재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의 죄를 방치하셔서 인류가 이토록 힘들고 피곤한 삶을 살게 하신 원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무능한 분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구자원은 말한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내용에 대해 인간적인 논리를 전개하여 기록된 성경을 넘어가는 것은 금물이라고 한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 배워서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함이라” (고전 4:6)
구자원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은 십자가 군사들이 악한 영의 세력들과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이지 성경이 계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귀신의 기원이나 출처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탄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귀신의 기원에 대한 논쟁, 또는 귀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몸에 들어올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하지 않은 생각을 각 사람에게 불어넣어 교회를 분열시켜서 전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3) 사탄의 타락 시기
구자원은 어떤 교리나 마찬가지로 사탄의 타락이나 지구의 창조 시점도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겪어왔다고 한다. 한때는 정통 교리로 받아들여진 주장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정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특히 마귀론 같이 민감한 주제들은 교회사를 통한 변천 과정을 끊임없이 점검하여 틀린 주장을 수정해 나가야 한다고 한다. 구자원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원 창조설로서 어떤 사람은 창세기 1장 1절 훨씬 이전에 원 창조(original creation)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그 이후에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반란과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과 우주의 혼돈이 있었으며, 창세기 1장 1절은 재창조 또는 재회복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지나치게 상상적이고 생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늘날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 번째는 중건설(重建設)인데 「휴거」의 저자, 할 린지(Hal Lindsey) 덕분에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주장이다. 이들은 창세기 1장 1절은 원 창조이며, 창세기 1장 2절은 사탄의 반란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기 때문에 우주가 혼돈하고, 공허했으며, 창세기 1장 3절 이후는 심판받은 지구를 재창조하거나 재구성한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1장 1절과 2절 사이에 무한한 시간적인 간격이 있기 때문에 중건설, 간격설(TheGap Theory)이라고 부른다. 구자원에 따르면 중건설은 그 자체가 재창조 또는 재구성의 이론이기 때문에 지구가 재창조되었다는 주장에 이어 사람조차 재창조되었다는 주장으로 발전하며 귀신의 기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구자원은 말하고 있다.
4) 이사야 14장 12절의 루시퍼에 대한 논쟁
사 14:12의 “아침에 아들 계명성”(개역개정성경)을 다른 성경, 예를 들어 KJV 성경은 “O Lucifer"로 표기하고 있다. NIV 성경은 “새벽별”, “O morning star"로 표기한다. 이 단어의 논쟁 핵심은 “계명성” 또는 “루시퍼”라는 단어가 사탄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사회의 권세자 바벨론의 왕을 나타내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헬렐”로 기록되고 있고 그 의미는 “할랄”, ‘밝음’에서 파생된 고유명사로 표기하고 있다. 70인 경에서는 이 단어를 ὲωσφορος로 표기하고 공세(貢稅) 즉, 열방 위에 힘이 뛰어남을 뜻한다고 한다. “헬렐”은 문자적으로 ‘빛을 나르는 자’ 또는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이다. ὲωσφορος는 벧후 1:19, 계 22:16, 눅 1:78에서 샛별, 광명한 새벽 별, 돋는 해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히브리 원어 성경의 사 14:12의 을 칼빈은 자신의 주석서에서 KJV 성경을 인용하여 ‘Son of the morning', ‘새벽의 아들’로 기록하고 사탄이 아닌 바벨론 왕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라틴어 번역본 벌게이트 성경과 KJV 성경만이 사 14:12의 Lucifer를 사탄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lucifer를 벌게이트 성경에서는 사 14:12 외에 3곳에서 더 사용하고 있는데, 욥 11:17, 38:32, 벧후 1:19에서 사용하고 있고, KJV 성경은 오로지 사 14:12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벌게이트 성경에서의 사용용례는 사 14:12에만 lucifer라는 단어를 의미상 바벨론 왕 또는 사탄으로 사용하고 있고, 욥 11:17에서는 ‘아침’, 욥 38:32에서는 ‘북두성’, ‘샛별'로 사용하고 벧후 1:19도 역시 샛별로 lucifer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벧후 1:19에서의 샛별(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에서는 lucifer)의 의미는 타락한 세상의 짙은 어둠이 사람들이 빛을 비칠 때까지 진리를 볼 수 없게 막고 있고, 빛은 계시의 등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사 14:12에 대한 주석들을 살펴보면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이사야는 죽은 자들이 살아서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독재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일종의 신으로 믿어주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고 한다. 이사야는 이 독재자를 ‘루시퍼’에 비유하면서 새벽의 아들로 부른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사 14:12의 구절을 해석하면서 계명성, 또는 루시퍼를 사탄으로 보는 사람들은 무지의 소치이며, 타당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랑게(J. P. Lange)는 사 14:12의 주석을 바벨론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온갖 권세를 가지고 다른 나라를 지배했던 권세가 땅에 떨어지고 망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도 눅 10;18을 인용해서 하늘에 떨어지는 별을 사탄으로 보고, 사 14;12의 루시퍼를 사탄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카일과 델리취(C. F. Keil and F.Delitzsch) 역시 사 14:12의 ‘루시퍼’ 또는 계명성을 사탄이 아닌 바벨론의 왕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이 바벨론 왕을 신성시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달리 사 14:12의 명칭이 ‘루시퍼’이든 아니면 ‘계명성’이든 이 존재를 사탄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에 따르면 ‘아침의 아들 루서퍼야, 어찌하다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하는 이사야서의 말씀과 바벨론의 왕에 관하여 말하는 관련 대목의 말씀들은 당연히 악마에 관한 말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티머시 곰비스(Timothy Gombis)는 바울이 설명하는 유대적 우주관은 하나님이 천사장들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그의 주권을 대리 행사 하신다고 한다. 즉, 하나님은 인격적인 천사를 창조하셔서 자신의 땅의 섭정으로 임명하셨고 이들은 하나님의 선한 원 창조의 일부라고 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특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권한을 각각 다른 천사들에게 주셨고, 특정한 민족들을 통치하는 권리도 주셨다고 한다. (신 32:8-9) 그리고 이 우주적 권세들은 타락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유대적 우주관, 세계관이라고 곰비스는 말하고 있다. 다니엘 10:13, 20, 21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싸움을 나타내고 있다. 가브리엘은 여기서 다니엘에게 자신이 늦게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사 왕국의 군주가 막아서라고 밝히고, 20절에서는 자신이 미가엘과 더불어 이 바사의 군주와 더불어 싸우고 다니엘의 군주, 즉 유대의 군주는 미가엘이라고 소개한다.
곰비스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섭정들이 특정한 지역과 민족을 다스리고 있다면 단 13-20의 내용이나 사 14:12-20, 그리고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의 배후가 타락한 천사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부분의 기독교 전통의 이해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유대의 세계관과 비슷하다. 그래서 사 14:12의 계명성이나 루시퍼를 사탄이라고 이해하는 것에 무리는 없었다. 현대적 해석이 또한 시대적 정황과 역사의 흐름에서 유대민족의 대적 바벨론 왕의 패망을 가리키고 있다는 주장도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된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뜻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성경 안에서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믿는 성도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뜻은 아주 제한될 것이다. 세상의 악(evil)과 악마(devil)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세상이 창조되고 타락한 천사는 하나님을 배신했고 이 땅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을 마귀는 미혹했고,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을 배신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악(evil)은 마귀(devil)와 관련이 있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그렇지만 그 악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를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구약성경에 나타난 마귀의 언어적 의미
엉거(Merrill F. Unger) 구약성경의 귀신(demon)이라는 낱말은 다이모니온(daimonion)에서 왔고, 초기에는 다이몬(daimon) 이라고 하였는데, 그 출처는 확실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플라톤(Platon)은 “안다" 또는 “영리하다"는 뜻이 있는 다오(dao) 에서 온 형용사 양식의 다에몬(daemon)에서 끌어내어 사용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많은 현대 학자들은 ‘가른다’거나 ‘과제를 나누어 준다’는 뜻이 있는 다이오(daio)에서 끌어냈는데, 그것은 그 뜻이 “나누는 자 또는 운명의 분배자”라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엉거는 말한다. 플라톤의 정의는 초인적인 지식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영들의 우수한 지식을 지적하였고, 따라서 웅변가들이 그들에게서 지식을 구했으므로 더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엉거에 따르면 이 낱말의 역사적인 발전에 대한 연구는 그 정확한 성경에서의 사용을 위하여 그 낱말을 형성하고 작성하는 하나님의 솜씨를 알게 된다.
1) 헬라어에서 “귀신”(Demon)의 의미
엉거는 귀신이라는 낱말인 다이몬(daimon)의 네 가지 원칙적인 의미를 소개한다. 이 낱말은 70인 역에서, 신약성서에서의 정확한 사용을 위하여 그 발전 과정에서 호모의 시대(the Homeric Period)부터 70인 역의 시대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엉거는 첫째로 이 언어의 초기역사에서 다이몬은 데오스(theos)라고 말하는 “신"(神, god)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프레러(Ludwig Preller)는 신들과 다이몬들은 호머와 고대 시인들에 의하여 같은 존재로 표현되었으며, 전자는 이방 종교와 신화에서 정의한 대로 신의 어떤 인격을 더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며, 후자는 생물과 자연 속에 나타나는 그의 능력과 활동을 말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엉거에 의하면 다이몬이라는 낱말의 발전에서의 두 번째 단계는 호머 이후에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귀신들은 신들과 사람들 사이의 중개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또한 모든 사람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를 위한 특별한 『다이몬』과 짝지어진다는 기록을 찾아낸다. 이 개인 각자의 『다이몬』은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Socrates)의 『다이모니온』(daimonion)에서처럼 분명히 사람의 영혼이나 영과 같지 않으며 그 사람과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아테네의 저술가들은 선신(善神, agathoes daimon)으로 표현하였다.
이 단계에서 엉거는 귀신들이 신들보다 낮은 존재들로서 표현되었더라도적어도 그들은 도덕적으로 악한 자로 생각되지 않아서 그들을 선한 귀신들과비교하여 생각했다고 한다. 『다이몬』이란 낱말의 발전의 제 3단계는 헬라인들이 귀신들을 사람처럼 어떤 면은 선하고 어떤 면은 악하여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서 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낱말의 개념이 점진적으로 저하되는 이 단계는 신들을 높이 찬양하려 하고, 일반적인 신화에서 그들에게속한 열정과 추문을 책임질 중개자인 “귀신들"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결과77)라고엉거는 말한다.
엉거는 크노크라테스(Xenocrates)가 말한 선신과 악신 사이의 차별은 특별히 사람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미덕의 도수에 따른다고 주장하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과 헬라의 역사가 플르타르코스(Plutarch) 등과 같은 후기 저술가들에 의하여 계승되어왔다고 한다. 주전 1세기의 스토아 철학자의 한 사람인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스토아 철학자)는 귀신들을 죽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의 영혼으로 보는 이론을 만들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더욱 선한 사람의 영혼은 더욱 높은 지역에 살며 부정한 영혼들은 땅에 가까운 데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낱말의 발전과정에 대한 마지막 단계에 대한 엉거의 견해는 70인 역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있는 것처럼 모든 귀신은 악하며 사탄의 왕국의 부하들로서 그의 활동 요원이라는 것이다. (마 12:22-30) 기독교의 초기 저술가들도 모든 귀신은 악하다는 증거를 많이 하였다. 예를 들면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분명히 구약성서의 교훈(신 32:17, 시 106:37)과 신약성경의 교훈(고전 10:19-20, 딤전 4:1)을 따라서 귀신들이 헬라의 신화에 감동을 주었고 마술사 시몬(행 8-9)과 마르키온(Marcion)과 같은 이단자들과 같은 악한 사람들을 일으켜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도록 힘을 주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2) 70인 역(Septuaginta) “귀신"의 의미
엉거에 따르면 다이몬과 다이모니온(daimon, daimonion)은 구약성경에 사용된 헬라어에서 자주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의 번역 어미이다. 헬라 문화에서 사용하던 헬라어 단어 다이몬이나 다이모니온(daimon, daimonion)과 정확하게 같은 히브리어가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다섯 가지 이상의 히브리어가 이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중에서 개역자들이 『귀신』(demon)이라고 번역된 것만 이 글에서는 논의한다.
(1) 쉐드힘(skedhim)
엉거는 귀신(daimon, daimonion)이란 낱말이 70인 역에 의하여 히브리어 낱말 쉐드힘(Shedhim)과 이와 비슷한 뜻이 내포된 몇 가지 다른 낱말을 헬라어로 번역함으로 성경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쉐드(Shedh, 언제나 복수인 Shedhim으로 나옴)는 흠정역에서는 “악마들”(devils)이라고 하였고 개역성서(the Revised Version)에서는 정확하게 “귀신들”(demons)이라고 번역한 신 32:17과 시 106:37에 나타나고 있다. 그 어원(語源)은 그렇게 잘 알 수는 없으나 아라비아어로 사라(sala)라는 말과 같은 쉐드(Shedh), 즉 “다스리는 것, 주(主)가 되는 것”이라는 말의 근원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히브리인들은 우상의 형상은 단순히 사람에게 숭배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귀신들의 보이는 상징으로 생각하여 왔으므로 우상들은 당연히 “주(主)들”이 되는 것이 그 기본적인 의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노래(the Song of Moses)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에 흘러갈 때 “신이 아닌 귀신들(쉐드힘)에게 제사하였으니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들이라”(신 32:17)고 엉거는 말한다.
엉거는 또한 쉐드힘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여 만든 우상의 형상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들 배후에서 숭배하도록 힘을 더해 주는 실제적인 영적인 존재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이같은 양면성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우상숭배로 떨어질 때 시편의 말씀에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邪神, daimonia, Shedhim)에게 제사하였는데 그것은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시 106:37-38)하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가나안 우상”은 생명이 없는 우상의 표현으로서 허구의 가시적 조형물에 불과하다. “귀신들”(shedhim)은 잘못된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실제적인 영적인 실재들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 영적 실재의 이름은 앗수르의 “쉐드”(shedu)와 비슷한데, 그것은 분명히 신들보다 아래에 있고 그들에게 예속된 제니(genni, 아라비안나이트의 귀신)나 수호신들을 의미한다고 엉거는 말하고 있다.
(2) 세이림(seirim)
엉거는 레위 족속의 제사법(레 17:1-7)은 광야에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장막성전에 들어갈 때 희생의 제물을 잡아서 바치라고 명령함으로써 그들이 광야에 나가서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 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않도록”(레 17:7)했는데, 이 수 염소를 원어에서 『세이림』(Seirim)이라고 하였고 70인 역에서는 다이모니아(daimonia)라고 했다고 한다. 이 독특하고 다양한 귀신숭배가 여로보암 1세(BC 929-909) 치하에서 다시 고개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성행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레위인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기를 거부하고 “여러 산당과 수 염소 우상(히브리어로 세이림, 70인 역의 헬라어로 다이모니아)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대하 11:15)을 세웠기 때문이다.
엉거는 또한 어원학(語源學)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낱말은 “털 많은 자” 또는 “수 염소”를 말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들 귀신은 모양과 성격이 염소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시적인 말씀들에서 이들 호색적인 마귀들이 바벨론의 폐허에서 춤을 추며 폐허의 도시에서 서로 부르는 장면을 그렸다. (사 13:21, 34:14) 본문에 나오는 “들양”과 “수 염소”는 둘이 다 세이림(seirim)으로서 다이모니아(daimonia)로 번역된다. 이는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이 그들을 귀신들로 생각하였던 것을 보여 준다.
(3) 우상들(idols)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또는 우상, 히브리어로 예리림, 70인 역의 헬라어로 다이모니아)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 96:5; LXX 95:5) 이 고전적인 말씀에서 엉거는 귀신들을 우상들과 같은 것으로 말하였으며, 귀신숭배는 우상숭배의 활기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히브리어의 예리림(elilim)은 단순히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닌 “헛것" ”없는 것"을 의미하는 “없음, 빈, 공허한”의 형용사적 의미를 가진 낱말의 복수이다. 우상들은 헛것이지만, 그들 뒤에 있는 귀신들은 실제적으로 존재한다고 엉거는 주장한다.
(4) 갓(gad)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운명의 신인) 갓(gad)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면”(gad을 70인 역에는 다이모니온으로 번역) 다시 우상숭배는 귀신들과 관계되어 있음을 확인하여야 한다고 엉거는 말한다. 운명의 신(gad)은 바벨론 사람들에 의하여 숭배되어왔다. 이 운명의 신은 어디나 있으며 바알(Baal), 벨(Bel)이라고도 불리어 왔으며 동양 전 지역에서도 행운을 주는 자로 생각되었다. 70인 역 구약성경에는 그의 특징과 힘 때문에 “귀신”으로 번역되고 있다고 한다.
(5) 파멸
“암흑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퀘테르, qeter)을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또한 엉거는 “백주의 악령”, 즉 “귀신”을 말하였다(시 91:6; LXX 90:6)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일반적인 귀신의 관념이 번역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음을 추적해 낼 수가 있다. 민족적인 방종 가운데는 밤낮으로 모든 순간에 악한 원수 갚는 영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70인 역 구약성경에서의 “귀신”이라는 낱말은 언제나 불길한 것을 말하고 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있어서는 이 낱말은 신약성경에서처럼 변할 수 없는 악령들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헬라적인 용법에 있어서의 변화는 첫째로 그 낱말의 사용에서 더욱더 악한 것이 되는 악신들에게서 선신을 구별해 내는 일이며, 둘째로 이방신들에게 속하는 사악한 이름의 범위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엉거는 말한다.
4. 신약성경에서 “귀신”의 의미
호머의 시대로부터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이몬과 다이모니온의 뜻은 그와 같이 점진적으로 신보다 하위(下位)로 내려갔으며 더욱더 악하다는 개념이 더해졌으며 마침내 신약성경에서 “악령” 또는 “마귀의 사자와 일”이라는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이름까지 얻게 된 것 같다고 엉거는 말한다. 귀신들은 영적인 존재들로서 지성적이고 악하고 부정하고, 사람의 육체를 해치고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더럽히는 일을 함으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능력이 있다고 엉거는 말한다.
1)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
예영수는 이 용어 대부분은 복음서에서 발견되고 있고(53회/ 마태복음 11회, 마가복음 13회, 누가복음 23회, 요한복음 6회), 나머지는 신약 각 성경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한 곳에서 다이몬(δαίμων, 마 8:31)이 다이모니온을 대체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약에서 다이모니온이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이 공관복음서 중 예수께서 치료의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이다. 그 가운데 몇몇 병행 구절(막 1:23, 26, 눅 4:33, 35, 마 8:28, 31, 막 5:2, 눅 8:27, 막 5:8 이하, 눅 8:29 이하, 마 10:1, 막 6:7, 눅 9:1, 막 9:20, 눅 9:42 등)을 보면 다이모니온이 ‘영’(πνεύμα), 특히 ‘더러운 영’(πνεύμα άκαθάρτον)96)과 같은 의미로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이해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2) 디아볼로스(διαβόλος)
예영수에 의하면 이 단어는 원래는 ‘디아발로’(διαβόλλω)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분리시키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희랍 언어의 콘텍스트에서는 ‘불평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중상(中傷, calumination)의 뜻을 나타낸다. 주후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경우엔 사탄을 지칭하면서 이호칭 이외에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거명하지 않았다고 한다.97) 70인 역의 경우 여성형 ‘디아볼레’(διαβολη)는 비방의 뜻으로 사용되든가, 디아볼로스(διαβόλος)의 뜻으로는 참소자(讒訴者, accuser)라는 의미로 불리는데, ‘대적자, 원수’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70인 역에서도 디아볼로스를 사탄(분리시키는 자, 원수, 중상자, 유혹자의 의미가 있음)의 뜻으로 사용한다. 그 뜻은 참소자, 유혹자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대적자’라는 뜻이 가장 합당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대적자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는’ 자로 파악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사타나스(Σατανας)
사탄(satana, Σατανας)이라는 명칭에서 예영수는 신약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귀신의 ‘이름들’은 ‘사탄, 벨리알(고후 6:15), 바알세불’(마 10:25, 12:24, 27 등 7회 등장) 뿐이라고 한다. 다른 것들은 악마적 존재를 지칭하는 일반적 호칭일 뿐이고 고유한 이름으로 지목되는 것은 이들 셋이라고 예영수는 말한다.
이들 세 명칭 중에서 바알세불이란 이름이 주목하게 한다. 이것은 공관복음서에만 등장하는데, 예수가 귀신들을 내쫓는 것이 ‘귀신의 왕’이라는 바알세불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는 장면에서 이 호칭이 나타난다. (막 3:22-26, 마 12:24-27, 눅 11:15-19) 특별하게 마 10:25에는 예수가 직접 이 명칭을 사용한 유일한 예가 발견된다고 한다.
바알세불이란 이름을 어원적으로 규명하기는 어렵다고 예영수는 말한다. 몇 가지 해석이 제시되는데, 첫째로 이 말이 시리아 번역자들이나 제롬 등에 의해서 불레셋 에크론의 도시 신인 ‘바알세붑’(Beelzebub, 파리 바알: 왕하 1:2, 3, 6, 16)으로 표기된다는 사실과 우가릿 문서로부터의 조명 등을 고려하여 ‘파리들(flies)의 주(主)’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세불’ 이란 말이 ‘거처, 처소’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바알세불’은 ‘거처, 즉 신당의 주’로 번역되며, 결국 야훼의 대적자인 사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제안은 바알세불을 ‘세불’ 이 갖는 고대 중근동의 유사어인 분(糞)과의 상관성을 고려하여 ‘대변(大便)의 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바알세불을 ‘불꽃의 주’로 이해하는 제안 등이 나타나지만, 그 어원이나 명확한 정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복음서에서 바알세불을 사탄과 동일하게 하고 있다는 점만을 우리는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4)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귀신의 의미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의 치유와 기적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에 대해서 복음서의 기자의 의도가 상당히 반영된 부분이 있다. 같은 부분을 다루면서도 기록된 공관복음서 내용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특징인데, 각 성경의 주제가 시대적 상황에서 각기 다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도 균일하게 등장하고 있는 악한 영들에 관한 이야기를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이어나가고 있음을 볼 때, 그리스도의 사역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마귀와 귀신들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과의 관계성에서는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는 새 창조이지만, 마귀의 입장에서 십자가란 자신의 완전한 패배이며, 소멸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마태복음에 나타난 귀신의 의미
예영수에 의하면 마태는 마가에 비하여 매우 뚜렷하게 기적 보도가 축소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마가에 나타난 기적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 마태에도 등장하고 있지만(막 7:31-37, 8:22-26은 제외), 이야기의 내용은 현저히 축소되어 소개되고 있다. 그것도 마태복음 산상수훈 직후 부분에 중점적으로 모인 상태다. 마태에서 쉽게 발견되는 교훈 부분에 기적 보도는 보론(補論)으로 추가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 점은 마가복음서의 경우 교훈과 기적 보도가 균형 있게 등장하고 있는 사실과 비교할 때 주목받는 부분이라고 예영수는 말한다.
이러한 기적 일반에 관한 마태의 특성은 귀신과 관련된 내용에서도 예영수는 그대로 적용된다고 한다. 마가복음 7장 27절~8장 3절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과 병행 부분인 마태복음 15장 26절~32절을 비교할 때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귀신과 관련된 묘사는 마태의 경우 7장 22절에 딸의 상황 묘사를 하면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라는 한마디의 말밖에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하여 마가의 경우는 7장 25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라는 표현과 26절의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기를 간구하거늘”이란 표현, 그리고 29~30절의 예수 말씀인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마가의 경우엔 뚜렷하게 귀신의 현존과 축귀를 지적하는 한편, 질병 치료의 기적을 생생한 필치로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마태의 그것은 확연히 축소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의 결론에서 예영수는 마태는 귀신 추방이나 병의 치유 등의 기적 자체에 대한 관심이나, 그것을 행한 예수의 인격에 대한 관심보다도 그러한 행위의 상징적 의미나 그에 결부된 교훈적 내용에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고 한다. 마태는 자신들이 절박하게 대결하고 있던 유대교와의 투쟁에서 기독교 신앙의 우위를 확신시키기 위한 ‘가르침’에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마태는 가르치며 훈계하고 꾸짖는 ‘교훈의 예수’ 모습을 좀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 마가복음에 나타난 귀신의 의미
예영수는 마가가 나타내는 예수가 행한 최초의 지상 활동은 귀신 추방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하고 있는 마가복음 1장 21~28절에 이 축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회당 귀신 들린 자의 ‘귀신 추방 이야기’는 신약성경 축귀 사역을 행한 기록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 귀신은 축출자를 알아채고 저항한다. 둘째, 귀신 축출자의 위협과 명령이 나타난다. 셋째, 귀신은 시위하며 떠나간다. 넷째, 이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의 인상이 서술된다. 이러한 사례는 지금도 축사에 있어서 똑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예영수는 예수의 첫 번째 활동인 귀신 추방의 기록에서 예수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질병 의식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사람의 질병이 필연적으로 귀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신약 시대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르게, 깊이 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자연법에 대한 현대인들이 가진 고착된 생각이 없었을뿐더러 현상계의 운행과 그 질서를 설명하면서 신적 작용과 개입에 대하여 훨씬 개방적인 이해를 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고대 이방 사회에서나 유대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이 귀신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이해가 있다고 한다. 육신의 병과 귀신 들림과의 관계에서 성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고 C. 프레드 디카슨(C. Fred Dickason)은 말한다. 예영수의 주장대로 유대인들의 전통은 육신의 병과 죄, 마귀의 저주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현대적 논쟁에서도 신자가 귀신 들림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지만, 많은 사람이 믿는 성도의 귀신 들림을 부정하고 있다. 디카슨은 귀신 들림이 사람을 유혹하여 참된 진리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또한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려고 시도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예영수는 역사적 예수가 생전에 여행하는 치료자, 기적의 행자(行者)였고, 축귀자(逐鬼者, exorcist)였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질병 치료라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막 1:34, 39, 6:13, 마 7:22, 9:34, 10:8, 눅 11:15, 13:32 등) 따라서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귀신 추방과 질병의 치료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했다. (막 1:32-34, 눅 6:18 이하) 115) 일종의 치료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 메시지의 본질적 부분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의 치유 행위는 곧 악마의 세력에 대한 정면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귀신들에 대한 이러한 승리는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기 위한 예수 사역의 근본을 보여 주는 것이다.
(3) 누가복음에 나타난 귀신의 의미
또한, 예영수는 누가의 사탄에 대한 이해는 누가복음 4장 1~13절에 나타나는데 누가복음 4장 5~7절(“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의 내용을 보면 사탄이 ‘세상 모든 나라’(πάσας τάς βασιλείας της οίκουμένης)를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을 줄 수 있는 존재로 표현된다고 한다. 그는 여기에서 ‘세상’(오이쿠메네)의 명확한 뜻은 ‘사람이 사는’ 세계를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이 구절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권세가 사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누가는 사탄을 세상 속에서 강한 권세를 휘두르며 자기의 권위 아래 인간들을 복속시키는 그러한 존재로 파악한다. 사탄은 인간에게 질병과 귀신 들림이라는 현상을 통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며 세상과 그 가운데 사는 인간들을 지배한다. 귀신 들림의 현상, 증세로 호로빈은 중독, 극단적인 행동들, 균형을 잃은 식습관, 쓴 마음과 용서하지 않음, 기만적인 인성과 행동, 우울증, 감정의 동요, 두려움과 공포, 죄의식과 자기 정죄의 행위라고 하며 이러한 귀신 들림의 원인으로 가계에 내려오는 죄, 개인의 죄, 사술의 죄, 이단적 신앙, 종교적 관행들, 성적인 죄, 충격이나 사고를 통해서 또는 성서에 대한 잘못된 태도들이라고 지적한다. 그 지배권을 예수에게까지 확장키 위해 광야의 시험을 통해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마침내 예수의 사탄에 대한 우위와 사탄의 패배가 확증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누가복음서 전편에 등장하는 귀신 관련 기록에서 발견되는데, 그 모습을 누가는 비유적 묘사(눅 11:21-22)를 통해서 잘 그려주고 있다. 즉, 귀신(사탄)을 ‘강한 자’, ‘잘 무장된’ 존재로서 ‘그 소유’를 안전히 지키는 자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귀신을 예수는 단호히 축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누가의 관점은 다른 공관복음서 기자와 비교해서 자신의 직업과 예수의 치유 사역이 관련이 있다고 예영수는 말한다.
(4) 사도행전에 나타난 귀신의 의미
또한, 예영수는 사도행전이 묘사하고 있는 바울을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 영역 확장의 와중에서 귀신, 또는 귀신 들린 사람들과의 대결 결과 그 승리를 통하여 많은 결실과 긍정적 효과를 본 것으로 제시한다. 사도행전 13장 4~12절에서 바울이 소위 제1차 전도 여행 동안 구브로의 바보라는 곳에서 유대인 거짓 예언자인 마술사(τινά μάγον) 바 예수의 방해를 받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의 사람’으로 바 예수는 ‘귀신의 아들’과의 대비임을 극적으로 부각한다. 대조의 요점은 성령과 귀신의 대결이다. 그리하여 바 예수, 곧 귀신에 의해 조종되는 자가 성령에 의해 지배받는 이의 선교 사역을 반대한다는 초기 선교가 갖는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초기 선교에서 “주의 바른길을 굽게 하는” 적대자의 존재는 귀신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처음 선교사들의 귀신에 대한 투쟁과 승리는 심지어 사도행전 19장11~12절과 같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였다고 누가는 전한다. 이적과 축귀로 점철된 사역을 통하여 이방 교회의 확장, 즉 땅끝으로 향한 복음의 점진적 이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5. 사탄을 나타내는 성경의 또 다른 표현들
성경은 마귀를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묘사한다. 아바돈 혹은 아볼루운, 파괴자(계시록 9:11), 형제의 참소자들(계시록 12:10), 대적자(벧전 5:8), 광명의 천사(고후 11:14), 무저갱의 사자(계 9:11), 적그리스도(요일 4:1-4, 요이 7), 바알세불-에그론의 배설물 신(dung god 마 12:24, 27), 벨리알(고후 6:15), 정죄자(딤전 3:6), 기만하는 자(계 12:9, 고후 11:3), 귀신-참소자, 중상하는 자(마 4:1, 요 8:44), 용(계 12), 원수(마 13:39), 악한 자(마 13:19), 이 세상의 신(고후 4:4), 왕(계 9:11), 거짓말쟁이(요 8:44), 살인자-생명의 파괴자(요 8:44), 압박하는 자-지배하는 자(행 10:38),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우는 사자(벧전 5:8), 악한 영들의 지배자(마 12:24), 이 세상의 지배자(요 12:31, 14:30, 16:11), 사탄-대적자, 반대하는 자(마 4:10, 슥 3:1), 독사, 뱀(창 3:1, 계 12:9), 유혹하는 자(마 4:3), 도둑(요 10:10), 늑대(요 10:12)125) 등 다양한 단어로 성경은 마귀를 묘사하고 있다.
C. 성경과 영적 전쟁
성경은 일관되게 마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거의 그 존재는 성경에서 거론되지 않는 곳이 없다. 이 싸움의 핵심은 과연 우리들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가에 대한 소속의 문제이다. 이것은 진리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 싸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문제가 결부된다. 우리는 마귀를 무시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집착하거나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다.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싸울 때,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한 싸움이고 우리에게는 진행 중인 싸움이기도 하다.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과 십자가, 성경과 이 영 간의 영적 전쟁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영광
이 싸움은 어느 개인의 사적인 전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전쟁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결부되어 있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보이지 않는 적들로부터 자신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내는 것이 이 싸움의 목표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궁극적인 승리이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악한 영을 먼저 인정 해야만 한다.
워너는 우리는 분명히 과거 어느 때보다 귀신의 활동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사탄이나 귀신이 역사의 초기에는 활동적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전술을 구사하는데, 초기의 역사에서는 암암리에 활동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경우 드러나지 않게 일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오늘날 그들의 활동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워너는 말한다.
워너는 이 주제는 성경에 항상 나타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된 신앙체계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명백히 보는 것을 무시해왔다고 그는 말한다. 자기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선교사들이 훨씬 쉽게 귀신들을 실재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많은 선교사가 귀신의 능력을 대면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그러한 경험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야기가 승리로 끝맺지 못했거나, 혹은 듣는 사람이 이러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귀신이나 그 능력을 대결하는 것에 대해 신학교육이나 실제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워너의 견해이다.
워너에 의하면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최초로 대결한 이래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적 전투는 그 이후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다. 영적 전투는 창세기 3장 15절 이후로 성경의 곳곳에 기록되어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 전투에 개입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적을 무시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 지속되는 전투에서 단지 적을 전략적으로 유리하게 할 따름이라고 워너는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이 전투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는 것이 워너의 주장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은 어떤 경우에도 조금도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적을 패배시키셨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적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아직 유보하고 계신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큰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가 신중하게 적을 상대해야 할 때다. 사탄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려는 불타는 욕망이 있다. 사탄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 4:4) 하려는 자라고 워너는 사탄을 정의한다.
워너는 사탄이 가장 잘 사용하는 전술은 속임수 혹은 교활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탄의 어떤 거짓말을 믿고서 속임수에 빠지는 만큼 우리 삶에서 사탄이나 귀신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귀신이 그리스도인의 몸 안에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믿는 자가 귀신 들릴 수 있는지 하는 논쟁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인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믿음의 영역에서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보다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할 따름이다. 닐 앤더슨(Neil Anderson)은 “진리 대결”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인생을 끌고 가는 속임수에 계속해서 속박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귀와의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싸움의 대상을 교만한 눈으로 우습게 보거나 아니면 과도하게 집착해서는 승산이 없다. 그러한 시각마저 마귀의 궤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허탄한 논쟁에 집착하기보다는 악한 영들을 성경적으로 잘 파악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이 존재와의 싸움에서 그들을 물리쳤는지를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엡 6:10-17)
2. 십자가의 능력
워너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는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통제밖에 있던 때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 이전에 우리는 모형과 “그림자”(골 2:16, 히 8:5, 10:1)에 입각하여 움직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 이래로,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움직인다. 갈보리 사건 이전에는 무엇인가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확실히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다. (고후 5:21) 그래서 사탄은 죽음이라는 형벌을 그리스도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역할은 예수 자신이 선택한 것이지, 강요받은 것은 아니다. (요 10:17-18)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할 수 있는 최악을 취하셔서 그것을 승리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 사건을 사용하셨다. 십자가는 사탄에게는 승리를 의미하고 하나님에게는 패배를 의미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오히려 이제 그리스도인 승리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거기서 적이 단번에 패했기 때문에 그것은 자랑스럽게 전시된다고 워너는 말한다.
워너는 사탄은 자신이 이 영적 싸움에서 패했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 사탄은 자신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한다. 적은 두 가지 근거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한다. 그 중 하나는 우리의 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해주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구제책을 받아들인다면, 사탄은 더 이상 죄책감을 더해서 우리를 속박할 수 없다고 워너는 말하고 있다. 유대의 전통은 죄에 대해서 자신과 부모의 죄, 또는 부모의 죄를 하나님께서 자손 삼, 사대까지 벌하신다고 믿는다. (출 34:7) 하지만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날때부터 소경인 청년에게 제자들이 이 청년이 맹인이 된 것은 자신의 죄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인지를 물을 때 그 청년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부모의 죄도, 청년 자신의 죄도 아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요 9:2-3) 마귀는 인간 육신의 병과 죄의 문제를 교묘하게 사용하여 믿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 죄를 사용해서 결국 절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 대한 승리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안에서 회개와 용서의 기도로 죄 사함을 받는다. 단지 구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다.
워너는 또 다른 공격의 근거는 자아(自我)라고 한다. 사탄의 목적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에서 인간이 타락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아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로 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다.”(계 12:11) 따라서 내가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갈 2:20), 또 나의 자아를 십자가로 보내어 옛 성품의 요구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승리로 이끈다고 워너는 말한다.
메노나이트 교파의 인류학자이며 선교학자인 도널드 제이콥스(DonaldJacobs)는 귀신론과 승리적 속죄관이 현대 선교의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목적에 큰 피해를 입혀 왔다고 말한다. 또 1975년 노트르담 대학에서 열린 기독교의료협회(Christian Medical Society)의 귀신론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존 뉴포트(John Newport)는 다음과 같은 소논문을 발표했다.
다행히도, 승리적 속죄관이 원래 의미를 회복하고 있다. 희생적, 대속적, 화해적, 구속적 관점의 속죄론은 모두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승리적 속죄론도 적절한 자리를 찾아야 한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사탄과 귀신들의 능력에 관련된 것이며, 따라서 이 승리적 속죄관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뉴포트는 조지 래드(George Ladd)가 골로새서 2장 15절을 해석한 것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래드(Ladd)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그 영적 군대를 무장 해제시켜서 계급장을 떼어내고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 버린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리하여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그 우주적 군대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심으로써 자신의 적을 이기셨다고 진술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적군에 대하여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 준다고 워너는 말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십자가에 관한 이 중요한 진리와 십자가가 제공해 주는 승리를 놓쳐 버렸다. 우리의 세계관이 세속화되면서, 영적 전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귀신들을 이론과 신학의 영역에 남겨놓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우리는 가능한 귀신의 세계와 관계를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귀신들을 매일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을 무릅쓰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이 그 조롱을 피하려 하며, 우리 중의 극소수만이 그것을 감당하고 있다고 워너는 말한다.
워너는 현대적 성경관으로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인용된 구절 중 몇몇은 귀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구절들은 세상이나 육신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절들을 영적 전투와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우리의 세계관이 다시 한번 가로막고 있다고 워너는 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분석하여 그것들을 각각의 정돈 된 틀 안에 집어넣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고 한다. “당신은 그것이 세상인지 육신인지 마귀인지 어떻게 아는가?”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악의 세 가지 측면(세상, 육신, 마귀)을 어떻게 다루는지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워너는 말한다.
워너는 여기서 세 가지 요소는 매우 밀접하게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에 대하여 말하면 또 다른 하나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육신은 세속적인 속성으로 유혹에 대하여 반응하게 한다. 세상은 우리가 사는 환경으로 “공중권세 잡은 자”의 통제 아래 있다. 사탄과 그의 귀신들은 우리의 육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고 있으며, 우리 안에 죄악 되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주위에 있는 세상의 자극을 사용한다. 마귀가 그의 목적대로 우리를 파괴하려 할 때 세상과 육신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바보일 것이다. 마귀가 이 모든 관계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굳이 성경을 펼쳐볼 필요도 없다고 워너는 말한다.
워너에 의하면 승리가 보장된 우리의 지위와 관련해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결과로서 갖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다. 이 새로운 관계는 출생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된다. (갈 4:4-7, 엡 1:5) 바울은 양자의 비유를 들어 새로운 관계를 쉽게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본래 노예였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들여서 “아들의 명분”(갈 4:5)을 주셨다고 말한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바로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맺은 이 새로운 관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사탄이 우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말소되었다.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미래에 상속받을 것이 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가족관계는 그 관계가 이루어진 순간부터 독특한 특권을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에 들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다고 워너는 말한다. (눅 10:18-20)
워너는 또한 마귀를 대적하는 힘은 소수의 특별한 신자에게만 주는 은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특권이며 책임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너희는 하나님에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라고 말한 이유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속박당하는 영역에서 고전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주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려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으려 한다. 사탄의 거짓말은 매우 교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이 사탄이 주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승리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승리를 주장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워너는 말한다. 십자가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회심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을 받는다.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요지는, 우리가 영적 전투에 의기양양하게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특별하고 새로운 체험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 안에 누가 거하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따른다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깨닫기만 하면 된다고 워너는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신자 자신의 소속감과 정체성의 문제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이래 내내 거기에 계신다고 워너는 말한다. 그는 우리 안에서 그의 계획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으셨고, 우리는 그가 수행하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둘 사이의 갈등은 결국 감정이 풀어지는 큰 경험과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사를 수반하는 결단의 지점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나 만일 갈등이 없었다면 감정적 체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능력의 역사는 훨씬 일찍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제대로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회심과 성화의 과정에서 더욱 일찍 온전하고 사려 깊은 실행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극한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워너는 말한다.
워너는 여기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감정적 체험을 좋아하여 정규적으로 그러한 체험을 창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감정을 소화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래서 감정이 진리나 영적 성숙, 혹은 심지어 진정한 예배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워너는 당부한다.
3. 영적 전쟁을 반대하는 주장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짐작컨대 세 가지의 논쟁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과의 사이의 화목제물(대리 형벌 이론)로서의 사건으로 인식하는 것과 두 번째는 원죄로 인해서 죄와 사망이 인간의 삶을 주장하면서 악한 영의 권세에서 사로잡힌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악에 대한 승리적인 속죄사건(승리자 그리스도)으로 보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도덕적, 윤리적 모범으로서 통치(도덕적 통치 이론)하시는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속죄를 죄와 죽음과 악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는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믿는다. 대리 형벌 이론과 도덕적 통치 이론의 성격은 분명하게 십자가의 의미에 포함되지만, 그러나 어느 입장에서든 십자가를 논쟁의 소재로 삼는 것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축소, 왜곡할 수 있다. 악의 문제를 전제하면 인간들의 구원을 이루시는 마귀와의 싸움에서의 승리적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과 연결해서 승리적인 속죄사건으로써 승리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축사 사역을 가로막는 주장에 대해서도 알아볼 것이다.
1) 승리자 그리스도의 속죄를 반대하는 주장
속죄하시는 그리스도를 승리자 그리스도로 보려는 입장에 대해서 보이드(Gregory A. Boyd)와 에디(Paul R. Eddy)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주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을 무찌르셨다는 것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천사 가운데 가장 능력이 있는(흔히 그 이름이 루시퍼라고 한다) 천사가 다수의 다른 천사들을 꾀어 하나님과 전쟁하게 하였는데, 이 전쟁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계 12:13-17) 결과적으로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다” (요일 5:19) 왜냐하면, 사탄은 “이 세상의 신”(고후 4:4)과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탄을 이 시대의 “임금”이라고 부르고 계신다. (요 12:31, 14:39, 16:11) 예수님은 사탄이 현재의 타락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자임을 인정하고 계신다고 보이드와 에디는 말한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첫 번째 메시아적 예언은 예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뱀의 “머리를 상하게”(창 3:15) 하실 것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찾고 있다. 메시아의 중심적인 중요성은 메시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인류를 속박하였던 모든 사악한 세력들에 대하여 승리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뿐 아니라 그분의 사역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흑암의 나라에 대항하여 전진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사탄의 억압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야 한다고 보이드와 에디는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탄과 그의 왕국을 물리치시는 주된 방법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흔히 생각하지 못하고 놓쳐 버리고 마는 이 주제가 사실은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원수 위에서 다스리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히 1:13, 10:12-13) 또한, 바울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이 멸망 받을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고전 15:22-25, 엡 1:20-22)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전의 “세상의 임금”이 쫓겨났으며 새로운 “지도자”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전의 불법적인 통치자는 인간을 비참과 죄와 멍에의 상태에 머물게 하였지만, 이 의로운 지도자는 “회개와 죄 사함”을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성경의 논증은 명확하다. 죽으시고 다시 사셨을 때 그리스도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보이드와 에디는 말한다. (골 2:15)
이러한 우주적 승리는 인간에게는 혁명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사탄을 무찌르셨기 때문에 인간은 이제 사탄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를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이드와 에디는 말한다. (계 12:9, 11)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대속물”이라 부르고 있으며(마 20:28, 딤전 2:6, 히 9;15), 구원을 “속량”이라고 부르고 있다. (롬 3:24, 8:23, 고전 1:30, 엡 1:7) 이 두 가지 용어는 어떤 사람을 노예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치러지는 값을 이르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탄의 죄와 정죄의 속박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이다.
보이드와 에디에 따르면 승리자 그리스도 이론은 안셀무스(Anselmus)의 견해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던 11세기까지 교회에서 지배적인 속죄론이었다. 이 주장이 전통적이라는 것은 이 주장에 대해서 지지하는 하나의 논증이 될 수 있다. 또한 승리자 그리스도의 이론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사역에 대해 다른 견해들이 하지 못하는 주제적인 통일성을 부여해 준다고 그들은 말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귀신을 쫓아내심, 그리고 치유 사역은 모두 전쟁과 관련된 행동들이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러한 활동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간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셨거나(대리 형벌 이론)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가혹함을 드러내 주었다(도덕적 통치 이론)고 볼 수 있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 견해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수님의 여타 활동으로부터 고립되게 한다. 이들 견해는 승리자 그리스도 이해와 결합하여야 한다고 보이드와 에디는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분리 불가능할 만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부활은 대리 형벌이나 도덕적 통치 속죄이론에서는 엄밀하게 말해서 필수적이지 않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의 육신이 죽으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죄는 여전히 드러나 있다. 대리 형벌 이론이나 도덕적 통치 속죄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 다른 이유를 발견하지만, 그 이유들이 속죄와 밀접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승리자 그리스도 이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무덤과 사망의 주관자인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악은 인간적인 주제이기 이전에 우주적인 주제이며 속죄는 구원론적인 주제이기 이전에 우주론적인 주제라고 보이드와 에디는 말한다.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주된 전투는 하나님과 반역한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의 우주적인 정사와 권세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세상에 한 인간으로 오셨으며 사탄을 정복하시고 교회가 자신의 승리를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마귀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창조 세계는 회복되었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보이드와 에디는 승리적 속죄론에 대한 논쟁에서 거기에 대한 반론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반론 1, 이 견해는 그 초점에 있어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는 반론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이 사탄을 물리쳤는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화목케 하였는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속죄에 대한 승리자 그리스도 이론에 반대한다. 반론 1에 대한 반론으로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신약성경이 어떻게 십자가 부활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케 하였는가에 많은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강조가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물리치셨다는 것에 대한 강조보다 더 큰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그들은 말한다.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주제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으며, 구약성경에 이미 예견되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반론 1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속죄에 관한 화목적인 주제가 보다 많은 강조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속죄에 대한 승리자 그리스도 이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실천적인 책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신약성경에 더욱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해도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미치는 근본적인 효과를 바꾸지는 못한다고 보이드와 에디는 말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그의 왕국을 패배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승리적 속죄론에 대한 논쟁의 반론 2, 이 견해는 지나치게 사변적이다라는 반론에 대해서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때로 초대교회에서 사변적이고 상상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보이드와 에디는 인정한다. 여러 이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허용하심으로 어떻게 하나님께서 마귀를 속이셨는지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고안되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승리자 그리스도 이론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러한 상상에 근거한 생각들을 받아들여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성경은 어떻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부활을 통하여 사탄을 무찌르셨는지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마귀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나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마 8:29) 골 2:15에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상에서의 영적 존재의 하나님에 대한 반란과 전쟁, 그리고 지상으로 쫓겨난 마귀와 그를 추종하는 악한 영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에 대한 마귀의 미혹과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그 결과인 죄의 삯인 사망을 십자가와 연결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십자가의 승리적 속죄론에 대해서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승리적 속죄론에 대한 논쟁의 반론 3은 이 견해는 사탄에게 너무 많은 영예를 부여한다는 반론에 대해서 이런 사람들은 능력 많으시고 주권적인 우주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된 대적을 무찌르기 위해 그런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여야만 했다는 사실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근거가 없다. 성경은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다”(요일 5:19)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사탄이 “이 세상의 신”(고후 4:4)과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로 통치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사탄에 의해 협박당하지 않으시며, 사탄은 세상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표를 뒤엎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타락한 주요한 천사와 전투에서 확실히 승리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탄과 그의 나라가 하나님께서 청산하여야 하실 진정으로 사악한 세력이라는 사실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정산(定算)하시는 중심적 방법이다. 이것 또한 성경은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축사 사역 이해
호로빈은 복음서에는 치유 혹은 축사에 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다고 한다. 그리고 치유에 관한 것보다 축사에 관한 것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각각의 사례가 개인 사역에 미치는 영향력과 의미는 심오하다고 그는 말한다. 호로빈은 우리는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더 인기 있는 주제들에 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비교하면서 쉽게 지나치기 쉽다고 한다. 많은 교회가 귀신들에 대해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에 전반적인 예수님의 축사 사역과 그에 관한 가르침을 오늘 우리의 시대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호로빈은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의학적 지식과 이해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귀신들에 관해 말씀하셨다고 가정한다고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1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셨더라면 그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역사와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에 거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현대의 과학과 문화, 의학, 역사로 과연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과 축사나 마귀를 규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현대적 시각의 잣대가 축사와 마귀를 이해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게 한다.
호로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블린 프로스트(Evelyn Frost)는 그녀의 책 「크리스천의 치유」(Christian Healing)에서 귀신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잘못된 신학적 접근법을 명료화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축사 사역은 귀신들이 존재한다는 당대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만들어진 이러한 공허한 개념들에 과학의 불빛이 비쳐졌고, 그 결과로 귀신들은 사라졌다.” 초대 교부들의 치유와 축사 사역에 관한 그녀의 연구는 이러한 잘못된 신학적 접근만 없었다면 매우 추천할 만한 것이라고 호로빈은 말한다. 또 어떤 교회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귀신들을 쫓아내었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믿는 성도들은 귀신 들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축사 사역을 자신과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귀신이 들릴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다. 필자는 이 논쟁 역시 에덴동산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와는 뱀의 미혹에 넘어갔고 인간의 대표 아담은 하나님의 말이 아닌 하와의 말을 믿었다. 아담이나 하와의 몸속에 마귀가 들어가지는 않았다. 마귀는 환경이나 자연을 통해서 자신의 변장술을 통해 믿는 자들을 그의 궤계에 걸려들게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귀신 들림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다.
호로빈은 이러한 여러 가지 신학적 견해들이 치유와 축사 사역을 하지 않고 있는 대부분 교회가 지닌 의견들이라고 한다. 교회는 기만의 영을 지배하는 방법에 무지하며,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에게 쉽게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금언 중의 하나는 “네 자신을 알고 적을 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구가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 우리의 원수 사탄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질 때, 혹은 사탄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 순진해서 자신이 그들의 삶이나 교회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믿어질 때 즐거워한다. 사탄과 그의 전략에 대한 무지로 인해 교회는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마귀론 이해만이 정확한 마귀의 기원과 그들의 일, 그리고 목표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마귀의 기원과 신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그들의 명칭을, 또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과 마귀의 관계를,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마귀의 일에 관하여 연구함으로 성경에서의 악한 영의 존재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그들의 악한 세력을 알아보았다. 때로는 성경 기자의 관심사가 마귀와 예수님의 축사 사역을 축소하고 있는 것도 알았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영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적 존재들을 피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악한 영이 주님 오시기 전에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을 또한 말하고 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악한 영에 대한 올바른 성경관이다. 이것은 과학이나 역사의 시간과는 무관하다. ‘신정론’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고 크신 뜻이 담겨 있다.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세상이 주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며 냉소하고 “신은 없다”라고 말한다. 전도는 단지 교회가 먹고 살기 위한 생계의 수단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것이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에 대한 시각이다. 악한 사탄, 마귀는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미혹을 주어 복음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자기 사람들을 이용해서 성경의 해석과 신학까지도 왜곡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마귀의 궁극적 목표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와 그를 따르는 세력들은 세상에 속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인데 이미 그들은 벌써 세상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일 4:2-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