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흔한 게 사랑이라지만
강남 부부
정동교
살집 찾아다니다가 처마 밑
일곱 가족 살던 구 집에
수차례 앉아보고 그 옆
전깃줄에 집 지어 세 마리 부화하다
솜털 난 육아에
비바람 더위 무릅쓰고
날 새면 사냥하는 향수의 그림자
까치 고양이 집 근처 서성일 때
농민단체 쌀값 보장하라 시위하듯
빽빽이고 돌진할 때 날파람 일고
스칠 때 움찔해진다.
낯 설은 땅 그 작은 맵시 몸에
집 짓고 새끼 쳐서
반년마다 대해를 넘나드는 삶
그 삶도 애달프다.
*정동교 : 2007년 ‘문예사조’ 등단, 작품집 ‘낚싯밥 올려주는 저물녘’ 등
「존재의 결핍은 ‘소유가 너무 적음'을 통해서 나타나고, 소유의 결핍은 완벽한 존재를 추구하는 욕망 속에서 나타난다」
-‘자크 라깡’,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
또한, 그는 언어에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이 나타난다고 주장하여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고 그것을 철학의 범위로까지 끌어올렸다. 그래서일까. 나는 산골로 들어온 이후, 늘 사랑의 결핍에 시달렸으며, 한때 아내에게 버림받고 그녀를 떠나보냄으로써 둘 다 소유하지 못한 죄책감과 절망감에 괴로워했다. 따라서 내가 무의식중에 쓰던 평소의 언어 행위 때문에, 행여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 뒤로 어스름하게 스러져가는 달빛이 역광으로 비췄다. 마치 고고하고 우아한 존재가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의 당혹스러운 훅, 하는 신음이 그녀에게 전해졌음에도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방금 내가 치운 반찬 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시간에 왜?”
겨우 내가 뱉은 말은 이 정도였다.
“그냥, 잠이 오지 않아 산책하는 중이에요.”
그녀는 개울가에 쪼그려 앉았다. 나더러 같은 행동을 취하라는 무언의 암시인지 아니면, 그냥 습관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멍하니 개울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나는 입안이 바짝 말라 혀가 굳어버린 줄 알았다.
“이렇게 살려고 부인과 이혼한 거예요? 아이들도 모조리 줘버리고?”
그녀는 느닷없이 이렇게 첫 마디를 열었다. 그녀는 그간, 나의 행적을 모조리 아는 것 같았다. 나는 뭐라도 한 마디 대꾸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혀가 굳었는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런 산골에 숨어 살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나의 상처를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여기 왜 왔어? 내 상처를 들쑤시려고 일부러 찾아온 거야? 남편이 예전에 왔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아. 서로 피장파장이야.”
그녀는 내 말에 피식, 하고 웃었다.
“제가 불행해 보이니 좋은가 봐요?”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말이야. 난 이곳으로 도피한 적 없어. 나 스스로 결정하고 나 스스로 자유를 찾기 위해 들어온 거야. 내 결정, 삶을 함부로 말 하지 마.”
나는 정말 화가 난 사람처럼 그녀를 다그쳤다. 그러나 솔직히 내 마음은 이런 게 아니란 걸 나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리던 그녀가 이곳에 일부러 날 찾아왔는데,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녀를 다그친단 말인가. 하지만 대화는 자꾸 빗나가기 시작했다.
“똑같으시네요. 우유부단하고 자기변명에 능하고, 자신 밖에 챙길 줄 모르는 그 이기적인 생각은 변함이 없네요.”
“뭐?”
나의 짧은 대꾸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왜 날 한 번도 안 찾으신 거예요? 제가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유부남으로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아니잖아요. 아저씨는 그냥, 말로만 날 흔들어놓고 상황이 복잡해지니까 도망간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녀의 감정이 격앙되었다. 나 역시 그녀의 발칙한 말에 그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날 떠나간 사람은 너였다고. 난 그때 정말 널 사랑했어. 네가 떠난 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이렇게 보고 있잖아.”
그때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내게 고함을 질렀다.
“그만!”
그제야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우선은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좋을 듯싶었다.
“미안해.”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안았다. 재스민 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그녀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모습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만치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남편이었다.
“유희야!”
나는 이쯤에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서 떨어지는데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아련하고 짜릿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꽉 잡은 그녀의 손을 뒤로하고 개울 위쪽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 펜션 1층의 세 팀과 2층 203호 투숙객들이 썰물처럼 모조리 빠져나갔다. 이른 피서를 온 손님들이었지만 내일이 월요일이라 모두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펜션을 빠져나갔으니 이제 남은 팀은 201호 단골손님과 202호 그녀와 남편뿐이었다.
“야! 모조리 다 나갔네. 잘 되었다. 오늘 일요일인데 올 손님도 없어. 일찌감치 문 걸어 잠그고 오랜만에 우리 가든파티나 한 번 하자. 어제 내게 진 빚도 있잖아.”
201호는 속이 후련한지 가슴을 폈다.
“어제 잘 바래다주었지?”
“그럼. 그 친구도 내게 고마워할 거야. 그런데 젊은 친구가 술버릇이 고약하긴 고약하더라. 나더러 한 잔만 더하자고 얼마나 채근되던지.”
“그래서?”
“그래서라니. 내가 누구야? 정의와 의리의 사도잖아. 할 수 없이 내 방에 숨겨놓은 양주 한 병을 함께 마시고 헤어졌지.”
“뭐?”
“뭘 놀래? 야야. 오해하지 마. 그 친구는 딱 한 잔만 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어. 내가 그리 눈치 없는 놈도 아니잖아.”
양주까지 마신 그가 새벽에 깨어 그녀를 찾으러 개울까지 온 거로 봐서 그는 정말 술이 센 편이었디.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안내실로 들어가려 하는데 그가 잡았다.
“그런데 말이야. 어제 그 남자, 좀 안 됐어. 회계사라며? 돈도 있고 제법 잘 사는 모양인데 아이들 때문에 부인하고 영 관계가 좋지 않은 모양이야. 어제 뭐라더라? 각자가 데리고 온 아이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며,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을 내게 했어.”
그의 말에 나는 의아했다.
“각자의 아이? 그게 무슨 말이야?”
“둘 다 재혼인 모양이던데? 남자에겐 전처 자식 두 명, 부인에게 딸 하나가 있는 모양이야.”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기론 남자는 재혼이 맞았다. 그런데 처녀였던 그녀에게 아이라니, 아마 남자가 술에 취해 헛소리한 모양이었다.
“됐어, 됐어. 그만해. 알았다. 해 질 녘에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자. 난 피곤하니 들어가서 좀 쉴게. 아! 이왕이면 고기하고 술을 사러 그대가 읍내에 좀 갔다 와. 자, 여기 카드.”
한숨 자고 나오니 몸과 마음이 개운했다. 그새 201호는 읍내에 다녀와서 돼지고기와 먹을 것을 잔뜩 사놓고 내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웠지만, 날씨는 좋았다.
그녀와 남편은 개울에 갔다 오는지 둘 다 젖은 몸이었다. 201호가 마당에서 불을 지펴 고기를 굽고 나는 간단한 밑반찬을 만들 즈음이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가 먼저 우리를 보고 말을 걸었다.
“이야. 좋은 냄새입니다. 우리가 내일 가는 줄 알고 환송회를 준비하나 봐요.”
서울 남자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투였다. 하지만 201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한술 더 떴다.
“물론입니다. 오늘 이거, 전부 다 내가 사는 겁니다. 오늘 우리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먹고 내일 모두 기절합시다.”
“좋습니다. 우리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그전에 먼저 먹기 없기입니다. 여보! 어서 옷 갈아입고 오자.”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내일 간다는 사실에 약간 마음이 걸렸다.
흑돼지고기였다. 숯 대신 장작불 위에 철판을 얹어 굽는 고기 냄새가 마당에 진동했다. 해거름이 되자 산골짜기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멀리 구름에 둘러싸인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이 보였다. 일찌감치 자리 잡은 풀벌레도 하나, 둘씩 찌르륵, 하며 소리 냈다. 아쉬운 것은 어젯밤 그녀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는 내 마음이었다.
그새 남자와 그녀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내려왔다. 나는 행여, 그녀가 불편해할까 봐 되도록 그녀와 멀리 떨어져 앉았다. 201호가 불판에 고기를 굽고 테이블에 전달하는 식이었는데 불판 오른쪽에 내가 앉고, 마주 보는 쪽에 그녀의 남편 그리고 옆에 그녀가 앉았다. 웬만큼 고기가 다 구워지자, 201호도 내 옆에 앉았다.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런 자리가 반가웠던지, 연방 고맙다는 말을 하며 게걸스럽게 먹고 마셨지만, 그녀는 별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201호가 분위기를 띄워준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탁자 밑으로 마신 소주 7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지간히 먹고 마신 후였지만, 그는 발동이 걸리는지 연방 201호와 내게 술잔을 권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남편을 말렸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가끔 우연히 마주친 그녀의 눈빛은 불안했고 흔들렸다. 나는 그들이 주는 술만 받아먹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201호도, 그도 몹시 술에 취해있었다. 나 역시 말없이 술을 먹다 보니 어지간히 취기가 올랐다. 그때 201호가 손바닥을 치며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주위에 대고 크게 말했다.
“우리 이쯤에서 이곳 펜션의 사장이자, 시인 겸 가수인 최림 씨의 노래, 한곡 들어봅시다. 박수!”
그녀의 남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사장님이 시인이시라구요? 게다가 통기타 가수?”
“그럼요. 서울 쪽에는 모르겠지만 이곳 지리산 일대에서는 아주 유명한 시인입니다. 봐요! 시인처럼 생겼잖아요.”
201호가 재미있다는 듯 더욱 흥을 돋우자,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술과 옛 기억에 취한 나로서는 그녀가 앞에 있으므로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였다. 나는 곧장 안내실에서 통기타를 가져왔다. 통기타를 튜닝하자 그제야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흔한게 사랑이라지만
나는 그런 사랑 원하지 않아
바라만 봐도 괜히 그냥 좋은
그런 사랑이 나는 좋아
변한 건 세상이라지만
우리 사랑 이대로 간직하면
먼 훗날 함께 마주 앉아
둘이 얘기할 수 있으면 좋아
어둠이 내려와 거리를 떠돌면
부는 바람에 내 모든 걸 맡길 텐데
한순간 그렇게 쉽사리 살아도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해」
나는 이미 과거에 있었다. 그녀와 광안리 방파제에 앉아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행복했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내가 부르는 노래를 기꺼이 따라 불렀다. 비록 완벽한 화음은 아니지만, 밤바다를 바라보며 둘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기쁨이요, 사랑의 축복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쉽게 살아도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한가. 이 소절을 부르는데 눈물이 흘렀다. 풀벌레와 바람 소리뿐인 이곳에 그때, 누군가 내 노래를 따라 했다. 그녀였다. 그녀는 때론 내 눈을 보면서, 또 때론 멀리 지리산을 보면서 그녀의 추억을 노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래가 채 끝나기 전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개울가로 뛰어가 버렸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첫댓글 여기까지 읽었다오. 하하하
바쁜 와중에도 긴 장편의 일부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가 한강 역시 첨엔 시인이었습니다. 참고하시길요.
흥미진진,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냇가에 가서 울고있는 여자.
일은 점점 어려워질 것 같네...
역시 선생님은 젊은 감성이십니다.
그러니 , 청춘은 나이가 아니다, 하는 항간의 말이 회자되지요.
젊은 시절, 누구나 경험하였고 꿈꾸었던 사랑!
우리 산청문협 회원님들의 시와 저의 소설로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