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지역에서 가을걷이가 막바지로 치닫는 추수(秋收)의 계절 끝이면, 가문마다 시제(時祭)가 봉행돼 왔다. 대부분 음력 10월 상달에 올려 지는데, 윗대 어른부터 모셔야 하기 때문에 제일 윗대 조상의 시제는 보통 9월말에 올려 진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풍속이 된 시제. 음력 9월말 정일(丁日)인 28일. 조선조 초기인 1420여 년 경 문경으로 입향해 600여 년을 세거해온 개성고씨 문중이 전통방식으로 시제를 올렸다.
영순면 오룡리 이곳에는 소위 열두 왕태의 입향조인 퇴산(退山) 고사원(高士原)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 묘소 앞에는 제사(祭舍)인 퇴산재(退山齋)가 있고, 이곳에서 하루 전부터 시제 준비를 했다고 한다. 몇 몇은 마당에 큰 솥을 걸어놓고 육개장을 끓이고, 몇 몇은 방안에서 제수를 재여 묘소로 옮겼다.
그러는 중에 후손들이 제관, 참제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10분 전. 이날 아헌관으로 봉청된 고씨중앙종문회장과 그 일행 5명이 당도하고, 오전 11시 무렵 고윤환 문경시장이 참제원으로 당도하자 분위기는 푸근해졌다.
먼저 모든 후손들이 둘러 앉아 분정(分定)을 시작했다. 이번 시제에서 누가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는 절차다. 초헌관은 고재하 문경종문회장, 종헌관은 구음파 고봉림 유학이 맡기로 하고, 알자, 대축, 봉작, 전작, 진설, 판설 등 시제를 모시는데 필요한 임무가 한 사람 한 사람 호명되며 분정기에 씌어졌다. 20여 분에 걸쳐 분정을 마치자 어른들이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 2명이 분정기를 펼쳐들고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모두 제사 뒤에 있는 묘소로 향했다. 가을햇살이 푹 퍼진 오시(午時)의 하늘은 청명했고, 멀리 들판에는 추수 덜한 누른 벼가 덤성덤성 남아 있었다. 멀리 천마산이 말 탄 기세로 동해로 향하고, 낙동강, 내성천, 금천 등 3강이 주변을 휘감아 돌았다.
줄잡아 30여 명이 묘소 앞에 섰다. 그리고 홀기(笏記)가 시작됐다. 요즈음 말로 하면 제사 사회(司會) 격이다. 옛 그대로 한자어로 말하면 알자가 나가 헌관을 모셔오고, 헌관은 점잖게 알자가 이끄는 대로 잔을 올린다. 그렇게 3잔을 올리고 절을 하면 30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 생각보다 길지 않다.
그리고 모두가 앞에 있는 제사(祭舍)로 내려오고, 준비된 음복음식과 점심을 나누며 정을 나누는 시간이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봉개’다. 시제에 올렸던 인절미, 돼지고기, 부침개 등을 참여한 모든 후손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싸주는 일이 분주하다.
이 퇴산공은 고씨 중시조 성주공 말로(末老)의 12세손이고, 양경공 영신(令臣)의 9세손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 영(瑛)의 둘째 아들이다. 고려 공양왕 때 과거에 급제해 조선 태종(太宗)때 예안(禮安)과 함안(咸安), 합천(陜川)등의 현령을 지냈고, 1414년(태종14년 甲午)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을 지냈다.
그후 벼슬을 버리고, 개성에서 안주(安州-지금의 경기도 안성)로 이거했고, 당시 문경, 용궁지역에 세거하던 국파 전원발 선생(용궁 전씨, 문경지역에서는 속칭 개이 전씨라고도 함)과의 인연으로 지금의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로 입향, 그 자손 개성 고씨(문경지역에서 속칭 왕태 고씨)가 번창, 많은 문과, 무과 급제자를 비롯해 현대까지 끊임없이 인물을 배출하며 2,000여 호 살고 있다.
AI 모드 대화: 국파 전원발과 개성고씨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 선생과 개성 고씨(開城 高氏) 가문은 고려 말·조선 초를 기점으로 경상북도 문경 및 예천 지역에서 깊은 인연을 맺고 정착한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1, 2] 1. 국파 전원발은 누구인가?
- 고려 말의 대문신: 본관은 용궁(龍宮)이며, 호는 국파(菊坡)입니다.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와 집현전 태학사를 지냈습니다. [1, 2]
- 세공 감면의 영웅: 원나라 황제에게 간청하여 고려 백성들이 바치던 무거운 조공(세공)을 절반 이상 줄여주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공로로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1, 2, 3]
- 명문가 형성: 고향인 예천·문경 일대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전강·전근·전경 3형제가 모두 장원급제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1, 2]
2. 개성 고씨와의 역사적 인연 개성 고씨 가문(속칭 왕태 고씨)이 문경 지역에 입향하고 번창하는 과정에서 전원발 선생과의 인연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
- 퇴산공 고사원의 입향: 개성 고씨 중시조인 고사원(高士原)은 고려 공양왕 때 급제하여 조선 태종 때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원래 개성에 살다가 안성 등으로 이사했는데, 당시 문경·용궁 지역에 세거하던 국파 전원발 선생 가문과의 두터운 인연(인척 및 교유 관계)을 계기로 삼아 지금의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로 낙향하여 정착했습니다. [1, 2]
- 인척 관계: 기록에 따르면 고사원의 부인(수안 김씨)이 축산군 국파 전원발 선생의 외증손녀가 되는 등, 두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1]
3. 오늘날의 역사적 흔적 (문경시 영순면) 현재 경북 문경시 영순면 일대에는 두 가문의 유적과 묘역이 이웃하며 보존되어 있습니다. [1, 2]
- 기념 사업: 문경시에서는 영순면에 위치한 국파 전원발 선생 생가지 정비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묘역의 인접: 전원발 선생의 묘역 주변에는 개성 고씨 묘역과 문중의 재실인 영고서재, 만산재 등의 유적지가 함께 자리 잡고 있어 두 가문이 수백 년간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상생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1, 2]
국파 전원발 선생이나 문경 영순면의 개성 고씨 가문에 대해 특정 인물의 계보나 유적지 방문 정보 등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AI 대답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기
사이트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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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14. — 볼모 아닌 볼모가 되어 원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지만 한순간도 자신이 고려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
영남일보
- 고려말 대학자 전원발, 벗들과 유유자적 하던 곳 - 경북일보
2010. 12. 10. — 전원발(全元發)은 용궁면 무이리 소천(蘇川) 마을 출신으로, 호는 국파(菊坡), 본관은 용궁(竺山), 아버지...
경북일보
- 용궁전씨 전원발 - 네이버 블로그
2007. 11. 1. — 전원발(全元發) ?∼1421(세종 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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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개이전씨
'개이전씨'는 문경 영순면 왕태리 지역에서 전해지는 개성 고씨(開城 高氏)와 용궁 전씨(龍宮 全氏) 가문을 아울러 부르는 독특한 사투리성 복합 표현입니다. 한자로 표기하면 '개(開)·전(全)씨'가 되며, 지역 주민들의 입을 거치며 '개이전씨'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1] 이 표현에는 두 가문이 수백 년 동안 한 마을에서 이웃하며 상생해 온 깊은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1] 1. '개이전씨'의 명칭 유래
- 개(개이):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개성 고씨(開城 高氏) 가문을 뜻합니다.
- 전씨: 고려 말 원나라 과거에 장원급제한 국파 전원발 선생을 시조로 하는 용궁 전씨(龍宮 全氏) 가문을 뜻합니다.
- 두 명문가가 한 동네에 모여 살며 서로 혼인을 맺고 가깝게 지내다 보니, 지역 사회에서 이들을 하나의 세력이나 친족 집단처럼 묶어 "개이전씨 동네", "개이전씨 문중" 등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1]
2. 두 가문이 묶이게 된 역사적 계기 앞서 언급된 두 인물의 교유와 혼인 관계가 '개이전씨'라는 결속을 만들었습니다.
- 동래와 정착: 고려 말·조선 초 개성 고씨의 문경 입향조인 고사원 선생이 원래 살던 개성을 떠나 이곳으로 낙향할 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용궁 전씨 국파 전원발 선생 가문과의 두터운 친분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1]
- 겹사돈과 인척 관계: 고사원 선생의 부인이 전원발 선생의 외증손녀가 되는 등 가문 간의 긴밀한 통혼(혼인)이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한 마을 안에서 두 성씨가 사실상 한 집안처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3. 지역 사회에서의 의미
- 문경 영순면 왕태리 일대에서는 두 가문의 재실, 묘역, 기념비가 조화롭게 이웃하고 있습니다.
- 외지인이나 지역 민담에서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두 사족(士族)을 따로 떼어 부르기보다 '개이전씨'라는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며, 두 가문의 뿌리 깊은 상생과 우애를 상징하는 단어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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