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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과(大過)
【傳】 大過는 序卦曰 頤者는 養也니 不養則不可動이라 故受之以大過라 하니라 凡物養而後能成이니 成則能動하고 動則有過하나니 大過所以次頤也라 爲卦上兌下巽하니 澤在木上은 滅木也라 澤者는 潤養於木이어늘 乃至滅沒於木하니 爲大過之義라 大過者는 陽過也라 故爲大者過와 過之大와 與大事過也니 聖賢道德功業이 大過於人과 凡事之大過於常者 皆是也라 夫聖人은 盡人道하니 非過於理也요 其制事以天下之正理하나니 矯失之用에 小過於中者則有之하니 如行過乎恭, 喪過乎哀, 用過乎儉이 是也라 蓋矯之小過而後 能及於中이니 乃求中之用也요 所謂大過者는 常事之大者耳니 非有過於理也라 唯其大라 故不常見이니 以其比常所見者大라 故謂之大過라 如堯舜之禪讓과 湯武之放伐은 皆由[一有此字]道也니 道는 无不中, 无不常이로되 以世人所不常[一作嘗]見이라 故謂之大過於常也라.
대과괘(大過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이(頤)는 기름이니, 기르지 않으면 동할 수 없으므로 대과괘(大過卦)로 받았다.” 하였다. 모든 사물은 기른 뒤에 이루어지니, 이루어지면 동하고 동하면 과함이 있으니, 대과괘(大過卦)가 이 때문에 이괘(頤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위는 태(兌)이고 아래는 손(巽)이니, 못〔澤〕이 나무〔木〕위에 있음은 나무를 없애는 것이다. 택(澤)은 나무를 윤택하게 하고 길러주는 것인데 마침내 나무를 멸하여 없애는 데에 이르니, 대과(大過)의 뜻이 된다. 대과(大過)는 양(陽)이 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큰 것이 지나친 것과 지나침이 큰 것과 대사(大事)가 지나침이 되니, 성현(聖賢)의 도덕(道德)과 공업(功業)이 일반인보다 크게 뛰어난 것과 모든 일이 보통보다 크게 뛰어난 것이 다 이것이다. 성인(聖人)은 인도(人道)를 다하니 이치에 지나친 것이 아니요, 일을 할 때에 천하의 정리(正理)로써 한다. 잘못을 바로잡는 용(用)에 조금 중(中)보다 지나치는 경우가 있으니, 행실에 공손을 과하게 함과 상(喪)에 슬픔을 과하게 함과 씀에 검소함을 과하게 함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바로잡기를 조금 과하게 한 뒤에야 중(中)에 미칠 수 있으니, 이는 바로 중(中)을 구하는 용(用)이요, 이른바 ‘대과(大過)’라는 것은 평상적인 일중에 큰 것이니, 이치에 과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크기 때문에 항상 볼 수가 없으니, 항상 보는 바에 비하여 크기 때문에 ‘대과(大過)’라 이른 것이다. 요순(堯舜)의 선양(禪讓)과 탕무(湯武)의 방벌(放伐)과 같은 것은 모두 도(道)를 말미암은 것이니, 도(道)는 중(中) 아님이 없고 떳떳함 아님이 없으나, 세상 사람들이 항상 보지 못하는 바이기 때문에 보통보다 크게 과(過)하다고 이르는 것이다.
大過는 棟이 橈니 利有攸往하여 亨하니라.
대과(大過)는 들보가 휘어짐이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워 형통(亨通)하다.
【傳】 小過는 陰過於上下요 大過는 陽過於中이니 陽過於中而上下弱矣라 故爲棟橈之象이라 棟은 取其勝重이니 四陽이 聚於中하니 可謂重矣라 九三九四皆取棟象하니 謂任重也라 橈는 取其本末弱이니 中强而本末弱이라 是以橈也[一作橈取其中强而本未弱本末弱是以橈也]라 陰弱而陽强하여 君子盛而小人衰라 故利有攸往而亨也라 棟을 今人謂之檁이라.
소과(小過)는 음(陰)이 위와 아래에 과한 것이요, 대과(大過)는 양(陽)이 가운데에 과한 것이니, 양(陽)이 가운데에 강하여 위와 아래가 약하다. 그러므로 들보가 휘어지는 상(象)이 되는 것이다. 들보기둥은 무거운 것을 감당함을 취한 것이니, 네 양(陽)이 가운데에 모였으니, 무겁다고 이를 만하다. 구삼(九三)과 구사(九四)가 모두 들보의 상(象)을 취하였으니, 짐이 무거움을 이른다. 휘어짐은 밑둥과 끝이 약함을 취한 것이니, 가운데가 강하고 밑둥과 끝이 약하기 때문에 휘어지는 것이다. 음(陰)이 약하고 양(陽)이 강하여 군자(君子)가 성하고 소인(小人)이 쇠하기 때문에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워 형통(亨通)한 것이다. 동(棟)을 지금 사람들은 ‘들보기둥〔檁〕’이라 이른다.
【本義】 大는 陽也니 四陽이 居中過盛이라 故爲大過요 上下二陰이 不勝其重이라 故有棟橈之象이라 又以四陽雖過而二五得中하고 內巽外說하여 有可行之道라 故利有所往而得亨也라.
대(大)는 양(陽)이니, 네 양(陽)이 가운데 거하여 지나치게 성하므로 대과(大過)라 하였고, 위와 아래의 두 음(陰)이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들보기둥이 휘어지는 상(象)이 있는 것이다. 또 네 양(陽)이 비록 과하나 이(二)와 오(五)가 중(中)을 얻었고, 안은 공손하고 밖은 기뻐하여 행할 만한 도(道)가 있기 때문에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워 형통(亨通)한 것이다.
彖曰 大過는 大者過也요,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대과(大過)는 큰 것이 과함이요,
【傳】 大者過는 謂陽過也니 在事에 爲事之大者過와 與其過之大라.
‘대자과(大者過)’는 양(陽)이 과함을 이르니, 일에 있어서는 일의 큰 것이 과함과 또는 과함이 큰 것이 된다.
【本義】 以卦體로 釋卦名義라.
괘체(卦體)로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였다.
棟橈는 本末이 弱也라.
들보기둥이 휘어진다는 것은 밑둥과 끝이 약하기 때문이다.
【傳】 謂上下二陰衰弱이라 陽盛則陰衰라 故爲大者過라 在小過則曰小者過니 陰過也라.
위와 아래의 두 음(陰)이 쇠약함을 이른다. 양(陽)이 성하면 음(陰)이 쇠하므로 큰 것이 과함이 된 것이다. 소과괘(小過卦)에 있어서는 “작은 것이 과(過)하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음(陰)이 과(過)한 것이다.
【本義】 復以卦體로 釋卦辭라 本은 謂初요 末은 謂上이요 弱은 謂陰柔라.
다시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본(本)은 초육(初六)을 이르고, 말(末)은 상육(上六)을 이르며, 약(弱)은 음유(陰柔)를 이른다.
剛過而中하고 巽而說行이라 利有攸往하여 乃亨하니,
강(剛)이 과하나 알맞고, 공손하고 기쁨으로 행하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워 형통(亨通)하니,
【傳】 言卦才之善也라 剛雖過而二五皆得中하니 是處不失[不失一作得]中道也라 下巽上兌하니 是는 以巽順和說之道而行也니 在大過之時하여 以中道巽說而行이라 故利有攸往하니 乃所以能亨也라.
괘(卦)의 재질이 선(善)함을 말하였다. 강(剛)이 비록 과하나 이(二)와 오(五)가 모두 중(中)을 얻었으니, 이는 처함이 중도(中道)를 잃지 않은 것이다. 아래는 손(巽)이고 위는 태(兌)이니 이는 손순(巽順)과 화열(和說)의 도(道)로 행함이다. 대과(大過)의 때에 있어서 중도(中道)와 손순(巽順)·화열(和說)로 행하기 때문에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니, 이는 바로 형통(亨通)할 수 있는 것이다.
【本義】 又以卦體卦德으로 釋卦辭라.
또 괘체(卦體)와 괘덕(卦德)으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大過之時大矣哉라.
대과(大過)의 때가 크다.”
【傳】 大過之時에 其事甚大라 故贊之曰大矣哉라 하니 如立非常之大事와 興不世之大功과 成絶俗之大德이 皆大過之事也라.
대과(大過)의 때에 그 일이 심히 크기 때문에 찬미하기를 ‘대의재(大矣哉)’라 하였으니, 비상한 큰 일을 세우고 세상에 보기 드문 큰 공(功)을 일으키고 세속에 뛰어난 큰 덕(德)을 이루는 것이 모두 대과(大過)의 일이다.
【本義】 大過之時엔 非有大過人之材면 不能濟也라 故歎其大라.
대과(大過)의 때에는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재주가 아니면 구제할 수 없으므로 큼을 감탄한 것이다.
象曰 澤滅木이 大過니 君子以하여 獨立不懼하며 遯世无悶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못이 나무를 없애는 것이 대과(大過)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
【傳】 澤은 潤養於木者也어늘 乃至滅沒於木하니 則過甚矣라 故爲大過라 君子觀大過之象하여 以立其大過人之行하나니 君子所以大過人者는 以其能獨立不懼하고 遯世无悶也라 天下非之而不顧는 獨立不懼也요 擧世不見知而不悔는 遯世无悶也라 如此然後能自守니 所以爲大過人[一无人字]也라.
못은 나무를 윤택하게 하고 길러주는 것인데 마침내 나무를 멸하고 없앰에 이르니, 과함이 심하다. 그러므로 대과(大過)라 한 것이다. 군자(君子)가 대과(大過)의 상(象)을 보고서 보통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행실을 세우니, 군자(君子)가 보통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까닭은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도 근심함이 없기 때문이다. 천하가 비난하여도 돌아보지 않음은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음이요, 온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뉘우치지 않음은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도 근심함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 이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남이 되는 것이다.
【本義】 澤滅於木은 大過之象也요 不懼无悶은 大過之行也라.
못이 나무를 없앰은 대과(大過)의 상(象)이요,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함이 없음은 대과(大過)의 행실이다.
初六은 藉用白茅니 无咎하니라.
초육(初六)은 깔되 흰 띠를 사용함이니, 허물이 없다.
【傳】 初以陰柔로 巽體而處下하니 過於畏愼者也라 以柔在下는 用茅藉物之象이니 不錯(措)諸地而藉以茅는 過於愼也라 是以无咎라 茅之爲物이 雖薄이나 而用可重者는 以用之能成敬愼之道也니 愼守斯術而行이면 豈有失乎아 大過之用也라 繫辭云 苟錯諸地라도 而可矣어늘 藉之用茅하니 何咎之有리오 愼之至也라 夫茅之爲物이 薄이나 而用은 可重也니 愼斯術也하여 以往이면 其无所失矣라 하니 言敬愼之至也라 茅雖至薄之物이나 然用之可甚重이라 以之藉薦則爲重愼之道니 是用之重也라 人之過於敬愼은 爲之非難이나 而可以保其安而无過하니 苟能愼[一有思字]斯道하여 推而行之於事면 其无所失矣리라.
초(初)는 음유(陰柔)로 손체(巽體)이면서 아래에 처하였으니, 두려워하고 삼가기를 과하게 하는 것이다. 유(柔)로서 아래에 있음은 띠를 사용하여 물건에 까는 상(象)이니, 땅에 놓지 않고 띠풀을 까는 것은 삼감을 과하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띠란 물건이 비록 하찮으나 쓰임이 중(重)한 것은 이것을 사용하여 경신(敬愼)의 도(道)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니, 이 방법을 삼가 지켜서 행하면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이것이 대과(大過)의 용(用)이다.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만일 땅에 그대로 놓더라도 가(可)한데, 깔되 띠풀을 사용하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삼감이 지극하다. 띠란 물건은 하찮으나 쓰임은 중하니, 이 방법을 삼가서 가면 잘못되는 바가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공경과 삼감이 지극함을 말한 것이다. 띠풀은 지극히 하찮은 물건이나 쓰임은 매우 중하다. 이것을 깔면 신중히 하는 도(道)가 되니, 이는 쓰임이 중한 것이다. 사람이 경신(敬愼)을 과하게 함은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나 편안함을 보존하여 허물이 없을 수 있으니, 만약 이 방법을 삼가서 미루어 일에 행하면 잘못되는 바가 없을 것이다.
【本義】 當大過之時하여 以陰柔居巽下하니 過於畏愼而无咎者也라 故其象占如此라 白茅는 物之潔者라
대과(大過)의 때를 당하여 음유(陰柔)로 손(巽)의 아래에 거하니, 두려워하고 삼가기를 지나치게 하여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흰 띠는 물건의 깨끗한 것이다.
象曰 藉用白茅는 柔在下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자용백모(藉用白茅)’는 유(柔)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傳】 以陰柔處卑下之道는 唯當過於敬愼而已라 以柔在下는 爲以茅藉物之象이니 敬愼之道也라.
음유(陰柔)로 비하(卑下)에 처하는 도(道)는 오직 경신(敬愼)을 과하게 할 뿐이다. 유(柔)로서 아래에 있음은 띠풀을 물건에 까는 상(象)이 되니, 공경하고 삼가는 도(道)이다.
九二는 枯楊이 生稊하며 老夫得其女妻니 无不利하니라.
구이(九二)는 마른 버드나무에 뿌리가 생기며, 늙은 지아비가 젊은 아내를 얻었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
【傳】 陽之大過에 比陰則合이라 故二與五皆有生象이라 九二當大過之初하여 得中而居柔하고 與初密比而相與하니 初旣切比於二하고 二復无應於上하니 其相與可知라 是剛過之人而能以中自處하고 用柔相濟者也라 過剛則不能有所爲니 九三是也요 得中用柔則能成大過之功이니 九二是也라 楊者는 陽氣易感之物이니 陽過則枯矣니 楊枯槁而復生稊면 陽過而未至於極也라 九二陽過而與初는 老夫得女妻之象이니 老夫而得女妻면 則能成生育之功이라 二得中居柔而與初라 故能復生稊而无過極之失하여 无所不利也라 在大過에 陽爻居陰則善하니 二與四是也로되 二不言吉하고 方言无所不利는 未遽至吉也라 稊는 根也라 劉琨勸進表云 生繁華於枯荑라 하니 謂枯根也라 鄭玄易에 亦作荑字하니 與稊同이라.
양(陽)이 크게 과(過)함에 음(陰)을 가까이 하면 합하므로 이(二)와 오(五)가 모두 낳는 상(象)이 있다. 구이(九二)는 대과(大過)의 초기를 당하여 중(中)을 얻었고 유(柔)에 거하였으며 초(初)와 매우 가까워 서로 더불고 있다. 초육(初六)이 이미 구이(九二)와 매우 가까이 있고 구이(九二)가 다시 위에 응(應)이 없으니, 서로 친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강(剛)이 지나친 사람인데 중도(中道)로 자처하고 유(柔)를 써서 서로 구제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강(剛)하면 무슨 일을 할 수가 없으니 구삼(九三)이 이 경우이고, 중(中)을 얻고 유(柔)를 쓰면 대과(大過)의 공(功)을 이룰 수 있으니 구이(九二)가 이 경우이다. 버드나무는 양기(陽氣)가 감동시키기 쉬운 물건이니, 양(陽)이 과하면 마른다. 버드나무가 말랐다가 다시 뿌리가 생겼다면 양(陽)이 과하나 극(極)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구이(九二)는 양(陽)이 과하나 초육(初六)과 친함은 노부(老夫)가 여처(女妻)를 얻은 상(象)이니, 노부(老夫)로서 여처(女妻)를 얻으면 생육(生育)하는 공(功)을 이룰 수 있다. 구이(九二)는 중(中)을 얻고 유(柔)에 거하며 초육(初六)과 친하기 때문에 다시 뿌리가 나고 극도로 지나친 잘못이 없어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대과(大過)에 있어서는 양효(陽爻)가 음위(陰位)에 거하면 좋으니 이(二)와 사(四)가 이 경우이나, 이(二)에서는 길(吉)함을 말하지 않고 바야흐로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은 대번에 길(吉)함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제(稊)는 뿌리이다. 유곤(劉琨)의 권진표(勸進表)에 “화려한 꽃이 마른 뿌리에서 난다.” 하였으니, 마른 뿌리를 이른 것이다. 정현(鄭玄)의 역(易)에 또한 제자(荑字)로 되어 있으니, 제(稊)와 같다.
【本義】 陽過之始而比初陰이라 故其象占如此라 稊는 根也니 榮於下者也니 榮於下則生於上矣라 夫雖老而得女妻면 猶能成生育之功也라.
양(陽)이 과한 초기에 초(初)의 음(陰)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제(稊)는 뿌리이니, 아래에서 영화로운 것이니, 아래에서 영화로우면 위에서 생겨난다. 지아비가 비록 늙었으나 여처(女妻)를 얻으면 오히려 생육(生育)하는 공(功)을 이룰 수 있다.
象曰 老夫女妻는 過以相與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노부(老夫)와 여처(女妻)는 과하게 서로 더부는 것이다.”
【傳】 老夫之說少女와 少女之順老夫는 其相與過於常分이니 謂九二初六陰陽相與之和 過於常也라.
노부(老夫)가 소녀(少女)를 좋아함과 소녀(少女)가 노부(老夫)에게 순종함은 서로 더부는 것이 보통의 분수보다 과한 것이니, 구이(九二)와 초육(初六)은 음양(陰陽)이 서로 더부는 화함이 보통보다 지나침을 말한 것이다.
九三은 棟橈니 凶하니라.
구삼(九三)은 들보기둥이 휘어짐이니, 흉하다.
【傳】 夫居大過之時하여 興大過之功하고 立大過之事는 非剛柔得中하여 取於人以自輔면 則不能也라 旣過於剛强이면 則不能與人同이니 常常之功도 尙不能獨立이온 況大過之事乎아 以聖人之才로도 雖小事나 必取於人하니 當天下之大任則可知矣라 九三이 以大過之陽으로 復以剛自居而不得中하니 剛過之甚者也라 以過甚之剛으로 動則違於中和而拂於衆心하니 安能當大過之任乎아 故不勝其任하니 如棟之橈하여 傾敗其室이라 是以凶也라 取棟爲象者는 以其无輔而不能勝重任也일새라 或曰 三은 巽體而應於上하니 豈无用柔之象乎아 曰 言易者는 貴乎識勢之重輕, 時之變易이라 三居過而用剛하고 巽旣終而且變하니 豈復有用柔之義리오 應者는 謂志相從也어늘 三方過剛하니 上能繫其志乎아.
대과(大過)의 때에 거하여 대과(大過)의 공(功)을 일으키고 대과(大過)의 일을 세우는 것은 강(剛)·유(柔)가 중(中)을 얻어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여 스스로 돕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미 강강(剛强)함에 과하면 남과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니, 보통의 공(功)도 오히려 홀로 세울 수 없거든 하물며 대과(大過)의 일에 있어서랴. 성인(聖人)의 재주를 갖고도 비록 작은 일이나 반드시 남에게서 취하니, 천하의 큰 임무를 담당하였다면 알 수 있다. 구삼(九三)은 대과(大過)의 양(陽)으로 다시 강(剛)함으로 자처하여 중(中)을 얻지 못하였으니, 강(剛)이 과함이 심한 것이다. 심하게 과한 강(剛)으로 동하면 중화(中和)를 어겨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르니, 어찌 대과(大過)의 임무를 감당하겠는가. 그러므로 그 임무를 이겨내지 못하니, 들보기둥이 휘어져서 그 집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흉한 것이다. 들보기둥을 취하여 상(象)을 삼은 것은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거운 임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삼(三)은 손체(巽體)로 상육(上六)과 응(應)하니, 어찌 유(柔)를 쓰는 상(象)이 없겠는가.” 하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역(易)을 말하는 이는 세(勢)의 경중(輕重)과 때의 변역(變易)을 아는 것을 귀히 여긴다. 삼(三)은 과(過)에 거하여 강(剛)을 쓰고, 손(巽)이 이미 끝나 장차 변하게 되었으니, 어찌 다시 유(柔)를 쓰는 의(義)가 있겠는가. 응(應)은 뜻이 서로 따름을 이르는데 삼(三)이 과(過)하게 강(剛)하니, 상육(上六)이 그의 뜻을 붙잡아 맬 수 있겠는가.”
【本義】 三四二爻 居卦之中하니 棟之象也라 九三은 以剛居剛하여 不勝其重이라 故象橈而占凶이라.
삼(三)과 사(四) 두 효(爻)가 괘(卦)의 가운데에 거하였으니, 기둥의 상(象)이다. 구삼(九三)은 강(剛)으로 강위(剛位)에 거하여 그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상(象)은 휘어짐이 되고 점(占)은 흉한 것이다.
象曰 棟橈之凶은 不可以有輔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동요(棟橈)의 흉함은 돕는 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傳】 剛强之過면 則不能取於人하고 人亦不能[一作肯]親輔之하니 如棟橈折하여 不可支輔也라 棟은 當室之中하여 不可加助하니 是不可以有輔也라.
강강(剛强)이 지나치면 남에게 취하지 못하고 남들 역시 친히 돕지 못하니, 마치 기둥이 휘어지고 부러져서 지탱하고 돕지 못하는 것과 같다. 들보기둥은 집의 한 가운데를 당하여 도움을 가할 수 없으니, 이는 돕는 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九四는 棟隆이니 吉하거니와 有它면 吝하리라.
구사(九四)는 들보기둥이 높으니 길(吉)하나, 다른 마음을 두면 하찮게 여길 만하리라.
【傳】 四居近君之位하니 當大過之任者也라 居柔는 爲能用柔相濟요 旣不過剛이면 則能勝其任이니 如棟之隆起라 是以吉也니 隆起는[一有兼字] 取不下橈之義라 大過之時엔 非陽剛이면 不能濟요 以剛處柔는 爲得宜矣니 若又與初六之陰相應則過也라 旣剛柔得宜어늘 而志復應陰이면 是有它也니 有它則有累於剛이니 雖未至於大害나 亦可吝也라 蓋大過之時엔 動則過也라 有它는 謂更有它志요 吝은 爲不足之義니 謂可少也라 或曰 二比初則无不利어늘 四若應初則爲吝은 何也오 曰 二得中而比於初는 爲以柔相濟之義요 四與初爲正應은 志相繫者也라 九旣居四하여 剛柔得宜矣어늘 復牽繫於陰하여 以害其剛이면 則可吝也라.
사(四)는 군주와 가까운 자리에 거하였으니, 대과(大過)의 임무를 담당한 이이다. 유위(柔位)에 거함은 유(柔)를 써서 서로 구제함이 되고, 이미 지나치게 강하지 않으면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으니, 들보기둥이 높이 솟은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길(吉)하니, 높이 솟았다는 것은 아래가 휘어지지 않는 뜻을 취한 것이다. 대과(大過)의 때에는 양강(陽剛)이 아니면 구제할 수 없고, 강(剛)으로 유(柔)에 처함은 마땅함을 얻음이 되니, 만약 또 초육(初六)의 음(陰)과 서로 응(應)하면 지나친 것이 된다. 이미 강유(剛柔)가 마땅함을 얻었는데, 뜻이 다시 음(陰)에 응(應)하면 이는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마음이 있으면 강(剛)에 누가 되니, 비록 크게 해로움에는 이르지 않으나 역시 하찮게 여길 만한 것이다. 대과(大過)의 때에는 동하면 과(過)함이 된다. ‘유타(有它)’는 다시 다른 뜻이 있음을 이르고, 인(吝)은 부족한 뜻이 되니 하찮게 여길 만함을 이른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二)가 초(初)와 가까이 있으면 이롭지 않음이 없는데, 사(四)가 만약 초(初)에 응(應)하면 인(吝)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二)가 중(中)을 얻었으면서 초(初)와 가까이 있는 것은 유(柔)로써 서로 구제하는 뜻이 되지만, 사(四)가 초(初)와 정응(正應)이 됨은 뜻이 서로 매이는 것이다. 구(九)가 이미 사(四)에 거하여 강유(剛柔)가 마땅함을 얻었는데, 다시 음(陰)에 끌리고 매여서 강(剛)을 해친다면 하찮게 여길 만한 것이다.”
【本義】 以陽居陰하여 過而不過라 故其象隆而占吉이나 然下應初六하여 以柔濟之면 則過於柔矣라 故又戒以有它則吝也라.
양(陽)으로 음위(陰位)에 거하여 과(過)하나 과(過)하지 않으므로 그 상(象)이 기둥이 높이 솟음이 되고 점(占)이 길(吉)한 것이다. 그러나 아래로 초육(初六)에 응(應)하여 유(柔)로 구제한다면 유(柔)가 과하므로 또 ‘다른 뜻이 있으면 부끄러울 만하다’고 경계한 것이다.
象曰 棟隆之吉은 不橈乎下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들보기둥이 높이 솟으면 길(吉)한 것은 아래로 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傳】 棟隆起則吉은 不橈曲以就下也니 謂不下繫於初也라.
들보기둥이 높이 솟으면 길(吉)한 것은 휘고 굽어 아래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니, 아래로 초(初)에 얽매이지 않음을 이른다.
九五는 枯楊이 生華하며 老婦得其士夫니 无咎나 无譽리라.
구오(九五)는 마른 버드나무가 꽃이 피며 노부(老婦)가 사부(士夫)를 얻은 것이니, 허물이 없으나 명예도 없으리라.
【傳】 九五當大過之時하여 本以中正居尊位나 然下无應助하니 固不能成大過之功이요 而上比過極之陰하니 其所相濟者 如枯楊之生華라 枯楊이 下生根稊면 則能復生하니 如大過之陽이 興成事功也요 上生華秀면 雖有所發이나 无益於枯也라 上六은 過極之陰이니 老婦也라 五雖非少나 比老婦則爲壯矣[一作壯夫 一作士夫]니 於五无所賴也라 故反稱婦得이라 過極之陰이 得陽之相濟는 不爲无益也어니와 以士夫而得老婦는 雖无罪咎나 殊非美也라 故云无咎无譽라 하고 象復言其可醜也하니라.
구오(九五)가 대과(大過)의 때를 당하여 본래 중정(中正)으로 존위(尊位)에 거하였으나 아래에 응조(應助)가 없어 진실로 대과(大過)의 공(功)을 이룰 수 없고, 위로 과극(過極)의 음(陰)을 가까이 하였으니, 서로 구제하는 바가 마치 마른 버드나무가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마른 버드나무가 아래에 뿌리가 나면 다시 살 수 있으니, 마치 대과(大過)의 양(陽)이 사공(事功)을 일으키고 이룰 수 있는 것과 같고, 위에 꽃이 피면 비록 나오는 바가 있더라도 마르는 데에는 유익함이 없다. 상육(上六)은 과극(過極)한 음(陰)이니 노부(老婦)이다. 오(五)가 비록 젊은 것은 아니나 노부(老婦)에 비하면 건장함이 되니, 오(五)에게 의뢰되는 바가 없으므로 도리어 ‘부인이 얻었다’고 칭한 것이다. 과극(過極)한 음(陰)이 서로 구제해 주는 양(陽)을 얻음은 무익(无益)하지 않으나, 사부(士夫)로서 노부(老婦)를 얻음은 비록 죄구(罪咎)가 없더라도 자못 아름다운 일이 아니므로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다’고 하였으며, 〈상전(象傳)〉에서는 다시 ‘추악하게 여길 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本義】 九五는 陽過之極이어늘 又比過極之陰이라 故其象占이 皆與二反이라.
구오(九五)는 양(陽)이 과(過)함이 지극한데 또 과극(過極)한 음(陰)을 가까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모두 이효(二爻)와 반대인 것이다.
象曰 枯楊生華 何可久也며 老婦士夫亦可醜也로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마른 버드나무가 꽃이 핀 것이 어찌 오래가며, 노부(老婦)가 사부(士夫)를 얻음은 또한 추악하게 여길 만하다.”
【傳】 枯楊이 不生根而生華면 旋復枯矣리니 安能久乎리오 老婦而得士夫면 豈能成生育之功이리오 亦爲可醜也라.
마른 버드나무가 뿌리가 나지 않고 꽃이 핀다면 곧바로 다시 마를 것이니, 어찌 오래가겠는가. 노부(老婦)로서 사부(士夫)를 얻었다면 어찌 생육(生育)의 공(功)을 이루겠는가. 이 역시 추악하게 여길 만함이 되는 것이다.
上六은 過涉滅頂이라 凶하니 无咎하니라.
상육(上六)은 지나치게 건너 이마까지 빠져 흉하니, 탓할 데가 없다.
【本義】 過涉滅頂이니 凶하나 无咎니라.
【본의】 지나치게 건너 이마까지 빠지니, 흉하나 허물은 없다.
【傳】 上六以陰柔로 處過極하니 是小人過常之極者也라 小人之所謂大過는 非能爲大過人之事也요 直過常越理하여 不恤危亡하고 履險蹈禍而已라 如過涉於水하여 至滅沒其頂이니 其凶可知라 小人이 狂躁以自禍는 蓋其宜也니 復將何尤리오 故曰无咎라 하니 言自爲之하여 无所怨咎也라 因澤之象而取涉義하니라.
상육(上六)은 음유(陰柔)로 과극(過極)에 처하였으니, 이는 소인(小人)으로서 보통보다 지남이 지극한 이이다. 소인(小人)의 이른바 ‘대과(大過)’라는 것은 크게 남보다 뛰어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상도(常道)를 지나고 이치를 넘어 위태로움과 망함을 근심하지 않고 험함을 밟고 화환(禍患)을 밟을 뿐이다. 마치 물을 지나치게 건너서 그 이마까지 빠지는 것과 같으니, 그 흉함을 알 수 있다. 소인(小人)이 미친 짓을 하고 조급하여 스스로 화를 받음은 당연하니, 다시 장차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러므로 ‘탓할 데가 없다’고 말하였으니, 스스로 한 것이어서 원망하고 탓할 데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택(澤)의 상(象)을 인하여 건너는 뜻을 취하였다.
【本義】 處過極之地하여 才弱不足以濟나 然於義爲无咎矣니 蓋殺身成仁之事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과극(過極)한 자리에 처하여 재주가 약해서 건널 수 없으나, 의리(義理)에는 무구(无咎)가 되니,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過涉之凶은 不可咎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지나치게 건너 흉함은 탓할 데가 없는 것이다.”
【傳】 過涉至溺은 乃自爲之라 不可以有咎也니 言无所怨咎라.
지나치게 건너서 빠짐에 이름은 바로 자신이 한 짓이어서 탓할 데가 없으니, 원망하고 탓할 데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