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헌공(겸익) 할아버지 발자취
글: 매헌공 11세손 명곡 이동일
가) 매헌공과 회야강의 세 여인
1597년 가을 무릎 토굴에 몸을 피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굴 안이 시아에 들고 안을 살피니 낯선 여념집 규수 한 분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처음 보는 분이나 전 난을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로써 통성명을 하고 며칠이 지나고 겸익할아버지는 전난 중에 앞날을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부부가 될 것을 청하니 규수께서 말하기로 아무리 전난 중이라 해도 사대부가 사람으로서 혼인의 예를 피하고 합궁할 수 없다고 하여 겸익할아버지는 몸에 지니고 있던 부채와 집필묵으로 예장지 쓰고 정화수 떠놓고 성혼의 예로써 절하고 그날로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마을로 내려와 가정을 이루니 그분이 강성문씨 부인의 씨다 이듬해 삼월에 창발(1599-1653) 할아버지를 출산하시고 이어 융발 할아버지를 출산하시고 출산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 창발 할아버지 7세 때인 1605년 세상을 떠나신다. 어린 자식을 남기고 떠나는 부인을 겸익 할아버지는 애달프고 비통한 심정으로 떠나보내셨다.
나) 청송심씨(靑松沈氏) 할매
겸익할아버지께서는 강성문씨 할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내시고 어린 창발, 융발을 보살필 것을 걱정하던 중 침모(針母)를 구하기 위해 수소문하였다 몇 분의 사람들이 찾아와 만나보았으나 어린 자식을 맞기기엔 부적합하다고 판단되고 고심하고 있던 중 아기를 출산하다. 잃고 홀로 사는 청송심씨 부인을 소개받고 기본의 학문도 익히고 성품이 온화한 분이라 판단하고 받아 들려 창발 융발 양육과 집안 살림을 맡겼다. 그리고 공직의 일과 학문에 전념하셨다 그 후 심씨 부인은 창발 융발 할아버지를 훌륭히 양육하시면서 집안 살림도 나름 잘 사셨다 창발 융발 두 분 할아버지께서 성인이 될 무렵부터 겸익할아버지 주변에서 사대부 남자가 세상에 나와 사모관대 한번 하고 정식으로 혼례 한번 못해서야 되겠느냐고 말이 많으므로 중신을 받아 들려 재혼을 결심하고 심씨부인에게 섭섭하지 않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그렇게 겸익할아버지 집을 나온 심씨 부인은 멀지 않은 근동(近洞)에 이주하여 자리를 잡으니 어릴 때부터 살가운 정으로 보살핌을 받은 창발 융발 할아버지들은 학업이 흔들리고 정을 끊지 못하고 심씨할매 집을 자주 왕래를 한다.
겸익할아버지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시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 살림을 맡아 보는 마름 송노인을 시켜 충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대책과 창발 융발 할아버지들의 장래를 위해 먼 곳으로 이주해 살기를 설득하여 모월 모일 새벽을 틈타 먼 강원도 삼척으로 떠나므로 비로소 창발 융발 할아버지들께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시고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심씨 부인과 인연도 이것으로 끝이 난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집에서 오래동안 심부흠 일을 한 송노인 밖에 없다.
다) 의혼(議婚)의 혼(魂)(밀양-直손씨 할머니)
밀양 일직손씨 할머니의 부친은 성균관 진사 손 시복이시고 6대조 할아버지께서는 격재(格濟) 손(孫) 조서(1412-1473)씨다
어느 청명한 날 밀양 다원마을 손진사댁 사랑채에선 맞선이 이루어 진다. 손진사댁 2남 2녀 중 맏딸께서 멀리 울산에서 오신 신랑 될 우리 겸익 할아버지와의 선을 보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선을 보고 그 자리에서 신부 부친이 여부를 물어보니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하여 부친인 손진사께서 궁합(宮合)을 보고 허혼(許婚)을 하겠다고 말하고 신랑께 돌아가서 납채(納采)의 예로 사주를 인편으로 보내달라고 하고, 겸익할아버지께서는 울산 웅촌 본가로 돌아와서 사주를 적어 보내는데 가른 싸리나무 가지 사이에 사주 봉투를 끼우고 청홍의 실로 타래를 정성껏 만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 사당에 고하고 신부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집에서 혼인날을 정하여 연길(涓吉)을 보내오면서 혼사가 시작되었다.
혼인날이 되어 밀양 다원마을로 가신 겸익할아버지께선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랑신부가 성복(成服)을 하고 초례상(醮禮床) 차리고 혼인식(婚姻式)을 치르셨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할머니께서 울산웅촌 시집으로 오시는 날의 행장은 말 두필 가마 두채 우마차 한대 가마꾼을 포함한 20여 명과 함께 2박 3일에 걸쳐 도착하시고 우귀(偶句)와 현구례를 마치면서 시집오셨다.
라) 회야강의 두 형제
겸익할아버지께서는 겸수 경록 경광 겸복할아버지에 이어 다섯째 막내로 태어나신다 어머니께서 산달이 다가오자 친정으로 출산을 위해 가셨다 그곳에서 겸익할아버지를 출산하시고 산후조리를 마친 후 어머니께서는 본가로 돌아가시고 겸익할아버지는 외조모 조부님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이때부터 벌써 총명함과 영특함을 보이는 '겸익할아버지는 외가식솔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다 본가로부터 아버지께서 병환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본가로 돌아왔다 본가로 돌아온 이듬해 아버지께서 타계하셨다 형님들과 함께 삼년상을 치렀다 그때 겸익할아버지 나이 8세가 된다
겸수형님은 겸익을 서당에 보네 학업에 열중토록 한다 겸익할아버지 18세 되던 해는 범어사에서 학업 중 1592년 4월 14일(선조 25) 왜병들이 쳐들어옴으로 겸익할아버지는 급히 짐을 꾸려 본가로 돌아와 겸수형님과 함께 의병에 나섰다.
겸수 겸익할아버지는 울산지방 다른 의병들과 규합하여 분연히 창의 거병식을 올리고 4월 23일 점령당한 병영성 탈환을 위해 기습전을 필두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게 길어지자 겸수 형님께서는 동생 겸익에게 숭조상문과 어머님 집안을 부탁하면서 몸을 피할 것을 명하므로 후일을 기약하고 원적산 미타암으로 몸을 숨겼다. 이때가 1597년 가을 무릎이다.
1592년 임진년 왜란이 일어났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겸수는 의병을 일으킨다 당시 의병들이 그랬듯이 우선 집안의 가솔들과 동생 겸익을 동반하여 이웃 마을 근동의 병사를 모아 왜병과 맞섰다 겸수는 오형제 중 중간 삼 형제를 잃고 막내 겸익과 단둘이고 보니 원로 하신 어머님과 숭조 상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가겠다는 동생 겸익을 설득하여 피신토록 하고 왜구 퇴치에 전념한다. 그 후 겸수는 임진왜란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사명대사와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우고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충의 의사 53위에 두 형제가 나란히 오른다. 나라에 충신이요 고장에 자랑이요. 가문에 영광입니다.
마) 원적산에 핀 매화꽃
원적산 산안개가 낮게 낮게 내려 앉는다. 그 밑으로 까마득하게 먼 날에 천둥이 치고 왜구의 군마(軍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조총의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면서 왜구가 물밀듯 침탈해 올 때 의병 겸익은 오른손 단검을 힘껏 움켜쥐고 왜구의 가슴을 찔렀다.
왜구의 심장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또다시 던진 단검이 빗나가도다. 후일을 기약하고 웅천을 건너 원적산 안개 속으로 몸을 감추다.
광풍 광음은 사라지고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안개 그치고 원적산 중턱에 매화꽃이 피었다. 비로소 회야강은 유유히 흐르면서 물길을 열고 이 강변에 수만 송이 매화가 피었다.
바) 매헌공 할배의 일화
임진왜란 18넌 전인 1564년 출생으로 아버지 우춘(선무원종공신)공과 맏형 겸수(나중 정주 판관)공이 의병으로 나간 뒤에 어머니(일직손씨)를 모시고 미타암에 피난 갔습니다.
그때 기장 임랑왜성에 주둔한 왜장 모리요시나리(森吉成:)가 풍신수길의 명을 받아 겸수 공의 가족을 포로로 잡기 위해 미타암에 나타났는데, 나무하다 그들을 본 매헌공이 낫을 들고 몰래 그들에게 접근 기습하여 5명의 왜병을 겸살(鎌殺)하였다는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매헌공 할배의 용감 무상한 기계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