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203 (월) ◈ 수 22:10-20 신중함과 관대함으로 겸손을 배운 세대들
오늘의 말씀 수 22:10-20
요단 언덕가의 큰 재단
22:10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22:11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22:12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대표단 파견
22:13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
22:14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열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하게 하니 그들은 각기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의 수령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들이라
대표단의 경고와 권고
22:15 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22:16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
22:17 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22:18 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22:19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
22:20 세라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죄악으로 멸망한 자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느니라 하니라
◈ 주해: 성령님의 조명
여호수아는 기업 분배를 끝내고 요단 동편 지파에게 칭찬과 노고를 치하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당부하고 그들을 축복하여 가족들에게 돌려보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다 주시겠다고 하신 맹세를 모두다 지키셨다. 요단강 동쪽으로 돌아간 세 지파는 요단강 근처에 큰 제단을 쌓는다. 서쪽 지파들은 이 일을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대표단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한다.
1. 오해로 인한 위기
10-16절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가 요단 동쪽 언덕가에 큰 제단을 쌓았다. 이스라엘 아홉 지파와 같이 신앙의 단일성을 유지하려는 염원을 담아 쌓은 제단이다.
이 소식을 들은 요단강 서쪽 지파들은 그들이 다른 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다고 오해한다. 요단강 서쪽의 온 회중이 의분이 가득하여 동쪽 지파들과 싸우려 하였다.
이스라엘은 제사장과 각 지파의 지도자로 구성된 대표단을 꾸려 길르앗으로 파견하기로 한다. 섣불리 싸우기 전에 신중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정확하지 않은 뜬소문만 믿고 분노를 앞세워 공격하여 싸우면 형제끼리 전쟁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일촉측발의 전쟁 위기상황이 초래될 뻔한 상황이었다.
오해가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해가 이해로 나아가려면 차분하게 한발 물러서서 알아보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싸우러 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엘르아살의 아들 제사장 비느하스와 각 지파에서 10명의 지도자를 대표단으로 먼저 보내 진상 파악에 나섰다.
수 22:16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
오해는 오해를 낳는다. 선한 의도로 선한 일을 할 때에 왕왕 오해가 생기는 일이 많이 있다. 오해를 방치하면 죄의 세력이 틈타 관계망에 얼키게 하여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오해는 감정을 동반한다. 감정은 생각을 굳어지게 하고 생각에 침몰 당하게 한다. 이것을 알고 있는 비느하스는 온 회중의 뜻을 전하며 과거 하나님께 거역하여 브올의 죄악과 아간의 범죄를 상기시키며 경고한다.
2. 의분의 대명사 비느하스
브올의 죄악이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물 당시 모압과 미디안 여인의 유혹을 받아 바알을 숭배하게 된 범죄를 말한다. 그때의 장소가 브올이었다. 브올은 모압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던 성읍이다. 그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 때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한 당사자가 제사장 비느하스였다. 전염병이 멈춘 것은 이스라엘 진영까지 이방 여인을 데리고 온 자와 여인을 비느하스가 단창으로 찔러 처단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비느하스편에서 보면 잊지 못할 사건이다. 그래서 동편 지파들에게 브올의 사건을 상기시켰던 것이다.(민25)
아간의 범죄란? 아간이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건이다. 하나님은 여리고 백성들과 어린아이 짐승까지 모두 죽이라고 하셨다. 물론 전리품까지 불태우라고 하셨다.
아간의 탐심으로 인하여 전리품을 챙겨서 그의 장막에 숨겨 놓았다. 여리고 성은 진멸되어야 했다. 가나안의 모든 것은 우상으로 부정했다. 그러므로 가난안의 첫 관문으로서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아간의 범죄로 인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는데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수7장).
수 22:17 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22:18 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22:19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
22:20 세라의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죄악으로 멸망한 자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느니라 하니라
비느하스는 이처럼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죄악이 공동체 전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체득했기에, 요단강 서쪽 지파들은 동쪽 지파들의 행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죄의 문제를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죄는 사소해 보여도 심각한 전염력이 있다. 죄는 죄를 낳는 확장성이 있다. 죄의 확장성은 공동체 전체를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정결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 작고 가벼운 죄란 없다.
3. 책임지는 태도
비느하스는 그들을 책망만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성막이 없는 요단 강 동편의 땅이 깨끗하지 않아서 제단을 쌓은 것이라면 성막이 있는 서쪽으로 와서 살라고 한다.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서 아홉 지파 반이 가진 기업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줄 테니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기업으로 받은 소유지를 나누어 줄지언정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다. 브올과 아간의 범죄가 처참하였듯이 하나님의 분노로 도리어 멸망 당할까 두려워서 신신당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과 사랑을 함께 성취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거룩과 사랑을 함께 이루어가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가 되어 가나안을 점령한 이스라엘 공동체도 사람이 모인 곳이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소통의 부재로 생기는 문제는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 오해와 갈등을 잘 보여준다.
19절 비느하스와 대표단은 책망만 하지 않고 책임지는 태도를 보인다. 다른 제단을 만든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이며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경고하는 한편, 요단강 서쪽의 땅을 나누어주겠다고 제안한다.
동쪽 땅에 제단이 없어 부정한 땅이 될 것을 우려한다면, 동쪽에 가짜 제단을 쌓지 말고 서쪽으로 와서 함께 살자는 것이다.
형제를 정죄하는 일은 쉽지만 회복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어렵다. 비록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요단강 서쪽 지파가 보인 자기희생적 태도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특별함을 보여준다. 정죄보다는 관대함이 지체를 대하는 합당한 태도이다. 오해를 이해로, 신중함과 관대함으로 형제들을 대한다.
하나님을 향한 선한 마음일지라도 공동체 안에서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늘 부족한 우리이기에 소통 부재로 인한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이럴 때 판단 정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보여 주듯이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가나안 정복 후 안식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는 따뜻한 형제애가 있어 신뢰할 만한 믿음이 있다. 자기의 소유를 나눠줄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내일 본문에 나오겠지만 요단 동편의 기업을 받은 지파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기 위하여 큰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이스라엘에 속해 있음을 증거하는 표징으로 제단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리지 않고 자신들의 선의에 따라 큰 제단을 쌓았다. 그들의 의도는 좋았지만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4. 생명을 주는 복음을 쉐마하라
쉐마의 의미는 “너희는 들으라”라는 뜻이다.(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만남의 교제이다. 독일 신학자 칼바르트 “말씀이 대상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라고 말했다.
날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말을 걸어오실 때 우리는 듣고 반응해야 한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했다.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할 수 있다. 아들 그리스도는 완전한 복종을 통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행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하라는 것만 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하시는 일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며, 그 일이 바로 그가 아들임을 증거한다. 그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듣는 귀가 어둡다. 특히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그렇다. 우리는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신신당부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은 쉐마해야 생명이 된다. 생명은 성장하고 자라게 한다. 생명은 물고기가 펄쩍펄쩍 뛰는 것처럼 생명력이 있다. 생명의 반대는 사망이며, 사망의 반대는 생명이다.
우리는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자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보혈을 흘려 주셨다. 그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살게 하신다.
보배로운 피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 보혈의 생명이 우리의 부정함을 씻어 정결하게 하신다. 복음의 효력은 듣고 행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 나의 묵상
가나안을 정복한 세대들에게 많은 문제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참으로 귀하고 부러운 세대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대충 타협하고 다른 지체들의 죄에 무감각하다.
게다가 지체들의 죄에 대하여 함께 책임지고 소유를 나눠줄 마음은 거의 없다. 모두가 나 살기에 바쁘다. 어찌되었건 각자가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하면 경건한 자로 평가받는다.
거룩에 대한 열망도 사라진 시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기업을 나눠 줄 마음도 사라진 시대다. 참으로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영적으로 연합이 없는 비참한 세대다.
이 특별한 세대는 광야에서 자라난 세대다. 척박하지만 말씀이 있는 곳에서 자라난 쉐마의 세대다. 척박함과 말씀이 빚어낸 세대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고 안식을 누린다.
이스라엘 역사상 그 이후 안식을 누린 세대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다윗시대 정도나 될까? 다윗 시대는 백성들의 믿음보다는 다윗으로 인한 안식이라고 보면 좋겠다.
각 백성들이 깨어서 안식을 누린 세대는 여호수아의 세대가 유일하지 않은가 싶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탁월한 지도자로 인하여 하나되는 교회가 아니다.
각 지체들이 하나님을 앎으로 거룩과 사랑으로 몸 된 교회를 이루는 교회, 즉 영광스러운 신부가 된 교회다.
인권을 우상으로 섬기며 개인주의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시대, 맘몬우상, 자아숭배가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시대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이 시대는 광야를 싫어하고, 광야에 있어도 홀로 앉아 말씀을 받아먹고 살지 않는 세대가 되었다. 남들 이야기를 한들 무엇하랴~ 바로 나의 이야기며 우리의 이야기다.
하나님이 나를 광야로 이끌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 광야에서 말씀을 받아먹지 않고 열정적으로 목회를 하고 또한 그것이 성공적이었다면 나는 말씀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역으로 사는 자, 성취로 사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 바벨론에 의한 심판과 의지하던 애굽이 부러져서 갈대지팡이임이 확인된 그 비참한 곳에서 홀로 앉아 말씀을 받아 먹게 하심에 감사를 드린다.
심판의 목적은 의를 기초로 다시 세우는 것이다.
교만한 자아를 인정하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광야다. 말씀으로 사는 세대가 가나안을 정복한다.
리더쉽과 재능이 많은 성도들이 안식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자가 안식에 들어간다. 사랑과 거룩을 함께 누리는 세대를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신다.
광야를 걷고 있는 성도들, 참으로 안타깝고 속상한 일들이 많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 그러나 광야만이 믿음의 세대, 안식의 세대를 빚어낸다. 교회의 지체들이 그 광야에서 말씀을 받아먹으며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우길 원한다. 그래서 가나안을 차지하는 세대로 함께 일어나기를 원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홀로 앉아서 말씀을 받아먹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거룩과 사랑이 함께 있는 교회, 안식에 들어가는 교회를 주님이 이루실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나도 관심이 없다.
사랑과 거룩이 함께하는 교회를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원하셨고 예수님 또한 겟세마네의 잔을 마시고 아버지께 버림받기까지 원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말씀으로 살도록 훈련하신 것처럼 나와 이 교회를 주님께 맡긴다. 주님이 하시면 가나안을 차지하고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가 세워진다.
갈렙처럼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루 하루를 순종하는 발걸음을 걷는 누군가가 필요하기에, 그 사람이 내가 될 수 있기를 원한다.
지금은 가나안을 점령해 나가는 시대와 세대가 아니라 광야에서 말씀을 받아먹으며 겸손을 배울 때인 것 같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내 영혼의 양식, 영원한 양식을 받아 먹는다.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먹는다. 때로는 맛있고 때로는 지겹다. 그래도 이 양식 외에 광야에서 살 길은 없고, 이 양식 외에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울 길이 없다. 광야에서 받아먹는 말씀, 광야에서 만나는 십자가, 광야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 광야에서 돌보시는 하나님과 함께 한다.
광야라는 비참한 현실보다는 광야이기에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그 안에서 안식하기를 원한다. 오늘도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간다.
◈ 묵상 기도
주님, 나를 위해 많은 제단을 쌓던 자였습니다. 유일한 제단, 하늘 아버지 집을 알지 못하니 땅에서 제단만 쌓았습니다.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한 제단이었습니다. 한 때는 큰 교회, 유명한 목사들을 추종했습니다. 그것들이 나의 제단이었습니다. 땅의 제단을 세운자 환란과 곤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도 가도 답이 없는 신앙생활, 무력하고 지치고 쓰러질 때 말씀이 내게 걸어 오셨습니다. 나를 위해 제단을 쌓던 자, 이제 하늘 제단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영생을 알게 하시고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 생명으로 이끄셨습니다. 영혼의 메마름과 목마름은 나의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항상 소통하시며 교제하셨습니다. 그 교제 가운데서 저를 초대하여 주셨습니다. 사랑과 복종의 조화 속에서 아들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상위 권위와 아들의 하위 권위에 대한 바름을 알고 섬김을 알게 하셨습니다. 사랑과 복종의 하모니를 봅니다. 만물 위의 이러한 질서가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우는 훌륭한 기본기가 됩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선한 의도로 어떤 일을 할 때에 공동체에 덕이 되는지 그렇지 못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진리에서 벗어나지는 않은지 신중하게 말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광야에서 말씀으로 순종을 배운 겸손한 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일상에 아간과 브올의 사건이 늘 있습니다. 불평과 갈등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거룩과 사랑을 이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길, 부활을 통하여 맞이하게 될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길로 가게 하옵소서. 복음 충신교회와, 다음세대를 세워 나갈 교육부서를 축복합니다. 인자와 신실로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