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도봉구 창동의 유래
- 양곡 창고가 있던 마을-
창동倉洞은 조선 시대 이곳에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마을 이름으로 현재 창2.3동을 말한다. 지금도 창동초등학교 옆 공터에는 오랜 옛날부터 석조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현재의 창동초등학교 전경
창동은 조선 중기까지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는데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양주군이 한성부에 소속됨에 따라 한성부 양주군 해등면촌에 속하였다가 1896년 경기도 양주군 해등면촌으로 바뀌었고, 1911년에 경기도 양주군 해등면촌 창동리로 되었다. 1914년에는 전국적으로 부근을 통폐합하여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하여 노해면이 되고 1963년에는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내 노해출장소에 소속되었으며, 1973년에 성북구에서 도봉구로 분리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창동 일대도 쌍문동과 함께 신석기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토기, 석기, 마제석연 등 유물이 많다. 이는 광복 전 일본 황산장삼랑煌山將三郞교수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서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창동은 한국전쟁 때 수도 서울을 수호하기 위해 국군이 고전분투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로서는 장비나 병력이 어느 한쪽도 우세하지 못해 의정부 등지에서 후퇴하는 아군을 창동에 집결시킨 다음 6월 27일 미명을 기해 의정부 수복 명 내렸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 채병덕蔡秉德총참모장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한편으로는 전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 무모한 집념에 불과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전세를 만회해 보려는 군으로서의 기백과 우국충정에 의한 장군의 기도를 엿볼 수 있다.
창동은 자연 마을인 창골을 비롯하여 유만, 말미, 모랫말 등이 모여서 형성된 마을이다.
창골은 창5동 동사무소 옆에 이정표만 표시되어 있을 뿐, 주민들도 어디가 창골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현재 이 지역은 거대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어 북부 생활권역을 이루었고, 30~40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창골의 앞들은 바라기들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바라기들은 수원이 적어 날씨가 가물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창동 주유소 근방의 삼성아파트에 약 50여 호가 거주하였다.